신앙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순간에도 곁에 계신 분을 놓치지 않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어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직접 뵙고도 여전히 의심했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그들을 밀어내지 않으시고 오히려 먼저 가까이 다가오셨고요.
믿음이 부족한 순간에도, 자꾸만 흔들리는 마음에도 주님은 내 곁을 떠나지 않으시고 조용히 가까이에 머물러주고 계시는구나...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오늘은 참 큰 위로가 됩니다.

2026년 5월 17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5월 17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보기
- 지금 바로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 오늘 말씀 묵상 모아보기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사도행전 1장 1-11절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다.
1 테오필로스 님, 첫 번째 책에서 저는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처음부터 다 다루었습니다.
2 예수님께서 당신이 뽑으신 사도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분부를 내리시고 나서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다 다루었습니다.
3 그분께서는 수난을 받으신 뒤, 당신이 살아 계신 분이심을 여러 가지 증거로 사도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4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계실 때에 그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나에게서 들은 대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기다려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며칠 뒤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6 사도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 물었다.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
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8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신 다음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10 예수님께서 올라가시는 동안 그들이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갑자기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렇게 말하였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에페소서 1장 17-23절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18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빕니다.
19 또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빕니다.
20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21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 위에, 그리고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22 또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 보기
마태오복음 28장 16-20절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2026년 5월 17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5
✚ 강론 시작 16:05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마음에도 날개가 필요합니다.
누구나 한 번쯤 새들처럼 날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답답한 일상, 풀리지 않는 걱정거리, 관계의 무게, 미래에 대한 불안 ……. 이런 것들이 우리를 짓누를 때,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하늘 높이 날아가고 싶어집니다.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에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오르시어 아버지께 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하늘을 바라보시며 사셨습니다. 명성과 권력을 쥐실 수 있었지만 그것들을 좇으시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품으셨습니다.
미움과 원망이 쌓일 수 있었지만 그것들을 바람 결에 훌훌 털어 버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내주셨을 때조차 절망하시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를 활주로 삼아 두 팔을 하늘로 벌리고 하느님 아버지를 우러르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늘로 오를 수 있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이미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미움과 욕심과 걱정이 우리를 아래로 끌어당기지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을 품게 하시고 위로 올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아버지께 올라가시어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르면, 주님 승천 대축일에서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 구 일 동안을 성령의 오심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여기고 구 일 기도를 바칩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우리 마음을 비우고, 성령의 바람을 맞을 준비를 합시다. 하느님을 향하여 하늘을 나는 연습을 시작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앞서가심과 뒤따름과 희망
늘 그렇듯 이번에도 예수 승천 대축일이 내게 무슨 의미일까 생각해봤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우릴 떠나 하늘로 오르신 것이 내게 무슨 의미냐는 말입니다.
사실 우릴 떠나시고 마는 것이라면 그것도 당신이 좋아서 떠나시고 우리가 어떻게 되든 상관 없이 떠나시고 마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분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지 내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므로 주님의 성탄과 부활을 우리가 기뻐하고 대축일로 경축함이 그분께서 우릴 위해 오시고 부활하셨기에 기뻐하고 경축하는 것처럼 주님 승천도 우릴 위한 것이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고 기뻐하고 경축하는 것이지요. 그 의미를 오늘 본기도도 그렇지만 감사송은 정확하고 명료하게 전해줍니다.
“주 예수님께서 저희 머리요 으뜸으로 앞서가심은 비천한 인간의 신분을 떠나시려 함이 아니라 당신 지체인 저희도 희망을 안고 뒤따르게 하심이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릴 떠나시고 비천한 인간의 신분을 떠나시려 승천하신 것이 아니라 앞서가시는 것이고 우리가 거기에 희망을 두고 뒤따르게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축일을 지내며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말은 ‘앞서가심’과 ‘뒤따름’ 두 단어이고 그리고 그사이에 희망이 있어야 하니 세 단어를 우린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먼저 앞서가심이라고 우리는 알아야 하고 그렇게 의미를 둬야 합니다.
앞서가시지 않고 두고 가시거나 버려두고 가시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앞서가셔야지만 구원이고 사랑인데 문제는 그것을 알아야 의미가 있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주님 승천이 사랑이 되고 의미가 발생하는데 그런 줄 모르면 홀로 가심이 될 것이고 우리의 뒤따름이 없겠지요.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가 뒤따르지 않는 것은 모르기 때문도 있지만 하늘에 희망을 두지 않기 때문이고 하늘에 희망을 두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욕망을 두거나 이 세상이 너무 재미있고 즐겁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남 얘기가 아니고 제 얘기입니다. 저는 주님 승천이 앞서가심이라고 알고 있고 우리가 뒤따라야 함도 알곤 있습니다. 문제는 이 세상에 그리 욕망을 두지 않지만 요즘 세상살이가 재미있고 즐겁습니다.
그제는 하루 내내 열무와 얼갈이배추를 수확하고 다듬는데 그것을 김치 담가 여기저기 나눠줄 것을 생각하니 힘들지 않고 즐겁고 행복했으며 그것들이 너무 쇄서 다 버리게 되었는데도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어느 본당에서 피정을 왔는데 즐겁게 강의하였더니 그분들이 재미있게 들어서 보람이 있었고 그래서 제가 행복했습니다. 이러니 제가 하늘에 오르고 싶고 거기에 희망을 두겠습니까?
그러니 오늘 사도행전의 천사가 제게 너는 “왜 하늘만 쳐다보고 서 있느냐?”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하늘 좀 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의 행복 곧 사랑의 행복을 앞당겨 사는 것도 좋지만 저의 경우는 앞당겨 사는 것보다 뒤따라가서 제대로 살 것에 희망을 둬야 하고 무엇보다 주님 사랑이 뒤따라가는 것을 갈망하고 재촉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올해 저는 죄송하지만 이런 지향만 두고 주님께서 그 은총을 차차 주실 것이라고 믿고 맡기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예수님을 향해 시선을 떼지 않고 살아가기
오늘은 주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신 ‘주님승천대축일’입니다.
우리에게 ‘하늘의 문’을 열어주신 날입니다. 그 누구도 열지 못했던, 곧 아벨의 의로운 피로도, 아브라함의 굳은 믿음으로도, 모세의 열성으로도, 예언자들의 충성으로도, 결코 그 누구도 열수 없었던,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닫힌 ‘하늘의 문’을 그리스도께서 열어주신 날입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란 시가 떠오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 빛 와 닿으면 //
스러지는 이슬과 더불어 /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과 함께 단 둘이서 / 기슭 에서 놀다가 / 구름 손짓 하며는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사실, “승천”에 대한 이야기가 <구약성경>에도 몇 군데 소개됩니다.
<창세기>에서는 아담의 6대 후손인 에녹이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하느님께서 데려가셨는데(5,24), 이를 두고 <히브리서>에서는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올라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1,5). 또 <열왕기 하권>에는 예언자 엘리야를 하느님께서 회오리바람에 태워 하늘로 데려 올라갔다(2,11)고 전합니다. 그리고 <토비트서>에서는 라파엘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2,20).
그렇다면, ‘주님의 승천’, 곧 사도신경에서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심을 믿나이다.”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오늘 <제1독서>는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자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흰옷을 입은 사람 둘이 나타나 말합니다.
“왜 하늘만 쳐다보고 서 있느냐?”(사도 1,11).
이는 예수님의 ‘떠나가심’(승천)이 끝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곧 ‘여전이 함께 하심’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그분의 삶은 단지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과거의 에피소드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현양되신 주님께서는 이제 장소와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으시며, ‘항상 우리에게 가까이 현존하심’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제2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 편에 앉히심을 알려줍니다. 곧 ‘떠나가심’(승천)은 ‘새로운 존재방식으로 함께 하심’임을 말해줍니다.
여기서, “하늘”이 물리적인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듯, “승천”도 물리적인 하늘의 어느 공간에 좌정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로 어느 한 장소에 있던 예수님께서, 이제는 ‘어느 공간에서나 같이 계시는 새로운 모습으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되심’을 의미합니다. 곧 “승천”을 통해서 육신의 모습은 사라지셨지만,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오신 것’을 말합니다.
교리적으로는 인성을 띠고 오신 예수님께서 ‘본래의 당신의 신성의 모습으로 돌아가심’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우리 인간에게도 당신의 그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시킴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는 ‘우리의 뿌리가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이 세상에 의해 살아가지 않고 ‘하늘에 의해 살아가는 것’임을, 곧 우리의 생명이 하느님의 생명, 하느님의 호흡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삶의 근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근원에 뿌리를 박고 살아갑니다. 그곳으로부터 양분을, 생명의 양식을 받아 살아갑니다. 그러니 ‘하늘에 뿌리를 박는 일’,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향해 시선을 떼지 않고 살아가는 일’일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 편에 앉아계십니다.”(콜로 3,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받았다.”(마태 28,18)
그리고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민족들을 당신 제자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곧 제자들을 ‘스승’으로 파견하십니다. 그러나 자기의 제자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제자로 삼아라고 하십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시대, 곧 교회의 시대가 예고됩니다. 제자들은 교회를 건설하면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홍보주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태 28,20).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오복음 28장 20절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주님!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가르침을 배워 익히고 지키는 자 되게 하소서.
오로지 당신께 뿌리박고 살아가게 하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 하고 어디에 있더라도 당신께 눈을 떼지 않는 당신께 속한 자 되게 하소서.
당신의 숨결이 되어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주님 승천을 기뻐할 수 있는 자격 : 파견의 기쁨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루카 24,50-52)
찬미 예수님!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을 가만히 묵상해 보면 제자들의 반응이 참으로 이상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남겨두고 하늘로 올라가 버리셨습니다. 사랑하는 스승님, 의지하던 부모님이 나를 떠나가셨는데 제자들은 슬퍼하며 울부짖기는커녕, 성경의 표현대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상식으로는 주님께서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신다면 언제나 우리 곁에 찰딱 붙어서 우리를 보살펴 주시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은 왜 굳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셔야만 했을까요? 그리고 제자들은 주님이 떠나셨는데 도대체 무엇이 그리 좋아서 기뻐 뛰며 돌아간 것일까요?
오늘 우리는 그 신비를 풀기 위해 '파견'과 '성장'이라는 위대한 생명의 법칙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합니다. 먼저, 제가 어렸을 때 겪었던 아주 충격적이고도 개인적인 일화 하나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일곱 살 생일을 맞았을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께서 저의 어깨를 잡으며 아주 단호한 표정으로 이렇게 폭탄선언을 하셨습니다.
"너는 이제 일곱 살이 되었다. 엄마는 너를 일곱 살까지만 키워주는 거다. 이제부터 네가 다치든, 잘되든 그것은 다 네가 책임져야 할 네 인생이다. 엄마 탓을 해서는 안 된다."
일곱 살짜리 꼬마가 듣기에는 너무나 서운하고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스스로를 보호하며 강하게 자라라는 뜻에서 그런 모진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머니의 그 무서운 파견 선언을 들은 날부터, 어린 제 마음속에 두려움과 동시에 아주 '묘한 쾌감'이 솟아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 이제부터 내 인생은 진짜 내 것이구나! 내가 이 인생의 주인이구나!'
어머니가 저를 품 안에서 밀어내어 파견하신 그 서운했던 순간이, 역설적으로 제가 부모의 부속품에서 벗어나 내 삶의 운전대를 직접 쥐게 된 가장 가슴 벅찬 독립의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그때 어머니가 저를 세상으로 매몰차게 파견하지 않으시고 서른 살, 마흔 살이 될 때까지 품에 안고 밥을 떠먹여 주셨다면, 지금 사제로서 영혼들을 돌보는 오늘의 저는 결코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다고 해서 죽을 때까지 품에 껴안고 젖을 물리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녀의 인생을 파괴하는 집착입니다. 진정한 부모는 자녀를 때가 되면 세상 속으로 결혼시켜 내보내야 합니다. 부모를 떠나는 것이 자녀에게 진짜 기쁨이 되는 이유는, 자녀가 부모를 떠나야만 비로소 자신도 누군가를 낳고 기르는 '새로운 부모(생명)'로 완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위대한 파견의 목적을 너무나도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실제 영상이 하나 있습니다.
호주의 한 야생동물 구조대원이 길가에 버려진 갓 태어난 새끼 캥거루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새끼 캥거루를 집으로 데려와 밤낮으로 우유를 먹이고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캥거루는 그 구조대원을 진짜 엄마로 여겼고 늘 그의 품을 파고들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캥거루가 다 자랐습니다. 구조대원은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지만, 캥거루가 캥거루답게 살게 하려고 그를 넓은 야생으로 방사했습니다. 처음에는 캥거루도 엄마 같은 사람을 떠나지 않으려 발버둥을 쳤습니다. 하지만 결국 자연으로 파견되어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캥거루 한 마리가 구조대원의 집 앞마당으로 껑충껑충 뛰어 들어왔습니다. 놀랍게도 옛날 그 캥거루였습니다. 그런데 그 캥거루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배에 있는 아기 주머니 속에, 아주 예쁜 자기 새끼를 소중하게 품고 온 것입니다.
캥거루는 구조대원 앞으로 다가와 주머니 속의 새끼를 자랑스레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키워준 은인에게 바치는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엄마, 저도 이제 당신처럼 생명을 낳고 돌보는 진짜 어른이 되었습니다!"라는 감사의 인사였던 것입니다.
만약 그 캥거루가 구조대원이 자기를 버렸다고 원망하며 파견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면, 결코 그 앞마당으로 다시 돌아올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품은 새끼(생명)가 있었기에 당당하게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출처: 동물 다큐멘터리 'The Kangaroo Sanctuary' 실화).
우리가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을 기뻐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며 우리를 떠나신 것은 우리를 고아로 버려두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영원한 젖먹이로 두지 않으시고, 이제는 우리 스스로 세상 속으로 들어가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여 새끼 캥거루처럼 가슴에 품고 돌아오라고 파견하시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위대한 신뢰'이자 '독립선언'인 것입니다.
우리가 매주 봉헌하는 미사(Missa)의 어원 자체가 바로 '파견'이라는 뜻입니다. 미사 끝에 사제가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고 말할 때의 라틴어가 "이테, 미사 에스트(Ite, missa est)"입니다. '이테(Ite)'는 '가라(Go)'라는 강력한 명령형 동사입니다. '미사(Missa)'는 '파견(Dismissal, Sent)'을 의미하는 명사이며, '에스트(est)'는 '~이다(is)'라는 뜻입니다.
즉 직역하면 "가라, 파견이다!" 혹은 "가라, 너희는 세상으로 보내어졌다!"라는 엄중한 선언입니다. 흔히 쓰는 사명, 곧 '미션(Mission)'이라는 단어도 바로 이 '미사(Missa)'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성체를 먹고 자라난 우리는 이제 세상의 영혼들을 살리기 위한 선교사(Missionary)로 파견되는 위대한 신분 상승을 이룬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험난한 세상에 파견해 놓고 하늘에서 뒷짐 지고 구경만 하실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떠나보내지만, 결코 자식을 완전히 버리는 법이 없습니다.
구약성경 탈출기 2장에 나오는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파라오가 히브리 사내아이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을 때, 요게벳은 아기 모세를 살리기 위해 피눈물을 머금고 갈대 상자에 담아 나일강에 띄워 보냅니다. 아기의 온전한 삶을 위해 기꺼이 끔찍한 파견을 결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요게벳은 아기를 그냥 버려두지 않습니다. 누나 미리얌을 몰래 상자 뒤로 따라가게 합니다.
결국 파라오의 딸이 모세를 건져내자, 미리얌이 나서서 유모를 소개해주겠다고 합니다. 그 유모가 누구였습니까? 바로 모세의 친엄마 요게벳이었습니다. 요게벳은 궁궐에 유모로 들어가 매일 모세에게 자신의 젖을 물리고, 히브리인의 신앙을 뼛속 깊이 가르칩니다. 이집트의 왕궁이라는 세상 한복판에 파견되었지만, 모세는 보이지 않는 어머니의 젖과 가르침을 먹으며 이스라엘을 구원할 위대한 영도자로 자라납니다. (출처: 『주석 성경』 탈출기 2장).
예수님의 승천도 이와 완벽하게 똑같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며 세상을 향해 우리를 갈대 상자처럼 띄워 보내셨지만, 결코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요게벳이 궁궐에 몰래 들어와 젖을 먹였듯, 주님께서는 하늘의 절대적인 도우심인 '성령'을 우리에게 유모처럼 보내주십니다. 세상 한복판에서 우리가 영적으로 굶어 죽지 않도록, 성령을 통해 끊임없이 당신의 은총과 가르침을 먹이시는 것입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 다음에 곧바로 '성령 강림 대축일'이 이어지는 교회의 전례 주년은 바로 이 기막힌 영적 섭리를 보여줍니다. 주님이 승천(파견)하셔야만, 성령(어머니의 젖)이 우리에게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위대한 학자이신 성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님은 『요한 복음 강해』 제94해설에서 주님께서 우리 눈앞을 떠나셔야만 했던 필연적인 이유를 이렇게 정확히 설명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제자들의 곁에 계속 머무셨다면, 제자들은 그분의 육신에만 매달리는 나약한 애착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시야에서 사라지셔야만, 비로소 성령께서 그들 내면에 영적인 사랑과 능력을 부어주시고, 그들을 스스로 걸어 다니며 세상을 구원하는 성숙한 영적 어른으로 만드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성 아우구스티누스, 『요한 복음 강해』 94, 4).
승천하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파견받는 기쁨을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나눈 이 모든 파견의 두려움과, 성령의 도우심, 그리고 캥거루처럼 열매를 안고 돌아오는 기쁨을 완벽하게 이해한다면 우리를 파견하시며 승천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엄청나게 인정하신 것임에 가슴 뿌듯해해야 합니다.
어릴 적 어머니의 매몰찬 선언이 저를 강한 어른으로 키웠듯, 나를 파견하시는 주님의 승천 앞에서 서운해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당당하게 내 인생의 운전대를 쥐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보내주신 성령이라는 든든한 보호자와 함께, 우리 가족과 이웃의 영혼들을 내 영적 주머니에 가득 담아 하느님 대전으로 당당히 돌아오는, 자랑스럽고 기쁨에 넘치는 하느님의 친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구경꾼에 둘러싸여 춤을 추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의 춤은 이제까지 흔히 보던 춤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일반적이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놀라움에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어이없어하며 이 남자의 춤을 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한 남자가 나와서 이 사람의 춤을 따라 추는 것입니다. 그저 놀라며 보고만 있던 사람들이 이제 손뼉을 치며 박자를 맞추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함께 어울려 춤을 추며 그 시간을 즐겼습니다.
처음의 춤꾼 한 명을 지도자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따르는 첫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예수님도 그렇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당시 모습은 미친 짓이라고 할 만큼 놀라웠습니다. 죄인과 먹고 마셨으며,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당시 유다인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던 안식일 법도 어기곤 했습니다.
만약 이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우리가 주님 안에서 위로와 힘도 얻을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따름’이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모두 알아서 해주시기만을 청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영광은 우리의 ‘따름’에서 이루어집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지상 여정이 끝나고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들어가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지금이야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 주님의 승천을 목격했던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우리 곁을 떠나 저 멀리 우주 공간으로 사라지신 주님의 부재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1독서의 사도행전에는 제자들이 주님께서 승천하신 하늘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때 천사가 말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 1,11)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할 일은 하늘만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상 속으로 돌아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 성령을 통해 세상 어디서나 그리고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더욱 깊고 충만하게 머무르십니다.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새로운 현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현존이 우리의 은총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면서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면서도 “더러는 의심하였다.”(마태 28,17)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의 나약함이 드러납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세상의 구원이라는 엄청난 사명을 제자들에게 맡깁니다. 이는 완벽하게 준비된 성인들을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흔들리고 의심하는 불완전한 사람들을 통해 당신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과연 완벽하게 준비된 사람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이행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도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흔들리고 의심하는 불완전한 사람이기에 삶 안에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노력이 모이고 모여 주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서 환하게 들어 높여질 것입니다.
너무나 부족한 우리인데도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라는 엄청난 사명을 건네주십니다. 그러나 사명만 던져주고 떠나시는 방관자 같은 주님이 아니십니다. 실패와 박해, 두려움이 가득한 세상 속으로 파견하는 제자들을 향해 그리고 지금을 사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주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주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고, 이렇게 주님께서 멀리 계신다고 느끼며 외로워하는 우리입니다. 이때 포기하고 절망에 빠질 것이 아니라, 우리 삶 모든 순간에 함께하시는 주님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철저히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과 다르고, 또 부족한 우리가 과연 할 수 있을까 하고 의심도 들겠지만, 어떻게든 따르려는 우리의 땀방울 하나하나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 영광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내가 나다워질 수 있는지 아는 것이다(몽테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십자가의 낮아짐은 승천의 높아짐으로 이어집니다. 승천은 예수님의 부재가 아니라 현존 방식의 변화입니다. 이렇듯 신앙은 세상 안에서 하늘의 뜻을 살아내는 현실의 삶입니다. 우리 존재가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희망의 표지입니다.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하늘에 이르는 길입니다. 성장과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이 모든 여정은 승천처럼 하느님의 영광 안으로 들어가는 여정입니다. 더 높은 사랑과 더 깊은 생명으로 들어올려지는 승천의 사건입니다. 이 승천으로 하늘과 땅이 다시 연결되는 은총이 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하늘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주님 승천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자기중심성을 넘어선 가장 좋은 승천의 사랑입니다. 욕심을 비우고 진실되이 사랑하는 것이 높아지는 참된 사랑입니다. 그래서 승천은 끝이 아니라 복음 선포의 시작입니다.
복음의 정신을 담아내는 것이 참된 소통이며 홍보입니다. 홍보의 본질은 이미지를 만드는 데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진실한 얼굴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진실과 존중, 희망과 사랑의 삶을 나누는 주님 승천 대축일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삶으로 하늘을 드러내는 것이 승천 신앙의 완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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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