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이 결국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는 오늘 말씀 속 기쁨은, 잠시 스쳐가는 행복보다 긴 시간이 지나도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는 희망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살면서 많은 것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흔들리기도 하지만, 사랑받았던 기억과 끝까지 견뎌낸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시 살아갈 힘을 마음 안에 남겨주시고, 누구도 빼앗지 못할 희망을 지켜주심에 감사합니다.

2026년 5월 15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5월 15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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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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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사도행전 18장 9-18절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
바오로가 코린토에 있을 때,
9 어느 날 밤 주님께서는 환시 속에서 그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11 그리하여 바오로는 일 년 육 개월 동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12 그러나 갈리오가 아카이아 지방 총독으로 있을 때, 유다인들이 합심하여 들고일어나 바오로를 재판정으로 끌고 가서,
13 “이자는 법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하느님을 섬기라고 사람들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4 바오로가 입을 열려고 하는데 갈리오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유다인 여러분, 무슨 범죄나 악행이라면 여러분의 고발을 당연히 들어 주겠소.
15 그러나 말이라든지 명칭이라든지 여러분의 율법과 관련된 시비라면,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시오. 나는 그런 일에 재판관이 되고 싶지 않소.”
16 그러고 나서 그들을 재판정에서 몰아내었다.
17 그러자 모두 회당장 소스테네스를 붙잡아 재판정 앞에서 매질하였다. 그러나 갈리오는 그 일에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18 바오로는 한동안 그곳에 더 머물렀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프리스킬라와 아퀼라와 함께 배를 타고 시리아로 갔다. 바오로는 서원한 일이 있었으므로, 떠나기 전에 켕크레애에서 머리를 깎았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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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6장 20-23ㄱ절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21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22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23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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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15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
✚ 강론 시작 06:25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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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사랑도 결국 연습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그리고 이 말씀을 해산의 고통으로 설명하십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16,21).
해산의 고통은 정말 큽니다. 그러나 새 생명의 기쁨이 고통보다 크기에 그 고통을 잊어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겪는 고통도 우리가 얻을 하느님 나라의 기쁨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피겨의 여왕’ 김연아 선수는 “No Pain No Gain.”, 곧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라는 좌우명을 두고 날마다 연습을 하였다고 합니다. 완벽한 경기를 위하여 수천 번의 점프 연습을 되풀이하였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세상의 금메달이나 우승 트로피를 얻는 데도 이렇게 많은 고통이 따르는데, 하늘의 썩지 않는 화관을(1코린 9,25 참조) 얻는 데 어찌 고통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평화를 얻으려 성당에 왔는데 마음속에 번뇌만 더 생긴다며 성당을 떠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당에 앉아 있는다고 저절로 하느님 나라가 오지 않습니다. 김연아 선수가 수천 번 점프 연습을 하였듯이, 우리도 수천 번 다시 사랑하고, 실패하며, 용서하는 고통스러운 연습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우리의 고난 끝에는 부활의 기쁨이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려에 대해 우려하는
우려(憂慮)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 좋은 말이 아닌 것처럼 쓰이고 그렇게 들립니다. 그러나 우려가 반드시 나쁜 뜻인 것은 아닙니다.
제 짐작에 우려라는 말은 논어의 인무원려(人無遠慮) 필유근우(必有近憂)에서 나온 말일 것입니다. 원려(遠慮)를 하지 않으면 근우(近憂)가 있기 마련이라는 뜻이지요.
원려란 무슨 뜻입니까? 멀리 내다보며 생각하는 것일 겁니다. 근우란 어떤 뜻입니까? 가까이 있는 근심일 뜻일 것이고, 근심이란 늘 가까이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니 근심이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내다보며 생각할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동양의 지혜가 담긴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전화위복(轉禍爲福) 새옹지마(塞翁之馬) 전화위복은 화가 바뀌어 복이 된다는 말이니 멀리 있는 복을 내다보면 가까이 있는 화를 보고 그리 근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새옹지마는 기쁨이 슬픔이 되고 슬픔이 기쁨이 되는 것의 반복이 인생이니 일희일비(一喜一悲) 곧 하나하나에 너무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오늘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맥락일까요?
같은 맥락이면서도 그 이유가 사뭇 다릅니다. 곧 화와 복 또는 기쁨과 슬픔이 저절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이유이고 하느님 때문에 그리 바뀌는 것이 차이입니다. 주님께서 떠나시기에 슬프고 근심스럽게 되지만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기에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 신앙인이라면 근심과 기쁨의 이유도 달라야겠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우려해야 할 것은, 이 세상 것에 관한 우려가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을 놓치거나 잃을까 그것을 우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것도 이 세상 것을 얻게 되었음에 기뻐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기쁨 곧 성령으로 인한 기쁨이어야겠지요.
세상 입맛이 천상 입맛으로 바뀌었음에 기뻐하고, 그래서 하느님 나라를 소유케 되었음에 기뻐하고, 하느님 나라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음에 기뻐하고, 무엇보다도 모든 선이신 주님을 소유하게 되었음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프란치스코처럼 이 기쁨 때문에 또 이 기쁨을 위하여 “우리 모두에게 온 몸과 온 마음과 온 생명을 주셨고 지금도 주시는 주 하느님,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으뜸선이신 주 하느님 외에는 아무것도 우리는 원하지 말고 바라지도 말며 마음에 들어하지도 즐거워하지도 않는” 그런 우리가 되기로 마음먹고 그런 은총을 주십사고 청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우리는 왜 기쁨을 잃고 살아가는가
오늘날에는 아파하고 고통 받는 이들이 유난히도 많아 보입니다.
그런데 누군들 슬픔에서 해방되고 싶지 않는 이가 있을까요?
누군들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요?
기쁨을 원하지 않은 이가 있을까요?
그런데, 대체 ‘참된 기쁨’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세상의 슬픔과 고통에 대하여, 그 누구보다도 가장 깊이 함께 아파하셨던 프란치스코 교종의 권고문헌인 <복음의 기쁨>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1항)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된 기쁨’을 예수님에게서 만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내 안에서’ 탄생되는 기쁨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제자들은 지금 신음하며 해산 중입니다. 해산을 마치면, 고통은 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기쁨이 너무 커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고 하십니다. 그때에는 “슬픔이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이 기뻐하는 것은 한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서가 아니라, ‘자신의 아기’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기쁨’은 아기가 ‘내 안에서’ 태어나야 오는 기쁨입니다.
그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내 안에서’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것은 내가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새로 탄생하는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그렇습니다. 부활이 ‘내 안에서’ 탄생하는 이 ‘기쁨’은 ‘빼앗겨 질 수 없는 기쁨’입니다. 사실, ‘내가 기쁨을 낳은 것이 아니라, 기쁨이 나를 낳은 것’입니다. 이것야말로 바로 예수님께서 주신 ‘참된 기쁨’입니다. ‘선사된 기쁨’, ‘주어진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죽음이 생명임을, 패배가 아니라 승리임을 말해줍니다. 그 ‘기쁨’은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그 속에서도 주님은 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항상 함께 하시는 그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고, 빼앗아갈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을 놓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고별담화의 마지막을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16장 22절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주님! 바로 이것이 저의 기쁨입니다.
그 어떤 불길도 태울 수 없고
그 어떤 슬픔도 해칠 수 없고
비록 흔들리더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그 어떤 방벽으로도 막을 수 없고
그 어떤 감옥으로도 가둘 수 없고
그 누구도 빼앗지 못할
결코 빼앗겨 질 수 없는
‘임의 사랑’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참 기쁨을 알면 진리에 도달한 것이다.
"여자가 해산할 때에는 진통이 닥쳐 근심에 싸인다. 그러나 아기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 때문에 그 고통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요한 16,21-22)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에게 아주 원초적이고도 강력한 비유를 들려주신다. 바로 해산하는 여인의 진통이다. 세상 사람들은 고통을 무조건 피하고 제거해야 할 최악의 질병으로 여긴다. 진통제가 없으면 단 하루도 견디지 못하는 것이 현대인의 나약함이다.
하지만 신앙인은 고통을 맹목적으로 피하는 사람이 아니다. 신앙인은 이 고통이 과연 무엇을 낳는지, 그 찢어지는 진통 끝에 어떤 생명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다. 참된 기쁨은 고통이 소멸할 때 오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뚫고 쏟아져 나오는 새 생명의 첫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에 완성된다.
이 위대한 생명 잉태의 역설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떠난 현대의 위대한 성녀가 있다. 1962년에 선종한 이탈리아의 소아과 의사이자 네 아이의 어머니였던 성 잔나 베레타 몰라(Gianna Beretta Molla)의 이야기다.
그녀는 넷째 아이를 임신한 지 두 달째 되던 날, 자궁에 거대한 종양이 생겼다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았다. 의사들은 그녀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즉각 자궁을 적출하거나 아기를 지우고 수술을 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것이 고통을 피하고 생존을 도모하는 세상의 합리적인 법칙이었다. 하지만 잔나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의사 선생님, 제 목숨을 구하려 아기를 죽일 수는 없습니다. 제 고통은 제가 짊어질 테니,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아이의 생명만은 살려주십시오."
임신 기간 내내 종양이 자라면서 자궁을 짓누르는 극한의 진통이 그녀의 몸을 찢어놓았다. 그녀는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도 기도하며 끝내 만삭을 채웠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딸 잔나 에마누엘라를 낳았다. 하지만 출산 직후, 감염에 의한 패혈증성 복막염이 찾아와 그녀를 죽음의 문턱으로 몰아넣었다.
그녀의 임종을 지켜본 남편 피에트로 몰라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염증과 고열 때문에 그토록 목숨 걸고 살려낸 아기를 직접 품에 제대로 안아보지도 못했을 만큼 비참한 육체적 고통 속에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임종의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후회나 절망의 그늘이 단 1퍼센트도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예수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끊임없이 속삭이며, 자신의 목숨과 맞바꿔 세상에 태어난 새 생명에 대한 환희 속에서 세상 어떤 권력자도 갖지 못한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 (출처: 피에트로 몰라, 『성 잔나 베레타 몰라의 생애』)
어떻게 죽어가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이토록 찬란하게 미소 지을 수 있을까? 내 육신이 부서지는 고통을 완벽하게 압도해버리는 '새 생명 탄생의 기쁨'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자연계의 생명체들 역시 기존의 낡은 자아를 부수고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기 위해 필연적으로 고통을 겪어야만 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저명한 정신과 의사이자 랍비인 에이브러햄 트워스키(Abraham Twerski)가 제시한 '랍스터의 성장' 법칙을 보라.
랍스터는 연약하고 부드러운 속살을 가지고 있지만, 아주 단단한 껍질에 둘러싸여 있다. 문제는 랍스터의 속살은 계속 자라는데 껍질은 절대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랍스터가 성장할수록 낡은 껍질은 몸을 잔인하게 짓누르기 시작한다. 랍스터는 껍질 안에서 엄청난 압박감과 숨이 막히는 극한의 고통(진통)을 느낀다.
이 죽을 것 같은 고통의 신호가 오면, 랍스터는 바위 밑으로 들어가 자신을 지켜주던 낡은 껍질을 찢고 밖으로 빠져나오는 피나는 산고를 겪는다. 껍질을 벗은 순간 가장 연약하고 위험한 상태가 되지만, 이 고통스러운 찢어짐의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자신을 품을 수 있는 더 크고 단단한 새로운 껍질, 즉 '새 생명'으로 탄생하게 된다. 랍스터는 평생 이 해산의 진통을 반복하며 거대한 생명체로 자라난다.
트워스키 박사는 뼈 있는 농담을 던진다. "만약 랍스터에게 인간의 의사가 있었다면, 랍스터는 압박감과 고통을 느낄 때마다 신경안정제나 진통제를 처방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을 피한 대가로 영원히 낡은 껍질 속에 갇혀 죽어갔겠지요." 인간이 십자가의 진통을 피하려 세상의 마취제에 숨는 것과 같다. 고통은 우리를 파괴하는 질병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낡은 자아의 껍질을 찢고 하느님의 자녀라는 '새 생명'으로 탄생할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거룩한 신호인 것이다. (출처: 에이브러햄 트워스키, 『Growing Each Day』)
그렇다면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느라 겪는 그 억울함과 상처의 기억들은 어떻게 기쁨으로 변환되는 것일까? 예수님의 말씀처럼 "아기를 낳으면 그 고통을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는" 이 신비를 뇌과학에서는 옥시토신(Oxytocin)이라는 호르몬으로 완벽하게 설명한다.
여성이 해산할 때 겪는 뼈가 벌어지는 통증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고의 고통 중 하나다. 정상적인 뇌라면 이 끔찍한 트라우마를 평생 기억하며 다시는 임신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피투성이가 된 아기를 낳아 가슴에 품는 바로 그 순간, 산모의 뇌에서는 사랑과 결속의 호르몬인 옥시토신이 평소의 수십 배로 폭발적으로 분비된다. 이 옥시토신은 산모의 뇌를 문자 그대로 포맷해 버린다. 고통의 끔찍한 기억 자체를 하얗게 덮어버리고, 그 자리를 아기를 향한 절대적인 맹목의 사랑과 환희로 가득 채워 넣는다.
성령은 바로 우리 영혼에 쏟아지는 '영적 옥시토신'이다.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자존심을 꺾고, 미운 이웃을 용서하기 위해 피눈물을 흘리며 십자가의 진통을 견뎌낼 때,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 영혼에 성령을 폭포수처럼 쏟아부어 주신다. 이 성령의 옥시토신이 뇌를 덮치는 순간, 내가 세상에서 겪었던 억울함, 모욕, 배신의 상처라는 십자가의 트라우마는 완벽하게 삭제된다. 그리고 오직 내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으며, 내 희생을 통해 이웃의 영혼을 하느님께 낳아주었다는 압도적인 기쁨만이 내 영혼을 온전히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의 결론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웅장한 도장을 찍어주신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요한 16,22)
이 결코 빼앗기지 않는 기쁨의 원리는 현대 IT 공학의 핵심 기술인 블록체인(Blockchain) 시스템과 정확히 일치한다.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추구하는 기쁨, 즉 돈, 권력, 건강, 인기는 내 지갑 속에 든 현찰이나 특정 회사의 중앙 서버에 저장된 데이터와 같다. 도둑이 지갑을 훔쳐 가거나, 해커가 서버를 털어버리거나, 주식 시장이 폭락하면(사기, 파산, 질병) 그 기쁨은 하룻밤 사이에 공중으로 증발해버린다. 세상의 기쁨은 누군가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빼앗아 갈 수 있는, 해킹에 절대적으로 취약한 저급한 시스템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의 산고를 뚫고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기쁨과 자존감은 차원이 다르다. 내가 우주 창조주의 고귀한 상속자이며, 십자가의 진통을 통해 이웃의 영혼 속에 하느님을 낳은 거룩한 어머니가 되었다는 이 영광스러운 팩트는 도대체 어디에 기록되어 있을까? 내 통장이나 얄팍한 기억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의 장부와 수천억 명의 천사들, 그리고 천국의 모든 성인의 장부에 실시간으로 분산되어 완벽하게 저장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영적 블록체인 기술이다.
사탄이 아무리 내 삶의 통장을 해킹하여 내 돈과 건강을 털어가려 덤벼들어도, 천국 전체에 분산 저장된 나의 고귀한 정체성(하느님의 자녀)과 그로 인한 기쁨의 기록은 결코 위조하거나 삭제할 수 없다. 해킹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완벽한 보안 시스템이기에, 세상 그 어떤 마귀나 불행도 이 기쁨을 내게서 빼앗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 기쁨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당신이 말씀하시려는 것의 목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해산의 고통, 곧 십자가의 영광을 깨달았다면 더는 물을 것이 없어진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 강해』에서 이렇게 일갈했다.
"성인들이 흘린 눈물은 기쁨을 잉태하는 거룩한 씨앗이다. 십자가의 찢어지는 진통 없이 부활의 기쁨만을 훔치려는 자는, 생명 없는 허수아비로 영원히 시들어갈 것이다." (출처: 성 아우구스티누스, 『시편 강해』).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대니얼 카니먼 박사의 인상 깊은 말이 있습니다. 우리 결정의 대부분은 가슴이 내린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싶었습니다. 결정은 원래 머리로 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카너먼 박사는 머리는 가슴이 이미 내린 결정을 뒤따라가며, “그래, 이건 이래서 좋은 선택이었어.”라고 합리화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혹시 ‘이런 상황에서는 슬퍼야 해, 이런 상황에서는 웃어야 해.’라면서 머리로 생각할까요? 아닙니다. 어느 순간 공감하면서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감동을 계속 머리로 떠올릴 수 있도록 합니다. 즉, 머리가 분석하기 전에 마음이 먼저 반응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이 먼저 움직일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머리가 먼저인 것처럼 판단합니다. 생각을 곰곰이 하면 늦게 됩니다. 그래서 ‘장고 끝에 악수 둔다.’라는 말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과 행적을 머리로 계속 떠올리면서 스스로 판단합니다.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계산하면서 행동하려고 합니다. 과연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따를 수 있을까요?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주님 말씀에 집중하면서, 우리 역시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세상은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착각하며 기뻐할 것입니다. 반면 제자들은 스승을 잃은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깊은 애통에 빠지게 됩니다. 모두 마음이 아닌 머리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근심 대신 기쁨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슬픔과 기쁨이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이 부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는 가장 위대한 기쁨의 원천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산모의 해산 고통을 말씀하십니다.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반드시 겪어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가 새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진통이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다시 보게 되면’이라고 하지 않고, 주어를 바꿔서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이라고 하십니다. 구원의 주도권이 철저히 주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보다 더 큰 것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충분히 흔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우리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크게 기뻐하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은 우리를 강하게 하고 우리가 계속 나아가도록 만든다(조나 레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 안에 뿌리내린 기쁨은 그 누구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세상이 빼앗을 수도 없는 참된 기쁨입니다. 하느님 안에 머무는 사랑의 기쁨은 세상의 힘으로는 결코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안에 머무는 사람만이 빼앗기지 않는 기쁨에 이릅니다. 사라지지 않는 생명의 기쁨입니다. 존재 자체가 사랑받고 있다는 깊은 깨달음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참된 기쁨은 세상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우리의 삶을 바로 세웁니다.
모든 순간을 하느님께 맡기는 기쁨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 안에서 자라나는 기쁨입니다. 하느님의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그 기쁨을 끝까지 잃지 않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빼앗기지 않는 기쁨의 길에서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으로 살아가는 기쁨의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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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