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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6.05.22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피어나네 2026. 5. 22.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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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마음을 이미 알고 계셨을 텐데도 왜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하셨을까요? 

 

이 질문은 다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시는 마음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예수님의 질문이 미안함 뒤에 숨어 있던 사랑을 다시 불러내는 말처럼 느껴졌어요.

 

오늘,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사랑을 다시 말하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2026년 5월 22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성경 말씀 정리

 

2026년 5월 22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5월 22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사도행전 25,13ㄴ-21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예수는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 무렵

13 아그리파스 임금과 베르니케가 카이사리아에 도착하여 페스투스에게 인사하였다.

14 그들이 그곳에서 여러 날을 지내자 페스투스가 바오로의 사건을 꺼내어 임금에게 이야기하였다. “펠릭스가 버려두고 간 수인이 하나 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갔더니 수석 사제들과 유다인들의 원로들이 그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면서 유죄 판결을 요청하였습니다.

16 그러나 나는 고발을 당한 자가 고발한 자와 대면하여 고발 내용에 관한 변호의 기회를 가지기도 전에 사람을 내주는 것은 로마인들의 관례가 아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17 그래서 그들이 이곳으로 함께 오자, 나는 지체하지 않고 그다음 날로 재판정에 앉아 그 사람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18 그런데 고발한 자들이 그를 둘러섰지만 내가 짐작한 범법 사실은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19 바오로와 다투는 것은, 자기들만의 종교와 관련되고, 또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뿐이었습니다.

20 나는 이 사건을 어떻게 심리해야 할지 몰라서, 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 그곳에서 이 사건에 관하여 재판을 받기를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21 바오로는 그대로 갇혀 있다가 폐하의 판결을 받겠다고 상소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황제께 보낼 때까지 가두어 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 보기

요한복음 21,15-19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15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2026년 5월 22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

✚ 강론 시작 07:15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오늘, 사랑한다고 말하기

오늘 복음에 나오는 당신을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경상도 남편을 둔 아내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아내가 평소에 사랑 표현에 인색한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옛날 옛적에 ‘사랑해’와 ‘안 사랑해’가 살았대. 그런데 ‘안 사랑해’가 죽고 말았대. 그럼 누가 남았게?”

아내는 “사랑해.”라는 말을 기대하였지만, 남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니 뭐 잘못 무긋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요. 사랑의 말은 상처를 낫게 하고, 죽어가는 사람도 살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 물으시며 베드로에게 사랑을 표현할 기회를 주십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것을 세 번의 사랑 고백으로 덮어 주시며 사랑의 실패를 치유하시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상처를 치유하시는 것을 넘어, 사랑을 표현하시는 것을 넘어, 사랑을 확장시키는 데로 나아가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 뒤에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사명이 따라옵니다(21,16-17 참조).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베드로 사이의 사랑이 그 안에만 갇히기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사랑은 나를 넘고, 나의 공동체를 넘어서 심지어 나의 원수에게도 이르러야 합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거나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도 예수님의 양들임을 발견하고 돌보는 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지금 이 순간 예수님께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21,15)라고 고백합시다. 그리고 그 사랑을 표현하는 데만 머물지 말고, 주님께서 저마다에게 주신 사명을 실천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는 더 사랑해야 할 사람!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나이를 먹을수록 이런 생각이랄까 염려를 하게 됩니다. 내가 나이를 먹어도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내 몸 하나 제대로 지탱하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이에게 돌봄을 받게 되어도 사랑할 할 수 있을까? 이는 내 코가 석 자인데도 사랑할 수 있냐는 말이지요.

흔히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까? 내 손에 박힌 가시가 남의 암보다 더 고통스럽고 더 신경 쓰인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냐고 물으시는 뜻도 이런 뜻과 연결하여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내 고통이 크면 남을 생각할 수 없고, 사랑은 더더욱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따라서 또 주님의 후계자로 주님의 양들을 돌봐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 보통 사람보다는 더 사랑해야 할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더 사랑해야 할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바티칸 공의회의 수도 생활 문헌 ‘Perfectae Caritatis(완전한 사랑)’는 수도자란 완전한 사랑을 사는 사람이라고, 더 정확히 얘기하면 더 완전한 사랑을 사는 사람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리스도인 누구나 원수 사랑을 포함하여 완전한 사랑을 살아야 하지만 수도자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보다도 더 완전한 사랑을 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마태오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고 말씀하신 다음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제자라면 하느님처럼 완전해야 한다고 하시는데 여기서 완전은 능력에 있어서 완전한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어서 완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루카 복음의 병행 구절에서는 ‘완전’이 ‘자비’로 바뀝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그러므로 주님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그래서 따르지 않을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주님께 사랑에 대한 가르침도 받고 따르기로 한 제자라면 더 사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더 사랑하는 것도 남보다 더 사랑해야 할 뿐 아니라 오늘보다 내일 더 사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우리에게 유일한 일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

예수님께서는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상을 차려 아침을 먹이신 다음, 베드로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시며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6.17)

뭔가 이상한 질문입니다. 보통 일을 맡길 때면, ‘이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잘 할 수 있겠느냐?’ 하고 묻는데, 엉뚱하게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왜 일까요? 이는 일을 ‘잘’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당신께서 맡기신 일은 ‘능력’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하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일’을 사랑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무엇이 본질인지를 파악하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나의 양들’이 아니라, ‘주님의 양들’을 돌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16.17 참조)

그렇습니다. 당신의 양들이 맡겨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우리를 믿으시기에 맡기신 양들입니다. 그러니 이는 제자들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나타냅니다. 능력을 보고 맡기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으로 맡기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양들을 돌보라 하심은 ‘당신이 먼저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믿고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를 깨닫지 못한 채, 세 번의 동문서답으로 대화를 끝내고 맙니다. 그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21,15.16.17 참조)라고 고백할 뿐,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실 이전에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의심하고 세 번이나 부정했지만, 주님은 그가 배신할 줄을 알면서도 그를 믿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사랑하시기를 결코 멈추지 않으신다는 ‘하느님의 신실하심’(헤세드)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믿음’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끝내 이를 알아듣지 못한 베드로는 결국, 양떼를 돌보지 않고 도망치고 말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것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일’에 앞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요청받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유일한 일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나의 일을 따르라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또 ‘나의 일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사랑을 깨우쳐주소서.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당신은 늘 저를 더더더 사랑하십니다. 제 역시 당신을 사랑하기에, 일을 사랑으로 하게 하소서. 당신에 대한 사랑으로 일하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21장 17절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심은

저의 사랑을 당신이 모르셔서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제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당신께서는 먼저 아침상을 차려

사랑을 먹이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먼저 사랑하시고,

훨씬 더 더 사랑하시며,

목숨까지 내주며 사랑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제가 당신을

배신할 줄을 빤히 알면서도

여전히 저를 사랑하시십니다.

하오니,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발씻김의 열매 : 착한 목자의 탄생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먹여라." (요한 21,17)

찬미 예수님! 부활 제7주간 금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가장 마지막 장, 곧 예수님과 베드로의 지독했던 사랑과 배신의 서사시가 마침내 아름다운 해피엔딩으로 완성되는 가슴 벅찬 에필로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해 허탈해하는 제자들을 티베리아스 호숫가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숯불을 피워 빵과 물고기를 구워놓고 그들을 기다리십니다. 식사를 마치신 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을 연거푸 물으시며 "내 양들을 먹여라"라는 위대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이 숯불 앞의 신비를 온전히 풀기 위해서는, 시간을 거슬러 예수님의 수난 전날 밤, '최후의 만찬' 성목요일의 다락방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은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기 시작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기겁하며 거부했습니다.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기십니다.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 (요한 13,7)

베드로가 그날 밤 깨닫지 못했던 '발 씻김의 진짜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단순히 "너희도 서로 겸손하게 봉사해라"라는 도덕적인 교훈이 아니었습니다. 이 발 씻김은 곧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질 처절한 '파스카의 신비'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어주신 것은, "내가 십자가에서 흘릴 나의 피로, 세상의 욕망과 교만에 찌든 너희의 그 얄팍한 '자아'를 완벽하게 죽이고 씻어내어, 이제부터 이 영혼의 주인이 '나 그리스도'임을 선포하겠다"라는 위대한 소유권 이전의 예식이었습니다.

이 기막힌 신비는 구약성경 탈출기 12장의 '파스카 어린양의 피' 규정에서 이미 완벽한 설계도로 주어졌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하기 전날 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집의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르라고 명령하십니다. 문설주는 집을 떠받치고 출입을 통제하는 집의 가장 아랫부분, 즉 신체로 치면 '발'에 해당합니다.

왜 굳이 피를 그곳에 발라야 했을까요? 죽음의 천사가 지나갈 때, 문설주에 발린 그 처절한 피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집의 첫째 아들, 즉 이 집을 지배하던 교만한 자아(이집트의 맏아들)는 이 피와 함께 이미 죽었다! 이 집의 소유권은 이제 하느님께로 넘어갔다!" 피가 발린 집은 죽음이 건너뛰고(Passover), 참 생명이 주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행위는 바로 그 파스카 어린양의 피를 제자들의 문설주(발)에 바르는 거룩한 행위였습니다. "너를 지배하던 네 낡은 자아는 이제 내 피로 죽었다. 이제 네 인생의 주인은 나다." 이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날 밤, 그 씻김을 끝까지 거부하며 자신의 낡은 자아를 펄펄 살려두었습니다. "다른 이들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주님을 위해 내 목숨을 내놓겠습니다!"라며, 자기 삶의 주인이 여전히 '자기 자신'이라고 뻗대며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짜 자존심은 대사제의 뜰에 피워진 '첫 번째 숯불' 앞에서 여지없이 붕괴되었습니다. 닭이 울기 전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며 도망쳤을 때, 베드로는 자신이 집을 지킬 능력도 없는 얼마나 쓰레기 같고 무력한 빚쟁이인지를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그리고 그런 비겁한 자신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다 쏟아 집값을 지불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목격하며, 베드로의 그 질기디질긴 이기적인 '자아'는 마침내 산산조각이 나고 완벽하게 씻겨 나갔습니다. 이제 영혼의 방이 비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은 똑같은 '두 번째 숯불'을 호숫가에 피워놓으셨습니다. 과거 배신의 트라우마가 서린 그 숯불 앞에서, 이제 옛 주인이 쫓겨나고 자아가 완전히 죽어버린 베드로에게 새 주인이신 예수님은 첫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베드로가 자신의 전문 지식과 고집(자아)을 완전히 버리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 찢어질 듯이 무거운 물고기들이 올라왔습니다. 그 숫자가 무려 '153마리'였습니다. 성 예로니모를 비롯한 교부들은 이 153이라는 숫자를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던 온 세상 물고기의 종류, 즉 이 세상 모든 민족을 상징한다고 풀이했습니다. 즉, 자아가 죽어 하느님이 주인이 되신 베드로는 이제 하느님의 그물을 던져 '온 세상의 하느님 자녀들'을 빠짐없이 낚아 올리는 거룩한 어부로 완성된 것입니다.

이제 가장 소름 돋는 기막힌 반전이 시작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그 153마리의 물고기(하느님의 자녀들)를 끌고 예수님이 피워두신 숯불 앞의 식탁으로 모여듭니다. 예수님은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이 아침의 식탁이 구약성경의 어떤 장면과 완벽하게 겹쳐지는지 아십니까?

탈출기 24장을 보면,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백성들과 파스카 희생 제물의 피를 뿌려 하느님과 거룩한 계약을 맺는 장면이 나옵니다. 계약이 완수되자 하느님은 모세와 일흔 명의 원로들을 시나이산 꼭대기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은 그 거룩한 산정에서 하느님을 직접 뵈며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는 엄청난 기쁨의 식탁을 누립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고 나서 먹고 마셨다." (탈출 24,11).

오늘 티베리아스 호숫가의 숯불 식탁이 바로 그 새로운 시나이산의 정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자아를 죽이는 새로운 세족례(계약)를 완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아가 씻겨진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제 단순한 어부가 아니라,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한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우주에서 가장 고귀하고 거룩한 하느님의 영적 동반자(원로)로 그 신분이 수직 상승한 것입니다.

이 거룩한 식탁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의 목숨을 다한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굳이 세 번을 물으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대사제의 뜰 숯불 앞에서 세 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의 그 뼈아픈 과거를, 똑같은 숯불 앞에서 세 번의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을 통해 완벽하게 치유하고 상계(Offset) 처리해 주신 것입니다.

이 회복의 고백이 끝나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사명을 주십니다.

"내 양들을 먹여라." (요한 21,17).

이 짧은 명령을 그리스어 원문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어떤 역할을 이양하고 계신지 그 장엄한 무게가 드러납니다. 주님은 첫 번째와 세 번째에는 "내 어린 양들을 먹여라(Βόσκε, 보스케)"라고 하셨고, 두 번째에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Ποίμαινε, 포이마이네)"라고 하셨습니다.

'보스케(Βόσκε)'는 단순히 육신의 밥을 준다는 뜻을 넘어,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영혼을 온전히 양육하라는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반면 '포이마이네(Ποίμαινε)'는 목자가 되어 앞장서서 인도하고, 늑대로부터 보호하며, 목숨을 걸고 책임지는 '전인격적인 돌봄'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예수님이 "이제부터 이 양들은 네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철저하게 "내 양들(μου)"이라고 소유권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양들은 베드로의 소유가 아닙니다. 양들의 진짜 주인은 피를 흘려 그들을 사신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양 떼를 이끄시던 당신의 그 '착한 목자'의 역할을 이제 베드로에게 고스란히 이양하고 계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인이 아니라, 주님의 양들을 내 양처럼 여기며 목숨 걸고 먹이고 보호해야 할 거룩한 '청지기'로 파견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목자로서 양들을 이끄셨던 것처럼, 이제 네가 하느님의 양 떼를 이끌라는 엄중한 명령입니다.

그렇다면 자아가 죽고 하느님과 한 몸이 된 청지기 베드로는 양 떼에게 도대체 무엇을 먹이고 돌보아야 할까요? 푸른 풀입니까? 아닙니다. 베드로가 세상 사람들에게 먹여야 할 진짜 양식은 바로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느님의 양들을 맡기시며, 그들의 입에 영원한 빵인 '성체'를 먹이라고 하십니다. 성체는 단순히 배를 불리는 위로의 떡이 아닙니다. 파스카의 피로 우리의 문설주를 발라 자아를 쫓아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입니다. 베드로가 양 떼에게 성체를 먹인다는 것은, 그 양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세상에 짓밟히는 한낱 짐승 같은 피조물이 아닙니다. 이 거룩한 빵을 먹는 여러분은 예수님의 피로 낡은 자아가 죽고, 예수님의 피를 물려받아 결국 하느님과 똑같이 완전해질 수 있는 신적인 본성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가톨릭 신학의 정수인 '신화(Deification)', 즉 인간이 하느님이 되는 기적입니다. 양 떼가 늑대의 위협이나 세상의 유혹 속에서도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교회를 굳건히 지켜내는 유일한 힘은, 바로 내가 하느님의 밥상에 앉아 하느님의 피를 먹는 '우주의 상속자'라는 이 엄청난 자존감에서 나옵니다.

내가 세상의 실패자나 찌질한 죄인이 아니라, 창조주 하느님과 한 식탁에 마주 앉아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하느님처럼 될 수 있는 존재라는 이 폭발적인 자존감을 가슴 깊이 새기십시오. 세상의 파라오들 앞에서 주눅 들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주님의 이름을 부여받은 '또 다른 그리스도'입니다.

이제 세상 밖으로 나가, 두려움에 떨며 상처받고 흩어진 이웃들에게 "당신도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라는 그 찬란한 이름표를 달아주며 먹이고 돌보는 참된 목자로 파견되십시오. 우리가 베드로처럼 내 자아를 죽이고 이 거룩한 식탁의 밥을 먹으며 주님을 사랑할 때, 우리 삶의 모든 실패와 숯불의 상처는 하느님과 영원한 계약을 맺는 시나이산의 눈부신 영광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맞벌이가 증가하고, 사교육이 활발해지면서 가족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식사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오래간만에 함께하는 식탁에서도 대화보다 스마트폰, OTT 영상을 각자 보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혼밥은 더 이상 이상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2023년 캐나다 공중보건학자 카렌 라르손 연구진은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 빈도가 높으면 아동, 청소년의 식사 질이 올라가고, 우울이나 불안 등의 정신 문제도 25% 감소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음주나 흡연과 같은 행동이 감소하는 등 함께 식사하는 것이 건강지표와 큰 연관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스트레스 회복력도 높아진다고 합니다.

이렇게 함께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편안한 ‘혼자’를 선호하면서 건강을 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함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대방의 말과 행동을 듣고 받아줄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즉, 사랑을 통해서만 함께할 수 있고, 사랑을 통해서 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배신을 꾸짖거나 해명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으시면서, 베드로의 내면에 남아 있는 깊은 죄책감과 수치심을 씻어주시고, 그가 사도로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십니다.

무엇보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불러주셨던 반석이라는 ‘베드로’가 아닌, 그의 옛 이름인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교회의 수장이라는 직분이나 화려한 겉모습을 다 내려놓고, 가장 연약하고, 있는 그대로의 ‘인간 시몬’으로서 하느님 앞에 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연약함을 인정하는 겸손에서 사랑의 마음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진실한 사랑 고백 위에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베드로의 양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본질은 의무감이나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사랑에서 흘러나와야 함을 보여줍니다.

이 모든 대화의 마지막은 “나를 따라라.”(요한 21,19)입니다. 이는 베드로를 처음 부르셨을 때의 말씀과 같습니다. 아마 처음의 베드로는 자기 열정만 믿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뼈아픈 실패를 겪고, 무조건적인 용서를 경험하고,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된 후 진정한 따름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을 향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따름이 되어야 했습니다.

우리의 능력과 재주 때문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습니다. 또 실패하고 배신했다고 해서 당신의 부르심을 철회하시지도 않습니다. 철저히 사랑만을 이야기하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계속해서 질문하십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도 예수님을 향한 사랑에만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을 통해 우리 모두 함께할 수 있는 커다란 힘을 얻게 됩니다. 건강한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젊음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상태지만, 아름다운 노년은 쉽게 빚을 수 없는 예술작품이다(엘리너 루스벨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 양들을 돌보아라.

베드로의 가능성과 사랑을 바라보시며 다시 양들을 맡기십니다. 양들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맡겨진 생명을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이 진정 돌보는 사람입니다. 끝까지 사랑해야 할 사람입니다. 결국 사랑 받은 사람이 다시 사랑하게 되는 신비입니다.

공동체의 기초는 지배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상처를 아는 사람만이 상처 입은 이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베드로 실패를 통해 자신의 연약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겸손함 안에서 비로소 다른 양들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스스로 살아날 수 있도록 사랑으로 기다려 주라는 부르심입니다. 잠시 멈추어 다른 존재의 고통을 바라보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래서 돌봄의 대상은 존귀한 생명 그 자체입니다.

목자는 자신을 높이기 위해 양들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로 섬깁니다. 누군가를 이기는 사람보다 누군가를 살리는 사람이 더 깊은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랑으로 돌보는 순간이 우리 또한 사랑으로 살아나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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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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