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아지는 것은 더 많은 사람 위에 서는 일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품고 섬기는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가장 높은 영광을 받으셨지만 언제나 우리를 당신께 붙들어 두지 않고 아드님께 이끌어 주시는 성모님의 마음을 바라봅니다.
함께 기도해 주시며 언제나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도와주시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께 감사합니다.

2026년 8월 22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여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8월 22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제1독서
에제 43,1-7ㄷ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으로 들어갔다.
천사가
1 나를 대문으로, 동쪽으로 난 대문으로 데리고 나갔다.
2 그런데 보라,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이 동쪽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큰 물이 밀려오는 소리 같았고, 땅은 그분의 영광으로 빛났다.
3 그 모습은 내가 본 환시, 곧 그분께서 이 도성을 파멸시키러 오실 때에 내가 본 환시와 같았고, 또 그 모습은 내가 크바르 강 가에서 본 환시와 같았다. 그래서 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4 그러자 주님의 영광이 동쪽으로 난 문을 지나 주님의 집으로 들어갔다.
5 그때 영이 나를 들어 올려 안뜰로 데리고 가셨는데, 주님의 집이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6 그 사람이 내 곁에 서 있는데, 주님의 집에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렸다.
7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사람의 아들아, 이곳은 내 어좌의 자리,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영원히 살 곳이다.”
복음 말씀 전체 보기
마태 23,1-12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 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지금 바로 보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말씀을 따라가 보세요.

2026년 8월 22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소개 00:06
✚ 미사 시작 01:30
✚ 제1독서 04:17
✚ 복음 07:45
✚ 강론 10:17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말씀 묵상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유청 안셀모 신부
왕관을 쓰셔도 여전히 어머니이십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왕국의 여왕/왕비란 왕의 아내가 아니라 왕의 어머니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모후’(게비라)라는 호칭은 ‘주인’(게비르)이라는 단어의 여성형입니다. ‘태후’ 또는 ‘여주인’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1열왕 15,13; 2역대 15,16; 예레 29,2 참조).
실제로 구약 성경의 역사서에서 모후는 큰 영예를 누리는 자리였습니다”(브랜드 피트리, 『마리아의 신비를 풀다』, 107면). 이처럼 구약 성경에서 모후는 왕과 함께 왕관을 쓰고 오른쪽에 앉았으며(예레 13,18; 1열왕 2,19; 시편 45[44],7-10 참조), 변호인이자 전구자로서 행동하는(1열왕 2,13-14.17-18 참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야말로 모후는 왕의 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 하느님께서 다윗의 왕좌를 주시어,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게 하신’(루카 1,32-33 참조) 분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새 임금이신 예수님을 소개할 때 마리아도 같이 소개되십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 1,16).
루카 복음서에서 엘리사벳은 마리아께 “내 주님의 어머니”(1,43)라고 인사말을 건넵니다. 여기서 ‘주님’이라는 표현은 왕을 가리키기도, 하느님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새 모후는 바로 마리아, 성모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지상에서도 사랑과 인내, 섬김과 봉사로 교회를 보살펴 주셨던 성모님께서는, 천상의 영광을 받으신 뒤에도 한결같이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를 기억하며, 다 함께 성모님께 노래를 바칩시다.
“모후이시며, 사랑이 넘친 어머니, 우리의 생명, 기쁨, 희망이시여!”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보이기 위해 일하는 사람의 불행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그들이란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입니다. 그들을 저로 바꾸면 김찬선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이에게 보이기 위한 거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아닐까요? 제가 바리사이하고는 다른가요? 조금이라도?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고, 곧 저의 모든 행위는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저는 위선뿐 아니라 독선의 잘못도 저지르는 자이지요. 좋게 이해하면 제가 그만큼 선을 좋아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악보다 선을 좋아하고, 악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며, 선 포기자 곧 선을 포기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선을 포기하고 막 살겠다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들은 선이라는 것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심지어 선을 증오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어제 복음에서 봤듯이 주인이 하느님 나라 잔치에 초대하려고 보낸 심부름꾼들을 죽이고 아들까지 죽이지요.
그러므로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하는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하기보다는 가련한 사람 또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함이 좋을 것입니다.
왜 가련하고 왜 불행합니까?
첫째는 그가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하고 좌우되기 때문이고,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도 이런 사람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둘째는 그가 자기 진실과 직면하지 않고 거짓 자기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고, 그럼으로써 회개할 기회를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에게 무엇보다 큰 문제는 사람들 앞에 있음으로 하느님 앞에 있지 않게 되는 것이고,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하려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사는 사람의 문제를 봤지만 사실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되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래서 일생을 이 문제와 씨름하였지만 아직도 오늘 주님께서 꾸짖으신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와 저는 다를 바가 없고, 그래서 오늘 복음만 읽으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지는 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스승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없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 우리는 참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물어야 합니다. 진정, 나는 스승을 찾고 있는가?
이제민 신부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이 없어서 우리 시대가 이 모양으로 혼탁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사방천지에서 만나는 우리 삶의 동반자들을 스승으로 알아 모시지 못하고, 그들의 제자가 되어 그들에게 머리를 굽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스승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스승이 없어서가 아니라, 스승을 곁에 두고도 눈이 먼 까닭이요, 제자가 되어 머리를 숙이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은 자신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으면서도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기보다 유식을 인정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식이 드러나면 감사하기보다 오히려 상처받으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참된 스승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오히려 고개를 쳐들어 먼 데서 스승을 찾고 있다면, 진정 우리가 눈멀어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누가 참된 스승인가” 하고 묻기에 앞서, 이렇게 물어 봅니다.
진정, 나는 참된 제자이고자 하는가?
고개 숙여 배우기보다 목을 뻣뻣이 세우고 가르치기를 일삼는 ‘나는 참 제자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에 ‘스승’으로 대우받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죄상을 세 가지를 고발하십니다.
<첫째>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곧 언행의 불일치와 남에게 짐 지움을 질타하십니다.
<둘째> “그들이 하는 일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곧 표리부동과 위선을 질타하십니다.
<셋째> “그들은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란다.” 곧 자만과 허영을 질타하십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이가 참된 스승인가?
<첫째>는 가르치되, 언행이 일치하는 이, 말씀을 성취하는 이일 것입니다. 곧 가르침으로 타인에게 짐을 지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이 실행함으로 타인의 짐을 짊어지는 이일 것입니다.
<둘째>는 일하되, 표리부동과 위선이 없는 이일 것입니다. 곧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자신을 보낸 분을 드러내는 이요, 남에게 보이기보다 보이지 않는 하늘의 아버지께 일을 바치는 이일 것입니다.
<셋째>는 사람들 가운데 있으되, 자만과 허영이 없는 이일 것입니다. 곧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이요, 섬김을 받으려하기보다 섬기는 이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섬김이야말로 참된 스승이 되는 길이요, 동시에 참된 스승이신 당신의 참 제자가 되는 길일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승, 선생, 아버지라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마태 23,10-11)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오복음 23장 12절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 머리를 숙이고 겸손할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먼 데서 당신을 찾지 않게 하소서.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보다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게 하소서.
무지가 드러나면 상처받기보다 감사하게 하소서.
주님,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늘 제 머리 위에 두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무지개의 색깔은 어떻게 될까요? 아마 곧바로 ‘빨, 주, 노, 초, 파, 남, 보’라고 외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무지개를 보았을 때, 정말 그렇게 선명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이 일곱 색으로 나누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여러 가지 색이 혼합되어 그 경계를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은 또 어떨까요? 강낭콩, 완두콩, 팥이 있습니다. 이를 두 부류로 나누면 어떻게 나누시겠습니까? 아마 강낭콩과 완두콩은 같은 부류로, 팥은 다른 부류로 나눌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강낭콩과 팥을 같은 부류로, 완두콩은 다른 부류로 묶습니다. 이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강낭콩은 kidney bean, 팥은 red bean, 완두콩은 green pea로 씁니다. 중국은 아예 팥을 ‘적두’로 부르면서 콩의 한 종류로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정확히 구분할 수 없습니다. “틀렸다. 잘못되었다. 큰 죄이다.” 등의 구분이 정말로 명확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내 편, 네 편으로 편을 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구분이 애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판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판단보다는 겸손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자기를 스스로 높이려고 남을 판단하기보다는 겸손한 모습으로 하느님께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높여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고발하면서, 하느님 뜻에 맞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회당의 석조 의자인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율법을 낭독하고 권위 있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은 사람들의 어깨를 무겁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작 율법의 참뜻인 사랑으로 짐을 덜어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경 구절을 담아 이마나 팔에 묶는 작은 가죽 상자인 성구 갑과 계약을 기억하기 위해 겉옷, 네 귀퉁이에 달던 술인 옷자락 술을 반드시 착용했습니다. 자기는 이렇게 경건한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잔칫집의 윗자리, 회당의 높은 자리, 스승이라는 칭호 등에 연연하면서 인간의 칭송을 갈망하는 영적 교만을 드러냅니다.
세상은 지배하고 군림하는 자를 높게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낮은 곳에서 타인을 섬기는 자가 참으로 큰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2)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높이려는 판단보다 자기를 낮추는 판단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높여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모님의 삶과 영광 안에서 이 점이 분명하게 성취됨을 알 수 있습니다. 낮은 자의 하느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명언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김중혁).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리아께서는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모후의 길을 걸으십니다. 결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거나 증명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높은 자리를 바라지도 않으셨습니다. 다만 조용히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며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자신의 삶을 온전히 내어맡기셨습니다.
모후의 중심에는 마리아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마리아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되고 그리스도를 향합니다. 그러기에 마리아의 모후됨은 스스로 얻어낸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겸손한 종에게 베푸신 은총의 완성입니다. 그러나 그 은총은 우리 모두를 향합니다.
마리아께서는 우리를 위해 전구하시고 우리의 아픔을 품어 아드님께 가져가시는 어머니이십니다. 하느님의 큰일은 언제나 가장 작은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나자렛의 작은 마을, 한 젊은 여인의 작은 응답, "예."라는 짧은 순명에서 구원의 큰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모후의 시작은 감사입니다.
마리아께서는 받은 은총을 자신의 영광으로 붙잡지 않으시고 섬김으로 되돌려드렸습니다. 은총을 받았기에 감사하고, 감사했기에 섬겼으며, 섬겼기에 더욱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마리아의 모성 또한 소유하는 사랑에서 놓아주는 사랑으로 깊어집니다. 예수님을 품으셨지만 붙잡지 않으셨고, 사랑하셨지만 소유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 아래에서는 가장 사랑하는 아드님까지 하느님의 뜻에 내어맡기셨습니다.
우리 또한 우리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뜻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섬김과 내어줌과 낮아짐의 마리아 모후께 전구를 청하는 은총의 날 되십시오. 존경과 공경이 사라지고 있는 이 시대를 일깨워주시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가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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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 6가지
마음에 머무른 한 말씀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지금 이 순간을 빚어 갑니다. 오늘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의 모든 순간에 천천히 스며들면 좋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