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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6.09.18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피어나네 2026. 9. 18.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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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믿으면 오늘을 조금 다르게 시작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예수님께 받은 사랑을 마음에만 간직하지 않고, 함께 걸으며 받은 것을 오늘의 삶으로 흘려보내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2026년 9월 18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성경 말씀 정리

 

2026년 9월 18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여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9월 18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제1독서

1코린 15,12-20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을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13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14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15 우리는 또 하느님의 거짓 증인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죽은 이들이 정말로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되살리지 않으셨을 터인데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되살리셨다고 우리가 하느님을 거슬러 증언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16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17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18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19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복음 말씀 전체 보기

루카 8,1-3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예수님과 함께 있던 여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2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3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지금 바로 보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말씀을 따라가 보세요.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2026년 9월 18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

✚ 제1독서 12:58

✚ 복음 07:03

✚ 강론 08:02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말씀 묵상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왕태언 요셉 신부

사랑하면 계산이 조금 느슨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랐던 여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여인들은 사회적 약자였습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충분히 낼 수 없었고, 남성들보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도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그렇기에 자기 재산을 써서 예수님을 시중드는 데 많은 용기가 필요하였습니다. 자기 재산으로 하는 일인데도 인정받거나 찬사를 듣기보다는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이러한 행동을 한 까닭은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았든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어떻게 보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깊은 애정과 희생으로 예수님을 따른 그들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 신앙의 본보기가 됩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내가 가진 몫을 내어놓기도 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서 가진 것을 나누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그러한 희생과 나눔을 하고 있는지요?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사랑은 손해 보거나 희생하는 일임을 알면서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더 힘차게 예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살 희망, 죽을 희망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참으로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코린토 신자들이 어찌 부활을 의심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면서 어찌 죽은 이들의 부활을 의심하느냐 그 말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는 정말 죽은 이들의 부활이 있는지 의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고 있었고 그래서 의심이 되었지만 하느님 존재를 의심 없이 믿는 지금은 부활을 의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으면서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은 제 생각에 두 가지 이유 곧 하나는 하느님 능력에 대해 의심하거나 다른 하나는 하느님 사랑에 대해 의심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하느님이 전능하신 천주요 천지의 창조주는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바칠 때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니다.”라고 고백하는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무능한 하느님을 뭣 하러 믿으며, 창조주가 아닌 하느님을 왜 믿으며, 특히 날 창조하지 않은 하느님을 어찌하여 믿고 뭣 하러 믿는다고 고백까지 하는 것입니까? 실로 믿을 이유도 고백할 필요도 없습니다.

전능하신 천주요 천지 창조주요 나의 창조주여야지만 우리는 믿을 필요가 있고 사랑의 창조주일 뿐 아니라 우리의 구원자심도 믿을 수 있고 희망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두 번째 믿음은 사랑의 창조주라는 것을 믿고, 나도 사랑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 첫 믿음이 있기에 나를 사랑으로 구원하실 거라는 것도 믿는 믿음인 겁니다.

이토록 창조의 하느님과 구원의 하느님은 밀접합니다. 사랑으로 낳지 않은 부모는 힘들면 버려버리지만 사랑으로 낳았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끝까지 양육하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양육하시는 것의 다른 표현입니다.

하느님은 처음부터 사랑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이렇게 믿기에 우리에게 희망도 있습니다. 이런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 희망도 가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덧붙여 말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믿기에 우리는 살 희망을 가질 수 있고 살 희망을 가지고 있기에 죽을 희망도 가질 수 있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죽을 희망, 더 정확히 얘기하면 잘 죽을 희망이 절실한데 살 희망에서 선종의 희망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고 희망하는 오늘 우리, 삶과 죽음을 모두 사랑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나는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사명을 밝혀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루가 8,1)

그런데 이러한 일에 홀려 숙식을 같이 하며, 온갖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따라다니는 이들이 있었으니 열 두 제자와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고,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3).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을 선망하고 따라 다닙니다. 정치가가 되고 싶어 하는 이는 정치꾼들을 따라다니고,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이는 장사꾼들을 따라 다니며, 주먹 잡이가 되고 싶어 하는 이는 싸움꾼들을 따라 다닙니다. 그리고 구원을 얻고자 하는 이는 구원자를 따라다닙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사람들은 다양한 직종과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모두가 구원과 구원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믿을 뿐만 아니라, 믿는 바를 위해 투신하고 헌신한 이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자신들이 믿는 것에 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그분께 바침으로써, 그분의 부르심에 전 인격으로 따르고 온 마음으로 섬기며 시중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직 “하느님께 사로잡힌 사람들”(앙드레 루프)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은 단지 고향이나 집 혹은 부모형제뿐 아니라 자신의 욕망마저도 버렸다는 것이요, ‘모든 것을 바쳤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몸과 소유물 혹은 재산뿐만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재능과 자신의 뜻마저도 바쳤다는 것이며, ‘온 마음을 다해 따르고 시중들었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행동만으로 따르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정신과 뜻을 그분께 전적으로 헌신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를 여섯 개의 동사로 표현해줍니다. 곧 그분의 ‘제자 되는 길’이 여섯 개의 동사로 표현됩니다. 그것은 “함께 있다”, “함께 다니다.” “따르다”, “선포하다”, “전하다”, “시중들다.” 라는 동사입니다.

<첫째>로, 제자들은 ‘그분과 함께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기도에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둘째>로, 그분과 “함께 다녔습니다.” 어디를 가든 주님과 함께 다니는 이들이요, 주님이 계시는 곳이면 어디든 가는 이들입니다.

<셋째>로는 그분을 ‘주님’으로 추종하며 실행으로 “따랐고”, <넷째>로 그분께서 선포하는 하늘나라를 “선포하였고”, <다섯째>로 복음을 “전했으며”, <여섯째>로 주님께서 하신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주님께 봉사하고 “시중들었습니다.” 자신의 정신과 힘을 다해 그분께 전적으로 헌신하여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며 시중들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이 여섯 가지의 ‘제자 됨’의 특성이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특별히, 순교의 달을 보내면서, 먼저 예수님을 전 인격으로 따를 수 있는 은총, 곧 “예수님께 사로잡힌 자”임을 증거하고 순교할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해야 할 일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그의 [수도규칙]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본성은 이것을 할 수 있기에는 너무도 부족하니, 주님께서 당신 은총으로써 우리를 도와주시도록 간구하자.”(규칙서 머리말 41).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복음 8장 1절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주님! 제가 주님을 믿기에, 늘 당신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당신께서 이미 저를 그러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당신의 제자로서 사랑으로 시중들고 따를 것이며, 당신이 하신 일을 할 것이며, 당신께 사로잡혀 당신이 원하신 바를 행할 것입니다.

하오니, 늘 저와 함께 계시는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고, 마땅히 당신이 사랑하시는 작은이들을 당신과 함께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의 시선은 더 넓습니다.

이런 말을 종종 합니다.

“토끼 같은 자식, 여우 같은 마누라.”

어렸을 때, “여우야 여우야 뭐 하니?”라는 노래로 하는 노래도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여우고개’라는 지명도 흔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여우는 인간 삶에 가까웠고 또 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 여우는 멸종되었습니다. 1970년대 지리산에서 마지막으로 발견된 것으로 이제 더 이상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여우는 동물뿐 아니라 과일, 곤충까지 먹는 잡식성 동물이라 생존력이 아주 뛰어나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멸종된 이유는 왜일까요?

한때 여우 목도리가 엄청나게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특히 외화벌이를 위해 여우를 잡아 목도리를 만들었는데, 그때 멸종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것은 쥐잡기 운동 때문이라고 합니다. 1년 치 이상의 식량을 갉아 먹는 쥐를 박멸하자며, 간첩 때려잡듯 쥐를 때려잡자고 홍보했었습니다. 이 쥐와 여우가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지만, 쥐약 먹은 쥐를 이 여우가 먹게 된 것입니다.

먹이 사슬이 연결되어 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인간의 잘못된 판단이 전혀 의도치 않은 희생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항상 전체를 바라보는 판단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전체를 보십니다. 그 모습이 당시에는 파격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길로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전교 활동에 열두 제자뿐만이 아니라 여러 명의 여성도 함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세기 유다교 전통에는 여성이 랍비의 공식 제자가 되거나 가족 울타리를 떠나 남성과 함께 가는 것이 사회적, 종교적 금기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차별의 벽을 허무시고, 여성도 동등한 구원 공동체의 동반자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이 여성들은 평범한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이들이 있었고,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여자 막달레나도 있었습니다. 헤로데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한나가 있었고 수산나와 다른 여자들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전통과 관습을 이야기 하면서 주님께서 제시하시는 길을 무시하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시하시는 길은 모두 함께하는 길이고, 진정으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길입니다. 차별하는 사랑이 아닌 차별 없는 사랑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안에서 하느님의 일이 완성되어 갑니다.

 

오늘의 명언

돈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 적도 없고 행복하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원하는 법이다. 사람은 공백을 채우는 대신 공백을 만들어낸다(벤자민 프랭클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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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 6가지

 

마음에 머무른 한 말씀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지금 이 순간을 빚어 갑니다. 오늘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의 모든 순간에 천천히 스며들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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