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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5일 남자세례명 16가지

피어나네 2023. 4. 2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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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5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로베르토, 로베르토 앤더튼, 마르코, 베드로 데 베탕쿠르트, 보니파시오, 스테파노, 아가토포, 아니아노, 에르미노, 에보디오, 윌리엄 마스든, 칼리스타, 페바디오, 필로, 헤르모제네, 헤리발도, 총 16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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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5일 여자세례명 멜라, 총 1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4월 25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6가지

 

 

 

 

4월 25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로베르토

  2. 로베르토 앤더튼

  3. 마르코

  4. 베드로 데 베탕쿠르트

  5. 보니파시오

  6. 스테파노

  7. 아가토포

  8. 아니아노

  9. 에르미노

  10. 에보디오

  11. 윌리엄 마스든

  12. 칼리스타

  13. 페바디오

  14. 필로

  15. 헤르모제네

  16. 헤리발도

 

4월 25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6가지

 

 

1. 로베르토

 

  • 가톨릭 성인 이름
    Robert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000년경 시라쿠사

 

 

로베르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로버트, 로베르또, 로베르뚜스, 로베르투스.

 

 

로베르토 자료

성 로베르투스(Robertus, 또는 로베르토)는 이탈리아 남서부 시칠리아(Sicilia) 섬에 있는 시라쿠사의 한 수도원의 원장이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로베르토 앤더튼

 

  • 가톨릭 성인 이름
    Robert Anderton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86년

 

 

로베르토 앤더튼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로버트, 로베르또, 로베르뚜스, 로베르투스, 안데르톤.

 

 

로베르토 앤더튼 자료

로베르투스 앤더튼(Robertus Anderton, 또는 로베르토 앤더튼)과 윌리엄 마스든(William Marsden)은 영국 랭커셔(Lancashire) 출신으로 옥스퍼드(Oxford)에서 수학한 후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들은 사제가 되기 위해 프랑스의 랭스(Reims)에서 함께 공부하였고 1585년 사제품을 받고 함께 영국 선교 길에 올랐다. 그들이 탄 배가 항로를 벗어나 와이트(Wight) 섬에 좌초되자 주민들에 의해 강제로 하선된 후 심문을 받았다.

이때 그들은 자신들이 가톨릭 사제임을 부인하지 않았고, 그 결과 사형언도를 받고 이듬해 와이트 섬 해변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들은 1929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마르코

 

  • 가톨릭 성인 이름
    Mark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복음사가,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74년경

 

 

마르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꼬, 마르꾸스, 마르쿠스, 마크, 말구.

 

 

마르코 자료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인 성 마르코(Marcus)는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사도 12,12. 25)과 동일 인물로 요한은 유다식 이름이고, 마르코는 그리스식 이름이다. 그리고 사도들과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집회를 가졌던 예루살렘 가정 교회의 집주인 마리아(Maria)가 그의 어머니인 듯하다.

그는 또한 사도 성 바르나바(Barnabas, 6월 11일)의 사촌이며(콜로 4,10), 키프로스(Cyprus) 태생의 레위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몸에 고운 삼베만을 두른 젊은이가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붙들리게 되자, 삼베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던 인물로도 여겨지나(마르 14,51-52) 확실하지는 않다.

그는 사도 성 바오로(Paulus, 6월 29일)와 성 바르나바를 수행하여 안티오키아(Antiochia)로 갔고(사도 12,25), 그다음에 성 바르나바와 함께 키프로스로 가서 그와 같이 성 바오로의 제1차 선교여행을 수행하였다(사도 13,5). 그러나 팜필리아에서 성 바오로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사도 13,13).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어쨌든 성 바오로와의 의견 대립 때문에 성 바오로의 제2차 선교여행에는 동행하지 않았다(사도 15,36-40). 그 후 성 마르코는 성 바르나바와 함께 키프로스로 갔으나(사도 15,39), 성 바오로가 로마에서 투옥되었을 때는 그와 함께 갇혀 있었다(콜로 4,10).

그는 분명 사도 성 베드로(Petrus, 6월 29일)의 제자였는데, 성 베드로는 그를 애정 깊게 ‘나의 아들 마르코’라고 언급하였다(1베드 5,13). 또한 그는 신약성경에 여러 번 언급된 예루살렘 출신의 요한 마르코임이 분명하다(사도 12,25). 교회 전승에 따르면 그는 사도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풀려났을 때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12,12)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성 마르코는 사도 베드로와 가까운 관계였다. 초대 교회 전승은 성 마르코가 사도 성 베드로의 대변인이자 통역관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동방 교회에서는 요한 마르코를 성 마르코 복음사가와는 다른 사람으로 여기고, 그가 비블로스(Byblos)의 주교였다고 하며 9월 27일에 축일을 지내고 있다.

어쨌든 성 마르코는 60~70년 사이에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서를 기술했는데 주로 사도 성 베드로의 가르침을 기초로 했다. 소아시아 지방 히에라폴리스의 성 파피아스(Papias, 2월 22일) 주교는 성 마르코가 사도 성 베드로의 통역자로서 직접 예수님의 말씀을 듣거나 따라다니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전해 들은 내용을 정확하게 기록했다고 전해주었다.

그 외에도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s, 150-215년)나 리옹의 성 이레네우스(Irenaeus, 6월 28일)도 성 마르코를 사도 성 베드로의 통역관으로 성 베드로의 순교 이후 복음서를 썼다고 전하고 있다.

클레멘스의 증언이나 교회 전승에 의하면, 성 마르코는 성 베드로에 의해 이집트로 파견되어 그곳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사람으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교회를 세우고 초대 주교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신자들과 함께 부활절 미사를 드리던 중 이교도들의 습격을 받아 붙잡혀 밧줄에 목이 묶인 채 거리를 끌려다니다가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이교도들이 성 마르코의 시신을 불태우려 하자 천둥과 번개가 쳤고, 그 틈에 신자들이 그의 시신을 수습해 인근 성당에 모셨다고 한다.

그 후 성 마르코의 유해는 828년 이탈리아 베네치아 상인들에 의해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Venezia)로 옮겨졌다. 이를 기념해 베네치아 사람들은 성인의 이름을 딴 산마르코 대성당(Basilica di San Marco)을 짓고 그곳에 성인의 유해를 모셨다. 그 후 성 마르코 복음사가는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의 상징으로 날개 달린 사자가 주로 등장하는데, 이는 그의 복음서가 세례자 성 요한(Joannes, 6월 24일)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시작하자 예술적으로 그 소리를 포효하는 사자와 비교하면서 생겨났다. 날개는 에제키엘(Ezechiel) 예언자가 환시로 본 네 마리 생물을 복음사가들에 적용한 데서 유래하였다. 그 외에도 교회 미술에서 그는 책 또는 두루마리나 긴 펜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표현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베드로 데 베탕쿠르트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de Betancurt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3회원,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26-1667년 과테말라

 

 

베드로 데 베탕쿠르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베탄커, 베탄쿠르트, 베탕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 데 베탕쿠르트 자료

성 베드로 데 베탕쿠르트(Petrus de Betancurt)는 1626년 3월 21일(또는 19일) 아프리카 북서부 대서양에 위치한 에스파냐령 카나리아 제도(Canary Islands)에 속한 테네리페(Tenerife) 섬의 빌라플로르(Vilaflor)에서 태어났다.

영웅적인 성덕으로 잘 알려진 그의 생애는 복음에 대한 충실함으로 대변된다. 그는 카나리아 제도의 노르만족 정복자들 중 하나인 후안 데 베탕쿠르트(Juan de Betancurt)의 후손이었지만, 그의 부모와 가족은 매우 가난했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얼마 안 되는 양떼를 돌보는 목동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의 부모는 그가 신앙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도록 돌보았고, 어린 베드로는 자연스럽게 깊은 명상적 영혼을 갖고 성장했다. 그래서 그는 소년 시절부터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 안에서 하느님을 보는 법을 배워나갔다.

서인도 제도(West Indies, 오늘날의 아메리카)에서 사는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상에 대해 들었을 때, 그는 그곳에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해야 할 강력한 소명을 느꼈다. 그래서 24세가 된 1650년, 성 베드로 데 베탕쿠르트는 자신의 한 친척이 총독의 비서로 일하고 있던 과테말라를 향해 출발했다.

하지만 그가 준비한 돈은 아바나(Havana)에서 이미 다 떨어졌다. 그래서 그는 부두에서 힘든 일을 하며 비용을 지불해야 했고, 또 과테말라시티까지 갈 여비 또한 마련해야 했다. 이렇게 힘든 여정 끝에 그는 무사히 과테말라시티에 도착했다.

당시 너무나 가난했던 그는 하루를 버틸 빵을 얻기 위해 구호품을 나누어주던 프란치스코 수도원 앞에 줄을 서야 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는 자신을 환대하고 또 일생 동안 그의 상담자가 되어준 유명한 선교사였던 페르난도 에스피노(Fernando Espino) 수사를 만나게 되었다. 페르난도 수사는 그 지방의 직물공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일자리도 찾아주었다.

1653년 성 베드로 데 베탕쿠르트는 그 지방의 예수회 대학에 들어가 사제가 되고 싶어 하는 소망이 자신 안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산 보르자(San Borgia)에 있는 예수회 대학에 들어갔지만 학업에 자질이 부족해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느님의 섭리는 다시 한 번 그를 도와 이곳에서 장차 그의 고해신부가 되어줄 예수회의 마누엘 로보(Manuel Lobo) 신부를 만나게 해주었다.

페르난도 에스피노 수사는 그에게 평수사로서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할 것을 권유했지만,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이 세상 안에 남아 살아가길 원하심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1655년 프란치스코 재속 3회에 입회해 서원하면서 성 요셉의 베드로(Pedro of St. Joseph)라는 이름을 받았다.

이때부터 성 베드로 데 베탕쿠르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된 일과 속에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시간을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인간에 대한 너그러움과 진실한 인류애를 갖고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모든 것을 투신하면서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과 비인간적인 노동으로 고통 받는 인디오들, 이민자들, 버려진 아이들의 사도가 되어갔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고무된 그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고자 노력했다. 1658년 그는 한 작은 오두막집을 얻어, 도시의 병원으로부터 버려졌지만 여전히 간호가 필요한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병원으로 변모시켰다. 이 병원은 ‘베들레헴의 성모님’으로 명명되었다.

그는 노숙자들을 위한 쉼터와 가난하고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고 작은 경당도 지었다.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시민들과 교회당국으로부터 모금활동을 펼쳤고, 가난한 사제들의 미사 봉헌을 위해 거리에서 기금을 모금하기도 하고, 이른 시간에 봉헌되는 미사를 위해 기부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이 일 때문에 미사에 빠지지 않도록 배려했다.

그는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한 시설 안에 작은 경당도 마련했다. 그리고 매년 8월 18일에 그는 어린이들을 모아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이 바치던 성모님의 칠락 묵주기도를 암송했고, 이 관습은 오늘날까지도 과테말라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는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남녀 젊은이들을 모아 조직했고, 이는 후에 베들레헴 형제회와 베들레헴 자매회로 발전했다. 그는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기도와 절제와 인내에 기초하여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 그리고 불행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활동 사도직을 포함하는 새로운 규칙서도 작성했다.

베들레헴 수도회는 이렇게 설립되었다. 전 생애를 통해 그의 영적 묵상의 중심 주제는 ‘베들레헴의 소년 예수’였다. 늘 가난한 이들 안에서 소년 예수의 얼굴을 보고 그들에게 경건하게 봉사했던 그는 1667년 4월 25일 41세를 일기로 과테말라시티에서 선종해 안티구아(Antigua)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 묻혔다.

성 베드로 데 산 호세 데 베탕쿠르트(Pedro de San Jose de Betancurt)의 시복시성을 위한 심사는 이미 1709년에 시작되었다. 그는 1980년 6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2002년 7월 30일 아메리카 대륙 순방 중 사목방문을 위해 과테말라를 찾은 같은 교황으로부터 과테말라시티에서 시성되었다.

이로써 그는 과테말라뿐만 아니라 중앙아메리카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일생 동안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위해 헌신했던 그는 ‘아메리카의 성 프란치스코’로 불리며 존경을 받고 있다. 그의 축일은 성 마르코(Marcus) 복음사가와 겹치는 관계로 전날인 4월 24일에 기념하기도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보니파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Boniface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243년 아오스타

 

 

보니파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보니파시우스, 보니파키오, 보니파키우스, 보니파티오, 보니파티우스, 보니페이스.

 

 

보니파시오 자료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또는 보니파시오)는 이탈리아 북부 카나바세(Canavese)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집에서 교육을 받았고 계속해서 토리노(Torino)의 주교였던 그의 삼촌으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는 토리노에서 북쪽으로 약 20km 정도 떨어진 프루투아리아(Fruttuaria)에서 베네딕토회 수도승이 되었다. 그 후 다시 아오스타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 율수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영성과 세속적 방면 모두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1

219년 그는 아오스타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90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스테파노

 

  • 가톨릭 성인 이름
    Stephe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81년 안티오키아

 

 

스테파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스더, 스테파누스, 스테판.

 

 

스테파노 자료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였던 성 스테파누스(Stephanus, 또는 스테파노)는 이단인 그리스도 단성론자들(monophysites)의 특별한 공격 대상이었다. 그들은 성 스테파누스를 제단 위에서 공격하여 때려죽인 후 시신을 오론테스(Orontes) 강에 던져버렸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아가토포

 

  • 가톨릭 성인 이름
    Agathop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 활동 연도와 지역
    +150년

 

 

아가토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가토뽀, 아가토뽀데스, 아가토뿌스, 아가토포데스, 아가토푸스.

 

 

아가토포 자료

성 필로(Philo)와 성 아가토푸스(또는 아가토포)는 107년 로마에서 순교한 안티오키아(Antiochia)의 주교인 성 이냐시오(Ignatius, 10월 17일)를 수행한 부제들이었다. 그들은 성인의 유해를 찾아 안티오키아로 되돌아 왔으며, 성인의 순교 여정과 죽음에 대한 행전을 기록했다고 믿어지고 있다. 그는 아가토포데(Agathopode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아니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Ania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마르코의 제자,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 알렉산드리아

 

 

아니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니아누스.

 

 

아니아노 자료

복음사가 성 마르코(Marcus)의 위경에 의하면 성 아니아누스(또는 아니아노)는 알렉산드리아의 구두장이였다가 후일 그곳의 두 번째 주교가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그는 성 마르코에 의하여 주교로 임명된 귀족으로 마르코를 승계한 사람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에르미노

 

  • 가톨릭 성인 이름
    Erm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737년 로베스

 

 

에르미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르미누스.

 

 

에르미노 자료

프랑스 북동부 랑(Laon)에서 태어난 성 에르미누스(또는 에르미노)는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성 우르스마루스(Ursmarus, 4월 19일)에 의해 랑에서 베네딕토회의 수도복을 받았다. 그는 벨기에 로베스 수도원의 원장이자 주교로서 사도적 열성을 실천함으로써 성 우르스마루스의 발자취를 따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에보디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vod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니케아

 

 

에보디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보디우스.

 

 

에보디오 자료

신뢰할 수 없는 행전에 의하면 성녀 테오도타(Theodota, 8월 2일)는 니케아(터키 북서부에 있는 이즈니크의 옛 이름)에 사는 귀부인이었다. 

그녀는 성 에보디우스(또는 에보디오), 성 헤르모게네(Hermogenes), 성 칼리스타(Callista)라는 세 아들을 둔 과부였다. 그녀의 세 아들들은 다른 축일과 순교 장소와 함께 로마 순교록에 세 번 언급되는데, 칼리스타 목록에서는 두 아들과 한 명의 딸로 나타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성녀 테오도타는 그 지방의 집정관 레우카티우스(Leucatius)의 청혼을 거절함으로써 앙심을 품은 그에 의해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발당했다.

당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시대였기 때문에 성녀와 그녀의 세 아들들은 바로 비티니아(Bithynia, 고대 소아시아 북서부 지역)의 총독 니케티우스(Nicetius)에게 끌려갔고, 그 후 그들은 모두 니케아에서 화형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그들이 시라쿠사(Siracusa)에서 순교했다는 말도 있지만 신빙성은 없어 보인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윌리엄 마스든

 

  • 가톨릭 성인 이름
    William Marsden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86년

 

 

윌리엄 마스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굴리엘모, 마르스덴, 마스던, 빌리암, 빌헬름, 윌리암.

 

 

윌리엄 마스든 자료

로베르투스 앤더튼(Robertus Anderton)과 윌리엄 마스든은 영국 랭커셔(Lancashire) 출신으로 옥스퍼드(Oxford)에서 수학한 후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들은 사제가 되기 위해 프랑스의 랭스(Reims)에서 함께 공부하였고 1585년 사제품을 받고 함께 영국 선교 길에 올랐다. 그들이 탄 배가 항로를 벗어나 와이트(Wight) 섬에 좌초되자 주민들에 의해 강제로 하선된 후 심문을 받았다.

이때 그들은 자신들이 가톨릭 사제임을 부인하지 않았고, 그 결과 사형언도를 받고 이듬해 와이트 섬 해변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들은 1929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칼리스타

 

  • 가톨릭 성인 이름
    Callista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니케아

 

 

칼리스타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깔리스따, 칼리스따.

 

 

칼리스타 자료

신뢰할 수 없는 행전에 의하면 성녀 테오도타(Theodota, 8월 2일)는 니케아(터키 북서부에 있는 이즈니크의 옛 이름)에 사는 귀부인이었다. 그녀는 성 에보디우스(Evodius), 성 헤르모게네(Hermogenes), 성 칼리스타라는 세 아들을 둔 과부였다.

그녀의 세 아들들은 다른 축일과 순교 장소와 함께 로마 순교록에 세 번 언급되는데, 칼리스타 목록에서는 두 아들과 한 명의 딸로 나타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성녀 테오도타는 그 지방의 집정관 레우카티우스(Leucatius)의 청혼을 거절함으로써 앙심을 품은 그에 의해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발당했다.

당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시대였기 때문에 성녀와 그녀의 세 아들들은 바로 비티니아(Bithynia, 고대 소아시아 북서부 지역)의 총독 니케티우스(Nicetius)에게 끌려갔고, 그 후 그들은 모두 니케아에서 화형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그들이 시라쿠사(Siracusa)에서 순교했다는 말도 있지만 신빙성은 없어 보인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페바디오

 

  • 가톨릭 성인 이름
    Phaebad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392년경 아쟁

 

 

페바디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파이바디오, 파이바디우스, 페바디우스.

 

 

페바디오 자료

성 파이바디우스(또는 페바디오)는 남부 갈리아(Gallia) 지방 아쟁의 주교였다. 그는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가 교회의 '빛나는 사람' 중 한 명으로 부를 정도로 매우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친구인 푸아티에(Poitiers)의 성 힐라리우스(Hilarius, 1월 13일)와 함께 서로마 제국에서 아리우스(Arius) 이단을 뿌리 뽑기 위해 노력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필로

 

  • 가톨릭 성인 이름
    Philo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 활동 연도와 지역
    +150년

 

 

필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없음.

 

 

필로 자료

성 필로와 성 아가토푸스(Agathopus)는 107년 로마에서 순교한 안티오키아(Antiochia)의 주교인 성 이냐시오(Ignatius, 10월 17일)를 수행한 부제들이었다. 그들은 성인의 유해를 찾아 안티오키아로 되돌아 왔으며, 성인의 순교 여정과 죽음에 대한 행전을 기록했다고 믿어지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헤르모제네

 

  • 가톨릭 성인 이름
    Hermogene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니케아

 

 

헤르모제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헤르모게네스, 헤르모제네스.

 

 

헤르모제네 자료

신뢰할 수 없는 행전에 의하면 성녀 테오도타(Theodota, 8월 2일)는 니케아(터키 북서부에 있는 이즈니크의 옛 이름)에 사는 귀부인이었다.

그녀는 성 에보디우스(Evodius), 성 헤르모게네(또는 헤르모제네), 성 칼리스타(Callista)라는 세 아들을 둔 과부였다. 그녀의 세 아들들은 다른 축일과 순교 장소와 함께 로마 순교록에 세 번 언급되는데, 칼리스타 목록에서는 두 아들과 한 명의 딸로 나타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성녀 테오도타는 그 지방의 집정관 레우카티우스(Leucatius)의 청혼을 거절함으로써 앙심을 품은 그에 의해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발당했다.

당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시대였기 때문에 성녀와 그녀의 세 아들들은 바로 비티니아(Bithynia, 고대 소아시아 북서부 지역)의 총독 니케티우스(Nicetius)에게 끌려갔고, 그 후 그들은 모두 니케아에서 화형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그들이 시라쿠사(Siracusa)에서 순교했다는 말도 있지만 신빙성은 없어 보인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헤리발도

 

  • 가톨릭 성인 이름
    Heribald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857년경 오세르

 

 

헤리발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헤리발두스, 헤리발드.

 

 

헤리발도 자료

고대 프랑스 지방 순교록에는 성 헤르발두스(Heribaldus, 또는 헤르발도)의 뛰어난 덕행과 숨은 생활을 기록했는데, 그의 성덕이 프랑스 지방 전역의 그리스도교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러나 자세한 전기는 없고 단지 오세르의 성 게르마누스(Germanus) 수도원에서 베네딕토회 수도자와 원장으로 지내다가 오세르의 주교가 되었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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