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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6일 남자세례명 16가지

피어나네 2023. 4. 2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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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6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그레고리오, 도미니코, 라파엘 아르나이즈 바론, 루치디오, 리카리오, 마르첼리노, 바실레오, 베드로, 스테파노, 아나클레토, 안토니노, 요한, 치리노, 클라렌시오, 클라우디오, 파스카시오 라드베르토, 총 16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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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6일 여자세례명 프란카 비살타, 알다, 엑스수페란시아, 총 3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4월 26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6가지

 

 

 

 

4월 26일 남자세례명 목록

 

  1. 그레고리오

  2. 도미니코

  3. 라파엘 아르나이즈 바론

  4. 루치디오

  5. 리카리오

  6. 마르첼리노

  7. 바실레오

  8. 베드로

  9. 스테파노

  10. 아나클레토

  11. 안토니노

  12. 요한

  13. 치리노

  14. 클라렌시오

  15. 클라우디오

  16. 파스카시오 라드베르토

 

4월 26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6가지

 

 

1. 그레고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Gregory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선교사,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300년

 

 

그레고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그레고리오 자료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와 도미니코(Dominicus)는 도미니코회의 초창기에 살았던 수도자들이다.

그들은 영혼을 구하려는 열망에 불타서 원장의 허락을 받고 에스파냐 아라곤(Aragun)의 바르바스트로(Barbastro) 부근의 무어인들이 사는 산악지대 마을인 소몬타노(Somontano)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들은 피레네 산맥을 따라 가면서 고지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복음 말씀 그대로 돈도 없고 맨발이었다. 작은 마을에서 작은 마을로,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다니며 말씀을 전하고, 대접해 주는 대로 먹고 잠을 잤다. 그러나 산 속의 바위 밑과 자연적인 동굴에서 지낸 때가 더 많았고,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없어 기진맥진한 적이 부지기수였다.

그들은 마을 어귀에 닿으면 조그마한 종을 울려 사람들에게 자신의 도착을 알렸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폭풍우를 만나 바위 밑에 피신해 있던 중 바위더미가 무너지면서 그 밑에 깔려 죽었다. 그들의 시신은 기적적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바르바스트로 교구의 베시안스(Besians)에 안장되었다.

복음적인 선교사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는 그들에 대한 공경은 1854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도미니코

 

  • 가톨릭 성인 이름
    Dominic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선교사,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300년

 

 

도미니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미니꼬, 도미니꾸스, 도미니쿠스, 도미니크, 도미닉, 도밍고.

 

 

도미니코 자료

그레고리우스(Gregorius)와 도미니코(Dominicus)는 도미니코회의 초창기에 살았던 수도자들이다. 그들은 영혼을 구하려는 열망에 불타서 원장의 허락을 받고 에스파냐 아라곤(Aragun)의 바르바스트로(Barbastro) 부근의 무어인들이 사는 산악지대 마을인 소몬타노(Somontano)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들은 피레네 산맥을 따라 가면서 고지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복음 말씀 그대로 돈도 없고 맨발이었다. 작은 마을에서 작은 마을로,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다니며 말씀을 전하고, 대접해 주는 대로 먹고 잠을 잤다. 그러나 산 속의 바위 밑과 자연적인 동굴에서 지낸 때가 더 많았고,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없어 기진맥진한 적이 부지기수였다. 그들은 마을 어귀에 닿으면 조그마한 종을 울려 사람들에게 자신의 도착을 알렸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폭풍우를 만나 바위 밑에 피신해 있던 중 바위더미가 무너지면서 그 밑에 깔려 죽었다. 그들의 시신은 기적적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바르바스트로 교구의 베시안스(Besians)에 안장되었다. 복음적인 선교사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는 그들에 대한 공경은 1854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라파엘 아르나이즈 바론

 

  • 가톨릭 성인 이름
    Rafael Arnaiz Baro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911-1938년

 

 

라파엘 아르나이즈 바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없음.

 

 

라파엘 아르나이즈 바론 자료

성 라파엘 아르나이즈 바론(Raphael Arnaiz Baron)은 1911년 4월 9일 에스파냐 부르고스(Burgos)의 한 부유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네 형제의 맏이로 태어났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몇몇 학교에 다녔고, 영성적 주제와 예술에 대한 감성은 어린 시절부터 두드러졌다. 이러한 자질들은 그가 열정적인 유머와 존경심과 겸손함을 갖고 세상을 향해 개방적이고 활발한 태도를 견지하도록 훌륭하게 균형을 잡아주었다.

그러던 중 발열과 늑막염의 발작으로 공부를 중단해야 했다. 그가 건강을 회복했을 때 아버지는 그를 사라고사(Zaragoza)의 기둥의 성모 대성당에 있는 기둥의 성모에게 봉헌하도록 했고, 가족들은 그가 중등교육을 수료한 오비에도(Oviedo)로 이사했다.

1930년 성 라파엘은 마드리드(Madrid)에서 건축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스도께 헌신하려는 그의 마음이 더욱 깊어진 것도 그 해였다. 그는 중등교육을 완벽히 마친 후, 그해 여름 마케다(Maqueda)의 공작과 공작부인인 그의 삼촌과 숙모의 집이 있는 아빌라(Avila) 근처에서 휴가를 보냈다. 삼촌과 숙모는 그에게 산 이시도로 데 두에나스(San Isidoro de Duenas)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소개해주었고, 그는 그곳의 아름다움과 기도 분위기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성소를 느꼈지만 분명 활동적인 직무를 수행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드리드에서 건축학도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엄률 시토회(트라피스트회) 안에서 ‘절대자’의 신비를 찾기로 결심하였다. 1934년 1월 16일 23세의 나이로 수도회에 입회하며 기쁘게 수도 생활을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의 입회 결정이 고통이나 실망에 자극받아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안에서 주어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주고자 하시는 무한히 선하신 하느님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성 라파엘은 그레고리안 성가와 시간 전례(성무일도)의 수도원 선율에 깊이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어머니와 삼촌과 숙모, 친분이 있던 여러 사람에게 편지를 썼고, 그의 어머니는 그가 죽은 후에 이 편지들을 모아 책으로 냈다.

수도회에 입회하고 넉 달이 지나고, 매우 엄격하고 소박한 사순시기를 보낸 뒤 그는 급작스럽고 심각한 상태의 당뇨병에 걸려 치료를 위해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는 1935년과 1937년 사이에 네 번이나 어쩔 수 없이 집과 수도원 오가는 생활을 반복해야만 했다.

그때는 에스파냐 내전이 한창일 때였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수도원에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을 봉헌하며 공동체의 끝자리를 선택하고 바깥 가장자리에서 살게 되었다. 당시 교회법은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이 수도 서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었다. 그는 1938년 4월 26일, 불과 27세의 젊은 나이에 질병의 마지막 공격을 받고 수도원 의무실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수도원 묘지에 묻혔고, 그의 유해는 나중에 대수도원 성당으로 옮겨졌다.

그는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놀라우리만큼 순수한 방법으로 시토회의 은총을 온몸으로 구현해나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모순과 당혹스러운 질병, 전쟁, 자신의 서원을 발하는 데 있어서의 무능함, 온전히 자기 자신을 포기할 때까지의 비정상적 공동체 관계 등 이 모든 것을 연속해서 겪을 수밖에 없었다.

굴욕감은 그의 일상의 동반자였다. 그의 한 가지 소망은 예수님과 성모님, 십자가, 트라피스트 수도회를 사랑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의 성덕에 대한 명성은 에스파냐 전역으로 급속히 퍼져나갔고, 산 이시도로 데 두에나스의 수도원에 있는 그의 무덤은 많은 은혜를 받는 순례지가 되었다.

1989년 8월 19일, 산티아고 데 콤프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서 열린 제3차 세계 청년대회(World Youth Day)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성 라파엘 수사를 현대 젊은이들의 모범으로 제안했고, 1992년 9월 27일 로마에서 그를 복자품에 올렸다.

시복미사 강론을 통해 교황은 이 에스파냐 출신 트라피스트 회원을 특별히 하느님의 부르심에 무조건적으로 응답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범이라 칭송했다. 성 라파엘 아르나이즈 바론은 2009년 10월 1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시성되었다.

교황은 이날 다섯 복자를 함께 시성하는 미사 강론에서 “새로 시성된 성인들은 인간의 이해와 계산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자기희생과 하느님에 대한 소명을 보여준 이들”이라며, 새 성인들의 거룩한 삶을 본받는 신앙생활을 해나가라고 당부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루치디오

 

  • 가톨릭 성인 이름
    Lucid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경 베로나

 

 

루치디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루끼디오, 루끼디우스, 루치디우스, 루키디오, 루키디우스.

 

 

루치디오 자료

이탈리아 베로나의 주교였던 성 루키디우스(또는 루치디오)는 기도와 학문으로 유명한 삶을 살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리카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Richa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645년경 첸툴라

 

 

리카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귀에르, 리까리오, 리까리우스, 리카리우스, 리퀴에르.

 

 

리카리오 자료

성 리카리우스(또는 리카리오)는 프랑스 아미앵(Amiens) 교외 첸툴라 태생으로 그곳의 주민들은 거의 모두가 이교도들이었다. 그 당시 2명의 아일랜드 선교사제가 이 지역을 지나다가 큰 변을 당했을 때 그가 이들을 숨겨주고 보호해주었다고 한다.

이 두 선교사는 그를 교육시켜 사제로 서품을 받도록 조처하였다. 사제가 된 그는 몇 년 동안 영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프랑스로 돌아와서 선교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또한 성 아달발두스(Adalbaldus, 2월 2일)와 그의 아내인 성녀 릭트루다(Rictrudis, 5월 12일) 및 국왕 다고베르트(Dagobert)에게 이 세상의 위험과 헛됨을 설파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후 그는 첸툴라에 수도원을 세우고 자신은 조금 떨어진 곳에 은둔소를 짓고 엄격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리퀴에르(Riquier)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마르첼리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cell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교황,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마르첼리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셀리노, 마르셀리누스, 마르첼리누스.

 

 

마르첼리노 자료

성 마르첼리누스(또는 마르첼리노)는 296년에 교황 성 카이우스(Caius, 4월 22일)를 계승하여 로마(Roma)의 주교인 교황좌에 올랐다. 그의 생애나 재임 기간 등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에 따르면, 그는 프로젝투스(Projectus)의 아들로 로마인이며 순교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는 303년 로마에서 시작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를 받지 않고 선종한 뒤에, 사제 마르첼루스(Marcellus)에 의해 로마의 비아 살라리아(Via Salaria)에 있는 성녀 프리스킬라(Priscilla) 카타콤바에 묻혔다고 한다.

그로부터 100년 정도 후인 4세기 초에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가 박해 시기에 일시적으로 배교를 했고, 박해자에게 성경을 넘겨주었다는 악의적 주장이 주로 도나투스파(Donatismus) 이단 신봉자들에 의해 퍼뜨려졌다. 하지만 히포(Hippo)의 주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8월 28일)는 이 같은 주장이 잘못된 중상모략임을 강력히 피력했다.

교회사가인 에우세비우스(Eusebius) 역시 그를 ‘박해를 극복한 교황’이라고 했고, 키프로스의 주교인 테오도레트(Theodoret)도 그가 박해 중에 훌륭한 역할을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의 배교 주장을 근거 없는 거짓으로 생각하고 있다.

“로마 순교록”(Martyrologium Romanum)은 4월 26일 목록에서 다른 전승을 전해주고 있다.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로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참수형을 선고받고 성 클라우디우스(Claudius), 성 키리누스(Cyrinus), 성 안토니누스(Antoninus)와 함께 순교했다는 것이다.

연대 교황표에 따르면, 그는 4월 1일 순교한 후 25일이 지난 4월 26일 비아 살라리아에 있는 성녀 프리스킬라 카타콤바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리베리오 교황표”(Catalogus Liberianus)는 10월 25일을 순교일로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10월 25일에 성인의 두 번째 축일을 기념하기도 한다. 동방 교회는 6월 7일에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바실레오

 

  • 가톨릭 성인 이름
    Basile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19년 아마시아

 

 

바실레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실레우스.

 

 

바실레오 자료

소아시아 흑해 연안에 있는 폰투스(Pontus) 지방 아마시아의 열정적인 주교였던 성 바실레우스(또는 바실레오)는 리키니우스 황제 때 바다에 던져져 순교하였다. 로마 순교록은 그의 제자 중 한 명인 엘피디포루스(Elpidiphorus)가 천사의 인도로 성인의 시신을 찾아 매장했다고 전해주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경 브라가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 자료

포르투갈의 브라가 지방의 수호성인인 성 베드로(Petrus)는 브라가 교구의 초대주교이자 순교자이다. 1552년 브라가의 대주교인 발타사르 림포가 라테스(Rates)에 있던 성인의 유해를 브라가 주교좌성당으로 정중하게 모셔와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 지방의 전승에 따르면 성 베드로는 성 대 야고보(Jacobus, 7월 25일) 사도의 제자였고 그에 의해 브라가의 초대주교로 축성되어 포르투갈 북부 지방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도록 파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브라가의 한 공주가 앓고 있던 나병을 치료하고 세례를 베푼 뒤에 순교하였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스테파노

 

  • 가톨릭 성인 이름
    Stephe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선교사,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345-1396년 페름

 

 

스테파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스더, 스테파누스, 스테판.

 

 

스테파노 자료

러시아의 우스트 유고(Ust Yug) 출신인 성 스테파누스(Stephanus, 또는 스테파노)는 1365년에 로스토프(Rostov)의 어느 수도원에 입회하여 30여 년 동안을 순회 설교사로서 활동하였다. 그는 코미족과 코미페르먀크족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우랄(Ural) 지방까지 순회하였다고 전해온다.

그는 그들 지방의 언어를 문자화하는 사업을 적극 추진하여 전례에서 토착어를 사용하게 하였고, 성경과 다른 번역물들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선교사로서 그의 사업은 성공적이었으나 노브고로트(Novgorod)와 모스크바(Moskva)로부터 억압받는 백성들을 돌봄에 있어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는 1383년에 페름 교구의 주교로 서품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아나클레토

 

  • 가톨릭 성인 이름
    Anacle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교황,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90/92년?

 

 

아나클레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나끌레또, 아나끌레뚜스, 아나클레투스.

 

 

아나클레토 자료

성 아나클레투스(또는 아나클레토)의 정확한 생애는 알 수 없고 다만 79년에 교황 성 리누스(Linus, 9월 23일)를 계승하여 제3대 교황이 되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로마(Roma)에서 순교한 그는 클레투스(Cletus)라는 단축형으로도 불린다. 그의 축일은 7월 13일에서 4월 26일로 변경하여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안토니노

 

  • 가톨릭 성인 이름
    Anton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안토니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또니노, 안또니누스, 안토니누스.

 

 

안토니노 자료

성 마르첼리누스(Marcellinus)는 296년에 교황 성 카이우스(Caius, 4월 22일)를 계승하여 로마(Roma)의 주교인 교황좌에 올랐다. 그의 생애나 재임 기간 등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에 따르면, 그는 프로젝투스(Projectus)의 아들로 로마인이며 순교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는 303년 로마에서 시작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를 받지 않고 선종한 뒤에, 사제 마르첼루스(Marcellus)에 의해 로마의 비아 살라리아(Via Salaria)에 있는 성녀 프리스킬라(Priscilla) 카타콤바에 묻혔다고 한다.

그로부터 100년 정도 후인 4세기 초에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가 박해 시기에 일시적으로 배교를 했고, 박해자에게 성경을 넘겨주었다는 악의적 주장이 주로 도나투스파(Donatismus) 이단 신봉자들에 의해 퍼뜨려졌다. 하지만 히포(Hippo)의 주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8월 28일)는 이 같은 주장이 잘못된 중상모략임을 강력히 피력했다.

교회사가인 에우세비우스(Eusebius) 역시 그를 ‘박해를 극복한 교황’이라고 했고, 키프로스의 주교인 테오도레트(Theodoret)도 그가 박해 중에 훌륭한 역할을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의 배교 주장을 근거 없는 거짓으로 생각하고 있다.

“로마 순교록”(Martyrologium Romanum)은 4월 26일 목록에서 다른 전승을 전해주고 있다.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로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참수형을 선고받고 성 클라우디우스(Claudius), 성 키리누스(Cyrinus), 성 안토니누스(또는 안토니노)와 함께 순교했다는 것이다.

연대 교황표에 따르면, 그는 4월 1일 순교한 후 25일이 지난 4월 26일 비아 살라리아에 있는 성녀 프리스킬라 카타콤바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리베리오 교황표”(Catalogus Liberianus)는 10월 25일을 순교일로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10월 25일에 성인의 두 번째 축일을 기념하기도 한다. 동방 교회는 6월 7일에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요한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146년 발랑스

 

 

요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자료

프랑스 리옹(Lyon) 태생인 요한(Joannes)은 시토 회원이 되기 전부터 주교좌성당에서 일했으나 양심에 가책에 되는 일을 한 후에 순례의 길을 떠났다. 그 후 그는 시토회에 입회하여 모범적인 수도자로 변신하였고, 방랑스의 주교이던 에우스타키우스(Eustachius)가 그릇된 행동을 함으로써 그가 주교로 선임되었다. 그는 참으로 열심한 영적인 사목자였고, 은혜 충만한 지도자로서 공경을 받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치리노

 

  • 가톨릭 성인 이름
    Cyr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치리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치리누스, 키리노, 키리누스.

 

 

치리노 자료

성 마르첼리누스(Marcellinus)는 296년에 교황 성 카이우스(Caius, 4월 22일)를 계승하여 로마(Roma)의 주교인 교황좌에 올랐다. 그의 생애나 재임 기간 등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에 따르면, 그는 프로젝투스(Projectus)의 아들로 로마인이며 순교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는 303년 로마에서 시작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를 받지 않고 선종한 뒤에, 사제 마르첼루스(Marcellus)에 의해 로마의 비아 살라리아(Via Salaria)에 있는 성녀 프리스킬라(Priscilla) 카타콤바에 묻혔다고 한다.

그로부터 100년 정도 후인 4세기 초에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가 박해 시기에 일시적으로 배교를 했고, 박해자에게 성경을 넘겨주었다는 악의적 주장이 주로 도나투스파(Donatismus) 이단 신봉자들에 의해 퍼뜨려졌다. 하지만 히포(Hippo)의 주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8월 28일)는 이 같은 주장이 잘못된 중상모략임을 강력히 피력했다.

교회사가인 에우세비우스(Eusebius) 역시 그를 ‘박해를 극복한 교황’이라고 했고, 키프로스의 주교인 테오도레트(Theodoret)도 그가 박해 중에 훌륭한 역할을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의 배교 주장을 근거 없는 거짓으로 생각하고 있다.

“로마 순교록”(Martyrologium Romanum)은 4월 26일 목록에서 다른 전승을 전해주고 있다.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로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참수형을 선고받고 성 클라우디우스(Claudius), 성 키리누스(또는 치리노), 성 안토니누스(Antoninus)와 함께 순교했다는 것이다.

연대 교황표에 따르면, 그는 4월 1일 순교한 후 25일이 지난 4월 26일 비아 살라리아에 있는 성녀 프리스킬라 카타콤바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리베리오 교황표”(Catalogus Liberianus)는 10월 25일을 순교일로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10월 25일에 성인의 두 번째 축일을 기념하기도 한다. 동방 교회는 6월 7일에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클라렌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Claren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620년 비엔

 

 

클라렌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글라렌시오, 글라렌시우스, 글라렌씨오, 글라렌씨우스, 끌라렌씨오, 끌라렌씨우스, 클라렌시우스, 클라렌씨오, 클라렌씨우스, 클라렌티오, 클라렌티우스.

 

 

클라렌시오 자료

성 클라렌티우스(또는 클라렌시오)는 성 에테리우스(Etherius, 6월 14일)를 계승하여 프랑스 비엔의 주교가 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클라우디오

 

  • 가톨릭 성인 이름
    Claud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클라우디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글라우디오, 글라우디우스, 끌라우디오, 끌라우디우스, 클라우디우스.

 

 

클라우디오 자료

성 마르첼리누스(Marcellinus)는 296년에 교황 성 카이우스(Caius, 4월 22일)를 계승하여 로마(Roma)의 주교인 교황좌에 올랐다. 그의 생애나 재임 기간 등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에 따르면, 그는 프로젝투스(Projectus)의 아들로 로마인이며 순교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는 303년 로마에서 시작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를 받지 않고 선종한 뒤에, 사제 마르첼루스(Marcellus)에 의해 로마의 비아 살라리아(Via Salaria)에 있는 성녀 프리스킬라(Priscilla) 카타콤바에 묻혔다고 한다.

그로부터 100년 정도 후인 4세기 초에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가 박해 시기에 일시적으로 배교를 했고, 박해자에게 성경을 넘겨주었다는 악의적 주장이 주로 도나투스파(Donatismus) 이단 신봉자들에 의해 퍼뜨려졌다. 하지만 히포(Hippo)의 주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8월 28일)는 이 같은 주장이 잘못된 중상모략임을 강력히 피력했다.

교회사가인 에우세비우스(Eusebius) 역시 그를 ‘박해를 극복한 교황’이라고 했고, 키프로스의 주교인 테오도레트(Theodoret)도 그가 박해 중에 훌륭한 역할을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의 배교 주장을 근거 없는 거짓으로 생각하고 있다.

“로마 순교록”(Martyrologium Romanum)은 4월 26일 목록에서 다른 전승을 전해주고 있다.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로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참수형을 선고받고 성 클라우디우스(또는 클라우디오), 성 키리누스(Cyrinus), 성 안토니누스(Antoninus)와 함께 순교했다는 것이다.

연대 교황표에 따르면, 그는 4월 1일 순교한 후 25일이 지난 4월 26일 비아 살라리아에 있는 성녀 프리스킬라 카타콤바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리베리오 교황표”(Catalogus Liberianus)는 10월 25일을 순교일로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10월 25일에 성인의 두 번째 축일을 기념하기도 한다. 동방 교회는 6월 7일에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파스카시오 라드베르토

 

  • 가톨릭 성인 이름
    Paschasius Radber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785?-865년경 코르비

 

 

파스카시오 라드베르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드베르투스, 라트베르토, 라트베르투스, 빠스까시오, 빠스까시우스, 파스카시우스.

 

 

파스카시오 라드베르토 자료

785년경 프랑스의 수아송(Soissons)에서 태어난 성 파스카시우스 라드베르투스(또는 파스카시오 라드베르토)는 갓난아이 때 부모로부터 버림받아 베네딕토회 수녀원에서 양육되었다. 청년이 된 후 아미앵(Amiens) 근처에 있는 코르비의 베네딕토회에 입회하였다.

당시 아빠스는 성 아달하르두스(Adalhardus, 1월 2일)였는데, 그는 성 파스카시우스의 개인적 스승이었으며, 후에 성 파스카시우스는 그의 전기를 집필하기도 하였다. 성서와 교부들의 저술에 대하여 깊이 있게 공부한 그는 부제 서품을 받았다.

822년 그는 독일 동부의 베스트팔렌(Westfalen) 지역에 새로운 코르비 수도원을 세우라는 명을 받고 파견되었다. 그는 신설된 수도원에서 수련자 담당과 수도원 학교의 교장을 맡았다. 843년경 그는 코르비 수도원의 아빠스(수도원장)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아빠스가 된 후에도 부제로 머물고 사제 서품을 받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자신이 신부가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겸손함 때문이었다.

7년간의 아빠스직을 마친 후 그는 생리키에(Saint-Riquier) 수도원에 머물며 학문과 저술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그가 남긴 여러 저술 중에서 성체성사에 대한 깊은 연구를 담은 “주님의 몸과 피”(De corpore et sanguine Domini)가 가장 유명하다. 그 외에도 그는 몇 권의 성서 주석서 그리고 스승인 성 아달하르두스와 그의 후임자인 왈라(Wala)의 전기도 저술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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