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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 남자세례명 115가지 (2/6)

pieonane 2023. 5. 29.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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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115분 자료를 총 여섯 페이지 가나다 순서로 정리했어요. 5월 29일 천주교 세례명 115분 중 20분 두 번째 입니다.

 

 

  1. 5월 29일 남자세례명 115가지 (1/6)

  2. 5월 29일 남자세례명 115가지 (2/6)

  3. 5월 29일 남자세례명 115가지 (3/6)

  4. 5월 29일 남자세례명 115가지 (4/6)

  5. 5월 29일 남자세례명 115가지 (5/6)

  6. 5월 29일 남자세례명 115가지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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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 여자세례명 강경복 수산나, 강완숙 골룸바, 구성열 바르바라, 권천례 데레사, 김연이 율리아나,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문영인 비비안나, 보나, 심아기 바르바라, 심조이 바르바라, 오 마르가리타, 우르술라 레도호프스카, 윤운혜 루치아, 윤점혜 아가타, 이 안나,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이성례 마리아, 이순이 루갈다, 이시임 안나, 이조이 막달레나, 정복혜 칸디다, 정순매 바르바라, 최 비르지타, 최조이 바르바라, 한신애 아가타, 총 26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5월 29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15가지 (2/6)

 

 

 

 

5월 29일 남자세례명 목록 (2/6)

 

  1. 김진후 비오

  2. 김천애 안드레아

  3. 김현우 마태오

  4. 김화춘 야고보

  5. 김희성 프란치스코

  6. 라이문도

  7. 레스티투토

  8. 리카르도 티르켈드

  9. 마르티리오

  10. 막시모

  11. 막시미노

  12. 바오로 6세

  13. 박경진 프란치스코

  14. 박경화 바오로

  15. 박대식 빅토리노

  16. 박사의 안드레아

  17. 박상근 마티아

  18. 박취득 라우렌시오

  19. 방 프란치스코

  20. 배관겸 프란치스코

 

5월 29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15가지 (2/6)

 

 

1. 김진후 비오

 

  • 가톨릭 성인 이름
    金震厚 Piu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39-1814년 한국

 

 

김진후 비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비오, 김비오, 비우스, 피오, 피우스.

 

 

김진후 비오 자료

충청도의 내포 평야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면천의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난 김진후(金震厚) 비오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요, 1816년에 순교한 김종한 안드레아의 부친이다.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운조’(運祚)로 기록되어 있다.

김 비오가 천주교 신앙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맏아들이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에게서 교리를 전해 듣고는 이를 형제들에게 전하면서였다. 당시 김 비오의 나이는 50세가량이었다.

그러나 김 비오는 처음부터 천주교 교리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는 세상의 권세와 쾌락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은총의 부르시는 소리를 들을 여유가 없었다. 특히 그는 감사 밑에서 작은 관직 하나를 얻게 되자, 자식들의 권유를 강하게 물리쳤다.

이후에도 김 비오의 자식들은 부친을 개종시키려고 꾸준히 노력하였다. 그러면서 그의 영혼은 점차 예수 그리스도께 기울어지게 되었고, 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비신자 친구들과의 관계도 끊어 버리게 되었다. 그는 열심히 신자의 본분을 지켜 나감으로써 어른으로서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김 비오는 1791년의 신해박해 때에 처음으로 체포되어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그는 이후에도 네다섯 차례나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곤 하였다. 또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는 다시 체포되어 배교를 뜻하는 말을 하고는 유배형을 받았지만, 얼마 뒤에 귀양에서 풀려났다.

집으로 돌아온 김 비오는 1805년에 다시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되었다. 그가 천주교 신자답게 행동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관장 앞에서도 서슴없이 신앙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의 박해가 공식적인 것이 아니었으므로, 김 비오는 사형 판결을 받지 않은 채 오랫동안 옥에 갇혀 지내야만 하였다. 그 동안 그는 점잖고 품위 있는 성격으로 해미의 관리와 옥리들에게 존경과 대우를 받게 되었고, 드러내 놓고 신자의 본분을 지킬 수도 있었다.

이렇게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김 비오는 모범적인 인내심으로 옥중 생활의 고통을 참아 냈으나, 이미 생명의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그는 1814년 12월 1일(음력 10월 20일)에 옥중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아무리 신앙으로 인내심이 강하다고 할지라도 고통스러운 옥살이를 견디기 어려운 나이였다.

김진후 비오가 병으로 죽었는지, 굶주림이나 또 다른 고통으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생전에 받은 박해와 옥중에서 보여준 신앙생활 때문에 온 교회가 그를 기리게 되었다는 사실만이 전해올 뿐이다.

김진후 비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김천애 안드레아

 

  • 가톨릭 성인 이름
    金千愛 Andrew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천민, 하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60-1801년 한국

 

 

김천애 안드레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드레아스, 앙드레, 앤드류, 앤드류.

 

 

김천애 안드레아 자료

고향을 알 수 없는 김천애(金千愛) 안드레아(Andreas)는 ‘전라도의 사도’로 유명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던 중, 그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당시 유 아우구스티노의 집은 전주의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있었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에 김 안드레아는, 자신의 신분을 뛰어넘는 고결한 마음으로 신자의 본분을 지켜 나갔다. 그는 진리에 대한 믿음이 남달랐으며, 교리의 가르침을 굳게 지킬 줄도 알았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전라도에서는 유 아우구스티노가 가장 먼저 체포되었다. 뒤를 이어 김 안드레아도 그의 맏아들인 유중철 요한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이내 감영에서는 김 안드레아에게 문초와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와 밀고를 강요하였지만,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을 굳게 증언하였다. 그리고 그 해 7월경 동료들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김천애 안드레아의 신앙은 형조에서도 한결같았다. 그는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으면서 “십계명을 버릴 수는 없으며, 한 번 죽는 것인 만큼 죽음을 달게 받겠다.”고 진술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전주로 압송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1년 8월 27일(음력 7월 19일), 또는 8월 28일로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그가 형조에서 한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천주교는 큰 도리요 지극히 훌륭한 행위로, 여러 해 동안 깊이 믿어 이미 뼛속까지 사무쳐 있습니다. (저에게) 형벌과 죽음은 영예로운 일이니, 어찌 마음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범한 죄를 돌이켜 보건대, 오직 빨리 죽기만을 원할 따름입니다.”

김천애 안드레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김현우 마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金顯禹 Matthew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중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75-1801년 한국

 

 

김현우 마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마태오, 김마태오, 마두, 마태우스, 마테오, 마테우스, 매튜.

 

 

김현우 마태오 자료

김현우(金顯禹) 마태오(Matthaeus)는 한양 명례방의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1786년경 유배지에서 사망한 김범우 토마스는 그의 맏형이자 이복형이고, 1801년 포도청에서 매를 맞아 순교한 김이우 바르나바는 그의 친형이다.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어, 맏형 김 토마스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한 김 마태오는 형인 김 바르나바와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당시 그들 형제에게 세례를 준 사람은 이승훈 베드로였다. 이어 1785년에 일어난 ‘명례방 사건’으로 김 토마스가 유배를 가면서 그들 형제는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며, 비밀리에 기도 생활을 계속해 나갔다.

1794년 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 김 마태오는 형과 함께 적극적으로 교회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홍필주 필립보의 집으로 가서 주 야고보 신부를 만났으며, 정인혁 타대오, 최필제 베드로 등 몇몇 교우들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들은 이 공동체 안에서 자주 기도 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강습하였다.

이후 김 마태오는 주 신부가 박해의 위험 때문에 잠시 형의 집을 피신처로 삼자, 그곳으로 가서 미사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형과 함께 주 야고보 신부가 설립한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또 1800년에 주 신부가 다시 한 번 형의 집을 방문하자, 김현우 마태오도 그곳으로 가서 교우들과 함께 미사에 참여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김 마태오는 형 김 바르나바와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특히 김 마태오가 체포될 때는 찬란하고 커다란 십자가가 나타나, 그의 앞에서 옥으로 가는 길을 가리켰다고 전한다.

포도청에서는 곧바로 김 마태오에게 엄한 문초와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거나 그동안의 행적을 추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알려진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입 밖에 내지 않았으며, 어느 누구의 종적도 밀고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다시 형조로 이송되어 굳센 신앙의 의지로 형벌을 이겨 내고 다음과 같이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다.

“삼 형제가 함께 천주교에 빠져 똑같은 악행을 함께 저질렀으며, 남녀가 뒤섞여 지내면서 천주교 서적을 외웠다. 많은 사람들을 속여서 그릇된 길로 이끌고 세상을 어지럽혔다. 비록 형벌을 당해 죽는다고 할지라도 ‘천주교는 끝내 옳은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김현우 마태오는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김현우 마태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김화춘 야고보

 

  • 가톨릭 성인 이름
    金若古排 Jame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6년 한국

 

 

김화춘 야고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야고보, 김야고보, 야고버, 야고부스, 야코보, 야코부스, 자크, 제임스.

 

 

김화춘 야고보 자료

김화춘 야고보[金若古排, Jacobus]는 충청도 청양의 수단이(현, 충남 청양군 남양면 신왕리)에서 태어나 보령의 청라동(현, 충남 보령시 청라면)으로 이주해 살았다. 1839년 전주에서 순교한 김대권 베드로가 그의 형이다.

본성이 온순하고 참을성이 있던 김 야고보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형과 함께 아버지에게 교리를 배웠다. 그리고 장성한 뒤에는 하느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하는 일에 큰 힘이 되고자 애썼다.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지켰으며, 언제나 기도 생활과 성경 읽기에 부지런하여 교우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는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경상도 청송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나 경주 포졸들이 청송 일대의 신자들을 수색하고 다닐 때, 김 야고보도 그들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관장이 제시한 온갖 유혹을 거절하고, 혹독한 형벌을 신앙으로 극복하였다. 그런 다음 고성대 베드로와 고성운 요셉 형제, 구성열 바르바라 등과 함께 대구로 압송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대구에서 여러 달을 갇혀 지내는 동안, 김 야고보는 여러 차례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전혀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을 굳게 지켰으며, 감사도 마침내 그의 신앙에 굴복하여 사형을 선고하게 되었다. 이때 그에게 내려진 선고문은 다음과 같다.

“김화춘은 아버지로부터 천주교 신앙을 배워 대대로 죄악을 저질러 왔다. 모두 어리석고 무식한 자들로, (천주교 교리를) 귀로 전해 듣고 입으로 외우면서 그 사악한 말을 깊이 믿었다. 여러 차례 형벌과 문초를 당하면서도 죽기를 맹세하고 뉘우치지 않으니, 그 요사하고 사악함이 아주 지극하다.”

김화춘 야고보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임금의 윤허가 내려져 동료들과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이었다. 김 야고보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김화춘 야고보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김희성 프란치스코

 

  • 가톨릭 성인 이름
    金稀成 Franci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중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65-1816년 한국

 

 

김희성 프란치스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프란치스코, 김프란치스코, 방지거,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김희성 프란치스코 자료

교우들 사이에서는 ‘경서’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김희성(金稀成)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1765년 예산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의 부유한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에 예산에서 순교한 김광옥 안드레아가 바로 그의 부친이다.

김 프란치스코는 어려서부터 전통 학문을 배워왔으나, 아버지가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에는 이를 버리고 천주교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아주 열심인 신자가 되어 기도와 애긍 생활을 실천해 나갔으며, 언제나 영혼을 구하는 일에 힘쓰게 되었다.

아버지가 1801년에 순교하자, 김 프란치스코의 열성은 날로 높아져 갔다. 그리고 아버지의 모범을 따르겠다는 그의 의지는 더욱 굳어져만 갔다.

김 프란치스코는, 모든 재물을 버리고 경상도 일월산에 있는 영양의 곧은장으로 들어가 가족과 함께 생활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금욕 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로 고신극기를 실천하였다. 또 급한 성격을 극복하고자 노력한 결과, 오래지 아니하여 양순함과 인내의 모범이 되기에 이르렀다.

1815년 3월 을해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밀고자가 포졸들을 이끌고 곧은장으로 쳐들어왔다. 그때 김 프란치스코는 산에 올라가 있었는데, 포졸들이 내려오라고 소리치는 것을 듣고는 아들 문악이에게 이렇게 당부하였다. “나는 천주의 명을 따라 가야 한다마는, 너는 나를 따라오지 말고 온 집안을 보살피되, 특히 할머니를 극진히 모시거라.”

그런 다음 김 프란치스코는, 아주 기쁜 낯으로 하산하여 포졸들은 물론 밀고자까지도 관대하게 대접하였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면서 상냥한 말로 위로하였으며, 아내에게는 어머니를 잘 봉양하고 자식들을 잘 가르친 뒤에 자신의 뒤를 따르도록 부탁하였다.

김 프란치스코는 웃는 낯으로 포졸들을 따라나섰다. 안동 관아로 끌려간 그는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결코 여기에 굴하지 않았다. 그러자 안동 관장은 그를 김종한 안드레아와 함께 대구로 이송하였고, 그들은 이곳에서 다시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김 프란치스코는 관원들이 당황할 정도로 항구한 신앙심을 보여 주었다.

대구 감사는, 김 프란치스코의 심지가 너무 굳은 탓에 결코 배교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의 최후 진술을 받아 조정에 보고한 뒤, 다른 신자들과 함께 옥에 가두어 두도록 하였다. 당시 대구 감사가 조정에 올린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김희성은 집 안에 천주교 서적을 숨겨 왔으며, 평소에 십계명과 같은 요사한 글들을 이웃과 함께 외우곤 하였습니다.”

김희성 프란치스코는 동료들과 함께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사형 집행에 대한 임금의 윤허가 내려와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대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그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김희성 프란치스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라이문도

 

  • 가톨릭 성인 이름
    Raymund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242년 툴루즈

 

 

라이문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이문두스, 레이먼드.

 

 

라이문도 자료

도미니코 회원인 빌리암 아르노(William Arnaud)는 같은 수도회의 두 명의 동료와 함께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의 명으로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Languedoc)로 파견되어 스테파누스(Stephanus)와 라이문두스(Raymundus, 또는 라이문도) 등과 함께 알비파(Albigenses)와 맞서 싸웠다. 하지만 그들은 알비파에 의해 툴루즈, 나르본(Narbonne) 등 여러 지방에서 추방을 당했다.

아비뇽(Avignon)에서 설교한 빌리암 아르노와 그의 동료들은 밤을 이용하여 툴루즈의 레이몬드 7세 백작의 성으로 피신하였으나, 성을 지키던 군인들에게 발각되어 모두 순교하였다. 이때 빌리암 아르노와 11명의 동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도미니코회와 작은 형제회의 순교자들이다.

그들은 1866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툴루즈의 순교자들로 시복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레스티투토

 

  • 가톨릭 성인 이름
    Restitu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99년 로마

 

 

레스티투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레스띠뚜또, 레스띠뚜뚜스, 레스티투투스.

 

 

레스티투토 자료

성 레스티투투스(또는 레스티투토)에 대해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순교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리카르도 티르켈드

 

  • 가톨릭 성인 이름
    Richard Thirkeld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83년

 

 

리카르도 티르켈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리카르도 티르켈드 자료

리카르두스(Richardus, 또는 리카르도)가 1579년에 사제서품을 받았을 때에는 이미 고령이었다. 그는 프랑스의 두에(Douai)와 랭스(Reims)에서 사제수업을 받았다. 그 후 영국 선교 길에 올라 요크에서 활동하던 중, 어느 날 밤에 감옥에 갇힌 신자를 방문하러 갔다가 가톨릭 사제임이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그는 고령이었으므로 죽음을 조금도 두렵게 여기지 않고, 함께 있던 다른 죄수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면서 죽음을 준비하였다. 그는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이 날은 주님이 예비하신 날이다. 그러니 기뻐하고 즐겨 용약하자!”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마르티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Marty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97년

 

 

마르티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띠리오, 마르띠리우스, 마르티리우스.

 

 

마르티리오 자료

테오도시우스 황제 치하에서 이탈리아 밀라노(Milano)에 거주하던 많은 이방인들 가운데 카파도키아(Cappadocia) 태생인 성 시시니우스(Sisinius) 그리고 마르티리우스(또는 마르티리오)와 알렉산데르(Alexander) 형제들이 가장 유명하였다.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는 그들을 트렌토(Trento)의 주교 성 비길리우스(Vigilius)에게 추천하여 설교 일을 맡기게 하였다. 시시니우스는 부제로 그리고 마르티리우스 형제는 독서자로 선임되어, 이들 세 사람이 신자들이 별로 없던 알프스 건너편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들의 전교 여행은 많은 성과를 내게 되어 성당을 짓기까지 하였으나, 선교사들의 성공을 달갑잖게 여기던 주민들이 새로 영세한 신자들을 위협하고 그들을 몽둥이로 때려 시시니우스는 즉사하고 말았다. 마르티리우스는 정원으로 피신하였으나 곧 발각되어 그 다음날 처형되었고, 알렉산데르 역시 처참한 죽음을 당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막시모

 

  • 가톨릭 성인 이름
    Maxim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6세기 베로나

 

 

막시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막시무스, 막씨모, 막씨무스.

 

 

막시모 자료

성 막시무스(또는 막시모)는 이탈리아 베로나의 주교였다. 그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자신의 교구를 다스렸기 때문에 그의 생애에 대해 상세한 것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막시미노

 

  • 가톨릭 성인 이름
    Maxim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347년경 트리어

 

 

막시미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막시미누스.

 

 

막시미노 자료

프랑스의 푸아티에(Poitiers) 출신인 성 막시미누스(또는 막시미노)는 어릴 때 고향을 떠났는데, 그 이유는 성 아그리티우스(Agritius, 1월 13일)의 명성에 이끌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독일 남서부 트리어에서 교육을 마치고, 자기 스승의 뒤를 이어 트리어 교구의 제5대 주교로 승품되었다.

335년 아리우스주의 이단에 반대하던 알렉산드리아의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가 그 지방으로 유배 왔을 때, 그는 성인을 환영하고 하느님을 섬길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성 아타나시우스는 성 막시미누스 주교의 성덕과 용덕 그리고 근면함을 보고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성 막시미누스는 쾰른(Koln)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에우프라테스(Euphratas) 주교를 이단자로 단죄하는 데 성공하였고, 아리우스주의(Arianism)를 옹호하던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에게 경고하기도 하였다. 그의 사망 연대는 불확실하지만, 그의 후임자인 성 바울리누스(Paulinus, 8월 31일)의 취임 연대가 347년경이기에 이때를 그의 선종 시기로 보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바오로 6세

 

  • 가톨릭 성인 이름
    Paul VI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교황

  • 활동 연도와 지역
    1897-1978년

 

 

바오로 6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몬티니,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파울로, 파울루스, 폴.

 

 

바오로 6세 자료

1897년 9월 26일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 콘체시오(Concesio)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Giovanni Battista Montini)는 어려서부터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변호사였던 그의 아버지 조르지오 몬티니(Giorgio Montini)는 일간지 ‘브레시아 시민’(Il Cittadino di Brescia)의 편집자로서 반교회적 사상과 투쟁하였고, 어머니 주디타 알기시(Giuditta Alghisi)는 교회 여성운동의 지도자였다. 

허약한 체질에 수줍음을 잘 타는 성격이었으나 총명하고 신심이 깊었던 그는 1903년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체사레 아리치 학교(Cesare Arici Institute)에 들어가 1914년까지 공부한 후 아르날도 다 브레시아(Arnaldo da Brescia) 고등학교를 거쳐, 1917년 브레시아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집에서 통학하였다.

1920년 5월 29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같은 해 11월 로마의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철학과 교회법을, 로마 대학에서 문학을 배웠고, 1922년부터는 교황청 외교관 학교(Academia dei Nobili Ecclesiastisi)에서 공부하였다. 1923년 3월 폴란드 바르샤바(Warszawa) 주재 교황대사 보좌관으로 파견되었으나 그곳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11월 로마로 돌아와 1년 동안 교회법과 외교학을 연구한 후 1924년 10월부터는 교황청 국무원에서 근무하였다. 

1925년에는 이탈리아 가톨릭 학생연맹(FUCI)의 지도신부로 임명되어 파시즘 학생연맹과 대립하여 싸우기도 했다. 1931년 다시 국무원에 근무하면서 교황청 외교관 학교에서 교황청 외교사를 강의하였다.

그는 1937년 12월 13일 완벽주의자로 유명한 교황청 국무원장 에우제니오 파첼리(Eugenio Pacelli) 추기경의 비서로 발탁되어 몬시뇰로 임명되었다. 1939년 파첼리 추기경이 교황 비오 12세(Pius XII)로 선출된 후에는 새 국무원장 루이지 막리오네(Luigi Maglione) 추기경을 보좌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포로 문제, 유대인 문제 등에 관심을 두고 활동했으며, 전쟁으로 집을 잃은 무주택자들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또한 미국가톨릭복지협회(NCWC)와 교황청 간의 연락 업무를 담당하는 한편, 국제 카리타스(Caritas Internationalis)와 국제 가톨릭 이주자위원회(International Catholic Migration Commission)의 설립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54년 11월 1일 밀라노(Milano) 대교구장으로 임명된 그는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며 왕성한 사목활동을 펼쳤다. 많은 성당을 신축 · 보수하고 사목 방문에 힘쓰며, 교회를 떠난 노동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여러 작업장을 찾아다니며 복음의 사회교리를 설교하여 그들이 교회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힘썼다. 

그는 평신도 사도직과 문화 활동을 장려하고 가톨릭 대학교와 신학교에서 사회과학을 가르치도록 권했으며, 그리스도교 노조 활동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청소년 문제에도 큰 관심을 두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였다. 1958년 12월 15일 교황 성 요한 23세(Joannes XXIII, 10월 11일)에 의해 추기경에 임명된 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준비위원회와 실무조정위원회의 임원직을 맡아 공의회 제1회기(1962년)에 참석하였다.

1963년 6월 3일 교황 성 요한 23세가 선종한 후, 6월 21일 새 교황으로 선출된 그는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Paulus)를 교황명으로 택하고, 6월 30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바오로 6세 교황으로 착좌하였다. 그는 곧 공의회의 속개를 발표했고, 제4회기까지 열린 공의회는 1965년 12월 8일 폐막되었다. 

제4회기(1965년) 때 지역 주교들에게 교황에 대한 자문 권한을 부여하는 영속적 기구로서 주교대의원회의 설립이 착수되었다. 그리고 공의회의 후속 조치로 전례 개혁, 미사 중 모국어 사용,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대화, 이웃 종교인 및 무신론자들과의 대화 등 가톨릭교회의 현대화가 이루어졌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비행기와 헬리콥터를 타고 외국을 방문한 최초의 교황이다. 1964년 1월에는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고, 12월에는 세계 성체대회 참가를 위해 인도 뭄바이(Mumbai)를 방문하였다. 1965년에는 미국 뉴욕의 국제연합(UN) 본부를 방문해 평화를 호소하는 연설을 했고, 1967년에는 튀르키예의 이스탄불(Istanbul)을 방문했다. 

1968년에는 라틴아메리카 대륙에 속한 콜롬비아를 찾아 보고타(Bogota) 세계 성체대회와 메데인(Medellin)의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연합회 총회에 참석했으며, 1969년에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교회협의회(WCC) 교회일치사무국과 중앙아프리카를 방문하였다. 1970년에는 아시아를 방문하던 중 필리핀 마닐라에서 암살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다수의 교황 문헌을 통해 교리를 해석하고 세상 속 교회의 역할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대표 문헌으로는 성체성사에 대한 전통적 교리를 재확인한 “신앙의 신비”(Mysterium fidei, 1965), 가난한 나라와 부유한 나라의 공동 발전을 위한 방법들을 제안한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1967), 부부 관계와 정결의 가치, 올바른 자녀 출산을 위한 부모와 의료인과 사목자의 역할을 설명한 “인간 생명”(Humanae vitae, 1968), 현대 세계에 부응하는 선교의 방향을 논한 “현대의 복음 선교”(Evagelii Nuntiandi, 1976) 등이 있다.

공의회 이후 전통주의자들의 반발과 국제 정세의 불안 등으로 어려움도 겪었지만,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평신도와 여성의 교회 참여를 증진하고 허례허식을 버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공의회 제3차 회기를 앞둔 1964년에는 여성 · 수도자 · 평신도의 공의회 입회를 허용했고, 1970년에는 여성 최초로 아빌라(Avila)의 성녀 테레사(Teresia, 10월 15일)와 시에나(Siena)의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4월 29일)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또한 그는 교황으로 선출될 때 받았던 삼중관(tiara)을 팔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1978년 8월 6일 카스텔 간돌포(Castel Gandolfo)에 있는 교황 별장에서 미사를 드리다 심장마비로 선종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간인 1963년 교황으로 선출된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1965년까지 공의회를 이끌었으며, 공의회 문헌을 반포하고 결의사항을 실행해 나갔다. 1964년에는 예루살렘 성지를 방문해 정교회 수장이었던 아테나고라스 1세 총대주교와 만나 그리스도교 일치에 앞장섰고, 세계 성체대회 개최지인 인도를 방문하며 아시아 땅을 밟은 최초의 교황이 되었다. 

1965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를 제정했으며, 재임 기간 중 추기경단을 꾸준히 늘리고 제3세계 출신을 발탁하는 등 가톨릭교회의 보편성을 구현하고자 노력하였다. 1969년 한국 최초의 추기경인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을 임명한 교황이기도 하다.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은 2014년 10월 19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 성 요한 23세와 더불어 가톨릭교회의 현대화와 세계화를 이끈 주역인 제262대 교황 바오로 6세의 시복식을 거행하였다. 시복식은 바오로 6세 교황 재임 중 제정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 제3차 임시총회 폐막 미사 중에 이루어졌다. 

바오로 6세 교황의 시복은 그의 전구(intercession)로 일어난 기적을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5월 9일 승인함으로써 결정되었다. 본인과 태아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낙태를 종용받았던 미국 캘리포니아의 임신부가 한 이탈리아 수녀에게 기도를 부탁했고, 그 수녀가 바오로 6세 교황의 상본(holy card)과 제의 조각을 임신부의 배에 놓고 기도한 뒤 건강한 아이가 태어났다고 한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2018년 10월 14일 세계주교대의원회의가 열리는 중에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자신을 시복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성식 미사에서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바오로 사도처럼 새로운 경계를 넘어서, 복음 선포에서나 대화에서나 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을 바라보며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외향적인 교회의 예언자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평생을 보내셨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당신 스스로 지혜로운 길잡이 역할을 하셨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더불어 우리의 공동 소명, 곧 성덕을 향한 보편적인 소명을 살라고 오늘도 우리를 격려하고 계십니다. 대충대충 사는 것이 아니라, 성덕을 살라고 권고하십니다.”라고 그의 성덕을 칭송했다.

2018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시성으로 역대 교황 중 성인은 82명(대립교황 교부 성 히폴리투스 포함), 복자는 9명이 되었다. 20세기 교황 중에서 성인품에 오른 이는 성 비오 10세(Pius X, 8월 21일), 성 요한 23세(Joannes XXIII, 10월 11일),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10월 22일)와 더불어 총 4명이 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9년 2월 6일 교황청 경신성사성을 통해 성 바오로 교황의 기념일을 제정하는 교령을 발표했다. 일반적 관례에 따르면 성인의 축일은 선종일로 지정하는데, 선종일인 8월 6일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임을 고려해 5월 29일을 선택 기념일로 지정했다. 5월 29일은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1920년 사제품을 받은 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박경진 프란치스코

 

  • 가톨릭 성인 이름
    박경진 Franci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35-1868년 한국

 

 

박경진 프란치스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박 프란치스코, 박프란치스코, 방지거,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박경진 프란치스코 자료

1835년에 태어난 박경진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장성한 다음 오(吳) 마르가리타와 혼인하여 충청도 청주에서 살았다. 그들 부부는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안전한 곳을 찾아 아들 사 형제를 데리고 진천 절골(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로 이주하여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였다.

박 프란치스코의 가족은 절골에서 2년가량 평온하게 생활하면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나 1868년에 이르러 박해가 더욱 거세어지면서 다시 위험에 놓이게 되었고, 그해 9월 5일(음력 7월 19일)에는 마침내 경기도의 죽산 포졸들이 절골로 들이닥쳤다.

이때 박 프란치스코의 가족은 포졸들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산중으로 피신하던 도중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중에서 박 프란치스코의 아내 오 마르가리타는 어린 자식을 업고 산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많은 매를 맞았다.

한편 가족의 사정이 궁금해진 박 프란치스코는, 동정을 살피려고 산에서 내려오다가 그 동네의 한 비신자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그 비신자는 박 프란치스코에게 ‘내 집에 자면서 동정을 살피는 것이 좋겠다.’며 안심을 시키고는 밤중에 뒷문으로 빠져나가 포졸들에게 박 프란치스코를 밀고하였다.

박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체포되어 아내 오 마르가리타와 함께 죽산으로 끌려갔다. 박 프란치스코는 옥중 생활을 하는 동안 동생인 박 필립보와 맏아들 박 안토니오에게 소식을 전하였는데, 특히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당부가 들어 있었다.

“어린 조카들을 잘 보살피면서 진정으로 천주님을 공경하고, 천주님께서 안배하시는 대로 순명하여 나의 뒤를 따라오도록 하여라.”

이 편지는 집안에 남아 있던 성물과 함께 박해 중에 소실되었다고 한다.

박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는, 이후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켰다. 그런 다음 1868년 9월 28일(음력 8월 13일) 죽산에서 함께 순교하였으니, 당시 박경진 프란치스코의 나이는 33세였다.

박경진 프란치스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박경화 바오로

 

  • 가톨릭 성인 이름
    朴-- Paul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57-1827년 한국

 

 

박경화 바오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울로, 바울루스, 박 바오로, 박바오로, 빠울로, 빠울루스, 파울로, 파울루스, 폴.

 

 

박경화 바오로 자료

‘도항’라는 관명(冠名)으로도 잘 알려진 박경화 바오로[朴甫祿, Paulus]는, 1757년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33세 무렵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본디 그는 제법 재산이 있는 데다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존경까지 받는 몸이었다고 한다. 1839년 대구에서 순교한 박사의 안드레아가 그의 아들이다.

박 바오로는 입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박해로 체포되었으나,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의 배교는 오히려 열심을 배가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는 더 철저하게 신자의 본분을 지키기 시작하였고,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산중으로 이주하기까지 하였다.

이후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박 바오로는 주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그런 다음 교회 서적을 열심히 읽고 비신자들을 입교시키는 데 노력하였으며,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자녀들이 열심히 덕행을 닦을 수 있도록 모범을 보여 주었다.

60세가 지나서 박 바오로는 가족을 데리고 충청도 단양의 가마기라는 곳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이곳에서 그는 1827년의 정해박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교우들을 안심시킨 뒤, 경상도 상주의 멍에목으로 이주하였으며, 4월 그믐에 교우들과 함께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내다가 체포되었다.

상주로 끌려가는 동안 박 바오로는 기쁨에 넘쳐 “우리가 오늘 가는 길에 대해 천주께 감사를 드리자.”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었고, 다른 교우들보다 더 많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의 신앙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형벌을 받는 동안에도 그는, “내 육신은 관장에게 맡기지만, 영혼은 주님의 손에 맡깁니다.”라고 소리쳤다. 게다가 옥중에서는 늙은 자신의 몸을 추스르기보다, 먼저 교우들을 격려하거나 보살펴 주었다.

상주 관장은 도저히 박 바오로의 신앙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대구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이때 그의 자식들도 굳게 신앙을 증언한 뒤에 모두 대구로 끌려갔는데, 장남인 박 안드레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석방되었다.

대구 감사는 연 3일 동안 박 바오로에게 혹형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이 조금도 바뀌지 않자, 사형을 선고한 뒤 옥에 가두도록 하였다. 이후 언젠가 그는 관장의 명령에 따라 한 승려와 교리에 대해 토론을 벌이게 되었는데, 그의 설명에 막힘이 없는 것을 본 관리들이 ‘천주교는 참된 종교’라고 하면서 감탄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박 바오로는 새로 감사가 부임한 뒤 다시 옥에서 끌려 나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노령에다가 여러 차례의 형벌 때문에 더 이상 몸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에 그는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알고는 아들과 교우들을 불러 놓고 이렇게 당부하였다.

“이 옥을 복락소(福樂所)로 생각하시오. 밖에 있는 가족들 때문에 분심을 갖지 말고 내 뒤를 따르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오.”

그런 다음 박경화 바오로는 평온한 기색으로 자신의 영혼을 천주께 드렸으니, 그때가 1827년 11월 15일(음력 9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5개월 뒤에 교우들이 그의 시신을 다른 곳으로 이장하고자 발굴하였는데, 그때까지도 그의 모습이 평소같이 평온해 보였다고 한다.

박경화 바오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박대식 빅토리노

 

  • 가톨릭 성인 이름
    朴大植 Victorinu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2-1868년 한국

 

 

박대식 빅토리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박 빅토리노, 박빅토리노, 빅또리노, 빅또리누스, 빅토리누스.

 

 

박대식 빅토리노 자료

박대식(朴大植) 빅토리누스(또는 빅토리노)는 경상도 김해 예동(현, 경남 김해시 진례면 시례리) 사람으로 천주교에 입교한 다음에는 언제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868년의 박해 때에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과 김해 포졸들이 함께 그의 집으로 몰려와, 박 빅토리노와 그의 조카 박수연을 체포하여 김해 관아로 압송하였다. 당시 그의 조카는 아직 예비 신자였다.

김해 관아의 옥에서 박 빅토리노는 송 마태오와 박 요셉을 동료로 맞이하였다. 그들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신앙을 고백하였기에 3일 만에 대구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고 신앙을 굳게 증언하였다.

대구 감사는 결국 박 빅토리노와 그의 동료들을 결코 배교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따라 박 빅토리노는 조카와 동료 2명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가 참수형을 받았으니, 그때가 1868년 10월 12일(음력 8월 27일)로, 당시 박대식 빅토리노의 나이는 56세였다.

참수형을 집행한 다음, 감사는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려는 명분으로 그들의 머리를 높이 매달게 하였다. 한편, 박 빅토리노의 가족은 그가 순교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대구로 와서 그의 시신을 찾아다 고향에 안장하였다.

박대식 빅토리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박사의 안드레아

 

  • 가톨릭 성인 이름
    朴士儀 Andrew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2-1839년 한국

 

 

박사의 안드레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박 안드레아, 박안드레아, 안드레아스, 앙드레, 앤드루, 앤드류.

 

 

박사의 안드레아 자료

‘사심’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박사의(朴士儀) 안드레아(Andreas)는, 1827년 대구에서 순교한 박경화 바오로의 아들로,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의’는 그의 관명(冠名)이다.

박 안드레아가 태어났을 때 이미 그의 아버지는 천주교에 입교해 있었으며, 따라서 그는 집안의 신앙을 이어받으면서 성장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박 안드레아의 신앙심은 깊어져만 갔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은 주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특히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이웃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 뒤 박 안드레아는, 가족과 함께 충청도 단양의 가마기라는 곳으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이곳에서도 얼마 안 되어 그의 신심과 효성, 애긍 생활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그의 가족은 고향의 재산을 버리고 온 터라 가난하였지만, 교우들이 집으로 찾아오면 모두가 이를 마다하지 않고 정성껏 대접하였다.

1827년의 정해박해가 발생한 뒤, 박 안드레아는 가족과 함께 아버지를 따라 경상도 상주 멍에목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이해 4월 그믐경에 그의 가족은 교우들과 함께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내다가 상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상주로 끌려간 박 안드레아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인내와 용기를 보여 주었다. 그는 어떠한 위협과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언한 뒤 대구로 압송되었다.

대구 감영에서도 박 안드레아는 여러 차례의 형벌을 신앙의 힘으로 참아 내었다. 반면에 노령인 아버지는 차츰 쇠약해지게 되었고, 이를 바라보는 그의 마음은 몹시 아플 수밖에 없었다. 이에 그는 관장에게 아버지를 보살펴 드릴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관장은 이러한 효성에 감동하여 그들 부자를 함께 신문하였고, 옥에서도 함께 있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가 옥중에서 보여준 효행은 모든 이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이후로도 박 안드레아는 수많은 형벌과 옥중에서의 고통을 신앙의 힘으로 참아 냈다.

당시 조정에서는 대구 감사의 사형 선고문을 받고서도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박 안드레아는 동료들과 함께 12년 동안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 다시 한 번 배교 여부를 묻는 문초가 있었는데, 이때 임금에게 올린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박사의는 천주교 교리를 배워 익혔으며, 마음을 다하여 이를 깊이 믿어 왔으므로 법에 따라 처단하려고 합니다.”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박사의 안드레아는 마침내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포졸들은 그의 시신을 수습한 뒤에 예를 다하여 장사를 지내 주었으며, 신자들은 오랫동안 그를 특별히 공경하였다.

박사의 안드레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박상근 마티아

 

  • 가톨릭 성인 이름
    Matthia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중인, 아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37-1867년 한국

 

 

박상근 마티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띠아, 마지아, 마티아스, 박 마티아, 박마티아.

 

 

박상근 마티아 자료

박상근 마티아는 경상도 문경에서 아전(하급 관리)을 지낸 사람으로, 중년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교리의 가르침을 착실하게 지키면서 생활하였다. 또 관청에 있었으므로 신자들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박 마티아는 평소에 숙모인 홍 마리아와 친척들은 물론, 이웃 사람들에게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다. 그뿐만 아니라, 비신자 어린이들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으면, 언제든지 그곳으로 달려가서 대세를 주곤 하였다. 이후 그는, 칼래(N. Calais, 姜) 신부에게 성사를 받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박 마티아는 그해 3월 중순경에 좁쌀을 사려고 칼래 신부가 숨어 있던 한실(현, 경북 문경시 마성면 성내리)에 갔다가 칼래 신부를 문경읍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모셔 와서 숨겨 주었다.

3일 뒤 박 마티아는 칼래 신부와 둘이서 새로운 은신처를 찾으려고 다시 한실로 갔다. 이때 칼래 신부는 한실 교우촌이 보이는 산에 오르면서 박 마티아에게 집으로 되돌아가도록 하였다. 그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박 마티아는 울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신부님 곁을 떠나다니요. 혹시 한실이 습격을 당했다면 신부님께서는 어디로 가시렵니까? 은신하실 곳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신부님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함께 가겠습니다. 신부님께서 이 험한 곳에서 돌아가신다면, 저도 기꺼이 따라서 죽겠습니다.”

그러나 결국 칼래 신부의 명에 순종하여, 그와 이별하고 집으로 되돌아와 있던 박 마티아는, 얼마 뒤에 숙모 홍 마리아와 친척 박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되어 상주로 끌려갔다. 이윽고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그는 “천주교를 봉행한다.”고 명백하게 신앙을 증언하였으며, 어떠한 위협과 형벌에도 굴하지 아니하였다.

그때 상주 옥에는 문경 인근에서 끌려온 교우들이 많이 있었다. 그때 박 마티아는 형벌을 받고 옥으로 돌아오면 함께 있는 교우들에게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자.’고 권면하였고, 많은 교우들이 그러한 모습에 용기를 얻어 순교에 이르렀다. 박상근 마티아는 마침내 관장의 명에 따라 옥중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 1월(음력 1866년 12월)로,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순교하기 직전에 박상근 마티아는 성호를 긋고는 예수 마리아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순교한 다음, 가족이 그의 시신을 찾아다가 고향에 안장하였다.

박상근 마티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8. 박취득 라우렌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朴取得 Lawrence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69?-1799년 한국

 

 

박취득 라우렌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우렌시우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스, 로렌조, 박 라우렌시오, 박라우렌시오.

 

 

박취득 라우렌시오 자료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박취득(朴取得)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또는 라우렌시오)는 고향 인근에 전파된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이후 그는 한양으로 올라가 지황 사바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족과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에 노력하였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박 라우렌시오는 고향의 여러 교우들이 체포되어 옥에 갇히자, 자주 그들을 찾아가 위로하였다. 그러던 중에 하루는 관장 앞으로 가서 “무죄한 사람들을 사납게 매질하고 여러 달 동안 옥에 가둔다는 것은 무서운 죄가 아닙니까?” 하고 항의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해미와 홍주 관아로 이송되어 잔인한 형벌을 당하였지만, 조금도 용기가 꺾이지 않았다. 그러나 옥에 갇힌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 조정에서 석방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으므로 순교의 영광을 얻지는 못하였다.

박 라우렌시오는 이때부터 원 야고보, 방 프란치스코 등과 교류하면서 교리를 실천하고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에 열중하였다. 그러던 중, 1797년의 정사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그에게 체포령이 내려지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지만, 아버지가 대신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면천 관아에 자수하였다.

이윽고 문초가 시작되었고, 박 라우렌시오는 그때마다 천주교 교리를 하나하나 설명해 나갔다. 화가 난 관장이 그에게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후 그는 다시 몇 차례의 문초와 형벌을 받고는 옥에서 여러 달을 지냈다. 그러다가 새 관장이 부임한 뒤 다시 문초를 받았으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신앙을 증거하고 홍주로 압송되었다.

홍주에서도 박 라우렌시오는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답변을 하였고, 갖가지 형벌을 인내로 참아 내었다. 그러자 홍주 영장은 화가 나서 ‘다리를 부러뜨리고, 죽도록 매를 치라.’고 한 뒤 옥에 가두었다. 이어 영장은 감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는데, 그때 감사는 ‘그놈의 다리를 치되, 열네 번을 때려도 항복하지 않거든 아주 죽여 버리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려보냈다.

이후 박 라우렌시오는 여러 달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자주 영장 앞으로 끌려 나가 형벌을 받았다. 또 옷이 벗겨진 채로 진흙 구덩이에 갇혀 밤새껏 추위와 비바람으로 고통을 받은 적도 있었다. 바로 이 무렵에 그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옥에 갇힌 지 두 달쯤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천주의 은총을 얻을 수 있는지 궁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잠결에 ‘십자가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였습니다. 이 발현은 약간 희미하기는 하였지만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박 라우렌시오는 모두 일천사백 대 넘게 맞았고, 8일 동안 물 한 방울을 마시지 못한 적도 있었다. 옥졸들은 이제 그가 죽은 줄로 알고 옷을 벗긴 다음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박 라우렌시오는 다시 옥으로 끌려 들어가자, “나는 굶겨도 죽지 않고 맞아도 죽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목을 매면 죽을 것이오.”라고 옥졸에게 말하였다. 실제로 이튿날 밤에 교우들이 그에게 다가가서 보니 모든 상처가 기적적으로 나아서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제서야 이를 요술이라고 생각한 옥졸이 새끼줄로 그의 목을 졸라 죽였으니, 이때가 1799년 4월 3일(음력 2월 2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약 30세가량이었다.

박취득 라우렌시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9. 방 프란치스코

 

  • 가톨릭 성인 이름
    方 Franci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비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9년 한국

 

 

방 프란치스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방 프란치스코, 방지거, 방프란치스코,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방 프란치스코 자료

방(方)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충청도 면천의 ‘여’ 고을 태생으로 감사의 비장(裨將)을 지낸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교우들 사이에는 ‘방 비장’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우연히 고향 인근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는 누구보다도 빨리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 다음 정산필 베드로 회장과 박취득 라우렌시오, 원시보 야고보 등과 자주 만나 교리를 연구하고 실천하였다.

교리를 실천하는 데 비상한 열심을 가졌던 방 프란치스코는 교우들 중에서도 단연 뛰어나게 되었다. 그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들으면서 자주 눈물을 흘렸으며, 그들과 같이 순교하기를 간절히 열망하였다.

그러던 중에 1797년의 정사박해로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방 프란치스코도 다음 해에, 홍주에서 체포되어 6개월 동안 많은 형벌을 당하고 사형 선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때 그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은 교우 두 명은 관례에 따라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받고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방 프란치스코는 오히려 기쁨에 가득 찬 얼굴로 천주와 동정 마리아께 감사드리고 나서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것도 천주의 은혜이지만, 관장이 이렇게 후한 대우를 해 주는 것도 섭리의 은혜인데, 어째서 당신들은 슬퍼하고 풀이 죽어 있소. 그것은 마귀의 유혹이오. 만일 우리가 천당을 얻을 이렇게도 좋은 기회를 놓친다면, 나중에 또 어떤 기회를 기대할 수 있겠소.”

이때 천주께서 방 프란치스코의 권고와 격려에 효력을 부여해 주셨다. 그 결과 그의 두 동료들은 자신들의 나약함을 스스로 뉘우쳤고, 오래지 않아 거룩한 기쁨을 같이하였다. 그들 셋은 함께 홍주 읍내에서 순교하였는데, 순교일은 1799년 1월 21일(음력 1798년 12월 16일)이었다.

방 프란치스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0. 배관겸 프란치스코

 

  • 가톨릭 성인 이름
    裵-- Franci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40?-1800년 한국

 

 

배관겸 프란치스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방지거, 배 프란치스코, 배프란치스코,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배관겸 프란치스코 자료

충청도 당진의 진목(현, 충남 당진군 석문면 장항리) 출신인 배(裵)관겸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어 입교하였다. 관명(冠名)은 ‘발은’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고향 진목은 충청도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내포 지역 안에 있었다.

배 프란치스코는 1791년의 신해박해로 체포된 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신앙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석방되었으나, 집으로 돌아와서는 곧바로 자신의 죄를 진실히 뉘우치고 다시 열심히 하느님을 섬겼다. 이후 그는 서산으로 이주하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 이웃에 있던 면천의 양제(현, 충남 당진군 순성면 양유리)로 돌아와 교우들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이룩하였다.

1794년 말 조선에 입국한 주 야고보 신부는 다음 해부터 지방의 신앙 공동체를 순방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배 프란치스코도 이 소식을 들었다. 이에 그는 1798년에 신부를 모실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교우들과 함께 양제 마을 안에 강당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이미 정사박해가 충청도 지역을 휩쓸고 있을 때였다. 실제로 양제의 교우들이 강당을 마련한 그해 10월 3일, 한 밀고자가 포졸들을 이끌고 양제 마을로 들이닥쳤다.

포졸들은 곧바로 배 프란치스코를 체포하여 홍주로 압송하였다. 관장은 그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면서 ‘교우들이 있는 곳을 대고, 천주교 서적을 갖다 바치라.’고 강요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에 홍주 관장은 화가 나서 사실 그대로를 공주 감사에게 보고하였고, 감사는 프란치스코를 청주 병영(兵營)으로 이송하여 문초하도록 하였다.

청주에 이르러 배 프란치스코는 원 야고보 등 다른 교우들을 만나 고통을 함께하였다. 그의 신앙은 여전히 굳건하였으며, 온몸의 살이 헤어지고 팔다리가 부러져 뼈가 드러날 정도가 되어서도 그는 영웅적인 인내로 모든 것을 참아 내었다. 그러나 형리들의 매질이 계속되면서 끝내 이를 이겨 내지 못하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0년 1월 7일(음력 1799년 12월 1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약 60세가량이었다.

배관겸 프란치스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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