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세례명/세례명 날짜 찾기

5월 29일 남자세례명 115가지 (3/6)

피어나네 2023. 5. 29.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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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115분 자료를 총 여섯 페이지 가나다 순서로 정리했어요. 5월 29일 천주교 세례명 115분 중 20분 세 번째 입니다.

 

 

  1. 5월 29일 남자세례명 115가지 (1/6)

  2. 5월 29일 남자세례명 115가지 (2/6)

  3. 5월 29일 남자세례명 115가지 (3/6)

  4. 5월 29일 남자세례명 115가지 (4/6)

  5. 5월 29일 남자세례명 115가지 (5/6)

  6. 5월 29일 남자세례명 115가지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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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 여자세례명 강경복 수산나, 강완숙 골룸바, 구성열 바르바라, 권천례 데레사, 김연이 율리아나,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문영인 비비안나, 보나, 심아기 바르바라, 심조이 바르바라, 오 마르가리타, 우르술라 레도호프스카, 윤운혜 루치아, 윤점혜 아가타, 이 안나,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이성례 마리아, 이순이 루갈다, 이시임 안나, 이조이 막달레나, 정복혜 칸디다, 정순매 바르바라, 최 비르지타, 최조이 바르바라, 한신애 아가타, 총 26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5월 29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15가지 (3/6)

 

 

 

 

5월 29일 남자세례명 목록 (3/6)

 

  1. 베드로 페트로니

  2. 빌리암 아르노

  3. 서석봉 안드레아

  4. 손경윤 제르바시오

  5. 송 베네딕토

  6. 송 베드로

  7. 스테파노

  8. 시시니오

  9. 신석복 마르코

  10. 신태보 베드로

  11. 안군심 리카르도

  12. 알렉산데르

  13. 양재현 마르티노

  14. 엘레우테리오

  15. 오반지 바오로

  16. 오종례 야고보

  17. 원경도 요한

  18. 원시보 야고보

  19. 원시장 베드로

  20. 유문석 요한

 

5월 29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15가지 (3/6)

 

 

1. 베드로 페트로니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Petroni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361년

 

 

베드로 페트로니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 페트로니 자료

이탈리아 시에나(Siena)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베드로 페트로니(Petrus Petroni)는 어릴 때부터 하느님의 일에 대하여 놀라운 관심과 행동들을 표현하였다.

그는 멀리 떨어져 혼자서 기도하기를 즐겨하였으며, 거리에서 부랑자들을 발견하면 그들을 도우며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에 마치아노에 카르투지오 수도원이 세워지자 그는 온갖 반대를 물리치고 17세의 나이로 입회하였다.

그 후 사제가 된 그는 여러 가지 놀라운 은혜와 초자연적인 지식을 받았다. 그는 당시 유명한 보카치오가 속된 활동을 그만두지 않으면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과연 그대로 되었다는 것이다. 보카치오는 처음에는 화를 냈으나 끝내는 개종했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빌리암 아르노

 

  • 가톨릭 성인 이름
    William Arnaud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242년 툴루즈

 

 

빌리암 아르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굴리엘모, 빌헬름, 윌리암, 윌리엄.

 

 

빌리암 아르노 자료

도미니코 회원인 빌리암 아르노는 같은 수도회의 두 명의 동료와 함께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의 명으로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Languedoc)로 파견되어 스테파누스(Stephanus)와 라이문두스(Raymundus) 등과 함께 알비파(Albigenses)와 맞서 싸웠다.

하지만 그들은 알비파에 의해 툴루즈, 나르본(Narbonne) 등 여러 지방에서 추방을 당했다. 아비뇽(Avignon)에서 설교한 빌리암 아르노와 그의 동료들은 밤을 이용하여 툴루즈의 레이몬드 7세 백작의 성으로 피신하였으나, 성을 지키던 군인들에게 발각되어 모두 순교하였다.

이때 빌리암 아르노와 11명의 동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도미니코회와 작은 형제회의 순교자들이다. 그들은 1866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툴루즈의 순교자들로 시복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빌리암 아르노는 윌리엄 아르노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서석봉 안드레아

 

  • 가톨릭 성인 이름
    徐碩奉 Andrew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6년 한국

 

 

서석봉 안드레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서 안드레아, 서안드레아, 안드레아스, 앙드레, 앤드루, 앤드류.

 

 

서석봉 안드레아 자료

서석봉(徐碩奉) 안드레아(Andreas)는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구성열 바르바라의 남편이며, 1815년 대구에서 옥사로 순교한 최봉한 프란치스코의 장인이다. 뒷날 신자들 사이에서는 그가 ‘손골(현,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박씨(朴氏)의 외조부’라고 전해져 왔다.

서 안드레아가 어디에서 태어나 언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과부였던 구 바르바라와 혼인한 서 안드레아는 사위인 최 프란치스코 부부와 함께 교우들이 모여 사는 경상도 청송의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리)으로 이주하여 그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815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 밀고자를 앞세우고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경주 진영에서는 서 안드레아에게 문초와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여기에 굴하지 않았고, 경주 관장은 그를 아내와 사위 등과 함께 대구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대구에서도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형벌을 받았지만, 이를 백절불굴의 항구심으로 참아 내면서 신앙을 고수하였다.

서 안드레아는 동료들과 함께 1815년 11월 18일(음력 10월 18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형벌에 인해 쇠약해진 탓에 옥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중에 순교하고 말았으니, 이때가 1816년 음력 10월 21일 이전이었다. 당시 대구 감사가 서석봉 안드레아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서석봉과 구성열 부부는 함께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뉘우칠 줄을 모른다.”

서석봉 안드레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손경윤 제르바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孫敬允 Gervase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약재상,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60-1802년 한국

 

 

손경윤 제르바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게르바시오, 게르바시우스, 손 제르바시오, 손제르바시오, 제르바시우스, 제르바씨오, 제르바씨우스.

 

 

손경윤 제르바시오 자료

‘백원’(伯源)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손경윤(孫敬允) 제르바시우스(Gervasius, 또는 제르바시오)는 1760년 한양의 양인(良人) 집안에서 태어나 안국동에서 약방을 운영하면서 생활하였다. 1790년 최필공 토마스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에 입교한 그는, 이듬해의 신해박해 때에 최필공 토마스와 최인길 마티아 등과 함께 체포되어 형조에 갇혔다가 석방되었다.

석방되자마자 다시 신앙생활을 회복한 손 제르바시오는 아우인 손경욱 프로타시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함께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다가 1796년에 다시 형조에 체포되어 여러 차례 형벌을 당한 뒤 석방되었다.

손 제르바시오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석방되자마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 일을 도왔다. 또한 주문모 야고보 신부로부터 회장에 임명된 뒤로는 자신의 직분을 열심히 수행하였다.

그는 최창현 요한과 최필공 토마스를 비롯하여, 홍익만 안토니오, 김이우 바르나바 등과 함께 공동체 활동을 하였으며, 정광수 바르나바를 도와 신부가 거처할 집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주 주 야고보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여하였다.

이후 손 제르바시오는 교우들의 신앙생활을 도우려고 아주 큰 집을 매입하였다. 그런 다음 바깥채는 술집으로 꾸미고, 안채는 교우들을 불러 가르치는 장소로 삼아 효과 있게 신앙 공동체를 보호하였다. 그리고 틈틈이 교리서를 베껴서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손 제르바시오 회장은 이러한 열심 때문에, 1801년의 신유박해가 시작되자마자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밀고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아우와 함께 경기도의 양근, 교하, 양지 등지로 피신해 다니면서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자기 대신 처자가 포도청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죽음을 무릅쓰고 관청에 자수하였다.

손 제르바시오 회장은 우선 포도청에서 갖은 형벌과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형벌을 이겨내지 못하고 마음이 약해졌으나, 형조로 이송되어서는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굳은 신앙으로 모든 시련을 극복하였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 밖 새남터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사형 선고를 받기 전에 손경운 제르바시오가 한 최후 진술은 이러하였다.

“일찍부터 천주교에 깊이 빠져 하루아침에 이를 바꾸기가 어려웠고, 일상의 고질병처럼 되었습니다. … 저는 천주교 때문에 여러 번 체포된 뒤에도 나라의 금령을 무시하여 (천주교에) 미혹된 마음을 바꿀 줄 몰랐습니다. 교우들과 체결하여 깊이 교리를 연구하였고, 널리 교리를 전하였습니다.”

손경윤 제르바시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송 베네딕토

 

  • 가톨릭 성인 이름
    宋 Benedict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8-1867년 한국

 

 

송 베네딕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네데토, 베네딕도, 베네딕또, 베네딕뚜스, 베네딕투스, 베네딕트, 분도, 송베네딕토.

 

 

송 베네딕토 자료

송(宋) 베네딕투스(Benedictus, 또는 베네딕토)는 충청도 충주 서촌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쳐 가정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온 가족이 함께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송 베네딕토는 좀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아들 가족과 함께 진천 배티 교우촌(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교우촌 신자들과 어울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이듬해 봄에는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러 다니던 한양 포졸들이 배티로 들이닥쳤다.

배티로 몰려온 포졸들은 그곳에 거주하던 송 베네딕토를 비롯하여 아들 가족 모두를 체포하여 진천 관아로 압송하였다. 그런 다음 경기도의 죽산 관아로 끌고 가서 가두었다가 다시 한양으로 이송하였는데, 이때 체포된 이들은 나이가 가장 많은 송 베네딕토와 그의 아들 송 베드로와 송 베드로의 딸, 송 베드로의 며느리인 이 안나, 그리고 이 안나의 아이 등 모두 5명이었다.

이들 가족은 한양으로 압송된 뒤에 모두 신앙을 굳게 지킨 다음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으로 당시 송 베네딕토의 나이는 69세였다.

송 베네딕토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송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宋 Peter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21-1867년 한국

 

 

송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송베드로,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송 베드로 자료

송(宋) 베드로(Petrus)는 충청도 충주 서촌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우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장성한 뒤에는 부친 송 베네딕토를 모시면서 성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 데 열중하였다.

송 베드로는 부친인 송 베네딕토와 함께 가족을 데리고 진천 배티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이듬해 봄에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러 다니던 한양 포졸들이 배티로 들이닥쳤다.

배티로 몰려온 포졸들은 그곳에 거주하던 송 베드로의 가족 모두를 체포하여 진천 관아로 압송하였다. 그런 다음 경기도의 죽산 관아로 끌고 가서 가두었다가 다시 한양으로 이송하였는데, 이때 체포된 이들은 송 베드로와 그의 부친 송 베네딕토, 그리고 그의 딸과 며느리 이 안나, 이 안나의 아이 등 모두 5명이었다.

송 베드로는 한양으로 압송된 뒤에 신앙을 굳게 지킨 다음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으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송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스테파노

 

  • 가톨릭 성인 이름
    Stephen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242년 툴루즈

 

 

스테파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스더, 스테파누스, 스테판.

 

 

스테파노 자료

도미니코 회원인 빌리암 아르노(William Arnaud)는 같은 수도회의 두 명의 동료와 함께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의 명으로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Languedoc)로 파견되어 스테파누스(Stephanus, 또는 스테파노)와 라이문두스(Raymundus) 등과 함께 알비파(Albigenses)와 맞서 싸웠다. 하지만 그들은 알비파에 의해 툴루즈, 나르본(Narbonne) 등 여러 지방에서 추방을 당했다.

아비뇽(Avignon)에서 설교한 빌리암 아르노와 그의 동료들은 밤을 이용하여 툴루즈의 레이몬드 7세 백작의 성으로 피신하였으나, 성을 지키던 군인들에게 발각되어 모두 순교하였다.

이때 빌리암 아르노와 11명의 동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도미니코회와 작은 형제회의 순교자들이다. 그들은 1866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툴루즈의 순교자들로 시복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시시니오

 

  • 가톨릭 성인 이름
    Sisin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97년

 

 

시시니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시시니우스.

 

 

시시니오 자료

테오도시우스 황제 치하에서 이탈리아 밀라노(Milano)에 거주하던 많은 이방인들 가운데 카파도키아(Cappadocia) 태생인 성 시시니우스(또는 시시니오) 그리고 마르티리우스(Martyrius)와 알렉산데르(Alexander) 형제들이 가장 유명하였다.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는 그들을 트렌토(Trento)의 주교 성 비길리우스(Vigilius)에게 추천하여 설교 일을 맡기게 하였다. 시시니우스는 부제로 그리고 마르티리우스 형제는 독서자로 선임되어, 이들 세 사람이 신자들이 별로 없던 알프스 건너편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들의 전교 여행은 많은 성과를 내게 되어 성당을 짓기까지 하였으나, 선교사들의 성공을 달갑잖게 여기던 주민들이 새로 영세한 신자들을 위협하고 그들을 몽둥이로 때려 시시니우스는 즉사하고 말았다. 마르티리우스는 정원으로 피신하였으나 곧 발각되어 그 다음날 처형되었고, 알렉산데르 역시 처참한 죽음을 당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신석복 마르코

 

  • 가톨릭 성인 이름
    申錫福 Mark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상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28-1866년 한국

 

 

신석복 마르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꼬, 마르꾸스, 마르쿠스, 마크, 말구, 신 마르코, 신마르코.

 

 

신석복 마르코 자료

경상도 밀양의 명례(현, 경남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 사람인 신석복(申錫福) 마르코(Marcus)는 장사를 하면서 생활하던 신자로, 1866년 병인박해 때 창원 마포로 장사를 나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오 야고보 등과 함께 대구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때는 신 마르코가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해 온 지 10여 년이 지난 뒤였다.

이에 앞서 대구 포졸들은 신 마르코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명례로 들이닥쳐 그의 집을 찾아낸 뒤 재산을 탈취하였다. 또한 여러 날을 수소문한 끝에 그가 장사를 하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신 마르코가 돌아올 만한 길로 달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김해 가산이라는 곳에서 신 마르코를 만나 천주교 신자임을 확인한 다음, 곧장 체포하여 밀양으로 압송하였다.

포졸들은 밀양에서 하루를 머무는 동안, 신 마르코에게 무수한 형벌을 가하였다. 그런 다음 그를 대구로 끌고 갔는데, 이때 그 사실을 알게 된 신 마르코의 형제들이 돈을 마련해 가지고 대구로 가는 일행을 뒤쫓았다. 그들 일행을 만난 신 마르코의 형제들은 포졸들에게 수작을 하며, 신 마르코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그는 형제들에게 말하기를 ‘한 푼도 포졸들에게 주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래서 신 마르코는 대구로 가는 동안 더 자주 능욕을 당해야만 하였다. 그리고 대구에 도착해서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 유혈이 낭자하고 뼈가 부러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며, “저를 놓아주신다 하여도 다시 천주를 봉행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관장은 이 말을 듣자 화가 나서 다시 신 마르코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게 하였다. 그런 다음, 며칠을 옥에 가두었다가 교수형을 집행하였으니, 이때가 1866년 3월 31일(또는 3월 18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이후 신석복 마르코의 가족이 그의 시신을 찾아다 고향에 안장하였다.

신석복 마르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신태보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申太甫 Peter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69?-1839년 한국

 

 

신태보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신 베드로, 신베드로,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신태보 베드로 자료

경기도의 용인 근처에서 태어난 신태보(申太甫) 베드로(Petrus)는, 1795년 무렵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신자가 되었다. 그의 집안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뒷날의 행적에서 미루어볼 때 그는 교육을 통해 어느 정도의 학식을 습득했던 것 같다. 1840년 전주에서 순교한 최조이 바르바라는 그의 며느리였다.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10년이 지난 뒤, 사촌인 이여진 요한과 함께 입교한 신 베드로는 일찍부터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만나 성사를 받고자 하였지만, 주 야고보 신부가 워낙 비밀리에 활동하였던 탓에 만날 수가 없었다.

이후 신 베드로는 1801년 신유박해가 끝난 뒤, 용인에 거주하던 순교자의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로 이주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그러다가 사촌 이 요한을 비롯하여 다른 교우들과 연락이 닿게 되자, 그들과 함께 교회 재건 운동을 의논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교우들이 가장 시급한 일로 생각한 것이 바로 북경에서 다시 성직자를 영입해 오는 일이었다. 그 결과, 1811년 말에 이 요한이 교우 한 명과 함께 북경으로 가서, 신자들의 서한 두 통을 전하게 되었다.

조선 신자들의 성직자 영입 운동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그때마다 신 베드로는 이를 위한 경비를 마련하는 데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신자들의 희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신 베드로는 영혼을 구하는 일에 힘쓰기로 작정하고,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생활하다가 경상도 상주의 잣골에 정착하여 은둔 생활을 하였다. 그동안 그는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곤 하였다.

1827년 전라도에서 정해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신 베드로는 자신이 살던 곳에서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그는 가족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상주의 포졸들과 함께 잣골로 들이닥쳤다. 당시 포졸들은 이미 체포된 신자들을 통해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나누어준 사실과 그의 거주지를 알고 있었다.

신 베드로는 이내 전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뒷날 그 자신이 성 샤스탕(St. J. Chastan, 鄭) 신부의 명에 따라 기록한 ‘옥중 수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에서 다음의 내용은, 그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 했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내 다리는 살이 헤어져서 뼈가 드러나 보였으며, 앉을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내 상처는 곪아서 참을 수 없는 악취를 풍겼다. 더욱이 내 방은 벌레와 이투성이였으므로, 아무도 내게 근접할 용기를 내지 못하였다. 다행히 건강한 몇몇 교우들이 부축을 해 주어 몸을 좀 움직일 수가 있었는데, 그들은 가끔 내 방을 치워 주기도 하였다. 이 애덕의 행위를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이처럼 형벌을 당하면서도 신 베드로는 결코 교회 서적과 동료들이 있는 곳을 밀고하지 않았다. 또 관장이 배교를 강요할 때면, “천주교가 없이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욕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감사는 할 수 없이 신 베드로를 다른 신자들과 함께 옥에 가두어 두도록 하였고, 그는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동안 그는 때때로 마음이 약해진 적도 있었지만, 언제나 용맹한 신앙심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에, 임금의 명에 따라 전주 장터(숲정이)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가량이었다.

신태보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안군심 리카르도

 

  • 가톨릭 성인 이름
    安-- Richard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74-1835년 한국

 

 

안군심 리카르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안 리카르도, 안리카르도.

 

 

안군심 리카르도 자료

1774년 충청도 보령에서 태어난 안군심 리카르두스(Richardus, 또는 리카르도)는 청년 시절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려고 가족과 함께 고향을 떠나 경상도로 이주하였으며, 가족의 생계를 위해 교회 서적을 베끼는 일에 몰두하면서 살았다.

본디 명랑한 데다가 겸손하고 친절하였던 안 리카르도는 누구나 애덕으로 대하였고, 그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정성스럽게 가르쳐 주는 것을 낙으로 알고 생활하였다. 또 그는 자식들의 교육에도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기도와 묵상을 하루도 빠트리지 않았으며, 보통 일주일에 세 번씩은 금식재를 지켰다.

언제인가 안 리카르도는 포졸들에게 체포된 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모호한 말로 대답하여 석방되었고, 이후로는 언제나 그때 분명하게 신앙을 증언하지 못한 것과 용기가 부족하였던 것을 후회하였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안 리카르도는, 언젠가는 자신도 체포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동안 교우들에게 나누어 준 서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얼마 동안 숨어 지내면서 순교할 준비를 하였는데, 상주 포졸들이 마침내 그곳을 찾아내서 그를 체포하였다.

상주 관장은 안 리카르도를 보자마자 천주교 신자인지를 확인하였다. 그런 다음 교리를 외워 보라고 하자, 그는 몇 가지 중요한 교리를 외우고서는 간단하면서도 명백하게 천주교 교리에 대해 설명하였다. 또 관장이, “국법을 어기는 것은 임금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냐?”라고 하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천주는 우주의 큰 임금이고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므로, 우리는 그분을 만물 위에 공경해야 합니다. 임금님과 관장님과 부모님은 천주 다음으로 공경해야 합니다.”

이어 관장은 천주를 배반하고 동료들을 밀고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안 리카르도는 이를 거절하고 형벌을 받았다. 이후에도 그는 자주 옥에서 끌려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언제나 끈기 있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그를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대구로 이송토록 하였다.

안군심 리카르도는 대구 감영에 도착한 뒤에도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의 몸은 이내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고통을 당하면 당할수록 천주에 대한 그의 사랑은 더욱 열렬해지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사형 선고를 받고는 다시 옥으로 끌려가 동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8년 동안 옥에서 고통을 받다가 1835년 이질에 걸려 사망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61세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알렉산데르

 

  • 가톨릭 성인 이름
    Alexander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97년

 

 

알렉산데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알레산드로, 알렉산더, 알렉산델, 알렉싼데르, 알렉싼델.

 

 

알렉산데르 자료

테오도시우스 황제 치하에서 이탈리아 밀라노(Milano)에 거주하던 많은 이방인들 가운데 카파도키아(Cappadocia) 태생인 성 시시니우스(Sisinius) 그리고 마르티리우스(Martyrius)와 알렉산데르 형제들이 가장 유명하였다.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는 그들을 트렌토(Trento)의 주교 성 비길리우스(Vigilius)에게 추천하여 설교 일을 맡기게 하였다. 시시니우스는 부제로 그리고 마르티리우스 형제는 독서자로 선임되어, 이들 세 사람이 신자들이 별로 없던 알프스 건너편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들의 전교 여행은 많은 성과를 내게 되어 성당을 짓기까지 하였으나, 선교사들의 성공을 달갑잖게 여기던 주민들이 새로 영세한 신자들을 위협하고 그들을 몽둥이로 때려 시시니우스는 즉사하고 말았다. 마르티리우스는 정원으로 피신하였으나 곧 발각되어 그 다음날 처형되었고, 알렉산데르 역시 처참한 죽음을 당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양재현 마르티노

 

  • 가톨릭 성인 이름
    梁在鉉 Martin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좌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27-1868년 한국

 

 

양재현 마르티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띠노, 마르띠누스, 마르티누스, 마틴, 말딩, 양 마르티노, 양마르티노.

 

 

양재현 마르티노 자료

1827년에 태어난 양재현(梁在鉉) 마르티누스(Martinus, 또는 마르티노)는 언제부터인가 경상도 동래의 북문 밖에서 살았다. 그는 동래에서 좌수(坐首)라는 직책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정식 요한 회장을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후 그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68년의 박해 때에 양 마르티노는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알려져 동래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그는 포졸들이 집으로 들이닥치자 태연하게 그들을 맞이하며 관아로 끌려갔다.

이윽고 관장 앞으로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양 마르티노는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는 형벌을 달게 받았다. 또한 관장이 배교를 강요하자, “절대로 천주교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하면서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다시 문초를 받고 수군의 병영으로 이송되었다.

양 마르티노는 수군의 병영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배교를 거부하였기에 옥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옥에 들어가서는 옥졸의 꾀임에 빠져 ‘돈을 주겠다.’고 약속한 뒤 몰래 그곳을 빠져 나와 집으로 되돌아갔다.

양 마르티노가 집으로 돌아가자 옥졸은 관장에게 가서 ‘죄수가 몰래 도망쳤다.’며 거짓으로 보고하였다. 이내 포졸들이 다시 양 마르티노의 집으로 몰려왔고, 그는 곧장 다시 체포되어 동래 관아로 압송되었다. 양 마르티노의 신앙심은 이때부터 다시 굳건해지게 되었다. 그는 혹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천지의 큰 부모이신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신앙을 증언하였다.

이후에도, 양 마르티노는 통영에 있는 수군의 병영으로 이송되어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동래 관아로 끌려와 옥중에서 이정식 요한 회장과 동료 교우들을 만나, 서로를 위로하면서 신앙을 굳게 지키기로 약속하였다.

동래 관장은 마침내 사형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옥에 있는 신자들을 끌어내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로 압송하였다. 이때 양재현 마르티노는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고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에 칼을 받았다. 그의 나이는 41세로 1868년 9월이었다. 당시 그의 시신은 가족에 의해 거두어져 사형장 인근에 안장되었다.

양재현 마르티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엘레우테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leuthe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례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로카 다르체

 

 

엘레우테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엘레우떼리오, 엘레우떼리우스, 엘레우테리우스.

 

 

엘레우테리오 자료

영국의 순례자인 성 엘레우테리우스(또는 엘레우테리오)는 성 그림발두스(Grimbaldus)와 성 풀쿠스(Fulcus)의 형제로 전해진다. 그는 이탈리아 남부 아퀴노(Aquino) 부근 로카 다르체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주요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오반지 바오로

 

  • 가톨릭 성인 이름
    吳盤池 Paul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3-1866년 한국

 

 

오반지 바오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오 바오로, 오바오로, 파울로, 파울루스, 폴.

 

 

오반지 바오로 자료

오반지(吳盤池) 바오로(Paulus)는 충청도 진천의 반지(현, 충북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던 집안 출신으로, 비교적 풍요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장성할 때까지 공부와는 담을 쌓았으며, 혼인한 뒤에는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다 날려 버리고 말았다.

오 바오로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것은 40세가 훨씬 지난 1857-1858년 무렵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아주 성실한 사람이 되었는데, 어느 날에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과 함께 진천의 지장골(현, 충북 진천군 진천읍 지암리)로 이주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그리스도교적인 체념으로 가난을 참아 견디었으며,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본분을 아주 정확하게 지켜 나갔다.

오 바오로의 열심은 이내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청주 병영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그를 체포하기 위해 지장골로 들이닥쳤다. 그는 한 젊은이와 함께 체포되어 진천에 투옥되었다가 청주로 이송되었으니, 이때가 3월 13일(음력 1월 27일)이었다.

청주 병영으로 압송된 오 바오로는 모진 형벌과 문초 가운데서도 교회 일을 조금도 누설하지 않았으며, 단지 ‘나는 천주교인이요.’라는 말만을 되풀이하였다. 한번은 형벌을 받고 옥으로 끌려갈 때, 형리들이 몽둥이로 그의 머리를 내리쳐 피가 솟아나자, 오 바오로는 대뜸 “나를 죽이고 싶으면 죽여도 좋소. 하지만 관장의 명령도 없는데 왜 마음대로 때리는 거요”라고 항의하였다.

당시 옥에는, 오 바오로와 함께 체포된 젊은이와 새로 체포되어 온, 배 바오로라는 교우가 있었다. 관장은 이들 세 사람을 죽일 생각이 없었으므로 ‘배교한다.’는 한마디만을 얻어 내려고 여러 방법으로 유혹하였지만, 오 바오로는 조금도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권면에도 함께 갇혀 있던 동료들은 관장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오 바오로가 옥중에 있을 때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이 적혀 있었다.

“교우로서의 본분을 잘 지키고 남의 빚을 갚도록 하여라. 그리고 만일 체포되면 주님을 위해 순교하도록 하여라.”

관장은 어떠한 형벌과 유혹으로도 오 바오로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알고는 마침내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이때 오 바오로는 “만 번 죽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할 수 없다.”는 말로 신앙을 증언하고, 청주 남문 밖으로 끌려 나갔다. 그런 다음 사형 집행을 관장하는 관리가 마지막으로 배교를 유도하려고 종이를 갖다 주자, 그는 끝까지 ‘배교한다는 말을 쓸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바로 그때였다. 오반지 바오로의 옆에 있던 사형 집행인이 그에게 달려들어 군중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목을 졸라 죽이고 말았다. 이렇게 오 바오로가 순교한 날은 1866년 3월 27일(음력 2월 11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그가 순교한 날에는 ‘백일청천에 무지개가 떠서 그의 시체에서부터 하늘까지 닿았다.”고 한다. 오반지 바오로의 시신은 아들과 신자들 몇 명에 의해 지장골로 옮겨져 그 인근에 안장되었다.

오반지 바오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오종례 야고보

 

  • 가톨릭 성인 이름
    吳宗禮 Jame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21-1840년 한국

 

 

오종례 야고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야고버, 야고부스, 야코보, 야코부스, 오 야고보, 오야고보, 자크, 제임스.

 

 

오종례 야고보 자료

오종례(吳宗禮) 야고보(Jacobus)는 충청도 은진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주교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리고 장성한 뒤로는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오 야고보는 혼인 직후 전라도 고산에서 살았는데, 진산에 살고 있던 형을 찾아갔다가 형과 여러 다른 교우와 함께 1839년 7월에 체포되었다.

이내 전주로 끌려간 오 야고보는 관장 앞에서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이때 영장이 “너는 아직 젊은 나이니, 다시는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하면 놓아주겠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천주를 섬기는 행복을 알고 있는데, 어찌 형벌이 두려워 천주를 배반하겠습니까?” 그러자 관장은 달콤한 말로는 그를 배교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고문을 하라고 지시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간 오 야고보는, 여러 차례에 걸쳐 갖가지 형벌을 받았으나 꿋꿋하게 이를 참아낸 다음,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는 그가 오래전부터 바라던 일이었다. 반면에 그는, 형이 배교하는 것을 보는 슬픔을 맛보아야만 했다.

옥으로 돌아온 오 야고보는 다른 증거자들과 고통을 나누었다. 그들은 여러 달 동안을 옥에 버려진 채 있었는데, 마침내 모든 절차가 끝나고 사형 집행일이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오종례 야고보는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40년 1월 4일(음력 1839년 11월 30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그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오종례는 아주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가족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이웃에게도 전교하였습니다. 또 입으로 십계명을 외우면서 조상의 가르침을 버리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다섯 차례에 걸쳐 문초를 받으면서도 아주 큰 기쁨이 마음에 있다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요망한 괴물을 청명한 세상에 그대로 둘 수는 없다.”

오종례 야고보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원경도 요한

 

  • 가톨릭 성인 이름
    元景道 John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74?-1801년 한국

 

 

원경도 요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원 요한, 원요한,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원경도 요한 자료

‘사신’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원경도(元景道) 요한(Joannes)은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물세 살 되던 1797년에 사촌 이중배 마르티노와 함께 김건순 요사팟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후 원 요한은 온 가족을 입교시켰으며, 최창주 마르첼리노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1800년의 예수 부활 대축일에 원 요한은 이 마르티노와 함께 동료의 집으로 가서 부활 삼종 기도를 바치고 성가를 부르면서 하루를 보내다가 체포되었다. 원 요한과 동료들이 여주 관아로 끌려가는 도중에 일행은 원 요한의 집을 지나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그의 노모가 눈물을 흘리면서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게 해 달라고 포졸들에게 부탁하였으나, 포졸들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관아에 도착하자마자 여주 관장은 그들 일행에게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고, 신자들을 밀고하라고 독촉하였다. 이때 원 요한은 일행을 대표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천주교에서는 다른 사람을 밀고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천주를 배반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이후에도 그들은 6개월 이상이나 옥에 갇혀 있으면서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당시 옥중에는 뒤에 체포된 원 요한의 장인인 최 마르첼리노도 함께 있었다.

그동안 원 요한은 여러 차례의 형벌로 인해 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그 상처가 기적적으로 낫곤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늙은 여종이 옥으로 달려와 노모와 부인이 슬퍼하고 있는 사정을 전하면서 그의 마음을 움직여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촌인 이 마르티노의 도움을 받아 흔들리려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1800년 10월에 원 요한과 동료들은 경기 감영으로 이송되어 다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 신유박해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자, 경기 감사는 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을 다시 끌어내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원 요한은 이에 굴하지 않았으며, 동료들과 함께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서로 용기를 북돋워 나갔다.

감사는 마침내 그들로부터 최후 진술을 받고 사형을 선고한 뒤, 이를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때 감사가 내린 원 요한의 사형 선고문에는 “천주교에 깊이 빠져 교회의 지시대로 형에게 제사를 폐지하도록 권하였으니, 이는 인간의 도리를 모두 끊어 버린 행위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 뒤 조정에서는 ‘고향으로 돌려보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원경도 요한은, 동료들과 함께 여주로 압송되어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27세 또는 28세였다.

원경도 요한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8. 원시보 야고보

 

  • 가톨릭 성인 이름
    元-- Jame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30-1799년 한국

 

 

원시보 야고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야고버, 야고부스, 야코보, 야코부스, 원 야고보, 원야고보, 자크, 제임스.

 

 

원시보 야고보 자료

원(元)시보 야고보(Jacobus)는 충청도 홍주 응정리(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의 양인(良人) 집안 출신이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몇 해가 지난 1788-1789년 무렵, 곧 그의 나이 60세가 다 되어서야 사촌 동생 원시장 베드로와 함께 천주교 교리를 듣고 입교하였다. ‘시보’는 그의 관명(冠名)이다.

본디 성품이 어질고 순하며 정직하고 활달하였던 야고보는, 입교하자마자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며 온갖 덕행을 실천하였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재산을 희사하였고, 금요일마다 금식을 하였으며, 이곳저곳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이름은 점차 인근 지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자, 홍주 관장은 포졸들을 보내 곧장 원 야고보와 사촌인 원 베드로를 체포해 오도록 하였다. 이때 원 야고보는 친구들의 권고에 따라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으나, 원 베드로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갖가지 혹형을 받은 뒤, 1793년에 순교하였다. 뒤에 이 소식을 들은 원 야고보는 사촌과 함께 순교의 영광을 얻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1795년 무렵, 원 야고보는 주 야고보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첩을 두고 있다는 이유로 주 신부에게 성사를 받지 못하자, 집으로 돌아가서는 바로 첩을 내보냈다.

이로부터 2년 후에는 정사박해가 충청도 전역을 휩쓸게 되었다. 이 와중에서 원 야고보도 1798년에 체포되어 덕산 관아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68세였다. 그러나 그는 갖가지 혹형에도 굴하지 않고, “천주를 섬기고 제 영혼을 구하고자 천주교를 봉행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런 다음 홍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덕산으로 끌려와 몹시 두들겨 맞았으며, 형벌로 인해 두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1799년 원 야고보는 감사의 명령에 따라 병영(兵營)이 있던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가 덕산을 떠나는 날 아내와 자식과 친구들이 울면서 따라오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하려면 인간의 본성을 따라가서는 안 되네. 모든 고통을 참아 낸다면, 기쁨 가운데서 주님과 착하신 동정 마리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네. 그대들이 여기에 있으면 내 마음이 흔들리니 돌아가게. 이성을 잃고 대사(大事)를 그르칠 수는 없네.”

청주에 도착하자마자 원 야고보는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를 당하였다. 관장은 그를 배교시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순교의 원의로 가득 찬 그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덕산에서 이미 두 다리가 부러졌던 원 야고보에게 다시 온갖 혹형이 가해졌으며, 그는 결국 이를 이겨 내지 못하고 말았다. 그때가 1799년 4월 17일(음력 3월 1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9세였다. 원시보 야고보가 순교한 뒤 그의 육체는 이상한 광채에 둘러싸인 것 같았으며, 이 광경을 목격한 50가족가량이 천주교에 입교하였다고 한다.

원시보 야고보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9. 원시장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柳文碩 John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32-1793년 한국

 

 

원시장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원 베드로, 원베드로,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원시장 베드로 자료

원(元)시장 베드로(Petrus)는 1732년 충청도 홍주 응정리(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의 양인(良人)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몇 해가 지난 1788-1789년 무렵, 곧 56-57세가 되었을 때, 사촌 형인 원시보 야고보와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시장’은 그의 관명(冠名)이다.

어느 날 원 베드로는 집을 떠나 1년 이상 다른 지방에 가서 생활하면서 교리를 공부하였다. 그동안 그는 ‘천주교 신앙이 수천 년 동안 목숨을 보전해 주는 약’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이후에는 집으로 돌아와 친척과 친구들에게 천주교의 주요 교리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하느님의 은총이 그의 설명에 힘을 보태 주었고, 친척과 친구들은 마음이 움직여 하느님을 믿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때까지도 그는 세례를 받지 못하였었다.

본디 원 베드로의 성격은 사납고 야성적이어서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그러나 신앙을 실천해 나가는 동안 성격이 변하여 어떠한 일에서나 온화함을 보여 주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거나 이웃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는 데 열중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이름은 관장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관장은 포졸들을 보내 원 베드로와 원 야고보를 체포해 오도록 하였다. 이때 사촌인 원 야고보는 친구들의 권고에 따라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으나, 원 베드로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홍주 관아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내 원 베드로는 홍주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관장의 어떠한 강요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천주를 배반하거나 동료들을 밀고할 수 없으며, 교회 서적이 있는 곳도 말할 수 없다.”고 답변하였다. 관장은 화가 나서 형리들에게 주리를 틀고, 치도곤 70대를 치게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하느님과 부모님께 대한 본분과 천주교의 참된 도리를 설명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여러 달을 옥에 갇혀 있으면서 원 베드로는 자주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고 형벌을 받았는데,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포졸과 형리들에게 전교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교우가 그를 만나러 옥으로 찾아왔고, 이때 원 베드로는 그에게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동안 홍주 관장은 감사에게 모든 사실을 보고하였으며, 감사에게서 ‘원시장을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관장은 다시 원 베드로를 옥에서 끌어내 갖은 형벌을 가하였지만, 한결같은 그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관장은 마지막으로 혈육의 정에 호소해 보기로 하였다. 원 베드로를 기다리고 찾는 자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식들 이야기를 듣고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는 제 마음을 크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천주께서 친히 저를 부르시니, 어찌 그 목소리에 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홍주 관장은 이 사건을 빨리 마무리 짓고자 하였다. 그래서 관례에 따라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음식을 가져다주도록 하고는, 죽을 때까지 매질을 하도록 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관장은 다른 방법을 생각한 끝에, 그의 몸에 물을 붓고 밖에 내다 놓아 얼어 죽게 하라고 명하였다.

원시장 베드로가 덮어쓴 물은 이내 얼음으로 변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오로지 주님의 수난만을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에게 바쳤으니, 그때가 1793년 1월 28일(음력 1792년 12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1세였다.

원시장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0. 유문석 요한

 

  • 가톨릭 성인 이름
    柳文碩 John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4-1801년 한국

 

 

유문석 요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유 요한, 유요한,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유문석 요한 자료

‘문철’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유문석(柳文碩) 요한(Joannes)은, 전라도 전주의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거주하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1784년에 태어났다.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그의 부친이고, 유중철 요한은 그의 형이며, 이순이 누갈다는 그의 형수가 된다.

유 요한의 집안에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부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경기도 양근에 살던 인척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면서부터였다. 이후 유 아우구스티노는 가족과 친지들에게 널리 교리를 전하였고, 그의 집은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었다. 따라서 유문석 요한은 어릴 때부터 신앙 안에서 자라날 수 있었다.

1795년,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초남이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유문석 요한의 나이는 열한 살이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그의 형인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가 동정 부부가 되기로 서약하고 혼인을 하였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났을 때, 초남이 마을에서는 유문석 요한의 부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가장 먼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이어 유중철 요한과 친척들이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이때 유문석 요한은 다행히 체포되지 않았으므로 여름 내내 전주 옥을 오가며 형에게 음식을 전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해 9월 중순 무렵에는 유 요한도 남은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는 이때 가족과 함께 순교를 약속하면서 굳게 마음을 다졌는데, 그 내용은 그의 형수 이순이 루갈다가 옥중에서 쓴 편지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 다섯 사람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천주를 위해 순교하자고 언약하고, 철석같이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한 결과, 우리의 뜻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 자연히 온갖 후회와 근심 걱정이 사라졌습니다. 날이 갈수록 천주의 은혜와 은총은 쌓이고, 우리 마음에는 신락(神樂)이 더해지며, 아무 걱정도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이어 전주 관장은 유문석 요한과 그의 가족에 대한 판결을 조정에 요청하였고, 조정에서는 곧장 이를 담당할 관리를 전주로 파견하였다. 그 결과 유 요한은 11월 14일(음력 10월 9일)에 옥에서 끌려 나와 형 유중철 요한과 함께 교수형을 받았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17세였다. 이때까지 그는 혼인을 하지 않았었다.

유문석 요한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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