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5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가롤로(성 안드레아의), 가우덴시오, 도로테오, 시메온, 요한 노이만, 제를락, 콘보이온, 텔레스포로 총 8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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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1월 5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8가지
1월 5일 남자세례명 목록
1. 가롤로(성 안드레아의)
- 가톨릭 성인 이름
Charles of St. Andrew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 활동 연도와 지역
1821-1893년
성 안드레아의 가롤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롤루스, 까롤로, 까롤루스, 샤를, 샤를르, 찰스, 카롤로, 카롤루스, 칼, 호벤, 호우벤, 후번.
성 안드레아의 가롤로 자료
세속의 생활에서 요한 안드레아 호우벤(Joannes Andreas Houben)으로 알려진 성 안드레아의 성 카롤루스(Carolus a Sancto Andreas, 또는 가롤로)는 1821년 12월 11일 네덜란드 루레몬트(Ruremond) 교구의 뮌스터겔린(Munstergeleen)에서 태어났다.
11명의 형제 중 넷째로 태어난 그는 태어난 날 바로 요한 안드레아라는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1835년 4월 26일 첫영성체를 하고, 같은 해 6월 28일 견진성사를 받았다. 그는 시타르트(Sittard)에서 정식 교육을 시작한 다음 브로크시타르트(Broeksittard)에서 계속하였다. 1840년 그는 군복무를 위해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 기간 중에 예수 고난회에 대해 처음 듣게 되었다.
군복무와 학업을 모두 마친 그는 예수 고난회에 입회를 요청하였다. 그는 복자 도미니코 바르베리(Dominicus Barberi, 8월 27일)에 의해 받아들여져 1845년 11월 5일 투르네(Tournai) 인근 에르(Ere)의 벨기에 도시에서 수련기에 들어갔다. 그는 같은 해 12월 예수 고난회의 수도복을 입으며 성 안드레아의 카롤루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법정 수련기를 완료한 그는 1850년 12월 10일 첫 서원을 발하고, 투르네에서 라비스(Labis)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직후 그는 예수 고난회가 세 개의 수도원을 설립한 영국으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한동안 브로드웨이(Broadway) 수도원의 수련자들을 위한 부수련장의 소임을 맡았다.
또한 그는 1856년 아일랜드 더블린(Dublin) 변두리에 위치한 아거스 산(Mount Argus)에 새로 설립된 수도원으로 이동될 때까지 성 윌프레드(Wilfred) 본당과 인근 지역에서 주임신부로서 사목활동을 수행하였다.
카롤루스는 남은 생애 대부분을 아거스 산의 은둔소에서 지냈다. 그는 아일랜드 사람들로부터 ‘네덜란드 출신의 아거스 산의 카롤루스 신부’로 불리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는 특별히 신심 깊은 사제였다. 그는 순명의 수련, 가난의 실천, 겸손과 단순함, 더 나아가 주님의 수난에 대한 신심에 있어서 탁월했다. 미숙한 영어 실력으로 인해 공식적인 설교자나 강론의 직무를 맡을 수는 없었지만 매우 성공적으로, 특별히 고해성사를 통해 영적 지도에 헌신하였다.
그의 덕행에 대한 명성은 많은 이들이 그로부터 축복을 받기 위해 수도원으로 모여들게 만들었다. 또한 확실한 기적적 치유에 대한 수많은 증언들이 회자되면서 그는 일생 동안 ‘기적을 행하는 자’로 알려졌다.
그의 명성이 영국 전역뿐 아니라 미국과 호주까지 전해지자 수도회에서는 그에게 잠시나마 휴식을 주고자 1866년에 그를 영국의 서튼(Sutton)과 런던(London)으로 이동시켰다. 그는 그곳에서 일상적인 소임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수도원 내부와 외부에서 그리고 신자와 비신자 사이에서 곧 그의 존재가 드러났다.
그는 1874년에 다시 더블린으로 돌아와 아거스 산의 수도원에서 1893년 1월 5일 새벽 선종할 때까지 머물렀다. 장엄하게 거행된 그의 장례예식 중에 아일랜드 전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함으로써 일생 동안 그의 삶을 통해 대중에게 헌신한 결과가 분명히 드러났다.
당시 신문 기사 역시 카롤루스 신부의 유해를 보기 위해 그토록 많은 이들의 종교적 감성과 존경을 불러일으킨 일은 그 이전 누구의 장례식에서도 볼 수 없었다고 그 분위기를 전했다. 수도원장은 그의 가족에게 보낸 서신에서 사람들이 이미 그를 성인으로 선포했다고 적었다. 그의 유해는 아거스 산의 수도원에 모셔졌다.
카롤루스 신부의 시복시성을 위한 절차는 1935년 11월 13일에 시작되었다. 오랫동안 면밀한 조사를 거쳐 1988년 10월 16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모든 이들이 아거스 산의 성인으로 부르는 그의 시복식을 집전하였다.
그 후 시성을 위한 기적 심사가 시작되었고, 다방면의 조사 끝에 그 정당성이 인정되어 2007년 6월 3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다른 세 명의 복자와 함께 시성식을 갖고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는 아거스 산의 성 카롤루스(Charles of Mount Arg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가우덴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Gauden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대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004년 그니에즈노(Gniezno)
가우덴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우덴시우스, 가우덴씨오, 가우덴씨우스, 가우덴티오, 가우덴티우스.
가우덴시오 자료
프라하(Prague)의 성 아달베르투스(Adalbertus, 4월 23일)의 동생인 성 가우덴티우스(또는 가우덴시오)는 로마의 아벤티네(Aventine) 언덕에 있는 성 알렉시우스(Alexius)의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함께 생활하였고, 프로이센(Preussen) 지방으로 선교를 떠나는 성 아달베르투스의 동료로서 수행하였다. 그는 성 아달베르투스가 순교할 때 대량학살을 피해 탈출하였고, 후에 오토 3세(Otto III) 황제에 의해 그니에즈노 교구의 초대 대주교로 선임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도로테오
- 가톨릭 성인 이름
Dorothe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1세기 킬리오코모스(Khiliokomos)
도로테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로떼오, 도로떼우스, 도로테우스.
도로테오 자료
성 도로테우스(또는 도로테오)는 흑해의 트라브존(Trabzon)에서 태어났는데, 흔히 킬리오코모스의 도로테우스로 알려져 있다. 그는 귀족가문이었으나 부모가 결혼을 강요하므로 12세 때에 집을 떠났다.
몇 년을 두고 방랑생활을 한 그는 마침내 폰투스(Pontus)의 젠나 수도원에 도착하여 입회하였다. 그는 모범적으로 수덕생활을 한 결과, 나중에는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에게는 예언의 은혜도 빛났지만, 너무나 자주 탈혼하는 은혜도 받아서 당대에 성인으로 공경을 받았다. 한 번은 이상한 방문객이 그에게 말하기를 아미소스 산 위에 수도원을 세우라고 지시하고, 삼위일체 하느님께 봉헌하라 일렀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세운 수도원이 저 유명한 킬리오코모스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도움으로 거대한 돌들을 날라다 세운 이곳에는 수많은 수도자들이 모여 들어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시메온
- 가톨릭 성인 이름
Simeo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승, 주행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89?-459년
시메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시므온.
시메온 자료
성 시메온은 389년경 로마제국의 속주인 실리시아(Cilicia)와 시리아(Syria)의 경계에 있는 시스(Sis, 오늘날 터키 남부 아다나[Adana] 북동쪽의 코잔[Kozan])에서 목동의 아들로 태어나 세례를 받았다. 교육받을 형편이 되지 않아 어려서부터 목동 생활을 하던 그는 13살 때 환시를 체험했는데, 후에 그 환시가 자신이 기둥 위에서 생활하게 될 예언이었다고 스스로 해석했다.
403년경 텔레다(Teleda) 인근의 에우세보나(Eusebona) 수도원에 입회했으나 더 철저한 고행 생활을 하고자 412년 수도원을 나와 안티오키아(Antiochia) 교외의 데이르 세만(Deir Seman, 혹은 Telanissos)으로 가서 독수자로서 은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3년 뒤에 근처 칼라아트 세만(Qalaat Seman) 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그가 산 위로 올라간 것은 그의 성덕 이야기에 감동한 군중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422년경 그는 세속을 완전히 떠나 하늘 가까이에서 살고 싶은 마음으로 돌기둥 위에 올라갔다. 군중을 피하고자 처음에는 3m 정도 높이의 기둥을 만들어 그 위에서 지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평생을 기둥 위에서 살았다.
그가 올라가서 고행 생활을 하던 돌기둥은 모두 네 개였는데, 마지막으로 올라간 돌기둥은 무려 20m 높이에 달했다. 그는 가로세로 2m를 넘지 않는 돌기둥 꼭대기의 좁은 공간에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고행 생활을 계속했다.
거의 잠을 자지 않거나 조금씩 자는 고행을 비롯해 야생동물의 가죽옷을 입고 지내며 40년 가까이 사순절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완전한 단식을 실천했다.
\돌기둥 위에 사는 성인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살아생전에 이미 성인으로 공경을 받았던 그는 매일 두 차례 찾아오는 이들을 위해 기둥 위에서 설교했다.
그의 설교는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개종하거나 잃었던 신앙심을 되찾았고, 고위 성직자와 황제까지도 그의 말을 경청하며 자문을 청하기도 했다. 최초의 주행자(柱行者)였던 그가 선종한 후 그를 본받고자 많은 이들이 기둥 위에 올라가 고행 생활에 도전했다.
콘스탄티노플의 돌기둥 위에서 살았던 성 다니엘(Daniel, 12월 11일), 안티오키아(Antiochia) 출신의 성 시메온(Simeon Stylites the Younger, 5월 24일) 등이 유명하다.
시리아 할라브주(州)의 주도인 알레포(Aleppo, 아랍어로 할라브[Halab])에서 북서쪽으로 60km 떨어진 칼라아트 세만에는 성 시메온 기둥 성인(St. Simeon Stylites the Elder)을 기념하는 기념관이 있다.
그가 올라가서 살았던 기둥을 중심으로 십자형으로 네 개의 성당이 건립되었는데,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요한 노이만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Neuman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811-1860년 필라델피아(Philadelphia)
요한 노이만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네우만, 네포무케네, 네포무케노, 네포무케누스, 네포무크, 네포묵, 노이먼, 뉴만, 뉴먼,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노이만 자료
보헤미아(Bohemia) 태생인 성 요한 네포무크 노이만(Joannes Nepomucene Neumann, 또는 요한 노이만)은 어려서부터 사제가 되려는 성소의 꿈을 갖고 성장해 신학교에 입학하여 착실히 준비했다. 그런데 당시 보헤미아 지역(현 체코)의 본당 사제가 많아 한동안 서품식이 이뤄지지 않자 유럽인들이 많이 이주하던 미국으로 떠났다.
그는 1836년에 미국 뉴욕(New York)에서 사제품을 받고 유럽 여러 언어에 능통한 자질을 살려 이주사목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1842년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에 입회하여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해 투신하였다.
성 요한 노이만은 미국에 정착하기 위해 1848년 시민권을 얻어 귀화하였고, 1852년 미국인으로서는 첫 번째로 주교품을 받고 필라델피아 교구의 제4대 교구장이 되었다. 그는 주교가 된 후 특별히 가톨릭 학교를 교구 체제로 설립하는데 큰 공로를 세웠다.
신자들을 위해 헌신하던 그는 1860년 1월 5일 사목방문을 가던 중 급작스런 심장마비로 선종하여 필라델피아의 성 베드로 성당에 묻혔다. 그는 1963년 10월 13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77년 6월 19일 로마(Roma)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제를락
- 가톨릭 성인 이름
Gerlac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170년경 발켄부르크(Valkenburg)
제를락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게를락.
제를락 자료
성 게를락(또는 제를락)은 젊었을 때에 군인으로 활약하였는데, 아내가 죽은 후 로마(Roma)를 순례하였고 그곳에서 젊은 시절의 죄를 통회하는 뜻으로 환자들을 간호하며 7년을 살았다.
그 후 그는 고향땅인 네덜란드로 돌아와서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뒤에 발켄부르크 교외에서 은수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서거 3년 전부터 인근의 은수자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며 제자들이 많이 모였다. 공식적으로 시성된 바는 없으나 오랫동안 성인으로 공경을 받아 왔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콘보이온
- 가톨릭 성인 이름
Convoyo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868년
콘보이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꼰보이온.
콘보이온 자료
브르타뉴(Bretagne) 태생인 성 콘보이온은 6명의 동료들과 함께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의 르동(Redon)에 거대한 거룩한 구세주 대수도원을 세웠다. 그 당시 복잡하고 혼란한 정치문제로 이 같은 역사는 거의 불가능하게 보였지만 그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또 베네딕토 회원이던 그는 그 지방의 주교가 행하는 성직매매를 극렬히 비난하면서 교황 레오 4세(Leo IV)에게 상소까지 하여 큰 성과를 얻었다. 1866년 르동의 거룩한 구세주 대수도원은 에우디스트회로 넘어갔다. 그는 1866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성인의 칭호와 함께 공경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텔레스포로
- 가톨릭 성인 이름
Telesphor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교황,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36년
텔레스포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뗄레스포로, 뗄레스포루스, 텔레스뽀로, 텔레스뽀루스, 텔레스포루스.
텔레스포로 자료
성 텔레스포루스(또는 텔레스포로)는 로마(Roma)에서 성 베드로(Petrus, 6월 29일)를 계승한 15명의 주교 가운데 한 명으로 순교자로 기술되어 있지만 순교 사실을 분명히 밝히지는 못하고 있다.
리옹(Lyon)의 주교인 성 이레네우스(Irenaeus, 6월 28일) 역시 그는 영광스럽게 순교했다고만 막연하게 말한다. 성 텔레스포루스가 그리스인이었다는 주장은 옳은 것 같다. 로마 순교록은 그의 축일을 1월 5일로 기록하고 있으나, 1월 2일을 축일로 기념하기도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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