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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1일 남자세례명 12가지

피어나네 2023. 10. 2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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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1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다시오, 말코, 베드로 카푸치, 비아토르, 아스테리오, 요한, 조티코, 카이오, 콘데도, 투다, 핀타노, 힐라리온, 총 12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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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1일 여자세례명 우르술라, 칠리니아, 총 2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10월 21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2가지

 

 

 

 

10월 21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다시오

  2. 말코

  3. 베드로 카푸치

  4. 비아토르

  5. 아스테리오

  6. 요한

  7. 조티코

  8. 카이오

  9. 콘데도

  10. 투다

  11. 핀타노

  12. 힐라리온

 

10월 21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2가지

 

 

1. 다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Das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하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니코메디아

 

 

다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다시우스.

 

 

다시오 자료

옛 “로마 순교록”과 전승에 따르면, 성 다시우스(또는 다시오), 성 조티쿠스(Zoticus), 성 카이우스(Caius)를 비롯한 15명의 군인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의 니코메디아(오늘날 튀르키예 북서부 이스탄불 인근의 이즈미트[Izmit])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은 이교도 신전을 파괴한 죄로 많은 고문을 당한 뒤 목에 돌을 매달고 바다에 던져졌다고 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세 명의 순교자만 언급하며 그들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하인으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들 모두 부당하게 황궁 화재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아 무거운 돌을 목에 묶고 바다에 던져져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말코

 

  • 가톨릭 성인 이름
    Malch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승,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90년경 시리아

 

 

말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말쿠스.

 

 

말코 자료

시리아의 성 말쿠스(또는 말코)에 대해서는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가 391/2년에 라틴어로 쓴 “포로가 된 수도승 말쿠스의 생애”(Vita Malchi monachi captivi)를 통해 알려졌다.

성 히에로니무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소아시아 남동부 니시비스(Nisibis) 인근에서 살던 한 농부의 유일한 자녀로 태어났다. 어른이 된 성 말쿠스는 부모의 결혼 강요를 피하려고 집을 떠나 안티오키아(Antiochia) 교외 칼키스(Chalcis) 사막에서 은수자 공동체에 들어가 수도승이 되었다.

몇 년이 지난 후 그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상속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원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집에 다녀오고자 했다. 그래서 자신의 집 방향으로 가는 순례자 무리에 끼어 가다가 사라센인에게 잡혀 노예로 팔려갔다.

성 말쿠스를 산 노예 주인은 함께 팔려온 다른 여자 노예와 그를 결혼시키려 했다. 그 여자의 남편은 이미 다른 주인에게 팔려간 상태였다. 그는 자신의 수도 성소를 지키기 위해 이미 결혼했다는 거짓말도 하고 부부관계도 맺지 않았다.

그 여인 또한 순결을 지키며 독신으로 살고 싶다는 뜻을 전하며 자신과 함께 정결의 동반자가 되어주길 요청했다. 그래서 그들은 주인에게 말하지 않고 오누이처럼 지냈다. 그러다가 둘은 기회를 봐서 주인의 집을 탈출해 부풀린 염소 가죽에 의지해 강 하류로 도망갔다.

그들을 잡으려고 주인이 쫓아 왔을 때 한 동굴에 숨어 겨우 추적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동굴에서 살던 사자의 공격을 받아 죽을 고비를 맞기도 했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전승에 의하면 성 말쿠스는 칼키스 사막에 있는 자신의 수도원으로 돌아갔고, 그 여인은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가족을 만나지 못해 다시금 성 말쿠스의 움막으로 찾아왔다. 그녀 역시 그곳에서 은수자로 살기를 원했다.

말년에 성 말쿠스는 에바그리우스(Evagrius) 주교의 지도를 받는 마로니아(Maronia)의 남자 수도원으로 갔고, 그의 아내 또한 마로니아에 있는 여자 수도원으로 옮겨 여생을 보냈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그들의 높은 덕은 비길 데가 없었다고 찬양했다. 그는 칼키스 또는 마로니아의 성 말쿠스로도 불린다. 동방 정교회는 그의 축일을 3월 26일에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베드로 카푸치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Capucci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390-1445년 치타디카스텔로

 

 

베드로 카푸치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 카푸치 자료

이탈리아 중부 치타디카스텔로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베드로 카푸치(Petrus Capucci)는 15세 때에 코르토나(Cortona)의 개혁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여기서 그는 리파프라타(Ripafratta)의 복자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9월 28일)의 지도를 받았는데, 그의 동료들 가운데에는 후일 유명하게 된 피렌체(Firenze)의 성 안토니누스(Antoninus, 5월 10일)와 복자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2월 18일) 등이 있었다.

복자 라우렌티우스 원장은 그에게 활동보다는 관상생활을 하도록 권했지만, 그에게는 수도원 내부의 일들이 여러 가지 주어졌다. 그의 생애는 수도원 도서관이 소실되어 자세히는 알 수 없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16년 교황 비오 7세(Pius VII)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비아토르

 

  • 가톨릭 성인 이름
    Viato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독서자,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90년 리옹

 

 

비아토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비아또르, 비아똘, 비아톨.

 

 

비아토르 자료

성 비아토르는 리옹의 주교가 된 성 유스투스(Justus, 10월 14일)가 사목하던 성당의 독서자였으며, 은수자로서 고적한 삶을 사는 가운데 성 유스투스의 동반자로서 그를 수행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아스테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Aste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23년오스티아

 

 

아스테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스떼리오, 아스떼리우스, 아스테리우스.

 

 

아스테리오 자료

로마(Roma)의 사제이던 성 아스테리우스(또는 아스테리오)는 교황 성 칼리스투스 1세(Callistus, 10월 14일)의 시신을 몰래 매장하였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애덕 행위로 말미암아 그는 알렉산데르 황제의 명령으로 오스티아에서 티베르(Tiber) 강에 던져져 순교하였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시신을 되찾아 오스티아에 매장하였고, 지금도 그곳의 주교좌 성당에 모셔져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요한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319-1379년브리드링턴

 

 

요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자료

영국 요크셔(Yorkshire)의 브리드링턴 인근 트윙(Thwing)에서 태어난 성 요한(Joannes)은 17세에 옥스퍼드에서 공부하고, 2년 뒤 브리드링턴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회에 입회하여 다양한 직무를 수행한 후 원장까지 역임하였다.

그는 특별히 복음적 삶에 이르는 정보와 영감의 근원으로 요한복음에 대한 연구를 강조했으나 그에 대한 전기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1379년 10월 10일 브리드링턴에서 선종한 그는 1401년 교황 보니파티우스 9세(Bonifatius I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조티코

 

  • 가톨릭 성인 이름
    Zotic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하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니코메디아

 

 

조티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조띠꼬, 조띠꾸스, 조티쿠스.

 

 

조티코 자료

옛 “로마 순교록”과 전승에 따르면, 성 다시우스(Dasius), 성 조티쿠스(또는 조티코), 성 카이우스(Caius)를 비롯한 15명의 군인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의 니코메디아(오늘날 튀르키예 북서부 이스탄불 인근의 이즈미트[Izmit])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은 이교도 신전을 파괴한 죄로 많은 고문을 당한 뒤 목에 돌을 매달고 바다에 던져졌다고 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세 명의 순교자만 언급하며 그들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하인으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들 모두 부당하게 황궁 화재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아 무거운 돌을 목에 묶고 바다에 던져져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카이오

 

  • 가톨릭 성인 이름
    Ca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하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니코메디아

 

 

카이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이오, 가이우스, 까이오, 까이우스, 카이우스.

 

 

카이오 자료

옛 “로마 순교록”과 전승에 따르면, 성 다시우스(Dasius), 성 조티쿠스(Zoticus), 성 카이우스(또는 카이오)를 비롯한 15명의 군인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의 니코메디아(오늘날 튀르키예 북서부 이스탄불 인근의 이즈미트[Izmit])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은 이교도 신전을 파괴한 죄로 많은 고문을 당한 뒤 목에 돌을 매달고 바다에 던져졌다고 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세 명의 순교자만 언급하며 그들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하인으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들 모두 부당하게 황궁 화재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아 무거운 돌을 목에 묶고 바다에 던져져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성 카이우스는 가이우스(Gai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콘데도

 

  • 가톨릭 성인 이름
    Conded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685년경

 

 

콘데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꼰데도, 꼰데두스, 콘데두스.

 

 

콘데도 자료

프랑스어로 콩데 혹은 콩데드라고 부르는 성 콘데두스(또는 콘데도)는 잉글랜드(England) 사람으로 일찍이 프랑스로 건너가서 퐁텐-생-발레리라는 곳에 정착하였다.

얼마 후 그는 퐁트넬(Fontenelle) 수도원이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보기로 하였다. 가는 길에 하룻밤을 지낼 방을 찾지 못해 이곳저곳을 헤맸는데, 날씨가 매우 나빴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부인이 그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밤새도록 폭풍우가 휘몰아침으로 그 부인은 걱정이 되어 창문을 들러보니 콘데두스가 자는 방에서부터 거대한 불빛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 성인은 그 후 폰테넬리에서 잠시 머물다가 벨치낙이라 부르는 곳에서 독수생활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의 성덕을 익히 알고 있던 국왕 시에리 3세는 조그마한 섬을 하사하여 수도원도 짓고 또 그 섬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였다. 그 후 성인의 유해는 퐁트넬(Fontenelle)로 이장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투다

 

  • 가톨릭 성인 이름
    Tuda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664년 린디스판

 

 

투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뚜다.

 

 

투다 자료

아일랜드 출신의 수도자였던 성 투다는 부활절의 날짜 계산을 포함한 로마 전례의 철저한 신봉자였다. 하지만 그는 성 콜만누스(Colmannus, 2월 18일)를 승계하여 자신과 반대되는 켈트(Celtic) 전례를 준수하는 린디스판 섬의 대수도원장 주교가 되었다.

주교좌에 오른 그는 노섬브리아(Northumbria) 지역 전부를 관할하였다. 그러나 켈트 전례를 지지하던 대부분의 수도자들은 664년에 성 콜만누스와 함께 성 투다에게 불화의 상처를 치유하도록 맡기고 린디스판 수도원을 떠났다.

성 투다는 착좌한 후 1년이 채 되지 않아 흑사병으로 더럼(Durham)에서 사망하여 그곳의 성당에 묻혔다. 그는 대중으로부터 큰 공경을 받지는 못했지만 몇 개의 순교록에 그의 이름이 올라있다. 성 베다(Beda, 5월 25일)가 그에 대해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핀타노

 

  • 가톨릭 성인 이름
    Fint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635년경 태그몬

 

 

핀타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문누, 문도, 문두스, 핀따노, 핀따누스, 핀딴, 핀타누스, 핀탄.

 

 

핀타노 자료

문누(Munnu) 혹은 문두스(Mundus)로도 알려진 성 핀타누스(Fintanus, 또는 핀타노)는 아일랜드의 클루인(Cluain) 섬에서 성 시넬(Sinell)의 지도하에 18년 동안 수도자로 살다가, 이오나(Iona)로 가서 은수생활을 시작하였다.

그가 도착할 즈음에 만나보기를 갈망하던 성 콜룸바(Columba)의 서거 소식을 듣고 아일랜드로 되돌아 와서 웩스퍼드(Wexford)의 태그몬에 수도원을 세우고 살았다.

그는 매우 엄격한 원장으로 알려졌고, 켈트족(Celts)의 전례를 옹호했는데, 630년에 열린 마그 렌(Magh Lene) 시노드에서도 이를 끝까지 주장하였다. 만년에 그는 나병에 걸려 고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힐라리온

 

  • 가톨릭 성인 이름
    Hilario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291-371년 가자

 

 

힐라리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없음.

 

 

힐라리온 자료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는 팔레스티나의 가자 남쪽 타바타(Tabatha)에서 태어난 성 힐라리온의 생애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이교도 부모에게서 출생한 성 힐라리온은 15세가 되어 문화와 지식의 위대한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서 공부하던 중 개종하여 세례를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사막의 성 안토니우스(Antonius, 1월 17일)를 만나 테베(Thebae, 나일 강 중류에 위치한 고대 이집트 신왕국시대의 수도로 오늘날의 룩소르 Luxor)로 가서 두 달을 함께 산 뒤 가자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사이에 그의 부모는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는 유산을 형제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준 뒤 세속의 모든 인연을 끊고 사막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악과 육신의 유혹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기도와 금욕, 고독의 삶을 살았다. 그가 은둔하던 장소는 마주마(Majuma)로부터 6-7마일 떨어진 바다 근처의 습기 많은 저지대였다. 그는 갈대와 골풀 등으로 만든 오두막에서 살았다. 나중에 작은 방을 지었지만 그것마저도 그가 편히 눕기에는 좁을 정도였다.

그는 일 년에 한 번, 부활절에만 머리를 깎았으며 작은 정원에서 직접 기르는 몇 개의 무화과와 약간의 야채를 먹으며 생활하였다. 그의 엄격한 생활 방식에도 불구하고 많은 수의 추종자들이 그의 근처에서 생활하고자 모여 들었고, 그가 행한 몇 차례의 치유 기적으로 인해 많은 병자들도 찾아왔다. 그는 강론과 삶의 모범으로 많은 이교도들을 개종시켰다.

65세까지 성 힐라리온은 마주마에 살면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말보다는 삶의 실천을 통해 가르쳤다. 하지만 이제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이 끝났다는 생각과 자신이 없어도 주민들이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의 자비를 얻기 위해 기도와 고통 속에 숨어 지내고자 하였으나 제자들과 수많은 사람들은 그가 떠나는 것을 반대하였다.

결국 실질적인 감금 상태에 있던 그는 단식을 한 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그들을 떠날 수 있었다. 360년경 마주마를 떠나 이집트로 향한 그는 먼저 40명의 제자들과 함께 테베에 있는 성 안토니우스의 무덤을 참배하였다.

성 힐라리온의 만년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이집트에서 괴롭힘을 당했고 또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의 체포 명령으로 인해 리비아의 사막으로 피신해야 했다. 그 후 그는 침묵과 낮은 자리에서 생활하기를 갈망해 두 명만을 동반한 후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바다를 건너 시칠리아(Sicilia)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장작을 패다 팔아 생활하던 중 그의 초기 제자인 헤시키우스(Hesychius)를 만났다. 곧 그의 명성이 널리 퍼져 또다시 많은 순례자들과 병자들이 그를 찾아 몰려들었다. 성 힐라리온은 쉴 틈조차 없을 만큼 바빠지자 제자 헤시키우스의 도움으로 자신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달마티아(Dalmatia) 해안에 있는 에피다우루스(Epidaurus)로 갔다.

그러나 또 같은 일이 반복되자 어둠을 틈타 헤시키우스와 함께 키프로스(Cyprus)의 파포스(Paphos)로 갔다. 그곳에서도 그의 기적은 계속되었고, 병자들과 신심 깊은 사람들 그리고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그를 방문하러 왔다. 그래서 성 힐라리온은 다시 헤시키우스의 도움으로 높은 산에 있는 접근 불가능한 곳을 찾아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372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는 죽음을 앞두고 헤시키우스에게 편지를 써서 그의 재산의 전부인 성경과 짧은 망토의 상속인으로 정하였다. 그는 사망 후 파포스 근처에 묻혔으나 헤시키우스가 비밀리에 그의 시신을 마주마로 옮겨 안장하였다.


교회 미술에서 성 힐라리온은 당나귀를 타고 악마나 용, 도마뱀을 십자가로 제압하는 늙은 은수자로 표현된다. 그는 키프로스와 시칠리아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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