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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7일 남자세례명 5가지

pieonane 2023. 12. 1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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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7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스투르미오, 요한, 칼라니코, 플로리아노, 호세 마냐네트 이 비베스, 총 5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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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7일 여자세례명 베가, 비비나, 올림피아, 총 2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12월 17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5가지

 

 

 

 

12월 17일 남자세례명 목록

 

  1. 스투르미오

  2. 요한

  3. 칼라니코

  4. 플로리아노

  5. 호세 마냐네트 이 비베스

 

12월 17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5가지

 

 

1. 스투르미오

 

  • 가톨릭 성인 이름
    Sturm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779년 풀다

 

 

스투르미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스뚜르미, 스뚜르미오, 스뚜르미우스, 스투르미, 스투르미우스.

 

 

스투르미오 자료

성 스투르미우스(또는 스투르미오)는 독일 바이에른(Bayern)의 어느 그리스도교 집안에서 태어나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6월 5일)의 지도를 받았고, 프리츨라(Fritzlar) 수도원에서 성 비그베르투스(Wigbertus, 8월 13일)의 교육을 받았다. 사제로 서품된 후 그는 3년 동안 베스트팔렌(Westfalen) 지방의 선교활동에 주력하였으나, 헤르스펠트에서 은수자가 되었다.

색슨족의 침략에 밀려난 그는 풀다로 와서 수도원을 세웠고 초대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에서 베네딕토회를 연구하였고, 풀다 수도원을 수도생활과 영성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마인츠(Mainz)의 새로운 주교와 관할권 분쟁이 생김에 따라 2년 동안 추방되었을 때, 그는 색슨족의 개종을 위하여 노력하였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어쨌든 그는 '색슨족의 사도'로 불리며, 베네딕토 회원이 된 첫 번째 독일인으로서 1139년에 시성되어 높은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요한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150/60?-1213년 마타

 

 

요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자료

오늘날 프랑스 남동부 프로방스(Provence) 지방의 포콩(Faucon)에서 태어난 성 요한(Joannes)은 어려서부터 귀족 가문의 신심 깊은 부모에게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의 아버지인 에우페미우스(Euphemius)는 그를 엑스(Aix)로 보내서 젊은 귀족에게 필요한 문법 · 검술 · 승마 등을 배우게 했다.

그는 또한 늘 어려운 사람에게 관심을 두고 도와주도록 교육하며 모범을 보여준 어머니 마르타(Martha) 덕분에 매주 금요일이면 병원을 방문해 환자들을 돌보고, 부모가 보내준 생활비 일부를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자선활동과 기도 생활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 후 그는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후 1192년 12월 32세의 나이에 사제품을 받았다. 후에 그가 설립한 삼위일체 수도회의 전승에 따르면, 성 요한은 그다음 해 1월 28일 첫 미사를 봉헌할 때 탈혼 상태에 빠져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탈혼 중에 붉은색과 파란색의 십자가를 손에 들고 흰옷을 입은 한 천사가 자기 앞에 무릎 꿇고 있는 두 명의 포로(한 명은 무어인이고 다른 한 명은 그리스도인) 위에 양손을 펴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미사 후에 그는 이 환시가 모슬렘에게 노예로 사로잡힌 그리스도인들을 해방하는 일에 헌신하라는 하느님의 뜻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노예 해방을 위한 사명을 시작하기에 앞서 기도와 피정의 시간이 갖고자 했고, 마침 모(Meaux) 교구 내의 한 숲에서 오랫동안 은수 생활을 하던 발루아(Valois)의 성 펠릭스(Felix, 11월 20일) 신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를 찾아가 함께 지냈다.

두 성인은 기도와 단식을 실천하며 성령의 이끄심 속에서 몇 년의 시간을 보내며 그리스도인 노예 해방을 위한 수도회 설립을 계획했다. 그리고 1198년 로마에 가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에게 수도회 설립 인가를 받았다. 이것이 ‘삼위일체 수도회’(the Order of the Holy Trinity for the Redemption of Captives)의 시작이었다.

초대총장으로 뽑힌 성 요한은 교황의 축복을 받고 파리로 갔고, 성 펠릭스는 파리 북쪽에 있는 세르푸와(Cerfroid)에 삼위일체 수도회의 첫 수도원을 설립했다.

성 요한은 수도회 지원자를 모아 성 펠릭스에게 보내 수련과 함께 그들의 사명 수행에 필요한 덕목을 익히도록 했다. 세르푸와의 첫 수도원에 이어 로마의 포르미스(Formis)에 있는 성 톰마소(Tommaso) 성당에 두 번째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성 요한과 삼위일체 수도회의 회원들은 1201년 처음으로 북아프리카의 모로코(Morocco)로 가서 86명의 노예를 속량해 해방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1202년과 1210년에는 모로코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서 고통받고 있는 그리스도인 노예들을 해방하기 위해 튀니지(Tunisia)로 가서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많은 이들을 구해냈다.

그는 해방된 이들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삼위일체 형제회’를 설립해 수도자들과 함께 살며 직업 교육 등을 통해 독립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었다. 그리고 그들 또한 다른 그리스도인 노예들을 위한 자선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성 요한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에스파냐에도 수도원을 건립하고, 순회 강론을 통해 노예 해방을 위한 사람들의 관심과 후원을 받고자 노력했다. 그는 언제나 좋은 해결책을 제시해주시는 성모님께 의탁하며 이 모든 일을 이루어나갔다.

1212년경 그는 오랜만에 파리 근교 세르푸와 수도원에 있는 성 펠릭스를 방문해 그와 함께 즐거운 한때를 지냈는데, 고령이었던 성 펠릭스는 1212년 11월 4일 세상을 떠났다.

성 펠릭스가 선종할 때 로마의 수도원에 머물고 있던 성 요한은 자기도 1년 뒤에 성 펠릭스의 뒤를 따르리라는 것을 알고는 기도에 몰두하며, 수도회의 형제들에게 노예 해방을 위한 일을 맡긴 후 1213년 12월 17일 평화로이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그의 시신은 로마의 수도원에 안치되었다가 1655년 에스파냐의 마드리드(Madrid)로 옮겨졌다. 1998년 그의 유해와 석관은 다시 살라망카에 건립된 마타의 성 요한 성당에 모셔졌다.

성 요한에 대한 공적인 공경은 1666년 교황 알렉산데르 7세(Alexander VII)에 의해 승인되었고, 1694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XII)는 그에 대한 공경을 보편교회로 확장하며 2월 8일을 전례 기념일로 정했다. 1955년 전례 개혁 이후 그의 축일은 선종일인 12월 17일에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칼라니코

 

  • 가톨릭 성인 이름
    Calanic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639년경 가자

 

 

칼라니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갈라니꼬, 갈라니꾸스, 갈라니코, 갈라니쿠스, 깔라니꼬, 깔라니꾸스, 칼라니쿠스.

 

 

칼라니코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12월 17일 목록에서 이슬람교를 믿는 사라센족이 예루살렘(Jerusalem)을 점령했을 때 순교한 “가자의 60명 순교자의 수난기”에 기초해 성 플로리아누스(Florianus)와 성 칼라니쿠스(또는 칼라니코)와 다른 58명의 동료가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헤라클리우스 황제(610~641년 재위) 때에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엘레우테로폴리스(Eleutheropolis, 고대 역사 도시로 오늘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속한 베이트 지브린 Beit Jibrin 지역)에서 희생했다고 전해주었다.

이 수난기 안에는 가자에서 포로가 되어 예루살렘에서 처형된 군인 10명의 순교(11월 11일로 추정)와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인 성 소프로니우스(Sophronius, 3월 11일)에 의해 신앙을 지키도록 격려받고 한 명도 배교하지 않고 엘레우테로폴리스에서 순교한 군인 50명의 이야기가 섞여 있다.

그리스어로 기록된 원본은 전해지지 않지만, 나중에 라틴어로 번역된 “성 플로리아누스와 동료들의 이야기” 사본(15세기)과 “60명 순교자의 수난기” 사본(10세기)이 불완전하게나마 전해지는데, 10세기의 사본이 순교자들의 이름과 군대 이름 및 구성원에 대한 기록 등이 있어 그리스어 본문에서 번역한 듯하다.

반면 15세기 사본은 라틴어 번역본에서 재차 번역한 것으로 추정되며, 성 플로리아누스의 이야기와 많은 기적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다른 순교자들의 이름이나 부대 이름 등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학자들은 10세기 사본을 더 신뢰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2월 17일 목록에서 팔레스티나의 엘레우테로폴리스에서 헤라클리우스 황제 때 가자를 포위한 사라센족에 의해 그리스도교 믿음을 지키다가 살해된 ‘50명의 군인 순교자들’이 있었다며, 각주로 알려진 순교자들의 이름을 모두 기록하였다.

그러나 옛 “로마 순교록”에 등장한 성 플로리아누스와 성 칼라니쿠스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플로리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Flor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639년경 가자

 

 

플로리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플로리아누스, 플로리안.

 

 

플로리아노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12월 17일 목록에서 이슬람교를 믿는 사라센족이 예루살렘(Jerusalem)을 점령했을 때 순교한 “가자의 60명 순교자의 수난기”에 기초해 성 플로리아누스(Florianus, 또는 플로리아노)와 성 칼라니쿠스(Calanicus)와 다른 58명의 동료가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헤라클리우스 황제(610~641년 재위) 때에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엘레우테로폴리스(Eleutheropolis, 고대 역사 도시로 오늘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속한 베이트 지브린 Beit Jibrin 지역)에서 희생했다고 전해주었다.

이 수난기 안에는 가자에서 포로가 되어 예루살렘에서 처형된 군인 10명의 순교(11월 11일로 추정)와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인 성 소프로니우스(Sophronius, 3월 11일)에 의해 신앙을 지키도록 격려받고 한 명도 배교하지 않고 엘레우테로폴리스에서 순교한 군인 50명의 이야기가 섞여 있다.

그리스어로 기록된 원본은 전해지지 않지만, 나중에 라틴어로 번역된 “성 플로리아누스와 동료들의 이야기” 사본(15세기)과 “60명 순교자의 수난기” 사본(10세기)이 불완전하게나마 전해지는데, 10세기의 사본이 순교자들의 이름과 군대 이름 및 구성원에 대한 기록 등이 있어 그리스어 본문에서 번역한 듯하다.

반면 15세기 사본은 라틴어 번역본에서 재차 번역한 것으로 추정되며, 성 플로리아누스의 이야기와 많은 기적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다른 순교자들의 이름이나 부대 이름 등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학자들은 10세기 사본을 더 신뢰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2월 17일 목록에서 팔레스티나의 엘레우테로폴리스에서 헤라클리우스 황제 때 가자를 포위한 사라센족에 의해 그리스도교 믿음을 지키다가 살해된 ‘50명의 군인 순교자들’이 있었다며, 각주로 알려진 순교자들의 이름을 모두 기록하였다. 그러나 옛 “로마 순교록”에 등장한 성 플로리아누스와 성 칼라니쿠스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호세 마냐네트 이 비베스

 

  • 가톨릭 성인 이름
    Jose Manyanet y Vive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33-1901년

 

 

호세 마냐네트 이 비베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니야네트, 마니야넷, 요세푸스, 요셉,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호세 마냐네트 이 비베스 자료

성 호세 마냐네트 이 비베스는 1833년 1월 7일 에스파냐 북동부 레리다(Lerida) 주(洲)의 트렘프(Tremp) 시에서 신심 깊은 그리스도인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같은 날 그 도시의 수호성인인 발데플로르스(Valldeflors)의 성모 마리아 본당에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는 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에 의해 동정 성모님께 봉헌되었다.

바르바스트로(Barbastro)의 피아리스트회(The Piarist Fathers) 학교에서 수학한 그는 레리다와 우르겔(Urgell)의 신학교에서 사제직을 준비하여 1859년 4월 9일 사제품을 받았다. 12년 동안 우르겔 교구에서 주교의 비서와 신학교의 도서관장, 사목방문을 위한 실무 책임자로서 고된 일을 역임한 그는 수도사제가 되려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두 개의 수도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1864년 그는 교구장 주교의 승인을 받아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의 아들 수도회’를 설립하였고, 1874년에는 그리스도인 가정의 모범인 나자렛 성가정을 본받고 전파하는 사명을 띤 ‘나자렛의 성가정의 딸 수녀회’를 설립하여 특별히 어린이와 젊은이들의 가톨릭 교육에 전념토록 하였다.

그는 거의 40여 년 동안 항구한 노력과 기도, 덕행으로 충만한 모범적인 삶, 애정 어린 헌신과 영혼들을 위한 염려를 가지고 에스파냐의 여러 마을에 학교와 사목 센터들을 여는 등 수도회의 형성과 확장을 이끌며 수도자들을 고무하였다. 오늘날 그가 설립한 두 수도회는 유럽의 여러 나라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대륙의 여러 나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는 특별히 하느님의 부르심 안에서 나자렛 성가정의 모범을 이 세상에 현존시키기 위해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또한 그는 성가정 잡지를 창간하고 성가정을 위해 봉헌된 성당 건립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아직 완전히 완공되지는 않았지만 바르셀로나(Barcelona)에 건립된 성가정 성당(Sagrada Familia)은 나자렛 성가정의 덕행과 모범을 영속화하고 모든 가정의 영적인 고향으로 만들기 위해 천재적인 건축가인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i)에 의해 설계되고 건축되었다.

그는 강론과 저술 작업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며, 수도회 회원들의 양성과 가정과 어린이들 그리고 학교 운영을 위해 많은 서간과 책들을 저술하였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나자렛 학교와 성가정의 집”(바르셀로나, 1895년)으로 문학적 형식으로 예수 마리아 요셉의 대화를 통해 기록한 영적 자서전이다.

그리고 “보석같이 귀중한 가정”(바르셀로나, 1899년)은 결혼과 가정을 위한 안내서로, 부부들에게 성소(聖召)로서 혼인성사의 존엄성과 자녀들에 대한 신앙교육의 중요한 사명을 되새기도록 하였다. 또 “성가정의 정신(영혼)”은 그가 설립한 수도회의 회원들을 위한 묵상서적으로 사회와 교회 안에서 그들의 성소와 정체성 그리고 사명에 대해 기술하였다.

성 호세 마냐네트 신부의 이런 노력들은 어려움 없이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랫동안 육체적 병고로 인해 고통을 당했지만 하느님의 뜻에 대한 겸손한 순명에 기초한 항구함과 용기로써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건강이 계속 악화되어 1901년 12월 17일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사업의 중심이었던 바르셀로나의 예수 마리아 요셉 학교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영원한 생명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어린이들에 둘러싸여 마지막으로 예수 마리아 요셉을 외우며 평화로이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그가 설립한 수도회의 수사와 수녀들뿐만 아니라 그의 모범과 생활로써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 수많은 젊은이와 어린이와 가정의 기도와 감사 속에 그가 선종한 학교의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의 거룩한 삶은 그를 만난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의 시복시성 절차는 1956년 공식적으로 시작되었고, 1982년 그의 영웅적인 덕행과 그의 중재로 인한 치유 기적이 확인되어 교회의 공식적 인정을 받았다.

그는 1984년 11월 25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2004년 5월 16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시성식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나자렛 성가정에서부터 자라난 성인의 성성(聖性)에 대해 언급하며, 그의 이름 안에서 이 세상의 모든 가정이 축복을 받을 것이며, 성령께서 가정의 복음의 선포하도록 그를 이끄셨다고 말씀하셨다.

그가 일생을 통해 추구했던 것은 모든 가정이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받는 것으로, 모든 가정 안에 나자렛을 건설하고 그래서 모든 가정이 성가정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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