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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6.05.19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피어나네 2026. 5. 19.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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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묵상하다 보니, 저 또한 누군가의 기도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신앙은 누군가의 기도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은총임을 배웁니다.

 

쉽게 모른 척하고 지나가는 세상에서, 외면하지 않고 누군가를 오래 품고 살아가는 마음이 얼마나 깊은 사랑인지 다시 생각해보는 오늘이에요.

 

저를 위해 빌어주신 수많은 마음들을 기억하게 하시는 주님은 찬미 받으소서.

 

2026년 5월 19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성경 말씀 정리

 

2026년 5월 19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부활 제7주간 화요일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부님들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를 한 페이지에 정리했어요.

 

2026년 5월 19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목차

오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원하는 내용으로 바로 이동해 보세요!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사도행전 20장 17-27절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나는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를 다 마칩니다.

 

그 무렵

17 바오로는 밀레토스에서 에페소로 사람을 보내어 그 교회의 원로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18 그들이 자기에게 오자 바오로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내가 아시아에 발을 들여놓은 첫날부터 여러분과 함께 그 모든 시간을 어떻게 지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19 나는 유다인들의 음모로 여러 시련을 겪고 눈물을 흘리며 아주 겸손히 주님을 섬겼습니다.

20 그리고 유익한 것이면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회중 앞에서 또 개인 집에서 여러분에게 알려 주고 가르쳤습니다.

21 나는 유다인들과 그리스인들에게,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오고 우리 주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증언하였습니다.

22 그런데 이제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23 다만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내가 가는 고을에서마다 일러 주셨습니다.

24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25 이제, 내가 두루 돌아다니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 여러분 가운데에서 아무도 다시는 내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26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 그 누구의 멸망에 대해서도 나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것을,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엄숙히 선언합니다.

27 내가 하느님의 모든 뜻을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여러분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전체 보기

요한복음 17장 1-11절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아버지,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1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2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도록 아들에게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3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4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5 아버지,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제가 아버지 앞에서 누리던 그 영광으로, 이제 다시 아버지 앞에서 저를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6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뽑으시어 저에게 주신 이 사람들에게 저는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7 이제 이들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8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을 제가 이들에게 주고, 이들은 또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제가 아버지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참으로 알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9 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10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통하여 제가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

11 저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지만 이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지금 바로 보는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영상과 함께 오늘 미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2026년 5월 19일 오늘 평화방송 매일미사의 순서를 아래에 정리했어요. 시간을 누르면 해당 장면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 시작 00:20

✚ 강론 시작 06:47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
깊이 있는 강론 모아보기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묵상 흐름 안에 잠시 머물러 보세요. 지금 마음에 와닿는 묵상부터 천천히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전해지는 신부님들의 묵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이어서 함께 살펴보세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가장 낮은 곳에서 피어난 영광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영광을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

요한 복음서에 거듭 나오는 ‘하느님 아버지를 드러내고 영광스럽게 한다.’는 표현은 다름 아닌 십자가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높이 들어 올려지시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입니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는 예수님의 삶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태로 보이는 지점이 하느님 보시기에는 최고점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낮추시고 고난을 겪으신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심을 알아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러한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바로 십자가 밑에 서 있던 백인대장입니다. 그는 제자들과 수많은 군중과 달리 예수님께서 구세주의 모습을 모두 잃어버리시고 십자가 위에서 처참히 돌아가시는 모습을 바라보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17,3).

이렇게 예수님을 알아본 백인대장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우리가 보는 최고점과 하느님께서 보시는 최고점은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삶이 가장 바닥에 떨어져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발견할 수 있다면 참으로 큰 은총일 것입니다. 삶의 가장 힘든 순간이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알아보고, 하느님 앞에 머무는 것이 바로 참된 신앙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싫은 것이 좋은 것이 되는 경지

“이제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제에 이어 오늘도 이번 주 성령 강림을 준비하면서 성령께 사로잡힌다는 것의 뜻이 무엇인지 묵상하고자 합니다.

성령께 사로잡힌다는 것은 우선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말에 골똘히 뭘 생각한다고 하고, 숙고에 숙고를 거듭한다고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인간적으로는 나쁜 뜻이 아니고, 즉흥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신중하게 한다는 좋은 뜻이 들어있습니다. 하느님을 빼놓고 하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기준에서 보면 성령적 즉흥성과 무위성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적 즉흥성은 성령께서 시키는 것이라면 지체치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요 성령께서 이끄시는 것임을 알았을 때 자기의 생각이나 신중함을 배제하고 곧바로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첫 제자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즉시 따른 것이 그것이고, 프란치스코가 마티아 사도 축일 복음을 들었을 때 성령 안에서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 하던 바다.”라고 기뻐 외치며 자기가 들은 바를 심혈을 기울여 이룩함에 있어서 시간이 경과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즉시 실행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1첼라노 22번 참조)

성령적 무위성(無爲性)은 노자의 무위지위(無爲之爲)와 같으면서도 다른 것입니다. 내가 뭘 하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면에서는 같지만 성령께서 주도하시도록 나를 내려놓은 것이라는 면에서는 다릅니다. 그래서 성령에 사로잡히면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령에 사로잡히면 싫은 것이 좋은 것이 되는, 그런 대단한 경지에 오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의 경우 나병환자를 그렇게 싫어했고 그래서 나병환자를 만날까 그렇게 두려워했는데 쓴맛이 단맛으로 바뀌는 은총 체험을 하고 나서 나병환자뿐 아니라 온갖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지요.

오늘 바오로 사도도 성령에 사로잡혀 예루살렘에 갔을 때 자기에게 닥칠 일을 이런 경지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일러 주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혔으면 갈 수 없는 곳과 할 수 없는 것을 성령에 사로잡히면 갈 수 있고 할 수도 있음을 바오로 사도를 통해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결국 사랑의 기도

오늘부터 3일 동안은 예수님께서 다락방에서 행하신 ‘고별사’에 이어지는 ‘고별기도’를 듣게 됩니다.

이 기도는 앞의 ‘고별사’의 중심 주제였던 ‘사랑’과 ‘영광’이 기도 형식으로 반복되고 있는데, 크게 세 가지 청원을 담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 자신을 위한 청원’(17,1-5)과 ‘제자들을 위한 청원’(17,6-19)과 ‘모든 믿는 이들을 위한 청원’(17,20-26)입니다.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오늘은 ‘전반부’(1-5절)인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아들의 영광을 청하는 기도만 보고, ‘제자들을 위한 기도’에 포함되는 ‘뒷부분’(6-11절)은 내일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

여기서 보듯이, 예수님의 기도는 ‘당신의 때’와 ‘영광’에 대한 기도로 시작됩니다.

먼저, “때”를 알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의 시작을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는 복음 선포로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는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고별사’의 시작인 13장 1절에서는 이를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렇습니다. 이제 ‘구원의 결정적인 때’, 곧 ‘카이로스의 때’가 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영광의 때’입니다. 사막에서 사탄이 “세상의 나라와 그 영광”을 주겠다고 할 때는 거부했던 진정한 ‘당신의 때’, ‘영광의 때’, ‘당신의 참 모습을 드러내실 때’, ‘아버지의 사랑이 아들을 통하여 결정적으로 드러날 때’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권한인 “영원한 생명”을 모든 이에게 사랑으로 주심으로써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한 17,3)이 될 것입니다.

결국, ‘이 기도’는 그 영광의 실현이 십자가를 통해 드러나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기도요, 곧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기를 기도 합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에게서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저희가 당신의 생명,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 하느님 앞에 감추어져 있는 저희의 참 생명을 드러내소서. 저희의 행실을 보고 세상이 저희가 당신의 제자임을 알게 하시고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복음 17장 1절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주님! 당신께서는 영광을 드러내시되, 굴욕 받음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의 굴욕을 발아래에 두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어, 썩는 것을 썩지 않는 것으로 바꾸셨습니다.

하오니, 그 어떤 굴욕과 수난에서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오로지 아버지를 알게 하시고, 당신을 알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상으로 함께 보는 오늘 묵상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주시는 이유

"영원한 생명은 오직 한 분이신 참하느님을 알고, 또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중략) 저는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내어 알려 주었습니다." (요한 17,3.6)

찬미 예수님! 부활 제7주간 화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을 바로 코앞에 두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며 바치시는 그 유명한 '대사제의 기도'입니다. 이 거룩한 기도문 속에서 예수님은 우리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지를 이렇게 요약하십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아는 것이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매일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외칩니다. 도대체 하느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이 무엇이기에, 그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준다는 것일까요? 하느님의 이름을 야훼라고 부르든, 엘로힘이라고 부르든 그 호칭 몇 개를 외우는 것이 구원의 조건은 아닐 것입니다.

이 깊고도 위대한 신비를 깨닫기 위해, 먼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일상 풍경 하나를 떠올려 보겠습니다.

요즘 공원이나 거리를 나가보면, 유모차에 아기 대신 예쁜 강아지를 태우고 산책하시는 분들을 참 많이 봅니다. 반려견을 키우시는 분들은 강아지를 향해 자신을 '엄마' 혹은 '아빠'라고 부릅니다.

"우리 아기, 이리 와! 엄마가 간식 줄게! 아빠한테 뽀뽀!"

강아지에게 최고급 옷을 입히고, 유기농 간식을 먹이며, 자신의 모든 사랑을 다 쏟아붓습니다. 강아지를 정말 자기 친자식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강아지를 아무리 친자식처럼 사랑한다고 해도, 세상의 어떤 보호자도 강아지를 앞에 앉혀놓고 이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자, 뽀삐야, 잘 들어라. 내 진짜 이름은 김철수야. 그리고 내 주민등록번호는 이거고, 내 통장 비밀번호는 1234란다. 오늘부터 나를 김철수라고 부르렴!"

왜 강아지에게는 자신의 진짜 이름과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을까요?

알려줘 봐야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강아지는 아무리 똑똑해도 인간의 언어로 그 이름을 부를 수 없고, 통장 비밀번호를 알아도 은행에 가서 돈을 찾을 수 없습니다. 결정적으로, 강아지는 평생을 엄마 아빠의 사랑을 받고 자란다 해도 결국 '개'일 뿐, 결코 '인간(나)'으로 성장할 수 없는 전혀 다른 본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똑같은 존재가 될 수 없는 대상에게는, 굳이 내 모든 것이 담긴 '이름'을 내어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자녀에게는 다릅니다. 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 부모는 가장 먼저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자녀를 자신의 가족관계증명서(호적)에 당당히 올려 자신의 성과 이름을 물려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자녀는 내 살과 피(DNA)를 물려받아, 언젠가는 나와 똑같은 생각과 권리를 가진 완벽한 '인간'으로 자라날 것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알려준다는 것은 "너는 나와 똑같은 본성을 가진 나의 후계자이며, 내 모든 것을 상속받을 자격이 있다"라는 가장 강력한 선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저는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습니다"라고 기도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과거 구약 시대에 하느님은 우리를 마치 당신이 기르시는 애완동물이나 피조물 정도로 대하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는 죄악에 물든 짐승 같은 본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감히 거룩하신 하느님의 본성에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라는 네 글자가 성경에 나오면, 감히 그 이름을 발음조차 하지 못하고 '아도나이(나의 주님)'라고 얼버무려 읽어야만 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절대로 함부로 풀 수 없는 무서운 암호(Code)로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십자가의 피를 흘리심으로써, 굳게 잠겨 있던 그 영적 암호를 완벽하게 해독(Decryption)해 버리셨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단순히 무서운 심판관이 아니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다정한 '아빠(Abba)', 즉 무한히 내어주시는 '사랑의 본성'임을 만천하에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인 당신이 그렇게 “나는 나다”라는 하느님 이름을 당신 자신에게 붙일 수 있었던 것처럼, 실로암에서 눈이 떠진 태생소경도 “나는 나다”라고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이것만이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다 자존감대로, 정체성대로, 믿는대로 성장합니다.

이것은 IT 공학에서 암호화된 데이터를 푸는 원리와 같습니다. 아무리 엄청난 금액이 들어있는 비트코인 지갑이라도, 암호를 풀 수 있는 '개인 키(Private Key)'가 없으면 그것은 그저 의미 없는 쓰레기 데이터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사랑'이라는 해독 키를 우리 영혼에 입력해 주시자, 다시 말해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시자, 하느님의 그 무한한 능력과 생명이 우리 삶 속에서 실제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이름을 알게 되고 그 해독 키를 받아들인 우리는 도대체 어떤 존재로 변하게 될까요? 강아지가 주인의 이름을 알 수 없듯, 피조물은 창조주의 이름을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창조주의 이름을 온전히 안다는 것은, 우리 역시 창조주와 동일한 존재, 즉 '하느님'의 본성으로 끌어올려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아는 자녀가 “난 아버지처럼 될 수 없어. 감히…” 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초대 교회의 위대한 교부이신 성 아타나시우스 주교는 이 기막힌 구원의 신비를 단 한 줄의 문장으로 이렇게 요약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이유는, 인간을 하느님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출처: 성 아타나시우스, 『말씀의 강생에 관하여』).

이단 같은 소리로 들리십니까? 아닙니다. 이것이 가톨릭 교의신학의 핵심인 '신화(Deification, 하느님화)'의 교리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아빠, 아버지가 될 수 있도록 예수님을 통해 그분의 이름을 알려주신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처럼 완전해질 수 있고, 더 나아가 하느님과 같은 신적 존재가 될 수 있다고 굳게 믿으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탈출기 3장을 보면 이 위대한 이름의 능력이 모세의 삶에서 어떻게 폭발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느님이 모세를 부르셨을 때, 모세는 두려움에 떨며 묻습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그분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 마침내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십니다.

"나는 있는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파견하셨다 하여라." (탈출 3,14).

하느님의 이름을 전수받기 전까지, 모세는 이집트에서 도망쳐 양이나 치던 겁쟁이 살인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이름'을 가슴에 품고 이집트로 돌아가는 순간, 모세는 더 이상 찌질한 도망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은 파라오 앞에 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보아라, 나는 네가 파라오에게 하느님처럼 되게 하겠다." (탈출 7,1).

모세가 파라오 앞에서 지팡이를 들어 바다를 가르고 재앙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똑똑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알고 그 이름을 자신의 영혼에 장착했기에, 그는 파라오 앞에서 피조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위를 대행하는 '또 다른 하느님'으로 격상되었던 것입니다. (출처: 『주석 성경』 탈출기 7장).

우리는 세례를 통해 우주 창조주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거룩한 '이름'을 물려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이라는 전쟁터에서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돈 몇 푼 손해 보았다고 잠을 못 자며 분노하고, 자존심 조금 상했다고 형제와 등을 돌리며 미워합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두려워 늘 세상의 쾌락과 타협하며 비겁하게 도망치려 합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피를 다 쏟아부어 너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주었는데, 너는 어찌하여 아직도 길거리를 떠도는 짐승처럼 두려움에 떨며 살고 있느냐? 당장 그 위대한 하느님 자녀의 이름을 버리든가, 아니면 지금 당장 돌아서서 네 이름에 걸맞게 당당하고 사랑 넘치게 살아라!"

여러분은 아버지의 이름을 알 수 없는 강아지가 아닙니다. 우주의 상속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주신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을 닮아 하느님처럼 이 세상을 자비롭게 다스리라는 위대한 파견 명령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버지,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사제가 된 후 꼭 지키려는 하나가 있습니다. 비밀을 만들지 말자는 것입니다. 비밀을 만들면 이를 지키기 위한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비밀 없이 살면 편합니다. 비밀을 지키려는 노력도 필요 없습니다.

예전에 책상 서랍에 열쇠를 달고 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남들이 하니 저도 자물쇠를 단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어서일까요? 이 서랍 안은 잡동사니로 가득 차서 엄청나게 지저분해졌습니다.

갑곶성지에서 초 봉헌함에 자물쇠가 걸려 있었지만, 직원에게 퇴근할 때는 열어 놓고 가라고 했습니다. 자물쇠가 있으니, 돈이 많이 들어있는 줄 알고 좀도둑들이 와서 자물쇠를 억지로 열어 망가트린 것입니다. 그러나 열어 놓고 가니 자물쇠가 부서졌을까요? 전혀 없었습니다. 이처럼 비밀을 만들면 그 비밀 지키기에 더 큰 힘이 필요합니다. 그로 인해 다툼과 싸움도 생기게 됩니다. 오해를 사기도 합니다. 그래서 모두 공개하면 편합니다. 하지만 공개하려면 그만큼 삶에 떳떳한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는 이를 뻔뻔한 삶이라고도 하지만, 뻔뻔하다는 말을 들어도 떳떳하면 비밀이 없어지고 삶이 편안해집니다. 누군가 제게 “신부님만 알고 계셔요.”라면서 무엇을 말하려고 합니다. 비밀을 공유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때 저는 자신 있게 말합니다.

“저 입 싸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고별 기도라고 하는 매우 장엄하고 깊이 있는 부분입니다. 십자가 수난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이 기도를 통해 당신의 사명을 말씀하시고, 동시에 제자들을 향한 무한한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비밀이 전혀 없는 예수님이십니다. 떳떳한 삶을 사셨고, 그 사랑으로 하느님 나라의 비밀스러운 일까지도 모두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특별히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안다’라는 말씀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단순히 지식적인 앎을 넘어서는,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와 체험을 뜻합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은 죽은 뒤에 가는 어떤 장소나 무한한 시간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고 친교를 누리는 상태 자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알아야 합니다. 숨김없이 모든 것을 다 알려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닮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떳떳한 삶입니다. 이 삶이 우리의 구원이며 생명이 됩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은 색칠책과 같다. 작은 부분을 하나하나 색칠하다 보면 언젠가 커다란 그림이 눈앞에 나타난다(세라 나이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영광은 십자가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참된 영광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완전하게 드러났습니다.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십자가의 영광입니다.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어 하느님의 빛을 드러내는 삶에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 안에서 사랑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더 깊은 관계와 생명을 이루시는 영광입니다. 존재의 진실함과 사랑의 깊이에서 드러나는 영광입니다. 조용히 세상을 밝힙니다. 시간과 상황에 따라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영광은 참된 사랑으로 우리의 삶 안에서 살아 움직이시는 사랑의 영광입니다. 내어주시는 사랑이 아버지와 아들의 참된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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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말씀 6가지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성경구절

지금 읽는 말씀에서 시작해 또 다른 말씀으로 이어지며 하루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씀 6가지를 통해, 하루의 시간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따라가 보세요.

 

흩어져 있는 말씀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말씀을 흘려버리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줍지 않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요.

 

오늘 전해진 말씀이 스쳐 지나가지 않고, 하루를 지나는 동안 마음에 천천히 남아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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