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9일에 해당하는 여자세례명 가타리나, 프란치스카, 총 2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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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3월 9일
천주교 여자세례명
2가지
3월 9일 여자세례명 목록
1. 가타리나
- 가톨릭 성인 이름
Catherine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수녀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413-1463년 볼로냐
가타리나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까따리나, 카타리나, 캐서린.
가타리나 자료
법률가이자 외교관의 딸인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또는 가타리나)의 어릴 때 이름은 카테리네 데 비그니(Catherine de Vigni)이다.
그녀는 페라라(Ferrara)의 후작인 니콜라우스 3세의 궁중에서 후작 부인을 모시는 시녀로 일하며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부친이 사망하자 그녀는 궁중을 떠나 준수도생활을 하려는 일단의 부인들과 함께 베긴회 공동체에 합류했다가 1431년 페라라(Ferrara)에서 프란치스코 규칙서를 따르는 ‘주님의 몸인 클라라회’를 설립해 수련장이 되었다.
성녀 카타리나의 명성이 널려 알려지자 1456년 볼로냐에 새 수도원 설립을 요청받고 페라라를 떠나 볼로냐에서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같은 이름의 수도원을 설립해 사망할 때까지 원장직을 수행했다.
수도생활을 시작한 이후부터 성녀 카타리나는 예수, 마리아, 요셉에 관한 환시를 비롯해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한 환시를 체험했다. 또한 어느 성탄절에 경험한 자신의 체험을 글로 썼는데, 그것은 아기 예수님을 팔에 안은 마리아의 환시였다. 이 환시는 그 후 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리는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그녀는 유능한 수련장이자 원장이었다. 그녀는 서도와 회화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고, 뛰어난 성덕으로 인하여 그녀의 수도원은 곧 유명하게 되어 천상 은총으로 충만하였다.
그녀가 손수 장정하고 장식한 성무일도서는 지금도 볼로냐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성녀 카타리나는 1438년에 초판을 작성하고 1450-1456년 증보판을 작성한 저서 「일곱 개의 영적 무기(Le sette armi spirituali)」에서 하느님과 사탄에 대한 자신의 환시를 상세하게 묘사했다.
그녀는 1712년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예술가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프란치스카
- 가톨릭 성인 이름
Frances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384-1440년 로마
프란치스카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로마나, 방지가, 프란체스까, 프란체스카, 프란치스까, 프랜시스.
프란치스카 자료
성녀 프란치스카 로마나(Francisca Romana, 또는 프란체스카)는 이탈리아의 부유한 귀족인 부소(Busso) 가문의 파올로(Paolo)와 자코벨라(Giacobella)의 딸로서 이탈리아 로마의 중심부인 트라스테베레(Trastevere)에서 출생하였다.
그녀는 13세 때에 인근의 부유한 영주인 폰치아노(Ponziano)의 라우렌티우스(Laurentius)와 결혼하여 40여 년 동안 이상적인 결혼생활의 모범처럼 살았다. 그들은 자녀 일곱을 두었으나 둘은 어린 나이에 사망하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금욕적인 기질이 강하였고,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하여 깊은 애정을 표현하곤 하였다. 그래서 흑사병과 내란으로 인하여 사회가 혼란할 때, 그녀는 자선활동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녀는 시누이인 반노차(Vannozza)와 함께 로마의 걸인들을 위하여 조직적인 봉사활동을 전개하여 높은 성덕을 쌓아 나갔다.
그녀는 성 알렉시우스(Alexius)의 환시를 본 뒤로 앓고 있던 중병에서 회복되었고, 1400년 그녀의 아들인 요한 바티스타(Giovanni Battista)가 태어날 때까지 산토 스피리투(Sancto Spiritu)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였다.
또 다시 흑사병과 기근이 로마에 들이닥쳤을 때, 그녀는 이 재앙의 희생자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돕기 위하여 자신의 보석까지 팔았다.
그러나 그녀의 집안에 재앙이 닥쳐왔다. 1408년에 대립교황의 편이었던 나폴리(Napoli)의 왕 라디슬라오(Ladislao)가 로마를 점령했을 때, 여자들은 남아 있었으나 교황의 편에 서 있던 남편 라우렌티우스는 피신해야만 했다. 게다가 폰치아니(Ponziani) 성이 약탈당하고 캄파니아(Campania)의 집도 불에 타버렸다.
그리고 1413년의 또 다른 흑사병 때문에 아들 에반젤리스타(Evangelista)가 희생되자 그녀는 자기 집을 아예 병원으로 개조하였다. 불행은 계속 이어져 2년 후에는 그녀의 딸 아녜스(Agnes)마저 사망하였다.
1414년경에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고, 남편의 추방령도 해제되어 돌아오고 재산도 되찾았지만 남편의 건강은 아주 나빴다. 성녀 프란치스카는 남편을 간호하는 한편 그녀의 모범을 따르는 귀족 부인 등과 함께 자선활동을 계속하면서 봉쇄생활을 하지 않고 세상 안에서 자선을 실천하는 새로운 형태의 수도 공동체를 이루어 살기로 결정하였다.
1433년 3월 25일, 처음에는 마리아의 오블라티회(Oblate di S. Maria)로 알려졌지만 후에 캄피돌리오(Campidoglio) 근처에 있는 '스페키의 탑'(Tor de Specchi) 근처에 있다고 하여 토르 데 스페키의 오블라티회로 알려졌고, 다시 현재의 성 프란치스카 로마나의 오블라티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1436년에 남편이 죽자 그녀는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성녀 프란치스카는 수녀원에 입회한 후 원장이 되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남은 4년 동안 엄격한 생활과 더불어 자선 사업에 전념하였다. 또한 그녀는 수차례나 환시를 보았고, 탈혼에 빠졌으며, 치유의 기적을 행하였고, 예언의 은혜도 받았다. 그녀는 대이교의 종말을 예언하였다.
그녀는 1608년 5월 9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시성되었고, 교황 비오 11세(Pius XI)는 성녀가 밤낮으로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는데 수호천사의 특별한 보호를 받았으며, 칠흑 같은 로마의 밤거리를 다니는 동안 수호천사가 동행하며 등불로 길을 비춰주었다는 전설에 근거해 1925년에 그녀를 자동차 운전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그녀는 또한 이탈리아 가정주부와 미망인의 모범으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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