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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6일 남자세례명 14가지

pieonane 2023. 6. 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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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6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구드발, 노르베르토, 라우렌시오, 라파엘 귀자르 발렌시아, 마르첼리노 샴파냐, 아만시오, 알렉산데르, 에우스토르지오 2세, 요한, 자를라트, 제라르도, 체라시오, 클라우디오, 필립보, 총 14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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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6월 6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4가지

 

 

 

 

6월 6일 남자세례명 목록

 

  1. 구드발

  2. 노르베르토

  3. 라우렌시오

  4. 라파엘 귀자르 발렌시아

  5. 마르첼리노 샴파냐

  6. 아만시오

  7. 알렉산데르

  8. 에우스토르지오 2세

  9. 요한

  10. 자를라트

  11. 제라르도

  12. 체라시오

  13. 클라우디오

  14. 필립보

 

6월 6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4가지

 

 

1. 구드발

 

  • 가톨릭 성인 이름
    Gudwal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선교사,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6세기경

 

 

구드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구드왈, 구르발.

 

 

구드발 자료

구르발이라고도 불리는 성 구드발은 웨일스(Wales) 사람으로서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Bretagne)로 갔던 초기 선교사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로코알 근교에 플레싯 수도원을 세웠고, 브르타뉴에도 수도원을 세웠다. 그가 주교였다는 설도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노르베르토

 

  • 가톨릭 성인 이름
    Norbert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대주교,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080?-1134년 마그데부르크

 

 

노르베르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노르베르또, 노르베르뚜스, 노르베르투스, 노르베르트, 놀베르토, 놀베르트.

 

 

노르베르토 자료

성 노르베르투스(Norbertus, 또는 노르베르토)는 1080년경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ordrhein-West falen) 지역의 크산텐(Xanten)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크산텐에 있는 성 빅토르(Victor) 수도원에 들어갔고, 커서는 쾰른(Koln)의 대주교와 함께 하인리히 5세 황제의 궁전에 들어와 황제의 하사품을 관리하는 차부제로 지냈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많았던 그는 자신의 지위에 맞지 않는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식에 참석하고자 말을 타고 가다가 벼락을 맞아 땅에 떨어졌다. 얼마 후 의식을 회복한 그는 방탕했던 지난 생활에 대해 깊이 뉘우치며 “주님, 저로 하여금 무엇을 하길 원하십니까?” 하고 그 옛날 사도 성 바오로(Paulus)가 그랬던 것처럼 주님께 여쭈었다. 그러자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라는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소명을 더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 쾰른 근처 지크부르크(Siegburg)의 한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들어가 기도와 단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결국 주님의 뜻을 확신한 그는 쾰른으로 돌아와 사제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1115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후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전에 있던 곳으로 돌아왔으나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아는 이들의 온갖 모욕과 냉대를 참으며 과거의 죄를 보속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소중한 기회로 삼았다. 그 후 그는 주임 사제직을 사임하고 소유물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본격적으로 보속의 길을 떠났다.

그가 프랑스 북부 지역을 다니며 주님의 말씀을 설교한 것이 큰 효과를 내면서 그는 매우 유명한 설교가로 변신하였다. 그리고 포스(Fosses)의 복자 후고(Hugo, 2월 10일)가 그의 동반자가 되면서 그의 능력은 더욱 돋보이게 되었다.

프랑스 북동부 랑(Laon)의 주교는 자신의 교구로 성 노르베르투스를 초대하면서 프레몽트레(Premontre)의 계곡에 있는 성당을 사용하도록 그에게 주었다. 그는 그곳에서 얼마간 기도와 고행을 실천하며 살다가 1120년 1월 25일 13명의 동료와 함께 성 마르티누스(Martinus)의 율수 수도회를 개혁하여 새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새 수도회는 급격히 성장하며 회원 수도 빠르게 불어났는데, 이것이 이른바 백의의 율수 의전 수도회인 ‘프레몽트레회’(Chanoines Reguliers de Premontre)의 시작이었다. 그는 생전에 8개의 대수도원과 2개의 수도원을 세웠고, 1125년에 교황 호노리우스 2세(Honorius II)에게 공식 인가를 받았다. 그 후 테오발드(Theobald) 백작이 입회를 요청하자 그는 입회를 거절하고 세상에서 수도회의 규칙을 따라 살도록 제3회를 조직하였다.

그 뒤에 교회 일로 독일의 슈파이어(Speyer)에 갔다가 황제와 교황 사절의 간청에 굴복하여 독일 중부에 있는 마그데부르크의 대주교가 될 것을 승낙하였다. 그 교구에는 개혁할 일, 정리해야 할 일들이 태산 같았다. 그는 성실한 협력자인 포세스의 복자 후고에게 수도회를 돌보도록 맡기고 마그데부르크로 갔다.

새 임지에 갔을 때 주교관의 문지기는 너무도 남루한 그의 모습을 보고 거지로 착각해 주교관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는 일화도 있다. 새 주교와 그의 개혁 정책에 반감을 갖게 된 이들도 많아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방해하며 심지어 그를 해치려는 시도까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덕행과 온화하고 용맹한 마음으로 그 모든 장애를 극복해나갔다.

1132년 그는 황제 대관식에 참석하고자 로마에 갔다가 중병에 걸려 4개월간 병상에 눕게 되었으나 그 후 교구로 돌아와 2년간 직무를 수행하다가 1134년 6월 6일 선종하여 프레몽트레회의 성모 성당에 안장되었다.

생전에 성 노르베르투스는 프랑스 북부 캉브레(Cambrai)에서 이단과 싸우는 대주교를 돕도록 제자 성 발트만(Waltman, 4월 11일)을 파견해 도와주었고, 사제직과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부정하고 다른 성사들도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탄켈름(Tanchelm)의 이단적 주장을 배격하는데 큰 공로를 세웠다.

그는 선종 후 비교적 늦은 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Gregorius X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유해는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가 성장하면서 마그데부르크가 개신교 지역이 되자 유해 훼손을 방지하기 위한 오랜 노력 끝에 1627년 폴란드 프라하(Prague) 인근 프레몽트레회의 스트라호프(Strahov) 수도원으로 옮겨 모셔 오늘에 이르고 있다.

1672년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는 보편 교회 전례력 안에서 그의 축일을 지내도록 하였다. 보통 출생지와 연결해서 ‘크산텐의 성 노르베르투스’로 불리는 그는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을 타원형으로 둘러싼 열주 위에 세워진 140명의 성인 입상의 주인공 중 한 명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라우렌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Lawrence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신부, 설교가

  • 활동 연도와 지역
    1476-1535년 빌라마냐

 

 

라우렌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우렌시우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스, 로렌조.

 

 

라우렌시오 자료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또는 라우렌시오)는 15-16세기의 시칠리아 왕국에서 중책을 맡았던 마스콜리(Mascoli) 가문의 후손으로 이탈리아 아브루치(Abruzzi) 지방의 빌라마냐에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아버지의 강압적인 반대를 물리치고 오르토나(Ortona)에 있는 은총의 성모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입회하여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설교 직무를 수행해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당대의 최고의 설교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그는 설교하기 전에는 항상 자신을 엄히 돌아보았고, 생활과 기도에 대한 열정으로 인해 설교의 권위가 더욱 높아졌다.

그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은 거의 모두가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1535년 6월 6일 하느님의 품 안에서 평온하게 선종한 그에 대한 공경은 1923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 때에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라파엘 귀자르 발렌시아

 

  • 가톨릭 성인 이름
    Rafael Guizar Valencia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878–1938년 베라크루즈

 

 

라파엘 귀자르 발렌시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발렌치아, 발렌키아.

 

 

라파엘 귀자르 발렌시아 자료

성 라파엘 귀자르 발렌시아(Raphael Guizar Valencia)는 1878년 4월 26일 사모라(Zamora) 교구에 속한 멕시코 서남부 미초아칸(Michoacan) 주(洲)의 코티자(Cotija)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인 프루덴치오(Prudencio)와 나티비타드(Natividad)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11명의 자녀를 두었다. 라파엘과 그의 형제들은 가정에서부터 훌륭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9살 때 어머니를 여읜 라파엘은 일찍이 수도회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이어 예수회 사제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성소(聖召)는 사제직에 참여하여 하느님의 이름 안에서 자신의 삶을 봉헌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891년 코티자에 있는 소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이어 1896년에 사모라에 있는 대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1901년 6월, 23살의 나이에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직 초기에 그는 많은 시간을 투자해 사모라와 멕시코의 여러 다른 지역에서 선교 사업을 수행하는데 헌신하였다. 1905년 사모라 신학교의 영성지도 신부로 임명된 그는 성체성사에 대한 사랑과 동정 마리아께 대한 깊은 신심 안에서 신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쉬지 않고 일했다.

1910년에 일어난 멕시코 민족주의 혁명의 여파로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정부의 박해가 심해지자 그는 이에 저항하기 위해 1911년에 종교 신문을 창간하였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불행히도 혁명 세력에 의해 폐간되고 말았다. 박해는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고, 그로 인해 그는 수십 년 동안 거처조차 제대로 정하지 못하고 지냈다.

그는 사생활의 제약으로 인해 고통 받았으며 그 외에도 많은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사도직을 계속 수행하기 위해 거리의 상인, 음악가, 동종요법(同種療法) 치료사 등으로 위장하여 병든 이들을 치유하고 위로하며 죽어가는 이들에게 성사를 집전하였다.

그는 혁명 세력들에 의해 쫓겨 다니며 계속되는 체포의 위험 때문에 더 이상 멕시코 지역에 머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1915년 말까지 미국의 남부 지방에 머물렀고, 그 다음 해에 과테말라(Guatemala)로 가서 대규모의 선교사들을 지도하였다. 선교사로서 그의 명성이 쿠바(Cuba)에까지 전해지면서 그는 그곳의 선교사들을 지도해 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쿠바에서의 그의 활동은 매우 생산적이었으며, 특별히 1919년 흑사병 희생자들을 위한 자선사업은 매우 모범적이었다. 1919년 8월 1일 쿠바에 머물고 있던 그는 베라크루즈 교구의 주교로 선출되어 그 해 11월 30일 아나바(Havana)의 주교좌성당에서 주교 서품식을 가졌다.

멕시코 혁명이 잦아든 1920년 1월 9일 라파엘 주교는 그의 교구로 돌아왔다. 그는 처음 두 해 동안 교구의 방대한 지역을 방문하며 선교사들을 지도하고 가공할 지진으로 인해 희생된 이들을 도왔다. 대지진은 베라크루즈 교구의 가난한 이들 안에서 대규모의 파괴와 죽음을 야기하였다.

그의 사명은 본당에서의 설교와 교리교육, 혼인 유효화와 고해성사를 듣는 일 그리고 지진 희생자들을 돕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된 관심사 중의 하나는 미래의 사제들을 교육하는 일이었다. 1921년 그는 지난 1914년에 몰수된 할라파(Xalapa / Jalapa)의 오래된 신학교를 돌려받아 보수하였다.

그러나 보수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부에 의해 다시 점거당했다. 그래서 그는 멕시코시티(Mexico City)로 신학교를 옮겨 15년 동안 은밀히 그 기능을 유지하였다. 이 신학교는 박해 기간 동안에 문을 연 유일한 곳으로 300명의 신학생들이 있었다.

그는 베라크루즈 교구의 책임을 맡은 이후 9년 동안 망명 생활을 했고 그 후로도 줄곧 도망을 다녀야 했다. 신앙의 자유를 위해 교구로 돌아와 박해자들의 손에 자신의 목숨마저 맡긴 것은 용맹하고도 모범적인 행동이었다. 1937년 12월, 코르도바(Cordoba)에서 사명을 수행하던 중에 그는 심근경색으로 고통을 받으며 남은 생애를 몸져누워 지내야 했다.

임종을 앞둔 그는 전능하신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면서도 교구와 신학교를 어렵게 운영해 갔다. 그는 또한 매일미사를 집전하였다. 라파엘 주교는 1938년 6월 6일 멕시코시티에서 선종하여 그 다음날 할라파의 주교좌성당에 안치되었다. 그의 장례 행렬은 승리의 사건과도 같았다. 모든 이들이 성인다운 삶을 산 그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라파엘 귀자르 발렌시아 주교는 1995년 1월 29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리고 2006년 4월 28일 시성을 위한 기적 심사를 통과한 후 그 해 10월 15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다른 세 명의 복자들과 함께 시성되었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 출신 주교로서는 처음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할라파 주교좌성당에 있는 그의 무덤은 그를 공경하는 수천의 사람들이 찾아와 도움과 전구를 청하는 순례지가 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마르첼리노 샴파냐

 

  • 가톨릭 성인 이름
    Marcellinus Champagnat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9-1840년

 

 

마르첼리노 샴파냐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셀리노, 마르셀리누스, 마르슬랭, 마르첼리누스, 베누아, 조제프.

 

 

마르첼리노 샴파냐 자료

1789년 5월 20일 프랑스 리옹(Lyon)의 아모 뒤 로제(Hameau du Rosey)에서 가난한 물방앗간 집의 아홉 번째 자녀로 태어난 성 마르첼리누스 샴파냐(또는 마르첼리노 샴파냐)는 신심 깊은 부모로부터 어려서부터 신앙 교육을 받았다.

일찍이 성소의 꿈을 키운 그는 리옹 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1816년 7월 22일 사제품을 받고, 라 발라(La Valla) 본당의 보좌신부로 부임하였다. 그는 신학교 생활 이후 늘 소년들을 교육하는 수도회의 설립에 관심을 가져오다가, 마침내 1817년 ‘마리아의 작은 형제회’(마리스타 교육 수사회)를 설립하여 1836년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았다.

그는 마리스타의 교육 이념인 학교 지침을 발간하였고, 교육 분야에서 기여하다가 1840년 6월 6일 51세를 일기로 노트르담 에르미타주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1955년에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99년 4월 18일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마르슬랭 조제프 베누아 샴파냐(Marcellin Joseph Benoit Champagnat)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아만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Aman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누아용

 

 

아만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만시우스, 아만씨오, 아만씨우스, 아만티오, 아만티우스.

 

 

아만시오 자료

성 아만티우스(또는 아만시오)는 신심 깊은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프랑스 남동쪽 칸(Cannes) 지역의 성당에서 사목하였고, 후에 누아용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신앙 때문에 다섯 명의 사제들과 함께 순교했는데, 그 중 세 명의 사제는 그의 형제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순교한 다섯 명의 사제들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알렉산데르

 

  • 가톨릭 성인 이름
    Alexand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590년/9세기? 피에졸레

 

 

알렉산데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알레산드로, 알렉산더, 알렉산델, 알렉싼데르, 알렉싼델.

 

 

알렉산데르 자료

로마 순교록은 성 알렉산데르가 이탈리아 토스카나(Toscana) 지방 피에졸레의 주교이자 순교자였다고 기록하였다. 전설적인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교회 활동에 대한 롬바르디아(Lombardia)의 아우타리(Autari) 왕과 지방 귀족들의 부당한 간섭과 침해에 대항하여 용맹하게 교회의 권리와 재산을 지킨 주교였다.

그는 6세기 말에 볼로냐(Bologna) 부근에서 매복한 반대자들에 의해 레노(Reno) 강에 던져져 순교하였다. 그런데 “성인전집”(Acta Sanctorum)을 편집하여 간행한 벨기에의 예수회 학자들인 ‘볼랑디스트’(Bollandists)는 성 알렉산데르의 순교 시기를 6세기 말이 아닌 9세기 중엽으로 보고 있다.

그는 롬바르디아의 로타르 1세(Lothair I) 왕을 만나 교회가 부당하게 약탈당한 재산을 복구할 수 있도록 그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그 후 파비아(Pavia)를 떠나 피에졸레로 돌아오던 도중, 볼로냐 지역에서 그동안 부당하게 약탈한 교회 재산을 포기하고 돌려줘야 하는 이들의 공격을 받아 레노 강에서 순교하였다.

그의 유해는 피에졸레 대성당으로 옮겨졌고 그 도시의 수호자로서 공경을 받아왔다. 그는 멘솔라(Mensola)에 성 마르티노(Martino) 수도원을 설립했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에우스토르지오 2세

 

  • 가톨릭 성인 이름
    Eustorgius II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18년 밀라노

 

 

에우스토르지오 2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우스또르지오, 에우스또르지우스, 에우스토르기오, 에우스토르기우스, 에우스토르지우스.

 

 

에우스토르지오 2세 자료

성 에우스토르기우스 2세(또는 에우스토르지오 2세)의 생애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512년에 밀라노의 주교로 승품되었고 약 7년 동안 교구를 다스린 사실만은 확실하다.

그는 높은 성덕의 소유자로서 신자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목자였고, 교회의 정통성을 수호한 인물로 높이 평가받는다. 또한 그는 베리(Berry) 지방에 복음을 선포하러 다녔다. 그는 밀라노의 성 라우렌티우스(Laulentius) 성당에 안장되어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요한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7세기 베로나

 

 

요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자료

성 요한(Joannes)은 성 마우루스(Maurus, 11월 21일)를 계승하여 이탈리아 베로나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교구 내의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활동을 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자를라트

 

  • 가톨릭 성인 이름
    Jarlath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50년 투엠

 

 

자를라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자를라스.

 

 

자를라트 자료

성 자를라트는 성 엔다(Enda, 3월 21일)의 제자로서 투엠 교외의 클루인 포이스(Cluain Fois)에 수도원을 세웠고, 그 지방의 교구를 설정한 초대 주교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성 파트리키우스(Patricius, 3월 17일)에 의하여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제라르도

 

  • 가톨릭 성인 이름
    Gerard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207년 틴토리오

 

 

제라르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게라르도, 게라르두스, 제라드, 제라르두스, 제라르드.

 

 

제라르도 자료

게라르두스(Gerardus, 또는 제라르도)는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Lombardia)의 옛 수도인 몬차(Monza)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때에 양친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유산으로 병자와 가난한 이를 돌보는 일을 하면서 거룩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직접 나환자의 손발을 씻겨주어 주위 사람들을 감동케 하였고, 이러한 그의 훌륭한 봉사로 인하여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또 그에게 애긍을 청한 사람이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물러나는 경우가 없었다.

한번은 이 지방에 기근이 들어 그 자신도 거의 아사지경에 이르렀지만, 그의 기도로 인하여 기적적으로 주민들을 살렸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그에 대한 공경은 1582년에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체라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Cera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455년 그르노블

 

 

체라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세라스, 체라시우스, 체라씨오, 체라씨우스, 체라티오, 체라티우스, 케라티오, 케라티우스.

 

 

체라시오 자료

성 케라티우스(또는 체라시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고 다만 5세기 중엽에 프랑스 그르노블의 주교로 활약하였고, 뛰어난 덕행으로 당대에 큰 영향을 끼친 분이라는 사실만 확인된다.

그는 441년의 오랑주 공의회(Council of Orange)에 참석하였고 오슈(Auch) 교구의 설립자로 알려져 있다. 성인의 유해는 롱베스 근교의 시모르 수도원에 안장되어 있다. 세라스(Serase)로도 불리는 성인에 대한 공경은 1903년에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클라우디오

 

  • 가톨릭 성인 이름
    Claud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699년경 브장송

 

 

클라우디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글라우디오, 글라우디우스, 글로드, 끌라우디오, 끌라우디우스, 끌로드, 클라우디우스, 클로드.

 

 

클라우디오 자료

성 클라우디우스(또는 클라우디오)는 프랑스 동부 프랑슈콩테(Franche-Comte) 태생으로 원로원 집안 출신이며, 사제로 서품된 후 브장송 교구에 소속되었다. 그러나 그는 12년 동안 봉직하다가 스스로 은퇴하여 콘다트(Condat) 수도원으로 들어갔는데, 여기서 그는 여생을 거룩하고도 엄격한 생활로 장식하였다고 한다.

이 수도원은 후일 그의 이름을 따서 생클로드(Saint-Claude)로 개명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 수도원의 원장이 된 그는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의 규칙을 채택하고 건물을 세우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685년에 그는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브장송의 주교로 선임되었으나,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7년 동안이나 교구를 발전시켰다. 그 후 그는 또다시 주교직을 사임하고 자기 수도원으로 돌아가서 수도생활에만 전념하였다.

성 클라우디우스의 축일은 12세기에 와서 널리 전파되었고, 그의 유해도 발견되어 큰 공경을 받았는데, 그의 무덤에는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전해온다. 그는 클로드(Claud)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필립보

 

  • 가톨릭 성인 이름
    Philip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경

 

 

필립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비리버, 필리뽀, 필리뿌스, 필리포, 필리포스, 필리푸스, 필립, 필립부스, 필립뽀, 필립뿌스, 필립포, 필립푸스.

 

 

필립보 자료

성 필리푸스(Philippus, 또는 필립보)는 사도들로부터 선발된 일곱 보조자(부제) 중의 한 명으로(사도 6,5), 첫 순교자 스테파노 부제의 순교 후 사마리아 고을로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였다(사도 8,4-8). 그곳에서 마술사 시몬의 개종을 이끌어 냈고(사도 8,9-13), 천사의 인도로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가다가 에티오피아 여왕 칸다케의 내시를 만나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었다(사도 8,26-39). 

그는 “아스돗에 나타나, 카이사리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을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사도 8,40)는 말처럼 지중해 연안 남쪽의 가자와 아스돗에서부터 자신의 집이 있는 사마리아 지방 카이사리아를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그는 카이사리아에서 결혼하지 않은 딸 넷과 함께 살았는데, 그 딸들도 예언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사도 21,8-9).

그리스의 전승에 의하면, 그는 소아시아 서부 아나톨리아(Anatolia) 지방에 있는 트랄레스(Tralles) 교구의 주교였다고 한다. “로마 순교록”은 6월 6일 목록에서 성 필리푸스가 카이사리아에서 평화로이 선종해 묻혔고, 그 곁으로 딸들이 묻혔다고 한다.

그의 설교가 매우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종종 그를 ‘복음사가 필리푸스’(Philip the Evangelist)라고도 불렀고, 그로 인해서 사도 성 필리푸스와 혼동되기도 했다. 동방 정교회 등에서는 10월 11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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