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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8일 남자세례명 11가지

피어나네 2023. 7. 2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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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8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그림발도, 라이문도, 아우스피치오 (프랑스), 아우스피치오 (독일), 아퀼라, 에우제니오 3세, 칠리아노, 콜로만노, 토트나노, 프로코피오, 하드리아노 3세, 총 11분 목록이에요.

 

7월 8일이 영명축일인 남자세례명은 어떤 이름이 좋을까요?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천주교 세례명 상세정보로 이동합니다. 어울리는 세례명을 지금 바로 찾아보세요.

 

7월 8일 여자세례명 순니바, 프리스킬라, 총 2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7월 8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1가지

 

 

 

 

7월 8일 남자세례명 목록

 

  1. 그림발도

  2. 라이문도

  3. 아우스피치오 (+475년 프랑스)

  4. 아우스피치오 (+130년경 독일)

  5. 아퀼라

  6. 에우제니오 3세

  7. 칠리아노

  8. 콜로만노

  9. 토트나노

  10. 프로코피오

  11. 하드리아노 3세

 

7월 8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1가지

 

 

1. 그림발도

 

  • 가톨릭 성인 이름
    Grimbald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903년 윈체스터

 

 

그림발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그림발두스, 그림발드.

 

 

그림발도 자료

성 그림발두스(Grimbaldus, 또는 그림발도)는 플랑드르(Flandre)의 생토메르(Saint-Omer) 태생으로 생베르탱(Saint-Bertin)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잉글랜드(England)의 국왕 앨프레드(Alfred)를 만났는데, 왕이 그의 높은 인격을 보고 잉글랜드로 초청하므로 885년에 영국으로 건너갔다.

국왕은 그를 캔터베리(Canterbury)의 주교로 임명하고자 하였으나 끝끝내 사양하였다. 이리하여 왕의 아들인 에드워드 왕자가 윈체스터에 뉴민스터(New Minster) 수도원을 짓고 그림발드를 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매우 훌륭한 성악가였다는 설이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라이문도

 

  • 가톨릭 성인 이름
    Raymund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자선가

  • 활동 연도와 지역
    +1118년 툴루즈

 

 

라이문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이문두스, 레이먼드.

 

 

라이문도 자료

프랑스 툴루즈에서 태어난 성 라이문두스(Raymundus, 또는 라이문도)는 그곳의 성 세르닌 성당에 봉사하던 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는 이 성당에서 합창대원으로 활약하다가 결혼하였으나, 곧 아내와 사별하였다.

그 후 그는 세상을 등지기로 결심하고 가진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뒤, 참다운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실시하는 자선단체를 만들었다.

그는 이 자선행위를 유대인들에게도 베풀어 말썽을 빚기도 했으며, 가난한 성직자들을 돕는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성 세르닌 성당의 건축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아우스피치오 (프랑스)

 

  • 가톨릭 성인 이름
    Auspic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475년 툴

 

 

아우스피치오 ( 프랑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우스피치우스, 아우스피키오, 아우스피키우스.

 

 

아우스피치오 (프랑스) 자료

성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Sidonius Apollinaris, 8월 21일)는 성 아우스피키우스(또는 아우스피치오)가 프랑스 툴의 주교였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아우스피치오 (독일)

 

  • 가톨릭 성인 이름
    Auspic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30년경 트리어

 

 

아우스피치오 (독일)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우스피치우스, 아우스피키오, 아우스피키우스.

 

 

아우스피치오 (독일) 자료

성 아우스피키우스(또는 아우스피치오)는 마테르누스(Maternus) 계승하여 독일 트리어 교구의 제4대 주교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같은 날 기념하는 프랑스 툴(Toul)의 주교 성 아우스피키우스와 동일인일 수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아퀼라

 

  • 가톨릭 성인 이름
    Aquila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사도들의 제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

 

 

아퀼라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귈라, 아뀔라, 아킬라.

 

 

아퀼라 자료

폰토스(Pontus, Pontos) 출신의 유다인으로 천막 만드는 일을 했던 성 아퀼라와 로마의 귀족 출신인 성녀 프리스킬라(Priscilla)는 부부 사이이다. 성녀 프리스킬라는 성 아퀼라와 우연히 만나 그의 인품과 신앙에 이끌려 결혼을 했다. 그런 부부에게 위기가 닥쳐왔는데,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정치적 이유로 모든 유다인의 거주 금지령을 내려 로마를 떠나야만 했다(사도 18,2). 그들은 당시 지중해 연안의 유명한 항구 도시이자 국제도시인 코린토스(Corinthos, 코린토)로 갔다. 그곳에서는 민족이나 인종에 따른 차별 없이 생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던 중 코린토스에서 복음을 선포하던 사도 성 바오로(Paulus, 6월 29일)를 만나 친분을 맺게 되었다. 마침 성 바오로와 생업이 같아 함께 지내며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이들 부부는 당시 아테네에서의 선교 활동에 별다른 성과 없이 코린토스로 돌아온 성 바오로를 그들의 집에 모시고 살면서 헌신적으로 도와주었다. 당시 성 바오로는 많은 유다인들에게 공격받는 처지라 그와 함께 있다는 것은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들 부부는 자신들의 재물을 봉헌해 사도의 활동을 돕고, 그들의 집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들이 모이는 가정 교회(Domus Ecclesiae)로 사용했다.

날이 갈수록 유다인들의 위협이 증가하자 사도 성 바오로는 코린토스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성 아퀼라와 성녀 프리스킬라도 그를 따라나섰다. 그들은 바오로 사도를 따라 에페수스(Ephesus, 에페소)로 가서 그곳에 머물렀다. 사도 성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여러분에게 다시 오겠습니다.”(사도 18,21)라는 작별 인사를 하고 에페소를 떠나 예루살렘을 거쳐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에페수스에서도 이들 부부의 집은 가정 교회이자 교리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한 번은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성경에 정통한 아폴로(Apollos)라는 유다인이 에페소에 도착했다. 그는 이미 주님의 길을 배워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성 요한(Joannes, 6월 24일)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설교하자 성녀 프리스킬라와 성 아퀼라는 그의 말을 듣고 집으로 데리고 가서 하느님을 길을 정확히 설명해 주었다(사도 18,24-26). 성경이 전해주는 대로 성녀 프리스킬라는 남편인 성 아퀼라와 함께 학식이 높았던 사람까지 가르치는 교사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이들 부부는 에페수스의 가정 교회 안에서도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특히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성이 종교적으로 무엇인가 가르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성녀 프리스킬라가 초대교회의 선교 활동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마지막에 성 아퀼라와 성녀 프리스킬라는 로마로 돌아갔다. 사도 성 바오로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그들의 공덕을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의 협력자들인 프리스카와 아퀼라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내 목숨을 구하여 주었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의 모든 교회가 그들에게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집에 모이는 교회에도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로마 16,3-5) 이를 통해 성녀 프리스킬라와 성 아퀼라 부부가 로마의 교회 공동체 내에서도 중요한 봉사를 수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전히 그들의 집이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가정 교회로 사용되고 있음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로마 순교록은 7월 8일 목록에서 그들이 소아시아 지방에서 순교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전설에 따르면 그들은 로마에서 장렬하게 순교했다고 한다. 가톨릭교회에서 성 아퀼라와 성녀 프리스킬라의 축일을 7월 8일에, 동방 정교회에서는 2월 13일에 함께 기념하고 있다. 다른 정교회에서는 성 아퀼라 홀로 소아시아 지역의 주교로서 7월 14일에 기념한다. 성녀 프리스킬라는 사도행전(18,2.18.26)에서 그렇게 불리지만 사도 성 바오로 사도의 서간에서는 프리스카(Prisca)로 불리고 있다(로마 16,3; 1코린 16,19; 2티모 4,19).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에우제니오 3세

 

  • 가톨릭 성인 이름
    Eugene III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교황

  • 활동 연도와 지역
    +1153년

 

 

에우제니오 3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우게니오, 에우게니우스, 에우제니우스, 유진.

 

 

에우제니오 3세 자료

이탈리아 피사(Pisa) 근교인 몬테마뇨(Montemagno)에서 평민의 아들로 태어난 에우게니우스(Eugenius, 또는 에우제니오)의 본명은 피에트로 파가넬리(Pietro Paganelli)이다.

그는 1128년 피사의 산 제노(San Zeno) 카말돌리회 수도원의 원장이었고, 1130년대 말 클레르보(Clairvaux)의 성 베르나르두스(Bernardus, 8월 20일)를 만나 그에게 매료되어 1138년 클레르보에서 시토회원이 되었다.

그 후 로마(Rome)의 성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다가 전혀 예상하지 않던 교황으로 선출되자 이름을 에우게니우스라 하였다. 그러나 그의 선출을 반대하던 브레시아(Brescia)의 아르날도(Arnaldo)의 농간과 로마 원로원의 통치를 인정하기를 거부했을 때 그는 로마(Roma)를 탈출해야만 하였다.

그는 1145년 파르마(Parma)의 수도원에서 비밀리에 축성식을 가졌다. 그 후 몇 가지 조약을 체결한 뒤에 로마로 돌아가 정상적인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의 초청으로 그는 1147년에 그곳을 방문하였고 제2차 십자군 운동을 선포하였다.

비록 이 십자군은 성 베르나르두스의 노력이 지대하였지만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트 3세 군대의 패퇴로 말미암아 실패로 끝났다. 에우게니우스 교황은 1147년에 파리(Paris)와 트리어(Trier)에서 교회회의를 개최하고, 다음 해에는 랭스(Reims)에서 교회회의를 열어 아르날도를 단죄하였다.

세상이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았을 때 그는 로마로 귀향하였으나, 1150년에 재차 강제로 로마를 떠나야 했다. 이번에는 티볼리(Tivoli)에 거주하였고, 1153년 붉은 수염왕 프레드리히 1세(Friedrich I) 황제와 콘스탄츠(Konstanz)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교회의 권리를 보증하는데 유익한 협약이었으나, 그는 그해 7월 8일에 그곳에서 선종하였다. 그의 시신은 성 베드로 대성전에 안치되었다.

그는 소란스런 재임 기간을 통하여 몇 가지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동방 교회와 로마와의 일치를 시도하였고, 성직자의 규율을 재정비하였으며, 명예스럽지 못한 성직자들을 제거하였고, 마니교의 재건을 봉쇄하였다.

그는 실로 용기가 많았고 단순하였으며 항상 성 베르나르두스의 영적 권고를 따라 생활하여 덕이 출중하였다. 그는 살아 있을 때부터 공경을 받았고, 사망 후에 그를 통해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그는 1872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시복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칠리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Chilia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689년경 뷔르츠부르크

 

 

칠리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낄리안, 칠리아누스, 킬리아노, 킬리아누스, 킬리안.

 

 

칠리아노 자료

아일랜드 수도자이던 성 킬리아누스(또는 또는 칠리아노)는 주교로 축성된 후 11명의 동료들과 함께 로마(Roma)로 가서 교황 코논(Conon)으로부터 독일의 프랑코니아(Franconia, 바덴과 바이에른) 지방의 복음 선포에 관한 책임을 맡았다.

그는 능력 있고 열성적인 협조자 성 콜로만누스(Colomannus) 신부와 성 토트나누스(Totnanus) 부제와 함께 선교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성 킬리아누스와 동료들은 순교하였다고 하는데 그 확실한 근거는 부족하다. 그는 킬리안(Kilian)으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콜로만노

 

  • 가톨릭 성인 이름
    Coloman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689년경

 

 

콜로만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꼴로만노, 꼴로만누스, 콜로만누스, 콜만, 콜만노, 콜만누스.

 

 

콜로만노 자료

아일랜드 수도자이던 성 킬리아누스(Chilianus)는 주교로 축성된 후 11명의 동료들과 함께 로마(Roma)로 가서 교황 코논(Conon)으로부터 독일의 프랑코니아(Franconia, 바덴과 바이에른) 지방의 복음 선포에 관한 책임을 맡았다.

그는 능력 있고 열성적인 협조자 성 콜로만누스(또는 콜로만노) 신부와 토트나누스(Totnanus) 부제와 함께 선교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성 킬리아누스와 동료들은 순교하였다고 하는데 그 확실한 근거는 부족하다. 그는 콜만(Colman)으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토트나노

 

  • 가톨릭 성인 이름
    Totna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689년경

 

 

토트나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또뜨나노, 또뜨나누스, 또뜨난, 토트나누스, 토트난.

 

 

토트나노 자료

아일랜드 수도자이던 성 킬리아누스(Chilianus)는 주교로 축성된 후 11명의 동료들과 함께 로마(Roma)로 가서 교황 코논(Conon)으로부터 독일의 프랑코니아(Franconia, 바덴과 바이에른) 지방의 복음 선포에 관한 책임을 맡았다.

그는 능력 있고 열성적인 협조자 성 콜로만누스(Colomannus) 신부와 토트나누스(또는 토트나노) 부제와 함께 선교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성 킬리아누스와 동료들은 순교하였다고 하는데 그 확실한 근거는 부족하다. 그는 토트난(Totnan)으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프로코피오

 

  • 가톨릭 성인 이름
    Procop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스키토폴리스

 

 

프로코피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프로꼬삐오, 프로꼬삐우스, 프로코피우스.

 

 

프로코피오 자료

교회사가 에우세비우스(Eusebius)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성 프로코피우스(또는 프로코피오)는 예루살렘 출신으로 스키토폴리스에서 살았으며, 교회의 지도자이자 구마자였으며 시리아어 통역사였다고 한다.

그는 매우 덕스럽고 겸손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그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카이사레아(Caesarea)로 이송되어 신전에 희생 제물을 바치라는 요구에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 주인을 모시는 것은 옳지 못하고, 오직 한 분의 왕이신 주님만 섬겨야 합니다.”

이 말이 황제를 격노케 하여 그는 그 자리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팔레스티나(Palestina) 지방의 첫 순교자로 기록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하드리아노 3세

 

  • 가톨릭 성인 이름
    Hadrian III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교황

  • 활동 연도와 지역
    +885년

 

 

하드리아노 3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드리아노, 아드리아누스, 아드리안, 하드리아누스, 하드리안.

 

 

하드리아노 3세 자료

성 하드리아노 3세(Hadrianus III, 또는 하드리아노) 교황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 그가 성인으로 공경을 받는 것보다는 로마(Roma)의 심각한 기근을 해결한 역사적인 인물로 더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는 884년 5월 17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포르토(Porto)의 주교 포르모수스(Formosus)가 주도하는 로마의 귀족당에 대항하였다.

그는 카롤루스 뚱보왕(Carolus Pinguis)의 왕위 계승 문제 때문에 초청을 받고 독일 보름스(Worms) 제국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 모데나(Modena) 인근에서 갑자기 사망하였다. 암살이란 의혹도 있었다. 그에 대한 공경이 여러 지방으로 전파되었고, 1891년 6월 2일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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