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세례명/세례명 날짜 찾기

7월 13일 여자세례명 4가지

피어나네 2023. 8. 11. 08:01
반응형

 

7월 13일에 해당하는 여자세례명 데레사(예수의), 미로페, 밀드레다, 클렐리아 바르비에리, 총 4분 목록이에요.

 

7월 13일이 영명축일인 여자세례명은 어떤 이름이 좋을까요?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천주교 세례명 상세정보로 이동합니다. 어울리는 세례명을 지금 바로 찾아보세요.

 

7월 13일 남자세례명 세라피온, 실라스, 에우제니오, 에즈라, 요엘, 토마스 턴스털, 투리아보, 헨리코 2세, 총 8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7월 13일
천주교 여자세례명
4가지

 

 

 

 

7월 13일 여자세례명 목록

 

  1. 데레사(예수의)

  2. 미로페

  3. 밀드레다

  4. 클렐리아 바르비에리

 

7월 13일 천주교 여자세례명 4가지

 

 

1. 데레사(예수의)

 

  • 가톨릭 성인 이름
    Teresa of Jesus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수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900-1920년 로스 안데스

 

 

데레사(예수의)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테레사, 테레시아.

 

 

데레사(예수의) 자료

성녀 로스 안데스의 예수의 테레사(Teresia de Jesus de los Andes, 또는 예수의 데레사)는 1900년 7월 13일 칠레(Chile) 산티아고(Santiago)의 상류 가정에서 후아나 페르난데즈 델 솔라르(Juana Fernandez del Solar)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심 깊었던 그녀는 프랑스의 맨발의 카르멜회 수녀인 리지외(Lisieux)의 성녀 테레사(10월 1일)의 전기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이 성인전을 통해 그녀는 자신이 하느님을 위해 홀로 살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중심적인 성격을 극복하며 모든 것 위에 다른 사람을 두는 방향으로 자신을 변화시켜 나갔다. 

그녀의 자기 변화에 더 큰 영감을 준 것은 첫영성체 때였다. 이를 통해 그녀는 주어지는 모든 것을 값진 것으로 만들기 위해 더욱 노력하였다.

1919년 5월 7일, 19살의 나이에 후아나(또는 후아니타 Juanita)는 로스 안데스의 카르멜회 여자 수도원에 입회하여 같은 해 10월 14일 착복식을 하고 예수의 테레사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녀의 짧은 생애의 마지막을 향해가고 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영성 생활의 체험을 많은 사람과 나누기 위해 편지 쓰기 사도직을 시작했다.

그러나 수녀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치명적인 발진티푸스에 걸려 활동의 제약을 받게 되었다. 그녀의 스무 번째 생일을 석 달 남겨 두고, 또 6개월의 법정 수련 기간을 완료하기 직전에 그녀는 죽음의 위험 중에 있는 상태에서 관면을 받고 1920년 4월 7일 첫 서원을 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12일, 그해의 사순시기 성주간 중에 선종하였다.

성녀 예수의 테레사가 선종한 후 그녀의 시신은 산티아고에서 90km 정도 떨어진 로스 안데스의 아우코 린코나다(Auco-Rinconada) 순례지에 모셔졌다. 매년 10만 명 정도의 순례자들이 그녀의 유해를 참배하기 위해 이곳을 찾을 정도로 그녀는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여성과 젊은이들에게 잘 알려진 그녀의 생애에 대한 텔레비전 미니시리즈가 1990년대 초 칠레에서 제작되어 방영되기도 했다.

그녀는 1987년 4월 3일 칠레 산티아고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93년 3월 21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녀는 칠레의 첫 번째 성인이자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성인으로 선포된 첫 번째 맨발의 카르멜 여자 수도원의 수녀이다.

또한 아빌라(Avila)의 성녀 테레사(10월 15일), 예수 성심의 성녀 테레사 마르가리타 레디(Teresia Margarita Redi, 3월 7일), 리지외의 성녀 테레사(10월 1일), 십자가의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Teresia Benedicta, 8월 9일)와 더불어 맨발의 카르멜 여자 수도원에서 다섯 번째로 테레사 이름을 가진 성녀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미로페

 

  • 가톨릭 성인 이름
    Myropes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1년 키오스

 

 

미로페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미로뻬스, 미로페스.

 

 

미로페 자료

성녀 미로페는 3세기에 소아시아 서부 에게해 연안의 에페수스(Ephesus)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배우며 성장했다고 한다.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에페수스를 떠나 키오스 섬으로 갔고, 그곳에서 병자들을 돌보고 순교자들의 무덤을 자주 순례하며 경건한 삶을 살았다.

성녀 미로페는 로마군의 해군으로 키오스 섬에 주둔하다가 이교도의 신상 앞에 희생 제물 바치기를 거부하고 용감하게 순교하여 우물에 던져진 성 이시도루스(Isidorus, 5월 14일)의 시신을 정성 들여 수습하여 매장해주었다.

그녀와 함께 성 이시도루스의 시신을 수습했던 동료 군인 암모니우스(Ammonius)도 그 일로 해서 체포되었다. 성녀 미로페는 몽둥이로 심한 매질을 당한 후 감옥에 갇혔는데, 고문의 결과로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암모니우스도 이때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성녀 미로페의 시신은 성 이시도루스 무덤 옆에 묻혔고, 그들의 무덤에서 여러 차례 치유 기적이 일어나면서 5세기에 그 위에 기념성당이 건립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이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7월 13일 목록에서 성녀 미로페의 순교에 대해 전해주고 있으나 암모니우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그녀의 축일을 12월 2일에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밀드레다

 

  • 가톨릭 성인 이름
    Mildred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공주, 수녀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700년경 민스터

 

 

밀드레다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밀드레드.

 

 

밀드레다 자료

머시아(Mercia)의 왕 미르왈드(Merewalh)와 켄트(Kent)의 공주인 성녀 에르멘부르가(Ermenburga, 11월 19일)의 딸이며, 성녀 밀부르지스(Milburgis, 2월 23일)와 성녀 밀드지타(Mildgitha, 1월 17일)의 동생인 성녀 밀드레다(Mildreda)는 파리(Paris) 교외 셸(Chelles) 수도원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열렬한 구혼자의 청을 거절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타네트(Thanet) 섬에 있는 민스터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 후 그녀는 그곳의 원장이 되었다. 그녀는 켄트에서 열린 교회회의에도 참석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한 놀라운 자애심이 크게 돋보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클렐리아 바르비에리

 

  • 가톨릭 성인 이름
    Clelia Barbieri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47-1870년

 

 

클렐리아 바르비에리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글렐리아, 끌렐리아, 클레리아.

 

 

클렐리아 바르비에리 자료

성녀 클렐리아 바르비에리는 1847년 2월 13일 이탈리아 볼로냐(Bologna) 외곽의 페르시체토(Persiceto)에 있는 분드리에 디 산 지오반니(Bundrie di San Giovanni)라는 마을에서 주세페 바르비에리(Giuseppe Barbieri)와 지아친타 난네티(Giacinta Nannetti)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서로 다른 출신을 갖고 있다. 아버지 주세페 바르비에리는 가장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머니 지아친타 난네티는 마을에서 가장 유력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 지역의 의사인 지아친타의 삼촌 집에서 하인으로 일했고 어머니는 부유한 피에트로 난네티(Pietro Nannetti)의 딸로 자랐다. 많은 논란 끝에 주세페와 결혼한 지아친타는 노동자의 가난을 받아들이고, 부유한 집에서 나와 시아버지인 산테 바르비에리(Sante Barbieri)의 초라한 시골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돌처럼 단단한 믿음과 온전한 그리스도교적 삶을 만들어갔다.

어머니의 소원대로 성녀 클레리아는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녀에게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가도록 어린 나이부터 가르쳤다. 어느 날 성녀 클레리아는 어머니에게 어떻게 하면 성녀가 되는지 묻기도 했다. 그러면서 어린 클레리아는 바느질과 방적 기술을 익히고 거친 털을 짜는 방법을 터득했는데, 이는 그 지역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1855년 콜레라가 번졌을 때 8살이었던 성녀 클레리아는 아버지를 여의었다. 의사 삼촌의 배려로 성녀 클레리아와 그녀의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은 성당 근처에 있는 편안한 집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성녀 클레리아는 하루하루를 더 거룩하게 열심히 살 수 있었다.

그녀는 평소 집에서 바느질하거나 성당에서 기도하며 지냈다. 보통 성인식 때 첫영성체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교리에 대해 완벽히 준비된 그녀는 1858년 6월 17일 11살의 나이로 첫영성체를 할 수 있었다.

이날은 성녀 클레리아의 미래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왜냐하면 그날 처음으로 영적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과 성모님의 슬픔은 그녀의 성스러운 영혼을 더욱 고무하였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미래를 보게 되었으며 기도와 선행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성체를 모신 성광 앞에서 그녀는 부동의 자세로 오로지 기도에 전념하였고, 집에서는 힘든 일을 하는 다른 소녀들의 모범이 되었다. 조숙한 그녀는 삼베를 짜는 힘든 일이 주업인 곳에서 하느님에 관한 생각과 기도를 늘 간직하고 있었고 때로는 동료들에게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녀는 세상일에 열심인 마르타(Martha)는 아니었지만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힘겨운 노동 현장에서 일하면서 그녀의 가냘픈 손은 힘겨운 삶의 흔적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그녀는 모든 것을 멀리하고 오로지 사랑과 헌신에 몸을 바친 마리아(Maria)도 아니었지만 잡념을 갖지 않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만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는 헌신적인 삶을 살며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잊거나 무시했다. 그녀는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이 기뻤고, 그녀의 기쁨은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주로 나타났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그녀를 가장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동료들에게로 이끌었다. 그녀의 강렬한 믿음은 하느님의 가난한 자들에게 그녀의 모든 것을 주게끔 했다.

이 시기에 교회에는 ‘그리스도교 교리교육 봉사자’라는 모임이 있었다. 그들은 주로 남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냉담하는 이들을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그녀의 마을에서는 어느 나이 든 학교 교사가 이 모임을 이끌고 있었다.

성녀 클레리아는 이 모임에 참여하였고,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모았다. 처음에 조교로 들어갔던 그녀는 놀라운 역량과 준비성으로 선임 회원들까지 인도하게 되었다. 제법 솔깃한 청혼을 거절한 젊은 아가씨들은 성녀 클레리아를 그들의 지도자로 뽑고 사도적이고 명상적인 삶을 채택하였다.

이 헌신의 삶은 성체성사를 받는 데서 비롯되어 인근 마을의 농부와 노동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당시는 이탈리아의 통일이라는 정치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기에 그들의 생각이 곧바로 현실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1868년 5월 1일 정치적인 문제가 해결되면서 성녀 클레리아와 그녀의 동료들은 ‘교사의 집’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하여 그들의 생각을 현실로 만들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리스도교 교리교육 봉사자회와 공식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이는 후에 그녀가 ‘슬픔의 어머니의 작은 자 수녀회’(The Congregation of Minims of the Sorrowful Mother)를 설립하는 초석이 되었다.

교사의 집으로 옮긴 후 의심할 여지 없이 하느님의 힘으로만 가능한 비범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그녀의 기도에 담긴 믿음과 헌신적인 사랑은 늘 놀라웠다. 그들의 작은 공동체에는 믿음과 하느님에 대한 갈망이 가득했고, 창의력과 상상력이 충만한 선교는 조직을 통한 선교가 아닌 보이지 않는 말씀을 통한 선교였으며, 성녀 클레리아는 움직이는 영혼이었다.

처음에 설립한 작은 단체가 점점 그 수를 늘려가면서 교리교육과 종교적 방향성이 필요한 가난하고 병든 어린 학생들의 수도 늘어갔다. 사람들은 성녀 클레리아를 점차 믿음의 지도자와 선생님으로 보게 되었다. 그들은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녀의 나이 22세 때의 일이었다. 성녀 클레리아는 수녀회를 설립한 지 2년이 지난 후 잠잠했던 결핵이 재발해 볼로냐에서 선종하였다.

성녀 클레리아가 설립한 슬픔의 어머니의 작은 자 수녀회는 이탈리아 전역과 인도 그리고 탄자니아까지 확장되어 갔다. 오늘날 그녀의 발자취를 따르는 수녀들은 지속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돕고 있으며 300여 명이 35개 공동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23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성녀 클레리아 바르비에리는 교회 역사상 가장 어린 수도 공동체의 설립자이다. 그녀는 1968년 10월 2일 교황 복자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9년 4월 9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그 외 세례명 날짜로 찾기

 

날짜순 천주교 세례명

어떤 세례명이 좋을까?

pieonane.com

 


 

그 외 세례명 이름으로 찾기

 

이름순 가톨릭 세례명

본받고 싶은 가톨릭 성인 찾기

pieonane.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