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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4일 남자세례명 18가지

피어나네 2023. 8. 1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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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4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가밀로 데 렐리스, 니코데모, 데우스데디트, 리카르도 랭혼, 마르첼리노, 보니파시오, 옵타시아노, 울릭, 유스토, 치로, 카스파르 데 보노, 펠릭스, 포카, 프란치스코 솔라노, 프로코피오, 헤라클라, 훔베르토, 흐로즈나타, 총 18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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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4일 여자세례명 토스카나, 총 1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7월 14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8가지

 

 

 

 

7월 14일 남자세례명 목록

 

  1. 가밀로 데 렐리스

  2. 니코데모

  3. 데우스데디트

  4. 리카르도 랭혼

  5. 마르첼리노

  6. 보니파시오

  7. 옵타시아노

  8. 울릭

  9. 유스토

  10. 치로

  11. 카스파르 데 보노

  12. 펠릭스

  13. 포카

  14. 프란치스코 솔라노

  15. 프로코피오

  16. 헤라클라

  17. 훔베르토

  18. 흐로즈나타

 

7월 14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8가지

 

 

1. 가밀로 데 렐리스

 

  • 가톨릭 성인 이름
    Camillus de Lelli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50-1614년

 

 

가밀로 데 렐리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밀루스, 까밀로, 까밀루스, 카밀, 카밀로, 카밀루스.

 

 

가밀로 데 렐리스 자료

성 카밀루스 데 렐리스(또는 가밀로 데 렐리스)는 1550년 5월 25일 이탈리아 남부를 지배하던 나폴리 왕국의 부키아니코(Bucchianico, 오늘날 아브루초[Abruzzo]에 속한 곳)에서 태어났다. 거의 50세에 그를 낳은 어머니 카밀라 콤펠리 데 라우레토(Camilla Compelli de Laureto)는 1562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는 나폴리와 프랑스 왕실 군대의 장교로 복무하며 거의 집에 있을 때가 없었다. 청소년 시절부터 노름을 좋아하고 군대를 동경하던 그는 입대하고자 했으나 오른쪽 발에 궤양이 생겨 연기하였다. 1571년 로마의 산 지아코모 병원(San Giacomo Hospital)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병원에서 조수로 일하던 중 노름을 하다 쫓겨났다.

다시 군에 입대해 베네치아(Venezia) 군대에 소속되어 이탈리아를 침략한 터키군과 여러 전투에서 맞서 싸웠다. 1574년경에는 청소년 때부터 습관이 된 도박에 빠져 빈털터리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군대에서도 나와 이곳저곳을 방황하다가 우연히 아풀리아(Apulia)의 만프레도니아(Manfredonia)에 있는 카푸친 수도원의 공사장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어느 날 한 수사의 설교를 듣고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그는 수도자가 되고자 수도회에 지원하였다. 하지만 거친 수도복에 발이 쓸려 예전의 상처가 도져 수련소에 들어올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치료를 위해 다시 로마의 산 지아코모 병원으로 갔다. 그곳에서 병을 치료하며 조수 일을 맡았다.

1579년 다시 카푸친 수도원에 들어갔으나 상처가 덧나면서 결국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병으로 일생 고생해야만 했다.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 성 카밀루스 데 렐리스는 자신을 성화하는 방법으로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투신하기로 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면서 그는 병원의 회계를 담당하는 최고 관리자까지 되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그는 병원의 놀라운 상황과 여러 부정적인 문제에도 눈을 뜨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남은 인생을 바칠 결심을 하고 뜻있는 간호사들과 함께 테베레(Tevere) 강변의 한 빈민촌에 공동체를 이룬 후 가난한 병자들의 가정을 방문하여 정성껏 돌보았다.

그는 자신의 고해신부이던 성 필리푸스 네리우스(Philippus Nerius, 5월 26일)의 권고를 받아들여 사제가 되기 위해 로마의 예수회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 1584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이미 함께 봉사하던 이들과 협조자를 모아 ‘병자 간호 성직 수도회’(Clerici regulares infirmis ministrantes)를 창설했다.

초대 총장이 된 그는 병든 이들의 상처뿐만 아니라 영적인 돌봄에도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1586년 교황 식스투스 5세(Sixtus V)로부터 수도회 회칙에 대한 승인을 받았다. 성 카밀루스와 동료 사제와 수사들은 우선 로마의 주요 병원을 방문하여 환자들의 영육의 건강을 돌보는 데 집중했고, 이어서 1588년 나폴리, 1594년에는 밀라노(Milano)의 병원에도 진출하여 환자를 돌보았다. 그러면서 보통 카밀로회(Ordo Sancti Camilli, O.S.C.)로 더 잘 알려진 그의 수도회는 청빈 · 정결 · 순명의 서원 외에 제4의 서원으로 ‘환자에 대한 정성 어린 간호’를 추가했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페스트가 유행했었다. 성 카밀루스 데 렐리스와 동료들은 로마 항구의 배들을 통해 전염된 페스트 환자들에게 큰 관심을 기울이고 치료하는 데 열중했다. 무엇보다 병원의 청결을 중요하게 생각한 그는 항상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환자들이 적당한 음식을 먹도록 하고, 전염병일 경우는 적절히 격리하는 방법 등을 활용해 병자들의 치료에 도움을 주었다.

그와 동료들은 항상 숨을 거두는 환자들 곁을 끝까지 지켰고, 임종자들의 장례 등에도 큰 관심을 보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높은 칭송을 받았다. 그들의 헌신적인 간호와 환자들과의 인격적 만남에 감동한 사람들이 ‘성 카밀루스의 품에서 죽으면 지옥은 안 간다’라고 그에게 존경과 애정을 표현했고, 그를 ‘로마의 성인’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성 카밀루스 데 렐리스는 건강이 점차 나빠지면서 더는 총장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1067년에 사임하였다. 그 무렵 수도회는 이탈리아 전역뿐만 아니라 헝가리까지 확장되어 나갔다. 사임 후에도 수도회와 환자들을 위해 헌신하던 그는 신임 총장을 동반해서 이탈리아 여러 곳의 병원에서 활동하는 수도원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면서 병에 걸려 건강이 나빠진 그는 마지막을 로마에서 맞이하고 싶다는 소망대로 로마로 돌아와서 1614년 7월 14일 선종하였다.

그의 시신은 로마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성당 제대에 안치되었다. 그는 1742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이어 1746년 같은 교황으로부터 시성되었다. 1886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천주의 성 요한(Joannes, 3월 8일)과 함께 모든 병자와 병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고, 1930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모든 간호사와 간호 단체의 수호성인으로 확대 선포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니코데모

 

  • 가톨릭 성인 이름
    Nicodem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748-1809년 아토스산

 

 

니코데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니고데모, 니고데무스, 니꼬데모, 니꼬데무스, 니코데무스.

 

 

니코데모 자료

성 니코데무스(또는 니코데모)는 1775년에 아토스 산의 디오니시우에서 수도자가 되었는데, 당대의 최고 저술가로 알려진 분이다. 그는 주로 교회법전, 성인전, 전례, 수덕신비 신학 등에 관한 저서를 남겼다. 그가 그리스어로 쓴 “라우렌티우스 스쿠폴리의 영적 전쟁”은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 수련”의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는 코린토스(Corinthos)의 성 마카리우스(Macarius)와 공동 편저한 “필로칼리아”인데, 이 책은 1782년에 베네치아(Venezia)에서 출간되었다. 또 그리스 교부들과 수도자들의 저서들을 집대성한 전집도 유명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데우스데디트

 

  • 가톨릭 성인 이름
    Deusdedit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664년 캔터베리

 

 

데우스데디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우스데딧, 프리또나, 프리토나.

 

 

데우스데디트 자료

남(南) 색슨 사람인 성 데우스데디트를 프리토나(Frithona)라고도 부르는데, 앵글로 색슨족으로서는 처음으로 고위 성직자가 된 분이다. 그는 653년에 캔터베리의 대주교로서 성 호노리우스(Honorius, 9월 30일)를 승계하였다.

그는 657년에 피터스버로우(Petersborough)의 수도원 건립을 도왔고, 타네트(Thanet) 섬에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 외에 그에 대한 자세한 이력과 활동은 알 수 없다. 성인의 예전 축일은 1월 14일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리카르도 랭혼

 

  • 가톨릭 성인 이름
    Richard Langhorne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법률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24?-1679년 영국

 

 

리카르도 랭혼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랑고른, 랑혼, 랭고른,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리카르도 랭혼 자료

리카르두스 랭혼(Richardus Langhorne, 또는 리카르도 랭혼)은 1624년경 영국 잉글랜드의 베드퍼드셔(Bedfordshire)에서 변호사인 윌리엄 랑혼(William Langhorne)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647년에 런던의 대표적 법학원인 이너 템플(Inner Temple)에 들어가 수확한 후 1654년 11월 변호사가 되었다. 가톨릭 신자로서 정의롭고 신심 깊은 법률가라는 평을 들었던 그는 예수회에 대한 법적 · 재정적 자문을 제공했다. 

1666년의 런던 대화재 이후 반가톨릭적 정서가 극심할 때 그는 잠시 체포되기도 했지만 바로 풀려났다. 그의 아내인 도로시 레가트(Dorothy Legatt)는 에식스(Essex)의 헤이버링(Havering) 출신의 열심한 프로테스탄트 신자였다.

1678년 티투스 오츠(Titus Oates)의 ‘가톨릭 음모 사건’(Popish Plot)이 발생했을 때, 세 명의 예수회 신부와 베네딕토회 신부 한 명이 체포되었다.

이 음모는 영국 국교회 사제이자 가톨릭의 배교자인 티투스 오츠가 가톨릭 교회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찰스 2세(Charles II) 왕을 암살하고 가톨릭 신자이자 나중에 국왕 제임스 2세(James II)가 된 요크의 공작을 왕으로 세울 음모를 꾸민다고 주장하여 런던을 공포정치에 빠뜨린 사건이었다.

그해 9월 찰스 2세 왕이 직접 추밀원에서 티투스 오츠를 심문해 그 모든 것이 거짓임이 드러났지만, 그로 인한 공포 상태는 1681년까지 계속되면서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예수회의 법률 고문이었던 리카르두스 랭혼은 네 명의 사제에 대한 서류를 검토하고 그들에게 아무런 혐의도 없음을 즉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네 사제가 체포된 후 한 주 만에 바로 체포되어 뉴게이트(Newgate) 감옥에 갇혔고 반역죄가 적용되었다.

그는 1679년 6월 14일 재판을 받았는데, 반역죄로 기소된 사람은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변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반가톨릭적 분위기 속에서 그의 주장과 결백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1679년 7월 14일 런던의 타이번(Tyburn)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형 집행을 앞두고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주 예수님, 당신의 손에 제 영혼을 맡겨드립니다. 지금, 이 순간 천국에 들어가게 하소서. 저는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교수형 집행자에게 “나는 준비가 되었소. 나 때문에 지체할 필요는 없소”라고 당당히 말하였다.

리카르두스 랭혼은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순교한 날인 7월 14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리카르두스 랭혼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마르첼리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cell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선교사

  • 활동 연도와 지역
    +762년경

 

 

마르첼리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셀리노, 마르셀리누스, 마르첼름, 마르첼리누스, 마르첼모, 마르쿨프.

 

 

마르첼리노 자료

마르첼모(Marchelm), 마르쿨프(Marculf)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는 성 마르첼리누스(또는 마르첼리노)는 프리슬란트(Friesland)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성 빌리브로르드(Willibrord)를 따라 네덜란드로 갔던 영국인이다.

그는 위트레흐트(Utrecht)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와 합류하여 15년 동안이나 프리슬란트와 구엘더랜드에서 활동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성 그레고리우스가 순교하자 그의 관할 구역이 성 레부인(Lebuin)의 수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므로, 그는 그 성인의 명에 따라 오브리셀의 이방인들에게 가서 성공적으로 활동하다가 그곳에서 운명하였다. 그의 유해는 나중에 데벤터로 이장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보니파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Boniface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270년 사보이아

 

 

보니파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보니파시우스, 보니파키오, 보니파키우스, 보니파티오, 보니파티우스, 보니페이스.

 

 

보니파시오 자료

사보이아 공국의 백작 토마스의 아들인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또는 보니파시오)는 젊어서 대 샤르트르회에 들어갔다가 카르투지오 회원이 되었으며, 1234년부터 1241년까지 벨리(Belley) 교구의 관리자로서 봉사하였다.

1241년 그는 잉글랜드(England)의 헨리 3세의 황후가 된 조카의 영향력에 힘입어 캔터베리(Canterbury)의 대주교로 선출되었으나, 1244년까지 자신의 주교좌에 부임하지 않을 정도로 강직하였다. 그는 교구를 개혁하고 과중하게 부과되는 상납금 등을 개혁하려고 시도하여 수많은 반대자들을 만들었다.

그는 국왕이 출타 중일 때에는 헨리 왕의 섭정을 맡았으며, 프랑스에 대한 외교사절직도 수행하곤 하였다. 그는 에드워드 1세와 더불어 십자군을 둘러보러 가는 도중에 사망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38년에 승인되었고, 축일도 이전에는 3월 13일에 기념했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옵타시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Optat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05년 브레시아

 

 

옵타시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옵따띠아노, 옵따띠아누스, 옵따씨아노, 옵따씨아누스, 옵타시아누스, 옵타티아노, 옵타티아누스.

 

 

옵타시아노 자료

성 옵타티아누스(Optatianus, 또는 옵타시아노)는 이탈리아 브레시아의 주교로서 451년부터 죽을 때까지 50년 이상 교구를 다스렸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울릭

 

  • 가톨릭 성인 이름
    Ulric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020-1093년 클뤼니

 

 

울릭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울리크.

 

 

울릭 자료

이교도로 태어난 성 울릭은 젊어서 궁성에서 지냈으나 그의 삼촌인 독일 프라이징(Freising)의 주교 노트케르(Notker)를 만난 뒤에는 세속적인 야심을 모두 버렸다.

그 후 그는 사제가 되었으나 크게 만족하지 못하고 로마(Roma)와 예루살렘을 순례하였는데, 이때 더욱 엄격한 생활을 하고자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1052년에 클뤼니의 성 후고(Hugo, 4월 29일)로부터 클뤼니 수도원의 수도복을 받았다.

그는 재능이 뛰어난 수도자였기 때문에 새 수도원의 건축이나 교황을 반대하는 세력들의 화합을 위하여 늘 동분서주하였다. 하지만 그는 수도원 생활의 엄격성을 회복하는데 기울인 노력 때문에 더욱 위대한 수도자로 추앙을 받고 있다. 한 번은 어느 수도자가 울고 있는 그를 보았다.

“나는 내 죄 때문에 웁니다.”

또한 그는 클뤼니 수도원의 회헌을 비롯하여 세 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러나 만년의 2년 동안은 맹인으로서 고통스런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유스토

 

  • 가톨릭 성인 이름
    Jus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로마

 

 

유스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유스또, 유스뚜스, 유스투스.

 

 

유스토 자료

로마군의 베테랑 군인이었던 성 유스투스는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그의 순교 장소는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일 수도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치로

 

  • 가톨릭 성인 이름
    Cyr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카르타고

 

 

치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치루스, 키로, 키루스.

 

 

치로 자료

카르타고의 주교인 성 키루스(또는 치로)는 아마 혼동이나 필사자의 실수의 결과로 보인다. 히포(Hippo)의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생애를 기록한 성 포시디우스(Possidius)는 이 카르타고의 주교가 성 키루스의 축일에 대한 강론을 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성 키루스가 아닌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 9월 16일)에 대한 강론이라는 것이 더욱 사실같이 보인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카스파르 데 보노

 

  • 가톨릭 성인 이름
    Caspar de Bono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530-1604년

 

 

카스파르 데 보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없음.

 

 

카스파르 데 보노 자료

카스파르 데 보노는 1530년에 에스파냐의 발렌시아(Valencia)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부모는 너무나 가난하고 또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는 성장한 후 가계를 돕기 위해 비단 장사를 떠났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장사를 그만두고 군인이 되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성소가 어디에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하였으며, 많은 시간을 기도와 묵상으로 지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은총으로 확신을 얻고, 수덕생활을 목표로 삼고 군대를 떠나려 하였지만 쉽게 놓아 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어느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였는데, 이때 그는 회복되기만 하면 '가장 작은 이들의 수도회'(Minimi Fratres, least brothers)에 입회하기로 결심하고, 나중에 그곳의 회원이 되었다.

파울라(Paula)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4월 2일)가 설립한 이 수도회는 대단히 엄격하였지만, 그의 장상은 카스파르 데 보노의 높은 성덕을 즉시 알아보았으며, 또 그를 다음 해에 사제로 서품하였다. 수도생활을 하면서 그는 늘 육체적인 여러 고통으로 괴로움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발적인 고행을 배가하였다.

그는 1604년에 발렌시아에서 운명하였고, 그의 무덤에서 여러 기적이 일어나면서 그에 대한 공경이 널리 퍼졌다. 마침내 그는 1786년 교황 비오 6세(Pius 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펠릭스

 

  • 가톨릭 성인 이름
    Felix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390년 코모

 

 

펠릭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펠리체.

 

 

펠릭스 자료

성 펠릭스는 이탈리아 코모의 초대주교이며, 밀라노(Milano)의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12월 7일)와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포카

 

  • 가톨릭 성인 이름
    Phoca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17년 시노페

 

 

포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뽀까스, 포까스, 포카스.

 

 

포카 자료

흑해 연안 시노페의 주교인 성 포카는 트라야누스 황제 때에 순교하였다. 그는 9월 22일에 기념하는 정원사이자 순교자인 성 포카의 삶으로부터 유래된 전설적인 인물로도 보인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프란치스코 솔라노

 

  • 가톨릭 성인 이름
    Francis Solano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선교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549-1610년

 

 

프란치스코 솔라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방지거,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프란치스코 솔라노 자료

프란치스코 회원인 성 프란치스코 솔라노(Franciscus Solano, 또는 프란체스코)는 에스파냐의 안달루시아(Andalusia)에서 태어났으며 1589년에 남아메리카 중부 페루(Peru)의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가 타고 가던 배가 폭풍우를 만나 포기해야 했지만 그는 몇몇 흑인 노예들과 함께 끝까지 배를 지키려고 하였는데, 결국에는 그 노예들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건지는 경험을 하였다.

그는 남아메리카의 여러 지역을 다니며 인디언들 가운데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그는 다른 어떤 유럽 성직자와는 달리 각 지방의 토착 언어를 열심히 배웠고, 또한 언어의 특은을 입은 사람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604년 그는 리마(Lima)의 어느 시장에서 그 도시의 부패상을 폭로하는 설교를 하였는데, 그 설교가 너무나 강력하였기 때문에 주민들이 크게 동요하였다. 시 당국은 그 지방의 대주교에게 공식 항의하였고, 그는 군중들을 진정시켜야만 하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거의 20년 동안 인디언과 에스파냐 정복자 사이를 오가며 피나는 노력을 경주하여 훌륭한 수도자의 상을 후손들에게 남겨 주었다. 1610년 7월 14일 페루의 리마에서 선종한 그는 1675년 6월 20일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해 시복되었고, 1726년 12월 27일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프로코피오

 

  • 가톨릭 성인 이름
    Procop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970년경-1053년 사자바

 

 

프로코피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프로꼬삐오, 프로꼬삐우스, 프로코피우스.

 

 

프로코피오 자료

성 프로코피우스(또는 프로코피오)의 생애에 대해 확실히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970년경 체코 서부 보헤미아(Bohemia)의 코우르짐(Kourzim) 인근에서 그리스도교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프라하(Prague)에서 공부한 후 그곳에서 동방교회의 사제가 되었다. 그리고 결혼하여 아들을 하나 두었다. 하지만 은수자의 삶을 간절히 원했던 그는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아내와 아들을 떠나 은수자의 삶에 헌신한 후 수도원을 설립하고 슬라브어로 그리스 전례를 통해 하느님을 찬미했다고 한다.

그는 처음 은수자의 삶을 시작할 때 프라하의 사자바 계곡에 있는 성 바실리우스(Basilius) 수도원에 들어가서 지냈는데, 그의 덕이 너무나 출중해서 이미 살아있는 성인으로 공경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보헤미아의 한 백작의 후원을 받아 사자바에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와 성 바실리우스의 수도 규칙을 따르는 동방 전례의 수도원을 설립하고 초대 원장으로서 삶을 마칠 때까지 20년 동안 헌신하였다.

성 프로코피우스는 1053년 3월 25일 자기가 설립한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일찍이 체코슬로바키아(Czechoslovakia,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개의 나라로 갈라졌음)의 수호성인으로 큰 공경을 받아 왔고, 1204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는 로마에서 시성된 최초의 보헤미아 출신 성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유해는 1588년 프라하 성(城)의 모든 성인 성당으로 옮겨 안치되었다. 전설적 이야기에 따르면 그가 사자바 계곡에서 고행 생활을 할 때, 그 주변에 살던 농부들은 악마가 쟁기에 매달린 채 성 프로코피우스와 함께 땅을 갈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신앙으로 인도되었다고 한다.

가톨릭교회는 한동안 그의 축일을 7월 14일(지역에 따라서는 7월 4일)에 기념했으나 새 “로마 순교록”은 선종한 날인 3월 25일에 그를 기념하도록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헤라클라

 

  • 가톨릭 성인 이름
    Heracla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247년 알렉산드리아

 

 

헤라클라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헤라끌라스, 헤라클라스.

 

 

헤라클라 자료

이집트 사람인 성 헤라클라와 그의 동생 성 풀루타르쿠스(Plutarchus)는 오리게네스(Origenes)의 첫 번째 제자로서 알렉산드리아의 교리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오리게네스의 협조자가 되어 사제로 서품되었고, 231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데메트리우스(Demetrius)가 오리게네스를 비난할 때 그를 계승하여 그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데메트리우스 주교를 계승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훔베르토

 

  • 가톨릭 성인 이름
    Humbert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193-1277년 로망스

 

 

훔베르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훔버트, 훔베르또, 훔베르뚜스, 훔베르투스.

 

 

훔베르토 자료

프랑스 도피네(Dauphine)의 로망스 태생인 훔베르투스(Humbertus, 또는 훔베르토)는 파리(Paris)로 공부하러 가서 법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1224년에 도미니코 회원이 되었다. 그는 리옹(Lyon) 수도원에서 교수하는 한편 원장도 겸임하였고,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한 뒤에는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의 관구장이 되었다.

그는 형제들을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Barcelona)로 보내어 아랍어를 익히게 한 뒤에 쿠만족(Cumans)와 타타르족(Tatar)에게 보내어 선교하도록 하였고, 저술에도 능하였으므로 신심에 관한 글을 남겼다. 그 후 그는 총장으로 임명되었으나 1263년의 런던 총회에서 사임하고, 발랑스(Valence)의 원장으로서 학문과 설교에만 전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8. 흐로즈나타

 

  • 가톨릭 성인 이름
    Hroznata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160-1217년 보헤미아

 

 

흐로즈나타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흐로즈나따.

 

 

흐로즈나타 자료

흐로즈나타는 보헤미아의 오토카르 1세 궁중의 귀족으로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즐기며 살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이 병들어 죽고, 그 얼마 후 그의 어머니마저 사망하자 그는 이 모든 것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여 궁중을 떠나 십자군이 되기로 서약하고 성지로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뜻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욕망이라고 단정하여 십자군 되기를 포기하고, 교황 코일레스티누스(Coelestinus III)의 도움을 청하였다.

마침내 그는 서부 바이에른(Bayern)의 테플(Tepl)에 적당한 땅을 구하여 대수도원을 세웠다. 그 후 그는 정체모를 사람들로부터 납치되어 알트-킨스부르크의 어느 지하 감방에 갇혔다가 운명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는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97년에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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