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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롤로 남자세례명 13인 목록

pieonane 2023. 1. 3.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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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세례명 가롤로는 가롤루스, 까롤로, 까롤루스, 샤를, 샤를르, 찰스, 카롤로, 카롤루스, 칼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남자세례명 가롤로 13인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가롤로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가롤로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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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롤로 남자세례명
13인 목록

 

 

 

 

가롤로 남자세례명 목록

 

  1. 가롤로(성 안드레아의) (1월 05일)

  2. 가롤로 (1월 06일)

  3. 가롤로 (3월 02일)

  4. 이경도 가롤로 (3월 02일)

  5. 정철상 가롤로 (5월29일)

  6. 가롤로 르왕가 (6월3일)

  7. 가롤로 스피놀라 (9월10일)

  8. 조신철 가롤로 (9월20일)

  9. 현석문 가롤로 (9월20일)

  10. 가롤로 (9월29일)

  11. 가롤로 가르니에 (10월19일)

  12. 가롤로 보로메오 (11월4일)

  13. 샤를 드 푸코 (12월1일)

 

13가지 가롤로 천주교 남자세례명

 

 

1. 가롤로(성 안드레아의)

 

  • 세례명 축일
    1월5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Charles of St. Andrew

  • 신분과 직업
    신부

  • 활동 연도와 지역
    1821-1893년

 

 

성 안드레아의 가롤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롤루스, 까롤로, 까롤루스, 샤를, 샤를르, 찰스, 카롤로, 카롤루스, 칼, 호벤, 호우벤, 후번.

 

 

성 안드레아의 가롤로 이야기

세속의 생활에서 요한 안드레아 호우벤(Joannes Andreas Houben)으로 알려진 성 안드레아의 성 카롤루스(Carolus a Sancto Andreas, 또는 가롤로)는 1821년 12월 11일 네덜란드 루레몬트(Ruremond) 교구의 뮌스터겔린(Munstergeleen)에서 태어났다.

11명의 형제 중 넷째로 태어난 그는 태어난 날 바로 요한 안드레아라는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1835년 4월 26일 첫영성체를 하고, 같은 해 6월 28일 견진성사를 받았다. 그는 시타르트(Sittard)에서 정식 교육을 시작한 다음 브로크시타르트(Broeksittard)에서 계속하였다. 1840년 그는 군복무를 위해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 기간 중에 예수 고난회에 대해 처음 듣게 되었다.

군복무와 학업을 모두 마친 그는 예수 고난회에 입회를 요청하였다. 그는 복자 도미니코 바르베리(Dominicus Barberi, 8월 27일)에 의해 받아들여져 1845년 11월 5일 투르네(Tournai) 인근 에르(Ere)의 벨기에 도시에서 수련기에 들어갔다. 그는 같은 해 12월 예수 고난회의 수도복을 입으며 성 안드레아의 카롤루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법정 수련기를 완료한 그는 1850년 12월 10일 첫 서원을 발하고, 투르네에서 라비스(Labis)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직후 그는 예수 고난회가 세 개의 수도원을 설립한 영국으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한동안 브로드웨이(Broadway) 수도원의 수련자들을 위한 부수련장의 소임을 맡았다.

또한 그는 1856년 아일랜드 더블린(Dublin) 변두리에 위치한 아거스 산(Mount Argus)에 새로 설립된 수도원으로 이동될 때까지 성 윌프레드(Wilfred) 본당과 인근 지역에서 주임신부로서 사목활동을 수행하였다.

카롤루스는 남은 생애 대부분을 아거스 산의 은둔소에서 지냈다. 그는 아일랜드 사람들로부터 ‘네덜란드 출신의 아거스 산의 카롤루스 신부’로 불리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는 특별히 신심 깊은 사제였다.

그는 순명의 수련, 가난의 실천, 겸손과 단순함, 더 나아가 주님의 수난에 대한 신심에 있어서 탁월했다. 미숙한 영어 실력으로 인해 공식적인 설교자나 강론의 직무를 맡을 수는 없었지만 매우 성공적으로, 특별히 고해성사를 통해 영적 지도에 헌신하였다.

그의 덕행에 대한 명성은 많은 이들이 그로부터 축복을 받기 위해 수도원으로 모여들게 만들었다. 또한 확실한 기적적 치유에 대한 수많은 증언들이 회자되면서 그는 일생 동안 ‘기적을 행하는 자’로 알려졌다.

그의 명성이 영국 전역뿐 아니라 미국과 호주까지 전해지자 수도회에서는 그에게 잠시나마 휴식을 주고자 1866년에 그를 영국의 서튼(Sutton)과 런던(London)으로 이동시켰다. 그는 그곳에서 일상적인 소임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수도원 내부와 외부에서 그리고 신자와 비신자 사이에서 곧 그의 존재가 드러났다. 그는 1874년에 다시 더블린으로 돌아와 아거스 산의 수도원에서 1893년 1월 5일 새벽 선종할 때까지 머물렀다.

장엄하게 거행된 그의 장례예식 중에 아일랜드 전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함으로써 일생 동안 그의 삶을 통해 대중에게 헌신한 결과가 분명히 드러났다. 당시 신문 기사 역시 카롤루스 신부의 유해를 보기 위해 그토록 많은 이들의 종교적 감성과 존경을 불러일으킨 일은 그 이전 누구의 장례식에서도 볼 수 없었다고 그 분위기를 전했다. 수도원장은 그의 가족에게 보낸 서신에서 사람들이 이미 그를 성인으로 선포했다고 적었다. 그의 유해는 아거스 산의 수도원에 모셔졌다.

카롤루스 신부의 시복시성을 위한 절차는 1935년 11월 13일에 시작되었다. 오랫동안 면밀한 조사를 거쳐 1988년 10월 16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모든 이들이 아거스 산의 성인으로 부르는 그의 시복식을 집전하였다.

그 후 시성을 위한 기적 심사가 시작되었고, 다방면의 조사 끝에 그 정당성이 인정되어 2007년 6월 3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다른 세 명의 복자와 함께 시성식을 갖고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는 아거스 산의 성 카롤루스(Charles of Mount Arg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가롤로

 

  • 세례명 축일
    1월 6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Charles

  • 신분과 직업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616-1670년 세체

 

 

가롤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롤루스, 까롤로, 까롤루스, 샤를, 샤를르, 찰스, 카롤로, 카롤루스, 칼.

 

 

가롤로 이야기

카롤루스(Carolus, 또는 가롤로)의 원래 이름은 요한 카롤루스 마르치오니(Joannes Carolus Marchioni)인데, 그는 이탈리아의 세체에서 가난한 부모 슬하에서 태어나 목동이 되었다가 사제가 되려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살았다.

그러나 그는 읽고 쓰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그의 보잘 것 없는 학력 때문에 나지아노에서 수사가 되어 그때부터 부엌, 문지기, 정원 등등 수도원의 허드렛일을 도맡다시피 하였지만, 그의 높은 성덕과 단순성 그리고 애덕은 놀라울 정도여서 주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또한 신비적인 서적도 몇 권 기록했고, 더할 수 없을 정도로 금욕생활을 하였으며, 1656년에 발생한 흑사병 유행 때에는 참으로 영웅적으로 주민들을 도와 그의 위대성이 더욱 돋보였다.

그의 가족명은 원래 멜키오르이나 그는 세그레의 카롤루스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1959년 요한 23세(Joannes XXIII)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가롤로

 

  • 세례명 축일
    3월 2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Charles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127년

 

 

가롤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롤루스, 까롤로, 까롤루스, 샤를, 샤를르, 찰스, 카롤로, 카롤루스, 칼.

 

 

가롤로 이야기

플랑드르(Flandre)와 아미앵(Amiens)의 백작인 카롤루스(Carolus, 또는 가롤로)는 매우 현명하고 자비롭게 백성을 다스렸기 때문에 '착한 사람'이란 칭호를 얻었다. 그의 부친은 덴마크의 왕 성 카누투스 4세(Canutus IV, 1월 19일)이다.

그는 불과 5세 때에 플랑드르의 백작 작위를 받았고, 그 후 장성하여서는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십자군에도 참가하여 많은 공적을 남겼다. 그는 항상 하느님께 대한 신심을 가장 중하게 여기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성 도나티아누스(Donatianus) 성당으로 맨발로 미사에 참례하러 가던 중에 그에 대한 불길한 음모가 싹트고 있었다. 이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항상 위험 중에 있지만,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다. 만일 우리가 죽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참으로 의롭게 죽어야 한다.”

그리고 그는 시편 150을 외웠다. 그는 성당의 제대 앞에서 인간들의 추악한 악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통회하던 중 자객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 자객은 그의 조카가 보낸 사람들이었다.

그는 높은 직책을 수행하였으나 항상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였으므로 이를 시기한 사람들에 의해 살해된 것이었다.

그의 유해는 벨기에의 브뤼헤(Bruges) 주교좌 성당에 안장되었고, 수많은 국민들로부터 공경을 받았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83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이경도 가롤로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李景陶 Charles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0-1802년 한국

 

 

이경도 가롤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롤루스, 까롤로, 까롤루스, 샤를, 샤를르, 이 가롤로, 이가롤로, 찰스, 카롤로, 카롤루스, 칼.

 

 

이경도 가롤로 이야기

어릴 때는 ‘오희’(五喜)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이경도(李景陶) 카롤루스(Carolus, 또는 가롤로)는 1780년 한양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충청도 연기 군수를 지냈으며, 부친 이윤하 마태오는 당대의 유명한 학자로서 외조부였던 이익의 학문을 잇고 있었다. 또 그의 어머니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에 기여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누이였다. 1802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와 1827년에 전주 옥에서 순교한 이경언 바오로는 그의 동생들이다.

이 가롤로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실천하였다. 본디 성격이 온순하고 너그러웠던 그는, 장성하면서 학문에도 재능을 보여 교회 서적들을 연구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비록 그는 어릴 때 병을 앓아 곱사등이가 되었지만, 그 자신의 신앙과 성품으로 이러한 신체적 결함을 보완하였다.

1793년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장남인 이 가롤로는 미신 행위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지혜를 발휘하여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게 장례를 치렀다.

이후, 그는 되도록 비신자들과는 어울리지 않으면서 가족이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끄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최필공 토마스, 홍재영 프로타시오 등 몇몇 교우들과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교리를 익히곤 하였다.

이 가롤로는 1797년에 어머니와 상의한 뒤, 누이인 이순이 루갈다가 전주의 유중철 요한과 동정 부부로 언약을 하고 혼인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때 그 사실을 알게 된 비신자 친척들이 그를 비난하였으나, 그는 슬기롭게 이를 극복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이 가롤로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관장의 문초 때마다 “아는 신자들은 없으며, 교회 서적은 불태워 버려 남아 있지 않다.”고 거짓으로 자백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한 다음, 처형되기 전날 옥중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어머니에게 보냈다.

“제 일생 지은 죄가 하늘까지 닿았고, 제 마음은 목석과 같아 이와 같이 뛰어난 은혜를 받으면서도 아직 눈물도 흘릴 줄을 모릅니다. 아무리 천주의 인자하심이 무한하다고는 하지만, 어찌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만일 천주께서 당신의 너그러운 손으로 저를 이끌어 주신다면, 만 번 죽는다 해도 무엇이 원통하고 무엇이 불안하겠습니까?”

이러한 편지를 남긴 이경도 가롤로는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 새남터로 끌려 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이경도 가롤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정철상 가롤로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丁哲祥 Charles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1년 한국

 

 

정철상 가롤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롤루스, 까롤로, 까롤루스, 샤를, 샤를르, 정 가롤로, 정가롤로, 찰스, 카롤로, 카롤루스, 칼.

 

 

정철상 가롤로 이야기

정철상(丁哲祥) 카롤루스(Carolus, 또는 가롤로)는 경기도 광주의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에 순교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그의 부친이고, 1839년에 순교한 유조이 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계모이며, 같은 해에 순교한 정하상 바오로 성인과 정정혜 엘리사벳 성녀는 그의 동생들이다.

정 가롤로는 어려서부터 부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또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이로 말미암아 집안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온 힘을 다하여 천주를 공경하고, 온 마음을 다하여 천주를 사랑하는 데에만 힘썼다.

1794년 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정 가롤로는 부친과 함께 한양으로 올라가서 성사를 받았다. 주 야고보 신부는 이후 경기도 광주에 있는 정 가롤로의 집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 무렵 정 가롤로는 포천의 유명한 신자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정 가롤로가 20세가량 되었을 무렵인 1801년에 신유박해가 발생하였다. 이때 부친과 숙부들이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가자, 그는 그들을 따라가 의금부 인근에 머물면서 옥바라지를 하였다. 이를 본 관리들이 그에게 ‘주 신부의 거처를 밀고하여 부친의 목숨을 구하라.’고 하였지만, 그는 결코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부친이 순교하던 4월 8일에, 정 가롤로는 의금부의 명에 따라 체포되어 형조에서 문초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있는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대면서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보호하려고 하였다. 그의 마음에는 천주를 위하여 죽겠다는 생각과 부친의 뒤를 따라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형조의 관리들은 문초를 하는 동안 정 가롤로의 생각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이에 그들은 그를 옥으로 데려가도록 하였고, 그는 한 달 이상을 옥에 갇혀 있어야만 하였다. 그런 다음 최필제 베드로, 윤운혜 루치아 등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이었다.

형조에서 정철상 가롤로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 내용은 이러하였다.

“너는 천주교에 깊이 빠져, 집안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요사한 스승(곧 주문모 야고보 신부)을 보호하려고 송곳으로 찔러도 말하지 않았다. …… 주문모를 맞이하여 거처하도록 하고, 흉악한 무리들을 불러서 모임을 가졌으며, 개나 돼지처럼 행동하면서 인간의 윤리를 무너뜨린 죄는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정철상 가롤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가롤로 르왕가

 

  • 세례명 축일
    6월 3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Charles Lwanga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60-1886년 우간다

 

 

가롤로 르왕가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롤루스, 까롤로, 까롤루스, 르완가, 샤를, 샤를르, 찰스, 카롤로, 카롤루스, 칼.

 

 

가롤로 르왕가 이야기

성 카롤루스 르왕가(Carolus Lwanga, 또는 가톨로 르왕가)와 성 요셉 무카사(Josephus Mukasa)와 동료 순교자들은 일명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불리는데, 이들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 수 있는 참으로 감동적인 순교사이다.

중앙아프리카 내륙지방에 살던 원주민들에게 처음으로 가톨릭 선교사를 파견한 것은 1879년의 일이다. 라비제리(Lavigerie) 추기경이 중앙아프리카의 선교를 위해 1879년에 설립한 화이트 파더들(White Fathers)이 바로 그들이었다.

우간다에서 처음에는 가톨릭교회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무테사(Mutesa) 추장의 도움으로 선교 활동과 신앙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했었다. 1860년경 우간다의 부두 카운티(Buddu County)에서 태어나 마울루궁구(Mawulugungu) 추장의 두 시종에게서 가톨릭 교리를 배운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884년 부간다(Buganda)의 카바카(Kabaka) 왕궁의 시종장이자 열심한 신자였던 성 요셉 무카사의 조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무테사 추장이 있을 때는 어느 정도 신앙생활의 가능했지만, 그의 후계자인 무왕가(Muwanga)는 자기 부족 가운데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뿌리 뽑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성 요셉 무카사 같은 훌륭한 부하도 있었다. 그래서 무왕가 추장은 자기가 시작한 박해의 첫 희생자로 성 요셉 무카사를 선택해 참수형에 처했다.

이때가 1885년 11월 15일이었다. 그날 밤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성 요셉 무카사의 지위를 승계한 그는 사제들과 연락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무왕가 추장의 잘못된 요구로부터 시종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자 예비신자 4명에게 몰래 세례를 주었다. 이때 세례받은 이들 중에는 13살의 소년 성 키지토(Kizito)도 있었다.

1886년 5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어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 무왕가 추장은 가톨릭 신자는 물론 성공회 신자들을 모두 색출해 잡아들였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신자가 된 시종들은 모두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한 후에 체포되었다. 그렇게 체포된 신자들은 나무공고(Namugongo)라 불리는 처형지까지 끌려가면서 온갖 시련을 겪었다.

처형장에 도착한 그들은 1886년 주님 승천 대축일인 6월 3일에 옷이 벗겨진 채 꽁꽁 묶였고, 사형 집행자들은 밤이 새도록 노래를 부르며 그들을 괴롭히다가 천천히 불에 태워 죽이는 잔인한 방법으로 모두 살해하였다.

그들보다 조금 앞서 5월 하순에 순교한 이들 중에 마티아 칼렘바 무룸바(Mattias Kalemba Murumba)로도 불리는 성 마티아 무룸바(Matthias Murumba)가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프로테스탄트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으나 결국은 리빈하크(Livinhac)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또 다른 동료 순교자로 키고와의 추장인 성 안드레아 카그와(Andreas Kagwa)가 있었는데, 그는 아내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주위의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받도록 인도했다.

이렇게 성 요셉 무카사 이후 1887년 1월 말까지 추장의 부당한 성적 요구를 거부하고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지키고자 노력한 많은 신자가 잔인한 고문을 받고 화형이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란 말처럼, 그들의 순교 이후 즉시 500명 이상이 세례를 받고 3천 명 이상의 예비신자가 쇄도하여 오늘날의 우간다 교회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와 성 마티아 무룸바를 포함해 모두 22명의 우간다 순교자들은 1920년 6월 6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성대한 예식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64년 10월 18일 로마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우간다의 순교자들’로 성인품에 올랐다.

성 카롤루스 르왕가는 1934년 6월 22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아프리카의 젊은이들과 가톨릭 운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가롤로 스피놀라

 

  • 세례명 축일
    9월 10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Charles Spinola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22년 나가사키

 

 

가롤로 스피놀라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롤루스, 까롤로, 까롤루스, 샤를, 샤를르, 찰스, 카롤로, 카롤루스, 칼.

 

 

가롤로 스피놀라 이야기

아폴리나리스 프랑코(Apolinaris Franco)와 카롤루스 스피놀라(Carolus Spinola, 또는 가롤로) 및 동료 순교자들은 1622년 일본의 대박해 때에 순교하신 분들로서, 1867년에 비오 9세(Pius IX)에 의하여 205명의 일본 순교자들로 시복되었다.

이들 중에는 18명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과 22명의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이 포함되어 있다. 1614년 도쿠가와가 그리스도교 박멸 정책을 반포한 이래, 위의 프란치스코 회원들이 1617년과 1632년에 순교하였고, 이 박해가 점점 확대되어 1622년에는 대박해로 발전하여 수많은 교우들이 순교하였다.

이들 중에는 아폴리나리스 프랑코 신부가 있다. 그는 에스파냐의 카스티야(Castilla) 사람으로 살라망카(Salamanca)에서 학위를 취득한 후에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었고, 1600년에 필리핀 선교사로 활약하다가 일본 선교단에 합류하였다.

1617년경에 그는 나가사키에 있었는데, 오무라 지방에 사제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소식을 듣고 용감하게 그곳으로 들어갔다가 5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였다.

이분 외에 유명한 순교자들은 다음과 같다. 리카르도 드 생 안느, 프랑소와 드 생 보나방튀르, 폴 드 생 클래르. 이들 외에 특기할만한 분은 카롤루스 스피놀라이다. 그는 이탈리아 태생으로 박학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예수회원이었다.

그는 나가사키에서 달을 관측하는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다가 6년 만에 체포되었는데, 이때 함께 체포된 사람은 일본인 사제인 세바스티아누스 기무라 등이다.

1622년 9월 10일, 두 명의 예수회원과 동료들이 나가사키에서 처형되었다. 바오로 나바로 신부(예수회)는 산채로 화형에 처해졌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조신철 가롤로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趙信喆 Charles

  • 신분과 직업
    복사,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6-1839년 한국

 

 

조신철 가롤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롤루스, 까롤로, 까롤루스, 샤를, 샤를르, 조 가롤로, 조가롤로, 카롤로, 카롤루스, 칼.

 

 

조신철 가롤로 이야기

성 조신철 카롤루스(Carolus, 또는 가롤로)는 강원도 회양에 살던 외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에 모친을 잃고, 얼마 안 되는 재산마저 부친이 탕진하자 그는 하는 수 없이 집을 떠나 절에 들어가 몇 해를 지냈다.

그 후 절에서 내려와 이집 저집 다니며 머슴살이를 하다가, 나이 23세 때에 북경을 왕래하는 사신의 하인으로 들어갔다.

정직하고 용감했던 그는 사신의 종복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칭찬을 듣게 되었고, 여러 번 북경을 왕래하는 동안 모은 돈으로 아버지와 형제들을 먹여 살렸다고 한다.

이 때 사신을 따라다니던 유진길과 정하상이 그의 착실함을 보고 장차 조선 교회의 큰 일꾼으로 만들고자 하는 생각에서 그를 입교시켰다. 얼마 후 그는 유진길과 함께 북경으로 가서 신부들을 만나보고 성세와 견진과 성체성사를 받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조선에 돌아온 그는 기쁨 중에 겸손과 인내와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생활하였고, 애긍시사로 새 신자들을 도왔으며, 아내를 권유하여 입교시켰으나 불행히도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조 카롤루스는 열심한 신자와 재혼하여 살았는데 그 부인이 곧 최영이 바르바라(Barbara)이다.

비록 그는 비천한 지위에 있으면서도 조선 천주교회를 위해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의 도움으로 성직자들이 입국하여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되었고, 특히 조선말을 잘 모르던 모방(Manbant, 羅) 신부의 통역관이 되어 지방 전교 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839년 봄 북경에서 귀국하던 어느 날 꿈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는데, “금년에는 순교하는 은혜를 너에게 주노라”하시는 말씀을 두 번이나 하셨다고 한다. 서울에 돌아와 보니 과연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 해 7월 어느 날 조 카롤루스가 외출한 사이에 포교들이 가족들을 잡아가고 말았다. 마침 집으로 돌아온 카롤루스는 곧 그들의 뒤를 따라 포도청으로 달려가서 스스로 잡혀온 사람들의 가장이라고 말하여 고문을 받게 되었다.

포장이 그의 집에서 압수한 종교서적과 묵주, 성패의 유래를 물으니 카롤루스는 자신이 북경에서 구하여 온 것이라고 대답하였을 뿐 그 밖의 물음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이에 형리들은 그의 팔과 다리를 묶어서 대들보에 매달고 닥치는 대로 매질을 하였으나 역시 별다른 말을 듣지 못하였다.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 모방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잡히자, 조 카롤루스는 이들과 함께 의금부로 보내져서 3일간의 고문과 매질을 받고 드디어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

그는 형장으로 싣고 갈 수레를 타기 전에 옥리에게 말하기를, “나는 천국으로 먼저 가서 기다릴 터이니 모두 용기를 내서 따라오도록 하라고 나의 가족들에게 전하여 주시오” 하며 희색이 만면하여 출발하였고, 가는 도중에도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서소문 밖에 이르러 수레 위의 십자가로부터 풀려 내려질 때, 그는 많은 구경꾼들 속에 끼어 있던 외인 친척들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 미소로 인사를 한 후 1839년 9월 26일 44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치명하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현석문 가롤로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玄錫文 Charles

  • 신분과 직업
    회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97-1846년 한국

 

 

현석문 가롤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롤루스, 까롤로, 까롤루스, 샤를, 샤를르, 찰스, 카롤로, 카롤루스, 칼, 현 가롤로, 현가롤로.

 

 

현석문 가롤로 이야기

성 현석문 카롤루스(Carolus, 또는 가롤로)는 1801년에 순교한 현계흠 베드로(Petrus)의 아들이고, 기해박해 때에 순교한 현경련 베네딕타는 그의 누님이며, 서울의 중인 계급 출신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 김 테레사(Teresia)와 아들 은석이도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다.

그의 생애는 한마디로 선교사와 교우들을 위한 삶이었다. 주문모 신부의 순교 이후 조선 땅에 성직자가 한 명도 없을 때, 그는 유진길, 정하상 및 조신철 등과 의논하여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였다.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를 영입하기 위하여 중국에도 다녀왔고, 샤스탕(Chastan, 鄭) 신부의 복사로서 항상 수행하던 중에 기해박해가 일어났다.

이때 그는 자수하려고 하였으나, 선교사들이 만류하며 오히려 살아남은 신자들을 돌보아 주는 것이 좋겠으니 숨어 다니며 세심한 주의로써 포졸들의 손에 잡히지 않게 하라고 권하자 이를 따랐다.

앵베르 범 주교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조선교회를 현 카롤루스에게 맡겼다. 그래서 그는 주교의 뜻에 어긋남이 없도록 임무를 다하기 위해 이재영이라고 하는 가명을 사용하고 다니면서, 새 신자들을 격려하고 권면하는 한편 각지로 돌아다니며 얻은 것으로 가난한 이를 도와주고, 흩어진 신자들을 모아 포졸들의 수색이 거의 없는 마을로 인도하는 등 동분서주하며 맡은 바 직책을 성의껏 수행하였다.

또 앵베르 주교가 수집했던 “기해일기”를 다른 동료들과 함께 보완하여 순교자의 전기를 완성하였다. 또 신자를 북경에 보내어 선교사들과 연락을 맺어 보려고 애썼으며,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부제 때에 여러 가지 위험을 무릅쓰고 상해로 길을 떠났을 때에도 함께 수행하였다.

서울로 돌아와서 김 신부가 거처하던 석전동의 집을 자기 명의로 등기하였는데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행위였다. 김 신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그 집을 버리고 다른 집을 사들여 전교자금과 성물들을 사포서동의 새 집으로 옮겼다.

이렇게 한지 며칠 뒤에 포졸들이 그를 잡으려고 전에 살던 집을 습격하였지만 헛수고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사할 때에 현 카롤루스를 도와주고 그 후에도 2, 3명의 신자들을 새집으로 안내한 일이 있었던 짐꾼들이 사실대로 고발하여 곧 포교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때 그곳에 와 있던 김임이 테레사, 이간난 아가타, 정철염 카타리나(Catharina), 우술임 수산나 등도 함께 붙잡히게 되었는데, 이때가 1846년 7월 15일이었다. 이리하여 현 카롤루스는 중대한 반역 죄인으로 군문효수를 선고받아 9월 19일 새남터에서 49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가롤로

 

  • 세례명 축일
    9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Charles

  • 신분과 직업
    군인

  • 활동 연도와 지역
    +1364년 블루아

 

 

가롤로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롤루스, 까롤로, 까롤루스, 샤를, 샤를르, 찰스, 카롤로, 카롤루스, 칼.

 

 

가롤로 이야기

카롤루스(Carolus, 또는 가롤로)는 1320년에 프랑스 블루아의 백작인 귀도 드 샤티용의 아들로 태어났고, 1337년에 결혼하였다. 그는 힘이 세고 매우 용감한 사람이었다.

그는 브르타뉴(Bretagne)의 요안나(Joanna)와 결혼했는데, 이 결혼을 미끼로 하여 브르타뉴의 작위를 요구하였으나 거절을 당하자 전쟁을 일으켰다. 그는 자기 휘하의 사병들로 구성된 부대를 진두지휘하다가 낭트(Nantes)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때부터 그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모든 힘을 기울였고, 한적한 곳을 찾아 고독한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사실 군인보다는 수도자가 될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트레귀엘이 있는 성 이보(Ivo)의 경당까지 맨발로 순례여행을 하였다.

그 후 다시 군인으로 돌아와서 프랑스를 위해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고, 잉글랜드(England)로 호송되었다. 그는 런던탑에 갇혔고, 그의 몸값 또한 엄청났다. 결국 9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다가 석방되었다.

그는 그 동안에 참으로 많은 기도를 하였고 또 인내심을 길렀으므로 아주 비범한 인물로 변하였다. 그 후 그는 어느 들판에서 살해되었는데,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의 시성에는 반대자들이 많았으나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Gregorius XI)가 그를 시성하는 칙서를 발표하려다가 아비뇽(Avignon)으로 귀양 가는 와중이라 취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공경하였고, 마침내 1904년에 교황 비오 10세(Pius X)는 그를 복자품에 올려 그에 대한 공경을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가롤로 가르니에

 

  • 세례명 축일
    10월 19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Charles Garnier

  • 신분과 직업
    선교사,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06-1649년 캐나다

 

 

가롤로 가르니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성 카롤루스 가르니에(Carolus Garnier, 또는 가롤로)는 예수회 사제로 서품된 후에 인디안 사목을 위하여 캐나다의 퀘벡으로 갔다.

 

 

가롤로 가르니에 이야기

1649년 그가 정착해 있던 휴런족(Huron) 인디언 마을이 적대적인 이로쿼이족(Iroquois) 인디언들의 공격을 받자, 그는 그들을 도망가도록 하다가 총을 맞고 쓰러졌다. 그러나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기어가다가 전투용 도끼를 맞고 절명하였다.

가르니에 신부의 장상은 그를 이렇게 말하였다.

“웃으면서 선을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가르니에 신부는 캐나다에서 순교한 7명의 동료 예수회원들과 함께 1930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그들은 캐나다의 수호성인들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가롤로 보로메오

 

  • 세례명 축일
    11월 4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Charles Borromeo

  • 신분과 직업
    추기경

  • 활동 연도와 지역
    1538-1584년 밀라노

 

 

가롤로 보로메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롤루스, 까롤로, 까롤루스, 샤를, 샤를르, 찰스, 카롤로, 카롤루스, 칼.

 

 

가롤로 보로메오 이야기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Carolus Borromeo, 또는 가롤로 보로메오)는 1538년 10월 2일 이탈리아 북부 마조레(Maggiore) 호수 근처의 아로나(Arona) 성(城)에서 지베르토(Giberto Borromeo) 백작과 교황 비오 4세(Pius IV)의 여동생인 마르게리타(Margherita de Medici)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봉사하고자 하는 열망이 커서 12살 때 산 그라티니아노(San Gratiniano) 수도원에서 삭발례를 받았다. 그 후 밀라노로 가서 프란체스코 알치아티(Francesco Alciati)에게서 교육을 받았으며, 1552년 파비아(Pavia) 대학교에 진학하여 1559년에 민법과 교회법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559년 12월 25일, 그의 외삼촌인 지안 안젤로(Gian Angelo de Medici) 추기경이 비오 4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직을 계승하게 되었는데, 새 교황은 평소 눈여겨본 조카인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를 로마로 불러들였다. 1560년 22살의 젊은 나이에 파격적으로 추기경으로 임명된 그가 가장 투철한 사명감으로 일했던 분야는 교황청 국무성 장관으로서의 직무였다.

특히 그는 트리엔트(Trient) 공의회 제3회기(1562~1563년) 동안 그의 외삼촌인 교황에게 가장 열성적이고 믿음직한 협력자이자 지원자였다.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는 공의회 운영의 훌륭한 지도자로서 임무를 수행했고, 마지막 회기에서 공의회가 결정한 칙서들을 성문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1562년 11월 19일 그의 형 페데리고(Federigo)가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은 그는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는 보로메오 가문(家門)의 수장 직책을 거절하고 1563년 7월 17일 사제품을 받고 성직자로서의 신분에 맞는 생활을 하려고 더욱 분발하였다.

그는 ‘로마 교리서’로 알려진 “본당 신부들을 위한 로마 교리서”(Catechismus romanus ad parochos)의 편찬에 깊이 관여하는 한편, 로마 신학교의 혁신, 미사 경본과 성무일도 및 교회 음악의 개정과 개혁, 교부들의 저서 출판 등에 헌신하였다.

특히 그는 가톨릭 교회의 공식 교리서가 출판되어야 한다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1564년 1월 교리서 편찬을 위한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막중한 소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이듬해 4월 교황에게 결과를 보고하였다.

1566년 비오 4세를 계승하여 교황으로 선출된 성 비오 5세(4월 30일) 교황은 이 교리서의 출간을 명해 “로마 교리서”를 발행하면서 특별히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 추기경의 열정과 노력에 대해 치하하였다.

1565년 10월 밀라노 교구장으로 부임한 그는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도 높은 개혁을 단행하여 밀라노 교구를 모범적인 주교좌로 만드는 놀라운 성과를 얻었다.

그는 또한 개혁과 쇄신 운동의 하나로 성직자와 평신도의 윤리와 생활 태도 개선을 위해 유익한 기준을 마련했으며, 성직자 교육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고, 어린이들과 어른들의 종교 교육을 위한 ‘그리스도인 교리 신심회’를 조직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교구 내에서 활동하는 예수회와 카푸친 수도회 등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지원을 제도적으로 보완했고, 프랑스 북부 두에(Douai)에 설립된 영국 대학을 지원하는 데도 호의적이었으며, 자신의 재임 기간에 11차례의 교구 시노드(Synod)와 6번의 관구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사제직을 지망하는 후보자들을 위한 단체의 성격을 지닌 ‘성 암브로시우스의 헌신회’(지금은 성 카롤루스의 헌신회)를 설립했는데, 그들은 주로 설교 활동에 종사하면서 프로테스탄트의 침입을 저지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타락한 신자들을 다시 교회로 불러들이는 데 큰 노력을 쏟아부었다.

1567년 그는 주교의 관할권에 대한 밀라노 의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사건의 발단은 그가 나쁜 생활에 물든 평신도 여러 명을 투옥한 것으로, 주교좌가 시 당국에 의해 심한 공격을 받게 되자 그는 그들을 모두 단죄하였다. 재차 그의 주교직이 시의원들로부터 도전을 받았을 때 교황은 그를 후원하고 시의회는 그들의 뜻을 고수함으로써 큰 파문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결국 그는 반대자들이 보낸 자객의 총에 맞기도 했는데, 다행히 총알이 몸을 스치고 가서 약간의 상처만 입기도 했다. 1576년 페스트와 기근으로 밀라노 인근의 주민들이 큰 곤경에 빠졌을 때, 그는 한 달 동안 매일 3천여 명의 주민들에게 음식을 제공하여 어려운 난국을 극복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시의회와 교회 사이의 관할권 분쟁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나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는 그때마다 현명하게 대처하였다.

그는 영국 선교 길에 오르는 수많은 젊은 사제들을 접견하고 지원했으며, 밀라노 외에도 여러 교구를 방문해 개혁을 촉구하였다. 1583년에는 교황사절로서 스위스의 독일어권 지역을 방문해 그 지역의 프로테스탄트를 상대로 설교하여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1584년 10월 그가 즐겨 찾던 바랄로(Varallo)에서 피정과 휴식을 마치고 심한 고열을 앓아 밀라노로 돌아와 11월 3일 밤에 “주님, 제가 여기 대령했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선종하여 주교좌성당 중앙 제대 아래 묻혔다. 그는 가톨릭 개혁 운동의 기수들 가운데 한 사람이자 학문과 예술의 수호자였다.

비록 그는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항상 겸손하게 처신하고 성덕을 높임으로써 개혁의 반대자들로부터도 칭송을 받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성직자나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들에게 권력을 남용한 적이 없다는 평을 들었다.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는 1602년 5월 12일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610년 11월 1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하여 성인품에 올랐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추기경 복장을 하고 종종 회개의 상징인 밧줄을 목에 두른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는 그가 행렬 중에 회개의 의미로 밧줄을 목에 두른 일에서 기인하였다. 그는 성직자, 교리교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샤를 드 푸코

 

  • 세례명 축일
    12월 1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Charles de Foucauld

  • 신분과 직업
    신부,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58-1916년

 

 

샤를 드 푸코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롤로, 가롤루스, 까롤로, 까롤루스, 샤를, 샤를르, 찰스, 카롤로, 카롤루스, 칼, 푸꼬.

 

 

샤를 드 푸코 이야기

성 샤를 외젠 드 푸코(Charles Eugene de Foucauld, 또는 샤를 드 푸코)는 1858년 9월 15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의 신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불행히도 여섯 살이 되던 1864년 부모를 차례로 잃고 고아가 되어 외조부인 드 모를레(De Morlet)에게 맡겨졌다.

여기서 그는 다정하고 사려 깊은 사촌 누이 마리(Marie)를 만났다. 그는 스트라스부르와 예수회가 운영하는 낭시(Nancy)의 기숙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학업에 성실치 않아 성적이 부진했고 또 엄격한 규율 생활을 싫어해 기숙사를 도망쳐 나왔다. 그는 퇴학과 함께 신앙마저 잃고 16세 이후부터 세속적인 쾌락과 물질적인 삶을 추구하였다.

1876년 육군 사관학교와 1878년 기병학교를 졸업한 후 소위로 임관한 그는 로렌(Lorraine) 지방과 알제리 북동부 지역에서 복무하였다. 하지만 방탕하고 멋대로 행동하던 그는 1881년 계급을 박탈당했다가 다시 회복되는 일을 겪기도 했다.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군대 생활이 자신에게 맞지 않음을 깨닫고 제대한 후, 사하라 사막으로 들어가 탐험을 시작하였다. 그는 알제리(Algeria)의 수도인 알제(Alger)에서 1년간 그 지방 언어와 관습을 배운 뒤 사막에서 유대인 랍비의 시종으로 가장하고 2년 동안 생활하였다.

탐험 생활 중 사막의 광활함에서 느낀 고독과 그 안에서 알라(Allah)신의 현존을 느끼며 살아가는 무슬림의 순박하고 투철한 신앙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1886년 10월 사촌누이로부터 소개받은 성 아우구스티노 성당의 앙리 위블랭(Henri Hublin) 아빠스와의 영적 대화를 통해 고해성사를 보고 교회와 화해하면서 성체를 모셨다.

강렬한 성격의 소유자인 푸코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기도와 금욕의 삶을 시작했고, 위블랭의 지도를 받으며 봉쇄 생활을 하던 중 은수자로서의 자신의 소명을 깨달았다.

그는 1890년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하던 중 나자렛에서 트라피스트회에 입회하여 마리 알베릭(Marie-Alberic)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는 곧 시리아에 있는 아크베(Akbes)의 트라피스트회 수도원으로 옮겨 그곳의 허름한 거처에서 1896년까지 지냈다.

1892년 수도서원 후 절대적인 청빈과 자기희생, 절제와 고독을 추구하던 그는 1896년 알제리의 스트라우엘리(Straoueli) 수도원을 옮겼다. 늘 더 큰 고독과 기도와 절제의 삶을 살고자 했던 그는 수도원장의 허락을 받고 트라피스트회를 떠나 1897년 팔레스티나의 나자렛으로 가서 클라라회 수녀원의 문지기로 살며 1900년까지 밤낮으로 묵상과 기도에 전념하였다.

그의 생활은 가장 비천한 노동, 경건한 독서, 성경 공부, 기도로 이어졌다. 나자렛에서 스승 예수의 삶을 본받고자 하는 자신의 성소를 확인한 그는 1900년 파리(Paris)의 수도원으로 돌아와 사제품을 준비한 후 1901년 6월 6일 프랑스 남부 비비에(Viviers)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품을 받은 성 샤를 드 푸코는 수많은 사람이 영적인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아프리카의 모로코(Morocco)에 이끌려 모로코와 알제리 국경 근처 베니 수도원(Beni-Abbes)의 은수처로 들어갔다. 그는 사막의 무슬림 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했는데, 그 방법은 설교가 아니라 모범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관상과 사랑의 삶을 통해서 자신 스스로 ‘보편적 형제’인 하느님의 사람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 과정은 후에 선교사들이 활동할 수 있는 터전을 준비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 ‘예수 성심의 형제회’(La Fratermite du Sacre-Coeur de Jesus)라고 이름 붙인 은수처에서 늘 공개적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오랜 시간 동안 조배를 했다.

1905년 그는 사하라 사막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알제리 남부의 도시인 타만라세트(Tamanrasset) 근처 아하가르(Ahaggar 또는 호가르 Hoggar) 산지에서 가장 높은 아세크렘(Assekrem)에 은수처를 마련한 후, 그곳에서 11년 동안 생활하면서 선교사들이 올 때를 대비하였다.

그는 투아레그족(Tuareg)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그들의 관습과 언어에 대해 배웠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와 문학적 전통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프랑스-투아레그어 사전을 만드는 작업에 헌신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모든 능력과 정성을 다해 사람들을 섬기며 평화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성 샤를 드 푸코 신부는 유럽으로 돌아가 군종신부나 위생병으로 참여할 것을 생각했지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한 의무임을 깨달아 아프리카에 남았다.

그러나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프랑스의 식민 통치를 반대하는 원주민들의 봉기가 일어났을 때, 그 혼란의 와중에 약탈을 위해 쳐들어온 호전적 무슬림인 사누시파(Sanusi)에 납치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들을 막으러 프랑스 군인들이 나타나자 성 샤를 드 푸코를 지키던 한 젊은이가 당황한 상태에서 그의 머리에 총을 쏘고 말았다.

12월 1일 타만라세트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태로 그는 사하라 사막에서의 영적 여정을 마무리했다. 사망 후 그의 시신은 투아그레족에 의해 무슬림과 함께 인근에 묻혔다가 1년 뒤에 도착한 프랑스군의 장군에 의해 도랑에서 발견되어 조금 떨어진 곳에 매장하였다.

그리고 1928년에 평소 성 샤를 드 푸코 신부의 뜻과는 달리 프랑스 군대가 주둔해 있던 알제리 중부의 오아시스 도시로 오늘날 엘메니아(El Menia)로 불리는 엘골레아(El Golea)에 옮겨져 재매장하였다.

성 샤를 드 푸코 신부가 사막에서 죽은 후 그의 영적인 영향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는 사막에서의 고적한 삶을 통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단순하게 하느님을 깨닫는 행복을 누렸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비그리스도교 대중 안으로 파고들어 간 선구자였다.

그는 아프리카의 비그리스도인과 무슬림 안에서 자신의 복음적 삶을 실천으로 보여주며 새로운 선교 방법을 모색했다. 그래서 그를 일컬어 ‘사막의 은수자’ 또는 ‘사하라의 사도’라고도 부른다. 그의 좌우명은 ‘예수 사랑’(Jesus Caritas)이란 두 단어였다.

그는 생전에 제자를 두지는 않았지만, 그의 삶에 영향을 받은 이들에 의해 ‘예수의 작은 형제회’(Little Brothers of Jesus, 1933년)와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Little Sisters of Jesus, 1939년)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성 샤를 드 푸코 신부가 행한 새로운 형식의 관상 기도가 널리 알려졌다.

그것은 세속에 살며 실천하는 관상 생활로 침묵 중에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나누고 복음의 가르침을 증거하는 사도직이다. 그래서 그들은 빈민 지역이나 공장이라는 ‘사막’으로 가서 덕과 관상 기도의 모범을 통해 그리스도의 현존을 보여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성 샤를 드 푸코 신부는 2005년 11월 13일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22년 5월 15일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5만여 명의 신자가 참석한 가운데 다른 9위의 복자와 함께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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