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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7일 남자세례명 26가지

피어나네 2023. 9. 1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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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7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가예타노(카예타노), 도나시아노, 도나토, 도메시오, 리치니오, 마뇨, 베드로, 빅트리치오, 빈첸시오, 세베리노, 세쿤도, 스테파노, 식스토 2세, 아가탄젤로, 아가피토, 알베르토, 야누아리오, 엑산토, 율리아노, 카르포포로, 카시아노, 카시오, 콰르토, 파우스토, 펠리치시모, 힐라리노 총 26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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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7일 여자세례명 클라우디아, 총 1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8월 7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26가지

 

 

 

 

8월 7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마뇨

  2. 빈첸시오

  3. 스테파노

  4. 아가피토

  5. 야누아리오

  6. 콰르토

  7. 펠리치시모

  8. 도나시아노

  9. 도나토

  10. 도메시오

  11. 리치니오

  12. 베드로

  13. 빅트리치오

  14. 세베리노

  15. 세쿤도

  16. 식스토 2세

  17. 아가탄젤로

  18. 알베르토

  19. 엑산토

  20. 율리아노

  21. 카르포포로

  22. 카시아노

  23. 카시오

  24. 카예타노 (가예타노)

  25. 파우스토

  26. 힐라리노

 

8월 7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26가지

 

 

1. 마뇨

 

  • 가톨릭 성인 이름
    Mag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차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8년

 

 

마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그누스, 마누스, 망누스.

 

 

마뇨 자료

성 식스투스 2세(Sixtus II)는 그리스 출신으로 알려졌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분명한 것은 그가 257년 8월 30일에 교황 성 스테파누스 1세(Stephanus I, 8월 2일)를 계승하여 로마의 주교좌에 올랐다는 것이다. 그는 전임 교황과는 달리 ‘화해하는 교황’으로서 아프리카와 동방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힘썼고, 그런 노력의 하나로 이단자들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준 세례의 유효성을 인정하였다. 

그는 재임 중에 단 한 번의 서품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교황 재임 전까지만 해도 그리스도교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갑자기 돌변해 257년 8월에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첫 번째 포고령을 반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더욱 잔혹한 두 번째 포고령을 반포하여 그리스도인에 대한 혹독한 박해를 시행하였다.

교황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 12월 11일)가 만든 비문에 따르면, 교황 성 식스투스 2세는 258년 8월 6일 자신의 주교좌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던 중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고 한다. 체포 장소에 대해서는 아피아 가도(Via Appia)에 있는 성 칼리스투스(Callistus) 카타콤바라고도 하고 개인 묘지인 프래텍스타투스(Praetextatus) 카타콤바라고도 한다. 

성 다마수스 1세 교황은 4명의 부제가 그와 함께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반면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는 6명이 함께 순교했다며 그 이름까지 전해주었다. 한편 성 식스투스 2세 교황의 시신은 8월 6일 성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의 교황 묘지에 안장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에서 교황 성 식스투스 2세와 함께 체포되어 순교의 월계관을 쓴 이들로, 부제인 성 펠리키시무스(Felicissimus)와 성 아가피투스(Agapitus) 그리고 차부제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 성 빈첸시오(Vincentius), 성 마그누스(또는 마뇨), 성 스테파누스(Stephanus)의 이름을 전해주었다. 

또한 그들과 함께 고통을 겪은 동료 순교자로 성 콰르투스(Quartus)도 있는데, 그는 카르타고(Carthago)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 9월 16일)와 관련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7일 목록에서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거룩한 전례를 거행하던 교황 성 식스투스 2세가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는데, 4명의 부제가 함께 순교했고, 그들 모두 아피아 가도에 있는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에 묻혔다고 했다. 

그리고 같은 날 교황 성 식스투스 2세의 부제인 성 아가피투스와 성 펠리키시무스도 순교하여 프래텍스타투스 카타콤바에 묻혔다고 기록하였다. 

다른 4명의 동료 순교자들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았다. 성 식스투스 2세 교황과 동료 순교자들의 전례적 기념일을 순교한 날인 8월 6일이 아닌 8월 7일로 옮겨 기념하는 것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매년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인 9월 14일로부터 40일 전인 8월 6일)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함이다.

한편 교황 성 식스투스 2세의 일화 중 널리 알려진 것은 로마 교회의 일곱 부제 중 한 명인 성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8월 10일)와 관련된 것이다.

당시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와 교회의 재산 관리를 책임지고 있던 성 라우렌티우스는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순교의 길을 걷는 교황의 뒤를 따르며 자신 또한 순교할 마음이었다.

그런데 성 식스투스 2세 교황은 그를 위로하며 먼저 교회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 명하고, 그 또한 나흘 뒤에 자신의 뒤를 따를 것이라 예언하였다.

실제로 성 라우렌티우스 부제는 교회의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나흘 뒤에 체포되어 뜨거운 석쇠 위에서 구워 죽이는 혹독한 형벌을 받고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빈첸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Vincent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차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8년

 

 

빈첸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뱅상, 빈센트, 빈첸시우스, 빈첸티오, 빈첸티우스, 빈켄티오, 빈켄티우스, 원선시오.

 

 

빈첸시오 자료

성 식스투스 2세(Sixtus II)는 그리스 출신으로 알려졌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분명한 것은 그가 257년 8월 30일에 교황 성 스테파누스 1세(Stephanus I, 8월 2일)를 계승하여 로마의 주교좌에 올랐다는 것이다. 그는 전임 교황과는 달리 ‘화해하는 교황’으로서 아프리카와 동방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힘썼고, 그런 노력의 하나로 이단자들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준 세례의 유효성을 인정하였다. 

그는 재임 중에 단 한 번의 서품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교황 재임 전까지만 해도 그리스도교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갑자기 돌변해 257년 8월에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첫 번째 포고령을 반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더욱 잔혹한 두 번째 포고령을 반포하여 그리스도인에 대한 혹독한 박해를 시행하였다.

교황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 12월 11일)가 만든 비문에 따르면, 교황 성 식스투스 2세는 258년 8월 6일 자신의 주교좌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던 중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고 한다. 체포 장소에 대해서는 아피아 가도(Via Appia)에 있는 성 칼리스투스(Callistus) 카타콤바라고도 하고 개인 묘지인 프래텍스타투스(Praetextatus) 카타콤바라고도 한다. 

성 다마수스 1세 교황은 4명의 부제가 그와 함께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반면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는 6명이 함께 순교했다며 그 이름까지 전해주었다. 한편 성 식스투스 2세 교황의 시신은 8월 6일 성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의 교황 묘지에 안장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에서 교황 성 식스투스 2세와 함께 체포되어 순교의 월계관을 쓴 이들로, 부제인 성 펠리키시무스(Felicissimus)와 성 아가피투스(Agapitus) 그리고 차부제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 성 빈첸시오(Vincentius), 성 마그누스(또는 마뇨), 성 스테파누스(Stephanus)의 이름을 전해주었다. 

또한 그들과 함께 고통을 겪은 동료 순교자로 성 콰르투스(Quartus)도 있는데, 그는 카르타고(Carthago)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 9월 16일)와 관련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7일 목록에서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거룩한 전례를 거행하던 교황 성 식스투스 2세가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는데, 4명의 부제가 함께 순교했고, 그들 모두 아피아 가도에 있는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에 묻혔다고 했다. 

그리고 같은 날 교황 성 식스투스 2세의 부제인 성 아가피투스와 성 펠리키시무스도 순교하여 프래텍스타투스 카타콤바에 묻혔다고 기록하였다. 

다른 4명의 동료 순교자들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았다. 성 식스투스 2세 교황과 동료 순교자들의 전례적 기념일을 순교한 날인 8월 6일이 아닌 8월 7일로 옮겨 기념하는 것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매년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인 9월 14일로부터 40일 전인 8월 6일)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함이다.

한편 교황 성 식스투스 2세의 일화 중 널리 알려진 것은 로마 교회의 일곱 부제 중 한 명인 성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8월 10일)와 관련된 것이다.

당시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와 교회의 재산 관리를 책임지고 있던 성 라우렌티우스는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순교의 길을 걷는 교황의 뒤를 따르며 자신 또한 순교할 마음이었다.

그런데 성 식스투스 2세 교황은 그를 위로하며 먼저 교회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 명하고, 그 또한 나흘 뒤에 자신의 뒤를 따를 것이라 예언하였다.

실제로 성 라우렌티우스 부제는 교회의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나흘 뒤에 체포되어 뜨거운 석쇠 위에서 구워 죽이는 혹독한 형벌을 받고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스테파노

 

  • 가톨릭 성인 이름
    Stephe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차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8년

 

 

스테파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스더, 스테파누스, 스테판.

 

 

스테파노 자료

성 식스투스 2세(Sixtus II)는 그리스 출신으로 알려졌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분명한 것은 그가 257년 8월 30일에 교황 성 스테파누스 1세(Stephanus I, 8월 2일)를 계승하여 로마의 주교좌에 올랐다는 것이다. 그는 전임 교황과는 달리 ‘화해하는 교황’으로서 아프리카와 동방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힘썼고, 그런 노력의 하나로 이단자들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준 세례의 유효성을 인정하였다. 

그는 재임 중에 단 한 번의 서품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교황 재임 전까지만 해도 그리스도교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갑자기 돌변해 257년 8월에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첫 번째 포고령을 반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더욱 잔혹한 두 번째 포고령을 반포하여 그리스도인에 대한 혹독한 박해를 시행하였다.

교황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 12월 11일)가 만든 비문에 따르면, 교황 성 식스투스 2세는 258년 8월 6일 자신의 주교좌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던 중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고 한다. 체포 장소에 대해서는 아피아 가도(Via Appia)에 있는 성 칼리스투스(Callistus) 카타콤바라고도 하고 개인 묘지인 프래텍스타투스(Praetextatus) 카타콤바라고도 한다. 

성 다마수스 1세 교황은 4명의 부제가 그와 함께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반면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는 6명이 함께 순교했다며 그 이름까지 전해주었다. 한편 성 식스투스 2세 교황의 시신은 8월 6일 성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의 교황 묘지에 안장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에서 교황 성 식스투스 2세와 함께 체포되어 순교의 월계관을 쓴 이들로, 부제인 성 펠리키시무스(Felicissimus)와 성 아가피투스(Agapitus) 그리고 차부제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 성 빈첸시오(Vincentius), 성 마그누스(또는 마뇨), 성 스테파누스(Stephanus)의 이름을 전해주었다. 

또한 그들과 함께 고통을 겪은 동료 순교자로 성 콰르투스(Quartus)도 있는데, 그는 카르타고(Carthago)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 9월 16일)와 관련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7일 목록에서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거룩한 전례를 거행하던 교황 성 식스투스 2세가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는데, 4명의 부제가 함께 순교했고, 그들 모두 아피아 가도에 있는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에 묻혔다고 했다. 

그리고 같은 날 교황 성 식스투스 2세의 부제인 성 아가피투스와 성 펠리키시무스도 순교하여 프래텍스타투스 카타콤바에 묻혔다고 기록하였다. 

다른 4명의 동료 순교자들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았다. 성 식스투스 2세 교황과 동료 순교자들의 전례적 기념일을 순교한 날인 8월 6일이 아닌 8월 7일로 옮겨 기념하는 것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매년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인 9월 14일로부터 40일 전인 8월 6일)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함이다.

한편 교황 성 식스투스 2세의 일화 중 널리 알려진 것은 로마 교회의 일곱 부제 중 한 명인 성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8월 10일)와 관련된 것이다.

당시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와 교회의 재산 관리를 책임지고 있던 성 라우렌티우스는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순교의 길을 걷는 교황의 뒤를 따르며 자신 또한 순교할 마음이었다.

그런데 성 식스투스 2세 교황은 그를 위로하며 먼저 교회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 명하고, 그 또한 나흘 뒤에 자신의 뒤를 따를 것이라 예언하였다.

실제로 성 라우렌티우스 부제는 교회의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나흘 뒤에 체포되어 뜨거운 석쇠 위에서 구워 죽이는 혹독한 형벌을 받고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아가피토

 

  • 가톨릭 성인 이름
    Agapi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8년

 

 

아가피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가비도, 아가비또, 아가비뚜스, 아가비토, 아가비투스, 아가피투스.

 

 

아가피토 자료

성 식스투스 2세(Sixtus II)는 그리스 출신으로 알려졌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분명한 것은 그가 257년 8월 30일에 교황 성 스테파누스 1세(Stephanus I, 8월 2일)를 계승하여 로마의 주교좌에 올랐다는 것이다. 그는 전임 교황과는 달리 ‘화해하는 교황’으로서 아프리카와 동방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힘썼고, 그런 노력의 하나로 이단자들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준 세례의 유효성을 인정하였다. 

그는 재임 중에 단 한 번의 서품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교황 재임 전까지만 해도 그리스도교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갑자기 돌변해 257년 8월에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첫 번째 포고령을 반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더욱 잔혹한 두 번째 포고령을 반포하여 그리스도인에 대한 혹독한 박해를 시행하였다.

교황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 12월 11일)가 만든 비문에 따르면, 교황 성 식스투스 2세는 258년 8월 6일 자신의 주교좌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던 중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고 한다. 체포 장소에 대해서는 아피아 가도(Via Appia)에 있는 성 칼리스투스(Callistus) 카타콤바라고도 하고 개인 묘지인 프래텍스타투스(Praetextatus) 카타콤바라고도 한다. 

성 다마수스 1세 교황은 4명의 부제가 그와 함께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반면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는 6명이 함께 순교했다며 그 이름까지 전해주었다. 한편 성 식스투스 2세 교황의 시신은 8월 6일 성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의 교황 묘지에 안장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에서 교황 성 식스투스 2세와 함께 체포되어 순교의 월계관을 쓴 이들로, 부제인 성 펠리키시무스(Felicissimus)와 성 아가피투스(Agapitus) 그리고 차부제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 성 빈첸시오(Vincentius), 성 마그누스(또는 마뇨), 성 스테파누스(Stephanus)의 이름을 전해주었다. 

또한 그들과 함께 고통을 겪은 동료 순교자로 성 콰르투스(Quartus)도 있는데, 그는 카르타고(Carthago)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 9월 16일)와 관련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7일 목록에서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거룩한 전례를 거행하던 교황 성 식스투스 2세가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는데, 4명의 부제가 함께 순교했고, 그들 모두 아피아 가도에 있는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에 묻혔다고 했다. 

그리고 같은 날 교황 성 식스투스 2세의 부제인 성 아가피투스와 성 펠리키시무스도 순교하여 프래텍스타투스 카타콤바에 묻혔다고 기록하였다. 

다른 4명의 동료 순교자들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았다. 성 식스투스 2세 교황과 동료 순교자들의 전례적 기념일을 순교한 날인 8월 6일이 아닌 8월 7일로 옮겨 기념하는 것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매년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인 9월 14일로부터 40일 전인 8월 6일)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함이다.

한편 교황 성 식스투스 2세의 일화 중 널리 알려진 것은 로마 교회의 일곱 부제 중 한 명인 성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8월 10일)와 관련된 것이다.

당시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와 교회의 재산 관리를 책임지고 있던 성 라우렌티우스는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순교의 길을 걷는 교황의 뒤를 따르며 자신 또한 순교할 마음이었다.

그런데 성 식스투스 2세 교황은 그를 위로하며 먼저 교회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 명하고, 그 또한 나흘 뒤에 자신의 뒤를 따를 것이라 예언하였다.

실제로 성 라우렌티우스 부제는 교회의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나흘 뒤에 체포되어 뜨거운 석쇠 위에서 구워 죽이는 혹독한 형벌을 받고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야누아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Janua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차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8년

 

 

야누아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야누아리우스, 자누아리오, 자누아리우스.

 

 

야누아리오 자료

성 식스투스 2세(Sixtus II)는 그리스 출신으로 알려졌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분명한 것은 그가 257년 8월 30일에 교황 성 스테파누스 1세(Stephanus I, 8월 2일)를 계승하여 로마의 주교좌에 올랐다는 것이다. 그는 전임 교황과는 달리 ‘화해하는 교황’으로서 아프리카와 동방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힘썼고, 그런 노력의 하나로 이단자들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준 세례의 유효성을 인정하였다. 

그는 재임 중에 단 한 번의 서품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교황 재임 전까지만 해도 그리스도교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갑자기 돌변해 257년 8월에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첫 번째 포고령을 반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더욱 잔혹한 두 번째 포고령을 반포하여 그리스도인에 대한 혹독한 박해를 시행하였다.

교황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 12월 11일)가 만든 비문에 따르면, 교황 성 식스투스 2세는 258년 8월 6일 자신의 주교좌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던 중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고 한다. 체포 장소에 대해서는 아피아 가도(Via Appia)에 있는 성 칼리스투스(Callistus) 카타콤바라고도 하고 개인 묘지인 프래텍스타투스(Praetextatus) 카타콤바라고도 한다. 

성 다마수스 1세 교황은 4명의 부제가 그와 함께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반면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는 6명이 함께 순교했다며 그 이름까지 전해주었다. 한편 성 식스투스 2세 교황의 시신은 8월 6일 성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의 교황 묘지에 안장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에서 교황 성 식스투스 2세와 함께 체포되어 순교의 월계관을 쓴 이들로, 부제인 성 펠리키시무스(Felicissimus)와 성 아가피투스(Agapitus) 그리고 차부제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 성 빈첸시오(Vincentius), 성 마그누스(또는 마뇨), 성 스테파누스(Stephanus)의 이름을 전해주었다. 

또한 그들과 함께 고통을 겪은 동료 순교자로 성 콰르투스(Quartus)도 있는데, 그는 카르타고(Carthago)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 9월 16일)와 관련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7일 목록에서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거룩한 전례를 거행하던 교황 성 식스투스 2세가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는데, 4명의 부제가 함께 순교했고, 그들 모두 아피아 가도에 있는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에 묻혔다고 했다. 

그리고 같은 날 교황 성 식스투스 2세의 부제인 성 아가피투스와 성 펠리키시무스도 순교하여 프래텍스타투스 카타콤바에 묻혔다고 기록하였다. 

다른 4명의 동료 순교자들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았다. 성 식스투스 2세 교황과 동료 순교자들의 전례적 기념일을 순교한 날인 8월 6일이 아닌 8월 7일로 옮겨 기념하는 것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매년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인 9월 14일로부터 40일 전인 8월 6일)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함이다.

한편 교황 성 식스투스 2세의 일화 중 널리 알려진 것은 로마 교회의 일곱 부제 중 한 명인 성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8월 10일)와 관련된 것이다.

당시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와 교회의 재산 관리를 책임지고 있던 성 라우렌티우스는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순교의 길을 걷는 교황의 뒤를 따르며 자신 또한 순교할 마음이었다.

그런데 성 식스투스 2세 교황은 그를 위로하며 먼저 교회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 명하고, 그 또한 나흘 뒤에 자신의 뒤를 따를 것이라 예언하였다.

실제로 성 라우렌티우스 부제는 교회의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나흘 뒤에 체포되어 뜨거운 석쇠 위에서 구워 죽이는 혹독한 형벌을 받고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콰르토

 

  • 가톨릭 성인 이름
    Quar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8년

 

 

콰르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과르도, 과르또, 과르뚜스, 과르토, 과르투스, 꽈르또, 꽈르뚜스, 콰르투스.

 

 

콰르토 자료

성 식스투스 2세(Sixtus II)는 그리스 출신으로 알려졌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분명한 것은 그가 257년 8월 30일에 교황 성 스테파누스 1세(Stephanus I, 8월 2일)를 계승하여 로마의 주교좌에 올랐다는 것이다. 그는 전임 교황과는 달리 ‘화해하는 교황’으로서 아프리카와 동방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힘썼고, 그런 노력의 하나로 이단자들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준 세례의 유효성을 인정하였다. 

그는 재임 중에 단 한 번의 서품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교황 재임 전까지만 해도 그리스도교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갑자기 돌변해 257년 8월에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첫 번째 포고령을 반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더욱 잔혹한 두 번째 포고령을 반포하여 그리스도인에 대한 혹독한 박해를 시행하였다.

교황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 12월 11일)가 만든 비문에 따르면, 교황 성 식스투스 2세는 258년 8월 6일 자신의 주교좌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던 중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고 한다. 체포 장소에 대해서는 아피아 가도(Via Appia)에 있는 성 칼리스투스(Callistus) 카타콤바라고도 하고 개인 묘지인 프래텍스타투스(Praetextatus) 카타콤바라고도 한다. 

성 다마수스 1세 교황은 4명의 부제가 그와 함께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반면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는 6명이 함께 순교했다며 그 이름까지 전해주었다. 한편 성 식스투스 2세 교황의 시신은 8월 6일 성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의 교황 묘지에 안장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에서 교황 성 식스투스 2세와 함께 체포되어 순교의 월계관을 쓴 이들로, 부제인 성 펠리키시무스(Felicissimus)와 성 아가피투스(Agapitus) 그리고 차부제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 성 빈첸시오(Vincentius), 성 마그누스(또는 마뇨), 성 스테파누스(Stephanus)의 이름을 전해주었다. 

또한 그들과 함께 고통을 겪은 동료 순교자로 성 콰르투스(Quartus)도 있는데, 그는 카르타고(Carthago)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 9월 16일)와 관련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7일 목록에서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거룩한 전례를 거행하던 교황 성 식스투스 2세가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는데, 4명의 부제가 함께 순교했고, 그들 모두 아피아 가도에 있는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에 묻혔다고 했다. 

그리고 같은 날 교황 성 식스투스 2세의 부제인 성 아가피투스와 성 펠리키시무스도 순교하여 프래텍스타투스 카타콤바에 묻혔다고 기록하였다. 

다른 4명의 동료 순교자들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았다. 성 식스투스 2세 교황과 동료 순교자들의 전례적 기념일을 순교한 날인 8월 6일이 아닌 8월 7일로 옮겨 기념하는 것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매년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인 9월 14일로부터 40일 전인 8월 6일)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함이다.

한편 교황 성 식스투스 2세의 일화 중 널리 알려진 것은 로마 교회의 일곱 부제 중 한 명인 성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8월 10일)와 관련된 것이다.

당시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와 교회의 재산 관리를 책임지고 있던 성 라우렌티우스는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순교의 길을 걷는 교황의 뒤를 따르며 자신 또한 순교할 마음이었다.

그런데 성 식스투스 2세 교황은 그를 위로하며 먼저 교회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 명하고, 그 또한 나흘 뒤에 자신의 뒤를 따를 것이라 예언하였다.

실제로 성 라우렌티우스 부제는 교회의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나흘 뒤에 체포되어 뜨거운 석쇠 위에서 구워 죽이는 혹독한 형벌을 받고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펠리치시모

 

  • 가톨릭 성인 이름
    Felicissim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8년

 

 

펠리치시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펠리치씨모, 펠리치씨무스, 펠리키시모, 펠리키시무스, 펠리키시무스.

 

 

펠리치시모 자료

성 식스투스 2세(Sixtus II)는 그리스 출신으로 알려졌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분명한 것은 그가 257년 8월 30일에 교황 성 스테파누스 1세(Stephanus I, 8월 2일)를 계승하여 로마의 주교좌에 올랐다는 것이다. 그는 전임 교황과는 달리 ‘화해하는 교황’으로서 아프리카와 동방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힘썼고, 그런 노력의 하나로 이단자들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준 세례의 유효성을 인정하였다. 

그는 재임 중에 단 한 번의 서품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교황 재임 전까지만 해도 그리스도교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갑자기 돌변해 257년 8월에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첫 번째 포고령을 반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더욱 잔혹한 두 번째 포고령을 반포하여 그리스도인에 대한 혹독한 박해를 시행하였다.

교황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 12월 11일)가 만든 비문에 따르면, 교황 성 식스투스 2세는 258년 8월 6일 자신의 주교좌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던 중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고 한다. 체포 장소에 대해서는 아피아 가도(Via Appia)에 있는 성 칼리스투스(Callistus) 카타콤바라고도 하고 개인 묘지인 프래텍스타투스(Praetextatus) 카타콤바라고도 한다. 

성 다마수스 1세 교황은 4명의 부제가 그와 함께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반면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는 6명이 함께 순교했다며 그 이름까지 전해주었다. 한편 성 식스투스 2세 교황의 시신은 8월 6일 성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의 교황 묘지에 안장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에서 교황 성 식스투스 2세와 함께 체포되어 순교의 월계관을 쓴 이들로, 부제인 성 펠리키시무스(Felicissimus)와 성 아가피투스(Agapitus) 그리고 차부제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 성 빈첸시오(Vincentius), 성 마그누스(또는 마뇨), 성 스테파누스(Stephanus)의 이름을 전해주었다. 

또한 그들과 함께 고통을 겪은 동료 순교자로 성 콰르투스(Quartus)도 있는데, 그는 카르타고(Carthago)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 9월 16일)와 관련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7일 목록에서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거룩한 전례를 거행하던 교황 성 식스투스 2세가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는데, 4명의 부제가 함께 순교했고, 그들 모두 아피아 가도에 있는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에 묻혔다고 했다. 

그리고 같은 날 교황 성 식스투스 2세의 부제인 성 아가피투스와 성 펠리키시무스도 순교하여 프래텍스타투스 카타콤바에 묻혔다고 기록하였다. 

다른 4명의 동료 순교자들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았다. 성 식스투스 2세 교황과 동료 순교자들의 전례적 기념일을 순교한 날인 8월 6일이 아닌 8월 7일로 옮겨 기념하는 것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매년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인 9월 14일로부터 40일 전인 8월 6일)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함이다.

한편 교황 성 식스투스 2세의 일화 중 널리 알려진 것은 로마 교회의 일곱 부제 중 한 명인 성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8월 10일)와 관련된 것이다.

당시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와 교회의 재산 관리를 책임지고 있던 성 라우렌티우스는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순교의 길을 걷는 교황의 뒤를 따르며 자신 또한 순교할 마음이었다.

그런데 성 식스투스 2세 교황은 그를 위로하며 먼저 교회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 명하고, 그 또한 나흘 뒤에 자신의 뒤를 따를 것이라 예언하였다.

실제로 성 라우렌티우스 부제는 교회의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나흘 뒤에 체포되어 뜨거운 석쇠 위에서 구워 죽이는 혹독한 형벌을 받고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도나시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Donat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 샬롱쉬르마른

 

 

도나시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나시아누스, 도나씨아노, 도나씨아누스, 도나씨안, 도나티아노, 도나티아누스, 도나티안.

 

 

도나시아노 자료

성 도나티아누스(Donatianus, 또는 도나시아노)는 프랑스 샬롱쉬르마른의 제2대 주교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도나토

 

  • 가톨릭 성인 이름
    Dona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61년 아레초

 

 

도나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나또, 도나뚜스, 도나투스.

 

 

도나토 자료

성 도나투스(또는 도나토)와 성 힐라리누스(Hilarinus)가 어떻게 서로 연관을 갖고 있는지는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

성 힐라리누스는 수도승으로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의 통치 때 이탈리아의 오스티아(Ostia)에서 순교했다. 그리고 성 도나투스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 지방 아레초의 제2대 주교로 로마 순교록에는 그 역시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 때 아레초에서 순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교회 미술에서 성 도나투스는 칼과 용과 함께 있는 젊은 또는 중년의 주교로서 그려진다. 그는 아레초의 수호성인이나 그에 대한 정확한 내력은 알려지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도메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Dome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승,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62년?

 

 

도메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메시우스, 도메씨오, 도메씨우스, 도메티오, 도메티우스.

 

 

도메시오 자료

멜키테스 사람들과 동방의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성 도메티우스(또는 도메시오)의 축일을 오늘날에도 성대히 지낸다. 성인은 페르시아의 개종자로서 메소포타미아의 니시비스(Nisibis)에서 수도자가 되었다가 부제로 서품되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동굴에서 살았고, 여기서 인근 주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 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사람들이 떼 지어 몰려와서 그에게 축복을 간청하였고, 혹시나 병을 치료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했는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쳤다고 한다.

그 당시에 도메티우스는 배교자인 황제 율리아누스의 불경을 크게 꾸짖은 바 있는데, 화가 치민 황제는 이 성인을 민중들의 재판에 회부하였다.

그러나 율리아누스는 이 성인 때문에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이리하여 그는 순교하였는데, 세상에서는 기적을 행하는 사람 또는 은수자로 알려지기 시작하여 동방 교회에서는 큰 성인으로 공경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리치니오

 

  • 가톨릭 성인 이름
    Licin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95년

 

 

리치니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치니우스, 리키니오, 리키니우스.

 

 

리치니오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8월 7일 목록에서 그리스도인 군인들이었던 성 카르포포루스(Carpophorus), 성 엑산투스(Exanthus), 성 카시우스(Cassius), 성 세베리누스(Severinus), 성 세쿤두스(Secundus)와 성 리키니우스(또는 리치니오)가 막시미아누스 헤르쿨리우스 황제의 통치 중에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의 코모(Como)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전설적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천여 명의 테반 군단(Theban Legion)의 일원으로 박해를 피해 도망갔다고 체포되어 코모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다른 전설에서 그들은 코모의 성 피델리스(Fidelis, 10월 28일)에 의해 감옥에 석방된 후 알프스를 넘으려다 체포되어 코모 호수 북쪽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그리고 코모에 있는 성 카르포포루스 성당은 그들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적 자료의 부족 등으로 해서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에서 그들의 이름은 모두 빠졌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60년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 자료

성 베드로(Petrus)와 성 율리아누스(Julianus)는 발레리아누스와 갈리에누스 황제의 통치 기간 중에 순교한 최소 20명의 남녀 로마 순교자들 중의 일부로 여겨진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빅트리치오

 

  • 가톨릭 성인 이름
    Victric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주교,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30-407년경 루앙

 

 

빅트리치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빅뜨리치오, 빅뜨리치우스, 빅트리치우스, 빅트리키오, 빅트리키우스.

 

 

빅트리치오 자료

성 빅트리키우스(또는 빅트리치오)는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330년경 로마제국의 국경과 접한 갈리아 지역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어서 로마제국의 군인이 된 그는 여러 지역에서 근무하며 경력을 쌓았다. 

그리고 363년경 프랑스 지방에 주둔할 무렵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에 따른 삶을 살기에 무기를 든 군인의 삶은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이 들어 호민관 앞에서 무기를 던져버리고 제대를 요청했다. 

하지만 호민관은 그를 채찍으로 때리고 감옥에 가두며 다시 무기를 들고 군인으로 복무하도록 고문까지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성 빅트리키우스는 호민관에게 사형 선고를 받고 참수형이 결정되었다.

놀라(Nola)의 성 바울리누스(Paulinus, 6월 22일)와 “로마 순교록”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후 그에게 두 가지 기적이 일어났다. 먼저 사형을 집행할 사람이 칼로 내려칠 곳을 정하듯 그의 목에 손을 얹는 순간 눈이 멀어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성 빅트리키우스는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의 뼈가 드러날 정도로 세게 조인 사슬이 저절로 느슨해지면서 그가 탈출할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386년 또는 393년경에 루앙의 주교로 착좌했는데, 그때까지의 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어쨌든 그는 벨기에와 프랑스 지역의 이교도들에게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한 선교사 주교였다. 그는 투르(Tours)의 성 마르티누스(Martinus, 11월 11일)와 놀라의 성 바울리누스 주교와 친분을 맺고 서신을 교환하기도 했다. 또한 브리튼(Britain)의 주교들 사이의 문제에 대한 중재를 요청받을 정도로 영향력과 존경을 받고 있었다.

한때 그는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부인하는 이단인 라오디케아(Laodicea)의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주교의 추종자라는 혐의를 받기도 했지만, 로마를 방문해 교황 성 인노켄티우스 1세(Innocentius I)의 신임을 확인받고 “Liber Regularum”이라는 중요한 교령을 받아왔다.

그는 396년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12월 7일) 주교에게 성 게르바시우스(Gervasius)와 성 프로타시우스(Protasius) 등의 유해를 받아 모시면서, 이를 축하하고 성인 유해의 신학적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성인들의 찬가”(De Laude Sanctorum)를 지었는데, 현재까지 전해지는 그의 유일한 작품이다. 그는 407년경 또는 407~417년경에 증거자로서의 삶을 마감하고 평화로이 선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세베리노

 

  • 가톨릭 성인 이름
    Sever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95년

 

 

세베리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세베리누스, 쎄베리노, 쎄베리누스.

 

 

세베리노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8월 7일 목록에서 그리스도인 군인들이었던 성 카르포포루스(Carpophorus), 성 엑산투스(Exanthus), 성 카시우스(Cassius), 성 세베리누스(또는 세베리노), 성 세쿤두스(Secundus)와 성 리키니우스(Licinius)가 막시미아누스 헤르쿨리우스 황제의 통치 중에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의 코모(Como)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전설적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천여 명의 테반 군단(Theban Legion)의 일원으로 박해를 피해 도망갔다고 체포되어 코모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다른 전설에서 그들은 코모의 성 피델리스(Fidelis, 10월 28일)에 의해 감옥에 석방된 후 알프스를 넘으려다 체포되어 코모 호수 북쪽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그리고 코모에 있는 성 카르포포루스 성당은 그들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적 자료의 부족 등으로 해서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에서 그들의 이름은 모두 빠졌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세쿤도

 

  • 가톨릭 성인 이름
    Secund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95년

 

 

세쿤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세군도, 세꾼도, 세꾼두스, 세쿤두스.

 

 

세쿤도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8월 7일 목록에서 그리스도인 군인들이었던 성 카르포포루스(Carpophorus), 성 엑산투스(Exanthus), 성 카시우스(Cassius), 성 세베리누스(Severinus), 성 세쿤두스(또는 세쿤도)와 성 리키니우스(Licinius)가 막시미아누스 헤르쿨리우스 황제의 통치 중에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의 코모(Como)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전설적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천여 명의 테반 군단(Theban Legion)의 일원으로 박해를 피해 도망갔다고 체포되어 코모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다른 전설에서 그들은 코모의 성 피델리스(Fidelis, 10월 28일)에 의해 감옥에 석방된 후 알프스를 넘으려다 체포되어 코모 호수 북쪽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그리고 코모에 있는 성 카르포포루스 성당은 그들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적 자료의 부족 등으로 해서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에서 그들의 이름은 모두 빠졌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식스토 2세

 

  • 가톨릭 성인 이름
    Sixtus II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교황,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8년

 

 

식스토 2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시스또, 시스토, 식스또, 식스뚜스, 식스투스, 씩스또, 씩스뚜스.

 

 

식스토 2세 자료

성 식스투스 2세(또는 식스토 2세)는 그리스 출신으로 알려졌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분명한 것은 그가 257년 8월 30일에 교황 성 스테파누스 1세(Stephanus I, 8월 2일)를 계승하여 로마의 주교좌에 올랐다는 것이다. 

그는 전임 교황과는 달리 ‘화해하는 교황’으로서 아프리카와 동방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힘썼고, 그런 노력의 하나로 이단자들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준 세례의 유효성을 인정하였다. 

그는 재임 중에 단 한 번의 서품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교황 재임 전까지만 해도 그리스도교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갑자기 돌변해 257년 8월에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첫 번째 포고령을 반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더욱 잔혹한 두 번째 포고령을 반포하여 그리스도인에 대한 혹독한 박해를 시행하였다.

교황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 12월 11일)가 만든 비문에 따르면, 교황 성 식스투스 2세는 258년 8월 6일 자신의 주교좌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던 중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고 한다. 

체포 장소에 대해서는 아피아 가도(Via Appia)에 있는 성 칼리스투스(Callistus) 카타콤바라고도 하고 개인 묘지인 프래텍스타투스(Praetextatus) 카타콤바라고도 한다. 

성 다마수스 1세 교황은 4명의 부제가 그와 함께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반면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는 6명이 함께 순교했다며 그 이름까지 전해주었다. 한편 성 식스투스 2세 교황의 시신은 8월 6일 성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의 교황 묘지에 안장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에서 교황 성 식스투스 2세와 함께 체포되어 순교의 월계관을 쓴 이들로, 부제인 성 펠리키시무스(Felicissimus)와 성 아가피투스(Agapitus) 그리고 차부제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 성 빈첸시오(Vincentius), 성 마그누스(Magnus), 성 스테파누스(Stephanus)의 이름을 전해주었다. 

또한 그들과 함께 고통을 겪은 동료 순교자로 성 콰르투스(Quartus)도 있는데, 그는 카르타고(Carthago)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 9월 16일)와 관련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7일 목록에서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거룩한 전례를 거행하던 교황 성 식스투스 2세가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는데, 4명의 부제가 함께 순교했고, 그들 모두 아피아 가도에 있는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에 묻혔다고 했다. 

그리고 같은 날 교황 성 식스투스 2세의 부제인 성 아가피투스와 성 펠리키시무스도 순교하여 프래텍스타투스 카타콤바에 묻혔다고 기록하였다. 

다른 4명의 동료 순교자들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았다. 성 식스투스 2세 교황과 동료 순교자들의 전례적 기념일을 순교한 날인 8월 6일이 아닌 8월 7일로 옮겨 기념하는 것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매년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인 9월 14일로부터 40일 전인 8월 6일)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함이다.

한편 교황 성 식스투스 2세의 일화 중 널리 알려진 것은 로마 교회의 일곱 부제 중 한 명인 성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8월 10일)와 관련된 것이다.

당시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와 교회의 재산 관리를 책임지고 있던 성 라우렌티우스는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순교의 길을 걷는 교황의 뒤를 따르며 자신 또한 순교할 마음이었다.

그런데 성 식스투스 2세 교황은 그를 위로하며 먼저 교회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 명하고, 그 또한 나흘 뒤에 자신의 뒤를 따를 것이라 예언하였다.

실제로 성 라우렌티우스 부제는 교회의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나흘 뒤에 체포되어 뜨거운 석쇠 위에서 구워 죽이는 혹독한 형벌을 받고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아가탄젤로

 

  • 가톨릭 성인 이름
    Agathangelo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38년 방돔

 

 

아가탄젤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가딴젤로, 아가딴젤루스, 아가탄겔로, 아가탄겔루스, 아가탄젤루스.

 

 

아가탄젤로 자료

아가탄젤로는 1598년에 프랑스의 방돔에서 태어나서 21살 되던 해에 르망(Le Mans)의 카푸친회에 들어갔다. 그는 1625년에 사제로 서품되면서부터 시리아로 갈 때까지 고향에서 유명한 설교자로 명성을 떨쳤다. 

또 알레포(Aleppo)에서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상인들을 상대로 사목활동을 하였으며, 그 동안에 아라비아어를 공부하여 대화나 강론에서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 

그는 모슬렘 사회의 문맹을 퇴치하고, 터키인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전하는 등 당시의 교회가 위험하다고 금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계속하였다.

1630년에 카푸친회는 이집트의 카이로에 선교지를 확보하고 활동을 개시하였는데, 아가탄젤로는 1633년에 그곳의 책임자로서 동분서주하였다.

이때 마르세유(Marseilles)에서 3명의 선교사들이 합류하였는데, 그들 중에 낭트(Nantes)의 카시아누스(Cassianus) 신부가 가장 출중하였다. 카시아누스는 즉시 아가탄젤로 신부의 오른팔이 되어 활동하였는데, 그가 특히 노력한 것은 로마(Roma) 성좌와 곱트 교회간의 재일치를 도모하는 일이었다.

이들 두 선교사는 그 힘든 일을 계속하다가 에티오피아 선교를 위하여 디바루아(Dibarua)로 갔다가 체포되어, 그곳의 왕인 바실리데스 앞으로 끌려가 결국은 순교하고 말았다.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는 이 두 분이 17세기의 가장 위대한 선교사였다고 선포하였다. 아가탄젤로와 카시아누스 신부는 1905년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8. 알베르토

 

  • 가톨릭 성인 이름
    Albert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307년? 트라파니

 

 

알베르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알버트, 알베르또, 알베르뚜스, 알베르투스, 앨버트.

 

 

알베르토 자료

시칠리아(Sicilia)의 알베르투스로도 알려진 성 알베르투스(Albertus, 또는 알베르토)는 이 섬의 트라파니(Trapani) 태생이다. 

그의 부모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만일 아들을 낳게 되면 몬테 카르멜의 성모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한 뒤에 그를 낳았다. 그래서 그는 어릴 때부터 카르멜 회원이 되어 사제로 서품된 뒤에는 메시나(Messina)로 가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규칙 외에도 자발적인 고행을 많이 하였고, 매일 밤에는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서 시편 전부를 바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만년에 그는 메시나와 가까운 곳에서 은수생활을 하였으며, 300년 후에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데 파치(Maria Magdalena de Pazzi, 5월 25일)가 카르멜회를 떠나려는 유혹으로 고생할 때, 천상에 계시는 성 알베르투스에게 기도하여 유혹을 이겼다는 이야기는 그의 성덕이 탁월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9. 엑산토

 

  • 가톨릭 성인 이름
    Exanth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95년

 

 

엑산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엑산투스, 엑싼또, 엑싼뚜스, 엑싼토, 엑싼투스.

 

 

엑산토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8월 7일 목록에서 그리스도인 군인들이었던 성 카르포포루스(Carpophorus), 성 엑산투스(또는 엑산토), 성 카시우스(Cassius), 성 세베리누스(Severinus), 성 세쿤두스(Secundus)와 성 리키니우스(Licinius)가 막시미아누스 헤르쿨리우스 황제의 통치 중에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의 코모(Como)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전설적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천여 명의 테반 군단(Theban Legion)의 일원으로 박해를 피해 도망갔다고 체포되어 코모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다른 전설에서 그들은 코모의 성 피델리스(Fidelis, 10월 28일)에 의해 감옥에 석방된 후 알프스를 넘으려다 체포되어 코모 호수 북쪽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그리고 코모에 있는 성 카르포포루스 성당은 그들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적 자료의 부족 등으로 해서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에서 그들의 이름은 모두 빠졌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0. 율리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Jul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60년

 

 

율리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율리아누스, 줄리안, 줄리언.

 

 

율리아노 자료

성 베드로(Petrus)와 성 율리아누스(Julianus, 또는 율리아노)는 발레리아누스와 갈리에누스 황제의 통치 기간 중에 순교한 최소 20명의 남녀 로마 순교자들 중의 일부로 여겨진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1. 카르포포로

 

  • 가톨릭 성인 이름
    Carpophor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95년

 

 

카르포포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르포포로, 가르포포루스, 까르뽀뽀로, 까르뽀뽀루스, 카르포포루스.

 

 

카르포포로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8월 7일 목록에서 그리스도인 군인들이었던 성 카르포포루스(또는 카르포포로), 성 엑산투스(Exanthus), 성 카시우스(Cassius), 성 세베리누스(Severinus), 성 세쿤두스(Secundus)와 성 리키니우스(Licinius)가 막시미아누스 헤르쿨리우스 황제의 통치 중에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의 코모(Como)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전설적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천여 명의 테반 군단(Theban Legion)의 일원으로 박해를 피해 도망갔다고 체포되어 코모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다른 전설에서 그들은 코모의 성 피델리스(Fidelis, 10월 28일)에 의해 감옥에 석방된 후 알프스를 넘으려다 체포되어 코모 호수 북쪽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그리고 코모에 있는 성 카르포포루스 성당은 그들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적 자료의 부족 등으로 해서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에서 그들의 이름은 모두 빠졌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2. 카시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Cassian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38년 낭트

 

 

카시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시아노, 가시아누스, 카시아누스, 카시안, 카씨아노, 카씨아누스.

 

 

카시아노 자료

아가탄젤로는 1598년에 프랑스의 방돔(Vendome)에서 태어나서 21살 되던 해에 르망(Le Mans)의 카푸친회에 들어갔다. 그는 1625년에 사제로 서품되면서부터 시리아로 갈 때까지 고향에서 유명한 설교자로 명성을 떨쳤다. 

또 알레포(Aleppo)에서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상인들을 상대로 사목활동을 하였으며, 그 동안에 아라비아어를 공부하여 대화나 강론에서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 

그는 모슬렘 사회의 문맹을 퇴치하고, 터키인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전하는 등 당시의 교회가 위험하다고 금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계속하였다.

1630년에 카푸친회는 이집트의 카이로에 선교지를 확보하고 활동을 개시하였는데, 아가탄젤로는 1633년에 그곳의 책임자로서 동분서주하였다.

이때 마르세유(Marseilles)에서 3명의 선교사들이 합류하였는데, 그들 중에 낭트의 카시아누스(Cassianus) 신부가 가장 출중하였다. 카시아누스는 즉시 아가탄젤로 신부의 오른팔이 되어 활동하였는데, 그가 특히 노력한 것은 로마(Roma) 성좌와 곱트 교회간의 재일치를 도모하는 일이었다.

이들 두 선교사는 그 힘든 일을 계속하다가 에티오피아 선교를 위하여 디바루아(Dibarua)로 갔다가 체포되어, 그곳의 왕인 바실리데스 앞으로 끌려가 결국은 순교하고 말았다.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는 이 두 분이 17세기의 가장 위대한 선교사였다고 선포하였다. 아가탄젤로와 카시아누스 신부는 1905년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3. 카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Cass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95년

 

 

카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시오, 가시우스, 까씨오, 까씨우스, 카시우스.

 

 

카시오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8월 7일 목록에서 그리스도인 군인들이었던 성 카르포포루스(Carpophorus), 성 엑산투스(Exanthus), 성 카시우스(또는 카시오), 성 세베리누스(Severinus), 성 세쿤두스(Secundus)와 성 리키니우스(Licinius)가 막시미아누스 헤르쿨리우스 황제의 통치 중에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의 코모(Como)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전설적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천여 명의 테반 군단(Theban Legion)의 일원으로 박해를 피해 도망갔다고 체포되어 코모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다른 전설에서 그들은 코모의 성 피델리스(Fidelis, 10월 28일)에 의해 감옥에 석방된 후 알프스를 넘으려다 체포되어 코모 호수 북쪽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그리고 코모에 있는 성 카르포포루스 성당은 그들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적 자료의 부족 등으로 해서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에서 그들의 이름은 모두 빠졌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4. 카예타노 (가예타노)

 

  • 가톨릭 성인 이름
    Cajet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480-1547년 티에나

 

 

카예타노(가예타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에타노, 가에타누스, 가예따노, 가예따누스, 가예타누스, 카예따노, 카예따누스, 카예타노, 카예타누스, 카제타노, 카제타누스, 카제탄.

 

 

카예타노(가예타노) 자료

성 카예타누스(Cajetanus, 또는 가예타노, 카예타노)는 1480년 이탈리아의 비첸차(Vicenza)에서 가스파르 티에네(Gaspar Thiene) 백작과 마리아 다 포르토(Maria da Porto)의 아들로 태어나 세례를 받았다. 

그는 가에타(Gaeta) 출신으로 파도바(Padova) 대학의 유명한 교수였던 삼촌을 기리기 위해 가에타노(Gaetano)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는 두 살 때 아버지가 전사하는 슬픔을 겪고 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파도바 대학에 들어가 법학을 공부하고 1504년 민법과 교회법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곧 비첸차의 시의원이 되었고, 1506년에는 로마(Roma)로 가서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II)로부터 최초의 공증인으로 임명받았다. 

1513년 율리우스 2세 교황이 선종하자 자신의 직책을 사임하고, 1516년 9월 30일 36세의 나이에 사제품을 받았다.

1519년 비첸차로 돌아온 그는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의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여 병원에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다가 베로나(Verona)로 이주해 활동하다가 베네치아(Venezia)에 불치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을 세웠다. 

1523년 그는 로마로 가서 조반니 피에트로 카라파(Giovanni Pietro Carafa)와 바오로 콘시글리에리(Paolo Consiglieri) 그리고 보니파치오 데콜리(Bonifacio de’Colli) 등과 함께 교회를 개혁하고, 백성들에게 설교하며, 병자를 돕고, 최악의 상황에서 허덕이던 성직자의 신분을 개선하려는 목적으로 성직 수도회를 설립하여 1524년에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의 승인을 받았다. 

‘테아티노회’(Theatines)라는 명칭은 나중에 바오로 4세(Paulus IV) 교황이 된 초대 총장 조반니 피에트로 카라파 주교의 출생지 이름에서 가져왔다. 테아티노회의 정식 명칭은 ‘신의 성직 율수 성직자회’로 재속 사제들로 구성된 성직 수도회로 공동생활을 하며 청빈, 정결, 순명의 삼대 서원을 했다. 

특히 이들은 재속 사제로 사목활동을 하며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 모든 재산을 포기함으로써 사제직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처음에는 회원 수도 적고 크게 성장하지는 못했지만, 자선 사업에 헌신하고 영성과 전례 연구에 집중하면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갔다.

1527년 로마가 약탈당할 때 성 카예타누스와 동료들은 감옥에 갇혔다가 탈출하여 베네치아로 피난을 갔다. 그곳에서 그는 에스파냐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많은 고문을 받기도 했다.

1530년 테아티노회의 총장으로 선출된 그는 개혁에 반대하는 이단적 가르침을 과감히 물리쳤고, 기도와 설교, 자선 사업과 금욕 생활을 통해 교회를 개혁하고 신자들의 영적 쇄신을 위한 밑거름을 마련하였다. 일반 시민들을 위한 성 카예타누스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전당포(은행)의 설립이었다.

후일 그는 복자 요한 마리노니(Joannes Marinoni, 12월 13일) 신부와 함께 ‘몬테 디 피에타’(Monte di Pieta)를 설립하여 고리대금업자에게 고통받던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일로써 시민들의 복리를 위해 일하였다.

1547년 8월 7일 나폴리(Napoli)에서 선종한 그는 1629년 10월 8일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671년 4월 12일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는 트렌토(Trento) 공의회 이전에 있었던 가톨릭 개혁가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성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거나 성모 마리아의 손에서 아기 예수를 받는 모습으로 주로 표현되는데, 이는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녀인 라우라 미냐니(Laura Mignani)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가 언급한 신비한 체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5. 파우스토

 

  • 가톨릭 성인 이름
    Faus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90년 밀라노

 

 

파우스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파우스또, 파우스뚜스, 파우스투스.

 

 

파우스토 자료

전승에 의하면 성 파우스투스(또는 파우스토)는 군인 순교자로서 콤모디우스 황제 치하의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현존하지 않는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6. 힐라리노

 

  • 가톨릭 성인 이름
    Hilar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승,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61년

 

 

힐라리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힐라리누스.

 

 

힐라리노 자료

성 도나투스(Donatus)와 성 힐라리누스(또는 힐라리노)가 어떻게 서로 연관을 갖고 있는지는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 성 힐라리누스는 수도승으로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의 통치 때 이탈리아의 오스티아(Ostia)에서 순교했다.

그리고 성 도나투스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 지방 아레초(Arezzo)의 제2대 주교로 로마 순교록에는 그 역시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 때 아레초에서 순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교회 미술에서 성 도나투스는 칼과 용과 함께 있는 젊은 또는 중년의 주교로서 그려진다. 그는 아레초의 수호성인이나 그에 대한 정확한 내력은 알려지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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