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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5일 남자세례명 14가지

피어나네 2023. 9. 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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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5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그레고리오, 네메시오, 루도비코, 마지노, 멘나, 빈첸시오, 에우세비오, 요셉 데 갈라산즈, 율리아노, 제네시오 (공증인), 제네시오 (희극배우), 제룬시오, 페레그리노, 폰시아노, 총 14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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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5일 여자세례명 루칠라, 에베, 파트리치아, 총 3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8월 25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4가지

 

 

 

 

8월 25일 남자세례명 목록

 

  1. 그레고리오

  2. 네메시오

  3. 루도비코

  4. 마지노

  5. 멘나

  6. 빈첸시오

  7. 에우세비오

  8. 요셉 데 갈라산즈

  9. 율리아노

  10. 제네시오 (공증인)

  11. 제네시오 (희극배우)

  12. 제룬시오

  13. 페레그리노

  14. 폰시아노

 

8월 25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4가지

 

 

1. 그레고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Gregory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선교사

  • 활동 연도와 지역
    707?-775년경 위트레흐트

 

 

그레고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그레고리오 자료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트리어(Trier)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인근의 팔젤(Pfalzel)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722년 독일의 사도인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6월 5일)가 프리슬란트(Friesland)에서 헤센(Hesse)과 튀링겐(Thuringen) 지방으로 갈 때 그 수도원에 머문 적이 있었다.

성 보니파티우스는 식사 자리에서 성 그레고리우스에게 성경을 읽도록 하고 그에 대한 설명과 사도적 생활에 대한 장점 등을 설명해주었다. 이때 성 그레고리우스는 성 보니파티우스의 주목을 받아 그의 제자가 되었고, 후에 그의 협력자가 되어 선교 여행에 동행했다.

750년경 성 그레고리우스는 위트레흐트의 성 마르티누스 수도원 원장의 책임을 맡았다. 그가 담당하게 된 수도원은 일종의 선교 신학교로 프랑크 · 프리슬란트 · 작센(Saxon) · 바이에른(Bayern) · 슈바벤(Schwaben) 등 여러 지역과 국가에서 모인 이들이 학문을 연구하는 전당이자 선교사들을 교육하는 곳이었다.

영국 잉글랜드(England)에도 훌륭한 학교들이 있었지만 많은 학자가 이곳을 찾아왔다. 754년에 스승인 성 보니파티우스가 순교하자, 그는 20년 가까이 프리슬란트(Friesland) 선교단을 이끌었다. 그가 주교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네메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Nemes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60년 로마

 

 

네메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네메시우스, 네메씨오, 네메씨우스.

 

 

네메시오 자료

성녀 루칠라(Lucilla)의 아버지인 성 네메시우스(또는 네메시오)는 로마 군대의 호민관이었다.

그는 알 수 없는 병에 걸린 성녀 루칠라를 치유해 준 교황 성 스테파누스 1세(Stephanus I)에 의해 딸과 함께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 후 로마의 부제가 된 성 네메시우스는 딸과 함께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로마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루도비코

 

  • 가톨릭 성인 이름
    Loui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왕, 3회원

  • 활동 연도와 지역
    1214-1270년 프랑스

 

 

루도비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수, 루도비꼬, 루도비꾸스, 루도비쿠스, 루수, 루이, 루이스.

 

 

루도비코 자료

성 루도비쿠스(Ludovicus, 또는 루도비코)는 프랑스 왕 루이 8세와 카스티야(Castilla)의 블랑쉬(Blanche)의 아들로 1214년 파리(Paris)에서 서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푸아시(Poissy)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1226년 그의 아버지가 서거했을 때 그의 나이는 12세에 불과했으므로 어머니가 섭정의 자리에 올랐다. 그녀는 아들의 왕권을 노리는 샹파뉴(Champagne)의 티보 4세(Thibaud IV)를 비롯하여 야심 많은 귀족과 대항했고, 어떤 때에는 전쟁도 불사하였다.

그는 1234년 5월에 프로방스(Provence)의 공작 레이먼드의 딸인 마르가리타(Margarita)와 결혼하여 열한 명의 자녀를 두었고, 그들을 훌륭하고 경건하게 교육하였다. 결혼한 해에 그는 왕권을 물려받고 통치자가 되었고, 어머니인 블랑쉬는 고문관으로서 아들을 도왔다. 

그는 1242~1243년에 일어난 남프랑스 반란을 진압했고, 잉글랜드(England)의 헨리 3세(Henry III)를 타유부르(Taillebourg) 전투에서 격퇴하고, 프랑스 서부의 푸아투(Poitou)를 손에 넣는 등 국가의 권력을 점점 확대하였다. 

1248년 그는 십자군을 지휘하여 출정하였으나 1249년에 이집트 북부의 다미에타(Damietta)에서 포로가 되어 사라센인들의 손에서 곤욕을 치렀다. 

그 후 그는 석방되어 이스라엘 성지로 가서 1254년까지 머물다가 어머니의 선종 소식을 듣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는 플랑드르(Flandre)와의 평화를 이룩하고 리모주(Limoges)와 카오르(Cahors) 등 수많은 지역을 평정하였다.

성 루도비쿠스는 천성적으로 신심이 깊었고, 또 실제로 이상적인 수도자 생활을 꿈꿨었다. 그래서 그는 정의로운 정치를 펼치며 그리스도교적 사랑으로 나라를 다스렸고, 왕으로부터 농부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권리를 옹호하여 성왕(聖王)으로 불렸다. 

동시에 그는 예리하고 강인한 군주였으며, 동시에 평화를 사랑하는 뛰어난 군인이었다. 그는 하느님께 불경한 태도나 말을 한 사실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맏아들에게 한 유언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그대로 설명하고 지켜나가도록 부탁할 정도였다. 

1270년 그는 재차 십자군을 일으켰다가 8월 25일 튀니스(Tunis)에서 당시 그의 군대를 휩쓸었던 전염병인 이질에 걸려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프랑스로 옮겨져 생드니(Saint-Denis) 수도원 성당을 비롯해 여러 곳의 성당에 모셔져 공경을 받고 있다.

성 루도비쿠스는 한마디로 가장 이상적인 중세의 그리스도인 왕이었다. 그의 치하에서 프랑스는 최대의 번영을 누렸다. 그의 신심은 스스로 작은 형제회의 3회원이 됨으로써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래서 그는 작은 형제회 제3회의 남자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1297년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Bonifatius V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선종 때에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주님, 저는 이제 당신의 집에 들어가렵니다. 당신의 거룩한 성전에서 예배하리이다. 당신의 이름에 영광을 드리나이다.” 그리고 오후 3시경에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라고 말을 한 후 숨을 거두었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프랑스 왕실의 문장인 백합 문장을 들고 있거나 예루살렘 성지에서 가져온 성물인 그리스도의 가시관을 들거나 머리에 쓴 모습으로 주로 그려진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쓰셨던 가시관은 성 루도비쿠스가 사라센 사람들에게 노예가 된 그리스도인들의 석방을 위해 많은 도움을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동로마 황제가 선물한 것이다. 

평소 신심이 깊었던 그는 수천 명의 신자와 함께 맨발로 먼 길까지 마중 나와 손수 가시관을 모시고 행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시관과 십자가 보목(寶木) 등을 모시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들여 파리에 생트샤펠(Sainte-Chapelle) 왕실 성당을 1248년에 완공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마지노

 

  • 가톨릭 성인 이름
    Mag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타라고나

 

 

마지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기노, 마기누스, 마지누스.

 

 

마지노 자료

성 마기누스(또는 마지노)는 에스파냐 타라고나 지방을 복음화한 선교사로 로마 제국의 박해 때 체포되었다. 그는 신앙을 포기하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멘나

 

  • 가톨릭 성인 이름
    Menna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52년 콘스탄티노플

 

 

멘나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멘나스.

 

 

멘나 자료

성 멘나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출신으로서 콘스탄티노플의 사제로 봉직하던 중, 536년에 교황 아가피투스 1세(Agapitus I)에 의하여 총대주교로 착좌하였다.

그는 그리스도 단성설자이던 전임자 안티무스(Anthimus)의 실책을 바로잡는 일부터 시작하여 개혁운동을 꾸준히 전개해 나갔다.

|544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를 뛰어난 신학자로 인정하면서 자신이 지지하는 그리스도 단성설자와의 화해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화해 칙서는 교황 비길리우스(Vigilius)에 의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므로 그 역시 서명을 거부하였다. 그는 이단 문제로 분쟁이 끊이질 않던 시기에 교황께 충성하고 순종함으로써 이단 확산 방지에 큰 기여를 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빈첸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Vincent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92년

 

 

빈첸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뱅상, 빈센트, 빈첸시우, 빈첸티오, 빈첸티우스, 빈켄티오, 빈켄티우스.

 

 

빈첸시오 자료

옛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성 에우세비우스(Eusebius) · 성 폰티아누스(Pontianus) · 성 빈첸시오(Vincentius) · 성 페레그리누스(Peregrinus)는 콤모두스 황제(180-192년 재위)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이탈리아의 로마(Roma)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은 고문대에서 사지를 늘어뜨리는 고문을 받고 매를 맞고 불에 지지는 형벌을 받은 후 납을 넣어 끝이 날카로운 채찍으로 죽을 때까지 맞아 순교한 후 로마의 카타콤바에 묻혔다.

전승에 따르면, 그들은 평소 자기 소유 재산을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며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도록 적극적으로 권고하였다. 이에 원로원 의원인 성 율리우스(Julius, 8월 19일)가 그들을 집으로 초대해 복음을 듣고 회심하여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그러고 나서 성 율리우스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며 가난한 이웃들에게 자기 재물을 나누어주다가 황제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 감옥에 갇힌 성 율리우스는 로마의 신상에 희생제물을 바치라는 비텔리우스 재판관의 명령을 끝까지 거부하고 매를 맞아 순교하였다.

성 율리우스가 순교한 후 그의 시신은 원형 극장 밖으로 버려졌는데, 성 에우세비우스와 동료들이 시신을 수습해서 로마의 아우렐리아누스 가도(Via Aurelianus)에 있는 칼레포디우스(Calepodius) 묘지에 안장하였다.

그 뒤에 성 에우세비우스와 동료들도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며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고 성 율리우스가 순교한 지 6일 뒤인 8월 25일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성 에우세비우스와 성 폰티아누스의 유해는 863년에 교황 성 니콜라우스(Nicolaus, 11월 13일)에 의해 프랑스의 비엔(Vienne)으로 보내졌고, 성 페레그리누스의 유해는 현재 미국 미네소타주(Minnesota) 대학촌의 성 요한 수도원 성당에 모셔져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25일 목록에서 로마의 아우렐리아 가도(Via Aurelia)에 성 에우세비우스와 그 동료들이 모셔져 있다고 간단히 기록하였다. 다만 앞서 순교한 성 율리우스에 대해서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에우세비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useb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92년

 

 

에우세비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우세비오스, 에우세비우스.

 

 

에우세비오 자료

옛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성 에우세비우스(또는 에우세비오) · 성 폰티아누스(Pontianus) · 성 빈첸시오(Vincentius) · 성 페레그리누스(Peregrinus)는 콤모두스 황제(180-192년 재위)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이탈리아의 로마(Roma)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은 고문대에서 사지를 늘어뜨리는 고문을 받고 매를 맞고 불에 지지는 형벌을 받은 후 납을 넣어 끝이 날카로운 채찍으로 죽을 때까지 맞아 순교한 후 로마의 카타콤바에 묻혔다. 

전승에 따르면, 그들은 평소 자기 소유 재산을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며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도록 적극적으로 권고하였다. 이에 원로원 의원인 성 율리우스(Julius, 8월 19일)가 그들을 집으로 초대해 복음을 듣고 회심하여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그러고 나서 성 율리우스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며 가난한 이웃들에게 자기 재물을 나누어주다가 황제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 감옥에 갇힌 성 율리우스는 로마의 신상에 희생제물을 바치라는 비텔리우스 재판관의 명령을 끝까지 거부하고 매를 맞아 순교하였다.

성 율리우스가 순교한 후 그의 시신은 원형 극장 밖으로 버려졌는데, 성 에우세비우스와 동료들이 시신을 수습해서 로마의 아우렐리아누스 가도(Via Aurelian)에 있는 칼레포디우스(Calepodius) 묘지에 안장하였다.

그 뒤에 성 에우세비우스와 동료들도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며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고 성 율리우스가 순교한 지 6일 뒤인 8월 25일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성 에우세비우스와 성 폰티아누스의 유해는 863년에 교황 성 니콜라우스(Nicolaus, 11월 13일)에 의해 프랑스의 비엔(Vienne)으로 보내졌고, 성 페레그리누스의 유해는 현재 미국 미네소타주(Minnesota) 대학촌의 성 요한 수도원 성당에 모셔져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25일 목록에서 로마의 아우렐리아 가도(Via Aurelia)에 성 에우세비우스와 그 동료들이 모셔져 있다고 간단히 기록하였다. 다만 앞서 순교한 성 율리우스에 대해서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요셉 데 갈라산즈

 

  • 가톨릭 성인 이름
    Joseph de Calasanz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설립자, 교육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56-1648년

 

 

요셉 데 갈라산즈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갈라산스, 갈라상스, 요세푸스,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칼라산스, 칼라산즈, 호세.

 

 

요셉 데 갈라산즈 자료

아버지 페드로 갈라산즈(Don Pedro Calasanza)와 어머니 마리아 가스토네아(Maria Gastonea)의 막내아들인 성 요셉 데 갈라산즈(Josephus de Calasanz)는 에스파냐 아라곤(Aragun)의 페트랄타 데 라 살(Petralta de la Sal) 근처의 칼라산사(Calasanza) 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에스타디야(Estadilla)에서 문법과 수사학을 공부하였으며, 레리다(Lerida) 대학에서 철학과 법학을 공부하여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1571-1577년). 그리고 발렌시아(Valencia) 대학과 알칼라 데 에나레스(Alcala de Henares)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런데 이 기간 중에 어머니와 형이 사망하자, 아버지는 요셉이 돌아와 결혼하여 가문을 이어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요셉은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물리치고 1583년 12월 17일 우르겔(Urgell)의 주교인 우고 암브로시우스(Hugo Ambrosius)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성 요셉은 알바라신 교구에서 활동하였다. 교구장 주교는 성 요셉을 자신의 고문 신학자이자 주교대리로 임명하여 피레네 산맥의 외딴 지역들에 대한 성직자들의 개혁과 신앙 재건을 위하여 파견되었다.

요셉은 모든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1592년 로마(Roma)로 가서 콜론나(Colonna) 추기경을 만났는데, 그 추기경 역시 성 요셉을 자신의 고문 신학자 겸 조카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그는 로마에서 교육과 자선 활동을 위한 공동체 설립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는 로마에서 일반 국민들의 무지와 윤리적 타락, 특히 부모가 죽은 뒤 버림받은 고아들을 보살피고 교육하는 일이 급선무임을 깨닫고 티베르 강을 끼고 있는 빈민가에서 유럽 최초의 무료 공립학교를 개설하였다.

그는 1597년에 두 사제의 도움으로 이 학교를 연 다음 ‘그리스도교 교리 형제회’의 책임자가 되었다. 마침내 1617년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는 성 요셉이 설립한 학교를 공식 수도회로 승인해 주었고, 많은 이들의 지원과 협력으로 이와 유사한 많은 학교들이 설립되어 학생수가 천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1621년 11월 18일에 그의 공동체는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인준을 받은 수도회가 되었으며, 성 요셉은 이 수도회의 종신 총장이 되었다.

초창기의 사제들은 주로 초등학교에서 가르쳤다. 성 요셉은 초급과 중급 학교의 체계화에 기여하였다. 그는 교과과정을 면밀히 구성하였고 어린이들이 선(善)을 사랑하도록 교육 원칙을 세웠다.

“어린이들이 처음부터 신앙과 문학 교육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삶이 행복함을 알게 된다.”고 그는 기록하였다.

이들 학교는 에스파냐, 보헤미아(Bohemia), 폴란드, 이탈리아 등 수많은 나라에 세워졌다. 그러나 설립자의 만년은 야심을 가진 후계자들의 심각한 분쟁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또 다른 욥처럼 용기를 발휘하였지만 그의 수도회에 대한 신뢰는 그가 죽은 후에야 되살아났다. 그는 로마에서 1648년 8월 25일에 운명하였다.

1748년 8월 7일 시복되었으며 1767년 7월 16일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교황 비오 12세(Pius XII)는 그를 ‘모든 그리스도교 학교의 천상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율리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Jul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율리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율리아누스, 줄리안, 줄리언.

 

 

율리아노 자료

역사가 바로니우스(Baronius)에 의하면 성 율리아누스(Julianus, 또는 율리아노)는 시리아의 사제로 그 외에 확실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제네시오 (공증인)

 

  • 가톨릭 성인 이름
    Genes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공증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초 아를

 

 

제네시오 (공증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게네시오, 게네시우스, 제네시우스.

 

 

제네시오 (공증인) 자료

로마 순교록은 8월 25일 목록에서 희극배우이자 순교자인 성 게네시우스 외에 막시미아누스 황제 치하의 프랑스 지방 아를에서 순교한 또 다른 순교자 성 게네시우스(또는 제네시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는 아를에서 태어나 군인이 되었고, 글을 잘 쓰는 능력으로 유명해졌다. 그래서 그는 아를 지방 집행관의 비서이자 공증인이 되었다. 어느 날 그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를 명하는 황제의 칙서를 필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예비신자였던 그는 정의롭지 못한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며 평판(平板)을 집정관 앞에 집어 던지고,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인임을 선언했다. 그는 즉시 체포되어 참수형을 받았는데, 이렇게 해서 그는 혈세(血洗)를 통한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제네시오 (희극배우)

 

  • 가톨릭 성인 이름
    Genes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희극배우,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초? 로마

 

 

제네시오 (희극배우)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게네시오, 게네시우스, 제네시우스.

 

 

제네시오 (희극배우) 자료

어느 날 로마에 있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궁중 무대에서 그리스도교의 성사(聖事)를 조롱하기 위한 연극이 황제 앞에서 공연되었다. 이때 전문 희극배우인 성 게네시우스(또는 제네시오)가 세례성사를 받으려고 준비하는 예비신자로 출연하게 되었다. 

공연 도중 그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갑자기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겠다는 생각이 불같이 타올라 실제로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가 이 사실을 황제에게 선언하자 화가 난 황제의 명령으로 그는 즉시 체포되어 집정관에게 넘겨졌다. 

그는 집정관 앞에서 참혹하게 매를 맞고, 고문대에 올라 오랫동안 쇠갈퀴를 이용해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문과 불붙은 나무토막으로 지지대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런데도 성 게네시우스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유지하며 이렇게 외쳤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임금은 없다. 당신이 나를 수천 번 죽인다 해도 나의 입술과 마음에서 그리스도를 앗아갈 수는 없다.” 

그는 결국 참수형을 받아 순교의 월계관을 얻었다. 그는 배우의 수호성인이다.

로마의 성 게네시우스에 대한 전설이 막시미아누스 황제 치하의 프랑스 지방 아를(Arles)에서 순교한 성 게네시우스에서 유래했다고 보기도 한다.

예비신자이자 지방 집행관의 공증인으로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라는 황제의 칙서를 필사하길 거부하고 순교한 성 게네시우스에 대한 공경이 로마에 퍼지면서 생긴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 순교록은 8월 25일 목록에서 로마와 아를의 두 게네시우스 순교자에 대해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제룬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Geruntiu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 탈코

 

 

제룬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게룬티오, 게룬티우스, 제룬시우스, 제룬씨오, 제룬씨우스.

 

 

제룬시오 자료

성 게룬티우스(또는 제룬시오)는 에스파냐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고, 세비야(Sevilla) 부근 탈코의 주교로서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페레그리노

 

  • 가톨릭 성인 이름
    Peregrin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92년

 

 

페레그리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뻬레그, 뻬레그리오, 뻬레그리우스, 페레그리우스, 페레그린.

 

 

페레그리노 자료

옛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성 에우세비우스(Eusebius) · 성 폰티아누스(Pontianus) · 성 빈첸시오(Vincentius) · 성 페레그리누스(Peregrinus, 또는 페레그리노)는 콤모두스 황제(180-192년 재위)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이탈리아의 로마(Roma)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은 고문대에서 사지를 늘어뜨리는 고문을 받고 매를 맞고 불에 지지는 형벌을 받은 후 납을 넣어 끝이 날카로운 채찍으로 죽을 때까지 맞아 순교한 후 로마의 카타콤바에 묻혔다.

전승에 따르면, 그들은 평소 자기 소유 재산을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며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도록 적극적으로 권고하였다. 이에 원로원 의원인 성 율리우스(Julius, 8월 19일)가 그들을 집으로 초대해 복음을 듣고 회심하여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그러고 나서 성 율리우스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며 가난한 이웃들에게 자기 재물을 나누어주다가 황제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 감옥에 갇힌 성 율리우스는 로마의 신상에 희생제물을 바치라는 비텔리우스 재판관의 명령을 끝까지 거부하고 매를 맞아 순교하였다.

성 율리우스가 순교한 후 그의 시신은 원형 극장 밖으로 버려졌는데, 성 에우세비우스와 동료들이 시신을 수습해서 로마의 아우렐리아누스 가도(Via Aurelianus)에 있는 칼레포디우스(Calepodius) 묘지에 안장하였다.

그 뒤에 성 에우세비우스와 동료들도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며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고 성 율리우스가 순교한 지 6일 뒤인 8월 25일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성 에우세비우스와 성 폰티아누스의 유해는 863년에 교황 성 니콜라우스(Nicolaus, 11월 13일)에 의해 프랑스의 비엔(Vienne)으로 보내졌고, 성 페레그리누스의 유해는 현재 미국 미네소타주(Minnesota) 대학촌의 성 요한 수도원 성당에 모셔져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25일 목록에서 로마의 아우렐리아 가도(Via Aurelia)에 성 에우세비우스와 그 동료들이 모셔져 있다고 간단히 기록하였다. 다만 앞서 순교한 성 율리우스에 대해서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폰시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Pontian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92년

 

 

폰시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본시아노, 본시아누스, 폰시아누스, 폰씨아노, 폰씨아누스, 폰티아노, 폰티아누스.

 

 

폰시아노 자료

옛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성 에우세비우스(Eusebius) · 성 폰티아누스(Pontianus, 또는 폰시아노) · 성 빈첸시오(Vincentius) · 성 페레그리누스(Peregrinus)는 콤모두스 황제(180-192년 재위)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이탈리아의 로마(Roma)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은 고문대에서 사지를 늘어뜨리는 고문을 받고 매를 맞고 불에 지지는 형벌을 받은 후 납을 넣어 끝이 날카로운 채찍으로 죽을 때까지 맞아 순교한 후 로마의 카타콤바에 묻혔다.

전승에 따르면, 그들은 평소 자기 소유 재산을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며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도록 적극적으로 권고하였다. 이에 원로원 의원인 성 율리우스(Julius, 8월 19일)가 그들을 집으로 초대해 복음을 듣고 회심하여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그러고 나서 성 율리우스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며 가난한 이웃들에게 자기 재물을 나누어주다가 황제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 감옥에 갇힌 성 율리우스는 로마의 신상에 희생제물을 바치라는 비텔리우스 재판관의 명령을 끝까지 거부하고 매를 맞아 순교하였다.

성 율리우스가 순교한 후 그의 시신은 원형 극장 밖으로 버려졌는데, 성 에우세비우스와 동료들이 시신을 수습해서 로마의 아우렐리아누스 가도(Via Aurelian)에 있는 칼레포디우스(Calepodius) 묘지에 안장하였다.

그 뒤에 성 에우세비우스와 동료들도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며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고 성 율리우스가 순교한 지 6일 뒤인 8월 25일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성 에우세비우스와 성 폰티아누스의 유해는 863년에 교황 성 니콜라우스(Nicolaus, 11월 13일)에 의해 프랑스의 비엔(Vienne)으로 보내졌고, 성 페레그리누스의 유해는 현재 미국 미네소타주(Minnesota) 대학촌의 성 요한 수도원 성당에 모셔져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25일 목록에서 로마의 아우렐리아 가도(Via Aurelia)에 성 에우세비우스와 그 동료들이 모셔져 있다고 간단히 기록하였다. 다만 앞서 순교한 성 율리우스에 대해서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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