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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8일 남자세례명 16가지

피어나네 2023. 9. 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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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8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루몬, 모세, 비비아노, 셉티미노, 아우구스티노, 안테, 알렉산데르, 야누아리오, 에드문도 에로스미스, 율리아노, 카이오, 펠라지오, 펠릭스, 포르투나토, 헤르메스, 후고 모어, 총 16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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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8일 여자세례명 플로렌티나, 총 1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8월 28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6가지

 

 

 

 

8월 28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루몬

  2. 모세

  3. 비비아노

  4. 셉티미노

  5. 아우구스티노

  6. 안테

  7. 알렉산데르

  8. 야누아리오

  9. 에드문도 에로스미스

  10. 율리아노

  11. 카이오

  12. 펠라지오

  13. 펠릭스

  14. 포르투나토

  15. 헤르메스

  16. 후고 모어

 

8월 28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6가지

 

 

1. 루몬

 

  • 가톨릭 성인 이름
    Rumo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6세기경

 

 

루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로난, 로낭, 루아단, 루안, 루앙.

 

 

루몬 자료

성 루몬의 생애에 대해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그는 본래 아일랜드 출신의 선교사로 5~6세기경에 영국 잉글랜드(England)로 이주하여 콘월(Cornwall)의 팰머스(Falmouth) 항구 도시 근처에 은둔소를 세우고 은수자로 살았다고 한다.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그는 영국 웨일스(Wales) 지방 출신으로 나중에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Bretagne) 지방 트레기에(Treguier)의 초대 주교가 된 성 투드발(Tudwal, 11월 30일)의 형제라고도 한다.

그 외에도 브르타뉴 지방에서 성인으로 공경받는 로크로난(Locronan)의 성 로난(Ronan, 6월 1일)과 같은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10세기에 잉글랜드 데번(Devon)의 오둘프(Ordwulf) 백작은 타비스톡에 성모 마리아와 성 루몬 수도원을 세웠고, 성 루몬을 수도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하였다. 그는 성 로난(Ronan), 성 루안(Ruan), 성 루아단(Ruadan)으로도 불린다.

축일 또한 아일랜드에서는 7월 22일, 영국에서는 8월 28일, 브르타뉴 지방에서는 6월 1일, 서방 정교회에서는 8월 30일에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옛 “로마 순교록”이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에서 그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는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모세

 

  • 가톨릭 성인 이름
    Mose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30-405년 에티오피아

 

 

모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모이세스, 모제스.

 

 

모세 자료

고대 에티오피아 태생인 성 모세 흑인(Moyses the Black)은 원래 신체상으로 매우 건장하고 또 깡패 기질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느 이집트 사람의 종으로 있던 중에 약탈 행위를 하다가 쫓겨나면서부터 아예 강도단의 두목이 되어 나일 강 유역에 악명이 자자했다.

강도단을 소탕하고자 군대가 동원되자 스케티스(Scetis) 사막의 은수자들 틈으로 숨어들었다가 그곳에서 수도자들의 거룩한 생활에 감명 받아 아예 수도자가 되었다.

수도생활에 정진해 후에 사제가 되고 공동체의 원장이 되었다. 그가 사제직에 올라 주교의 허락을 받고 흰옷을 입었는데, 이때 그 주교가 “이제까지 흑인이던 사람이 백인이 되었네.”라고 하자 그는 “겉만 그렇지, 속은 아직도 검은 줄을 하느님만은 아십니다.” 하고 대답한 것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75세 되던 해에 도적 떼가 수도원을 기습했을 때, 수도자들을 피신시킨 후 몇 명의 노년의 수도자들과 함께 그들을 맞았다가 전부 살해되었다. 그의 무덤은 와디 나트룬(Wadi Natrun)으로도 부르는 스케티스에 있는 다이르-알-바라무스에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비비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Viv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460년 생트

 

 

비비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비비아누스, 비비안.

 

 

비비아노 자료

프랑스 생트의 주교인 성 비비아누스(Vivianus, 또는 비비아노)는 서고트족(Visigoths)의 침략으로 인해 야기된 지역 주민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그의 삶을 헌신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셉티미노

 

  • 가톨릭 성인 이름
    Septim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셉티미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셉띠미노, 셉띠미누스, 셉티미누스.

 

 

셉티미노 자료

성 호노라투스(Honoratus)와 아론티우스(Arontius), 포르투나투스(Fortunatus), 사비니아누스(Sabinianus), 펠릭스(Felix), 야누아리우스(Januarius), 셉티미누스(또는 셉티미노), 레포시투스(Repositus), 사토르(Sator), 비탈리스(Vitalis), 도나투스(Donatus) 그리고 또 다른 펠릭스(Felix)는 아프리카의 하드럼멘툼 출신인데, 비록 형제지간은 아닐지라도 ‘12명의 거룩한 형제들’로 알려졌다.

그들은 모두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체포되어, 카르타고(Carthago)에서 고문을 받고 이탈리아로 호송되었다.

처음 네 사람은 8월 27일에 포텐차(Potenza)에서, 펠릭스와 야누아리우스 그리고 셉티무스는 베노사(Venossa)에서 그리고 다른 이들은 센티아나(Sentiana)에서 각각 참수당하여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아우구스티노

 

  • 가톨릭 성인 이름
    Augustin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교회학자, 교부

  • 활동 연도와 지역
    354-430년 히포

 

 

아우구스티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오스딩, 아우구스띠노, 아우구스띠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 오스틴.

 

 

아우구스티노 자료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또는 아우구스티노)는 이교도인으로 로마 제국의 관리인 부친 파트리키우스(Patricius)와 그리스도인인 모친 성녀 모니카(Monica, 8월 27일)의 아들로 354년 11월 13일 아프리카 누미디아(Numidia) 지방의 타가스테(Tagaste, 현 알제리 북쪽의 수크아라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타가스테와 인근 마다우라에서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았는데, 370년에는 법률가가 될 꿈을 안고서 수사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카르타고(Carthago)의 대학교에 들어갔다. 이때 그의 나이는 17세였는데, 여기서 한 여인과 사랑에 빠져 함께 생활하기 시작하여 그의 부친이 항상 소중히 여기던 아들 아데오다투스(Adeodatus)를 낳았다.

그는 공부를 마치고 여러 지방에서 교사생활을 하며 그리스도교 신자로서의 생활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는 점차 철학에 흥미를 갖다가 존재 문제, 특히 악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될 것을 기대하고 373년경 마니교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타가스테와 카르타고 등지에서 10여 년간 교사생활을 한 후 383년에 로마(Roma)로 가서 수사학교를 세웠으나, 학생들의 태도 때문에 크게 실망하다가 384년 가을부터 밀라노(Milano)의 수사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신플라톤 철학과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12월 7일) 주교의 설교에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성 암브로시우스의 강의를 통해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은유적 또는 영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는 한편으로는 명예, 재산, 결혼 등의 내적 갈등을 겪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며 살려는 소망이 불길처럼 치솟았다.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정원을 산책하다가 “집어서 읽어라”(Tolle, lege) 하고 반복해서 외치는 신비로운 소리를 듣고 성경을 펼쳐 읽어 본 것이 사도 바오로(Paulus)의 로마서 13장 13절의 말씀이었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그래서 그는 386년 8월 교수직을 그만두고 그의 친구 성 알리피우스(Alypius, 8월 15일)와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함께 387년 4월 13일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에 밀라노에서 성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지도로 교리를 받고 세례를 받았다. 

그 후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와 일종의 수도원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다가, 391년에 자신의 소망과는 달리 사제로 서품되었고, 5년 후에는 히포의 주교로 선임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북아프리카의 교구에서 그리스도교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주교 중의 한 사람으로 거의 35년을 참된 사목자로 헌신했다. 

그는 사목자의 권위를 행사하되 백성들의 복리와 행복을 위하여 사용했고, 대성당의 성직자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으며, 엄격한 규율 아래 모든 일을 행했으며, 주일과 축일에는 반드시 강론을 했고, 직접 예비신자 교리를 담당했으며, 교회와 가난한 사람들의 재정지원을 물색하는 등 사회 정의를 위해서도 주교직을 유용하게 활용했다. 

그는 틈나는 대로 글을 썼다. 친구들뿐만 아니라 교구 신자들과 도나투스파(Donatism) 이단자들에게도 반박문을 써 보냈다. 특히 마니교(Manichaeism)와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를 반박하는 강연회에는 너무 많은 청중이 몰릴 정도였다. 

이외에도 삼위일체와 은총론에 관한 책도 썼는데, 그의 연구 대상은 매우 광범위했었다. 그래서 전해오는 저작으로 113종의 책과 논문, 200여 통의 편지, 500회의 설교 등이 있다.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자신의 개종 과정을 기록한 자서전적 저서인 “고백록”(Confessiones)과 호교론적 저서인 “신국론”(De ciavitate Dei)이다. 그는 자신의 극적인 개종을 통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순수한 은총을 절실히 체험했기 때문에 은총론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를 거듭했다. 

그래서 그를 흔히 ‘은총론의 박사’(Doctor Gratiae)라고 부른다. 그는 서방교회의 4대 교부 중에서 가장 위대한 교부이자 교회 학자이며 뛰어난 영성가였다. 주교가 된 이후에도 주교관 내에 성직자 수도원을 세워 공동생활을 이어갔을 정도로 수도자로서의 그의 영향 또한 대단하다. 

그의 수도 규칙은 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7월 11일)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렇듯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방 그리스도 교회 지성의 모델로서 가톨릭 신앙 안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반달족이 히포를 포위 공격하던 430년 76세의 나이로 하느님 품에 안겼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떤 성인도 과거가 없는 사람은 없다. 또한 어떤 큰 죄를 지었던 죄인이라도 미래가 없는 사람은 없다.”라는 교회의 오랜 진리를 몸소 보여 준 인물이다. 

아들의 회개를 위해 오랜 세월 눈물로 하느님께 기도했던 어머니 성녀 모니카의 정성과 영적 스승이었던 성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도움으로 그는 하느님의 사랑과 희망의 증거자가 되었다.

교회 미술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대개 연구에 몰두하는 주교의 모습으로 서재에서 책을 든 모습으로 그려진다. 15세기 이후에는 바닷가에서 조개껍데기를 든 어린아이와 함께 등장하는데, 이는 성인의 환시 내용을 기초로 한 것이다.

중년의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심오한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 몰두하던 중 바닷가를 거닐다가 한 아이가 모래톱에 조그만 구덩이를 파놓고 조개껍데기로 부지런히 바닷물을 퍼 나르는 것을 보았다.

궁금해 묻는 그에게 어린아이는 바닷물을 다 퍼 담을 것이라 했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질문에 “그럼, 아저씨 작은 머리로 삼위일체 하느님을 어떻게 알아들으려고요?” 하는 말을 남기고 어린아이는 사라졌다고 한다.

17세기 이후에는 불타는 심장을 들고 있거나 화살에 의해 관통된 심장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도 그려지는데, 이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종교적 열정을 표현한 것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안테

 

  • 가톨릭 성인 이름
    Anthe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안테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떼스, 안테스.

 

 

안테 자료

성 포르투나투스(Fortunatus)는 성 안테와 성 카이우스(Cajus)와 함께 이탈리아의 살레르노(Salerno) 부근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의 유해는 940년 살레르노에 안장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알렉산데르

 

  • 가톨릭 성인 이름
    Alexand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244-340년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데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알레산드로, 알렉산더, 알렉산델, 알렉싼데르, 알렉싼델.

 

 

알렉산데르 자료

317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선출된 성 알렉산데르는 이미 73세였다. 그의 지혜와 성덕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에 참석하여 아리우스(Arius)와 아리우스파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336년에 아리우스가 황제의 명을 받고 콘스탄티노플에 오게 되자 그는 자신이나 아리우스가 제거되도록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는데, 아리우스가 그곳에 도착하기 전날에 죽었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야누아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Janua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야누아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야누아리우스, 자누아리오, 자누아리우스.

 

 

야누아리오 자료

성 호노라투스(Honoratus)와 아론티우스(Arontius), 포르투나투스(Fortunatus), 사비니아누스(Sabinianus), 펠릭스(Felix), 야누아리우스(또는 야누아리오), 셉티미누스(Septiminus), 레포시투스(Repositus), 사토르(Sator), 비탈리스(Vitalis), 도나투스(Donatus) 그리고 또 다른 펠릭스(Felix)는 아프리카의 하드럼멘툼 출신인데, 비록 형제지간은 아닐지라도 ‘12명의 거룩한 형제들’로 알려졌다.

그들은 모두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체포되어, 카르타고(Carthago)에서 고문을 받고 이탈리아로 호송되었다.

처음 네 사람은 8월 27일에 포텐차(Potenza)에서, 펠릭스와 야누아리우스 그리고 셉티무스는 베노사(Venossa)에서 그리고 다른 이들은 센티아나(Sentiana)에서 각각 참수당하여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에드문도 에로스미스

 

  • 가톨릭 성인 이름
    Edmund Arrowsmith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85-1628년 영국

 

 

에드문도 에로스미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애로스미스, 에드먼드, 에드몬드, 에드문두스, 에드문드.

 

 

에드문도 에로스미스 자료

성 에드문두스 에로스미스(Edmundus Arrowsmith, 또는 에드문도 에로스미스)는 잉글랜드의 헤이독(Haydock)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브라이언(Brian)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견진성사 때 받은 에드문두스라는 이름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의 집안은 가톨릭 신앙을 지키기 위해 많은 고난을 겪었다.

할아버지가 감옥에서 신앙을 증거하다 순교하고, 부모 또한 감옥에 갇히면서 그와 형제들은 이웃들의 돌봄을 받기도 했다. 1605년 성 에드문두스 에로스미스는 사제가 되기 위해 잉글랜드를 떠나 프랑스의 두에(Douai)에 있는 영국 신학교에 들어갔다.

건강상의 문제로 잉글랜드로 돌아왔다가 회복한 후 다시 두에로 가서 공부를 마치고 1612년 아라스(Arras)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 해에 곧바로 영국 선교 길에 나섰다.

그는 1622년까지 별다른 어려움 없이 랭커셔(Lancashire)의 가톨릭 신자들을 사목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체스터(Chester)의 영국 성공회 주교에게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제임스 1세(James I) 국왕이 체포된 모든 사제를 풀어주라는 명을 내림에 따라 석방된 후 그는 1624년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근친결혼을 주례했다는 한 청년의 밀고 때문에 1628년에 다시 체포되어, 가톨릭 사제로서 유죄 판결과 더불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그해 8월 28일 랭커스터(Lancaster)에서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의 유해 중 일부인 손은 시복식 전까지 에로스미스 가문에 의해 보존되었다. 현재는 그레이터 맨체스터(Greater Manchester)의 애슈턴인마커필드(Ashton-in-Makerfield)에 있는 성 오스왈도와 성 에드문도 에로스미스 가톨릭 성당에 모셔져 있다.

성 에드문두스 에로스미스는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순교일인 8월 28일에 기념하고, 시성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2000년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율리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Jul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세기경? 브리우드

 

 

율리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율리아누스, 줄리안, 줄리앙, 줄리언.

 

 

율리아노 자료

브리우드의 성 율리아누스(Julianus, 또는 율리아노)는 프랑스 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순교자 중 한 명이다. 그는 프랑스 남동부 비엔(Vienne) 지방 출신으로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던 군인이었다. 

“로마 순교록”과 교회 전승에 따르면, 그는 로마군의 호민관으로서 군대 상관이자 친구인 비엔의 성 페레올루스(Ferreolus, 9월 18일)와 함께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다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성 페레올루스의 권유로 클레르몽페랑(Clermont-Ferrand)으로 일단 피신했다.

그러나 비엔의 총독인 크리스피누스(Crispinus)가 보낸 군인들에 의해 체포되어 잔인하게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의 참수된 머리는 군인들에 의해 즉시 비엔으로 옮겨졌다. 총독은 성 율리아누스의 머리를 성 페레올루스에게 건네며 로마의 신들에게 희생제물을 받치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성 페레올루스는 단호히 이를 거부하고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한 후 순교하였다. 성 율리아누스의 머리는 성 페레올루스와 함께 묻혔고, 그의 나머지 시신은 신자들에 의해 브리우드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그리고 후대에 그의 무덤 위에 성당이 지어졌고, 수많은 순례자가 찾아오면서 중세에 그 위에 생 줄리앙(Saint-Julien) 대성당이 다시 건립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카이오

 

  • 가톨릭 성인 이름
    Ca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카이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이오, 가이우스, 까이오, 까이우스, 카이우스.

 

 

카이오 자료

성 포르투나투스(Fortunatus)는 성 안테(Anthes)와 성 카이우스(또는 카이오)와 함께 이탈리아의 살레르노(Salerno) 부근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의 유해는 940년 살레르노에 안장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펠라지오

 

  • 가톨릭 성인 이름
    Pelag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소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83년 콘스탄츠

 

 

펠라지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뻴라지오, 뻴라지우스, 펠라기오, 펠라기우스, 펠라지우스.

 

 

펠라지오 자료

어린아이였던 성 펠라기우스(또는 펠라지오)는 누메리아누스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박해 중에 판노니아(Pannonia, 도나우 강 중류 우안(右岸)의 헝가리 분지 지역)에서 순교하였다. 그의 유해는 10세기 초 독일 남서부의 콘스탄츠 주교좌성당으로 옮겨졌고, 이후 그 도시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펠릭스

 

  • 가톨릭 성인 이름
    Felix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펠릭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펠리체.

 

 

펠릭스 자료

성 호노라투스(Honoratus)와 아론티우스(Arontius), 포르투나투스(Fortunatus), 사비니아누스(Sabinianus), 펠릭스, 야누아리우스(Januarius), 셉티미누스(Septiminus), 레포시투스(Repositus), 사토르(Sator), 비탈리스(Vitalis), 도나투스(Donatus) 그리고 또 다른 펠릭스는 아프리카의 하드럼멘툼 출신인데, 비록 형제지간은 아닐지라도 ‘12명의 거룩한 형제들’로 알려졌다.

그들은 모두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체포되어, 카르타고(Carthago)에서 고문을 받고 이탈리아로 호송되었다.

처음 네 사람은 8월 27일에 포텐차(Potenza)에서, 펠릭스와 야누아리우스 그리고 셉티무스는 베노사(Venossa)에서 그리고 다른 이들은 센티아나(Sentiana)에서 각각 참수당하여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포르투나토

 

  • 가톨릭 성인 이름
    Fortuna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포르투나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포르투나또, 포르투나뚜스, 포르투나투스.

 

 

포르투나토 자료

성 포르투나투스(또는 포르투나토)는 성 안테(Anthes)와 성 카이우스(Cajus)와 함께 이탈리아의 살레르노(Salerno) 부근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의 유해는 940년 살레르노에 안장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헤르메스

 

  • 가톨릭 성인 이름
    Herme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20년경

 

 

헤르메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없음.

 

 

헤르메스 자료

그리스 태생으로 로마에서 순교한 성 헤르메스는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공경을 받아 왔다.

“로마 순교록”(Roman Martyrology)은 교황 성 알렉산데르 1세(Alexander I, 5월 3일)의 행적에 일부 포함되어 전해지는 내용에 근거해서, 그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통치 중에 신앙을 증거하다가 아우렐리아누스 재판관에 의해 감옥에 갇혔다가 마침내 참수형으로 순교했다고 전해주고 있다.

그는 로마의 성녀 테오도라(Theodora, 4월 1일)와 형제간으로, 성녀 테오도라는 감옥에 갇혀 온갖 고문을 받고 순교한 성 헤르메스를 돌보아주었고, 그의 시신을 로마에서 가까운 살라리아 가도(Via Salaria)의 성녀 바실라(Basilla) 카타콤바에 묻어 주었다.

얼마 후 성녀 테오도라 역시 순교하여 성 헤르메스 옆에 묻혔다. 성 헤르마스의 비명(碑銘)은 교황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 12월 11일)가 썼다고 한다.

그의 무덤 주변에는 600년경 교황 펠라기우스 1세(Pelagius I)에 의해 성당이 건립되었고, 교황 하드리아노 1세(Hadrianus I)는 살라리아 가도에 그의 이름을 딴 카타콤바를 복원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후고 모어

 

  • 가톨릭 성인 이름
    Hugh More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평신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88년 영국

 

 

후고 모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위고, 후꼬, 휴스.

 

 

후고 모어 자료

후고 모어(Hugo More)는 1563년경 영국 잉글랜드 동부 링컨셔(Lincolnshire)의 그랜섬(Grantham)에서 태어나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는 법학 공부를 위해 1581년 옥스퍼드(Oxford)의 브로드게이츠 홀(Broadgates Hall)에 들어갔다. 

브로드게이츠 홀은 법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한 대학 기숙사로 1624년 제임스 1세(James I) 왕이 설립한 펨브로크 대학(Pembroke College)의 기초가 된 곳이다. 그리고 이어서 1583년 런던(London)의 그레인즈 인(Gray’s Inn) 법학원에서 수학했다. 

그는 1584/5년에 토마스 스티븐슨(Thomas Stephenson) 신부에 의해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열심한 프로테스탄트 신자였던 아버지에게 상속권을 박탈당했다. 1585년 그는 사제가 되기 위해 프랑스 랭스(Reims)의 영국 대학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하던 중 건강이 나빠져 1587년 5월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되었고, 프로테스탄트 예배에 참석하기를 거부한 혐의로 올드 베일리(Old Bailey)에서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1588년 8월 28일, 그는 런던의 링컨스 인 필즈(Lincoln’s Inn Fields)에서 로베르투스 모턴(Robertus Morton) 신부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이때 그는 불과 25세의 청년이었다.

후고 모어는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순교한 날인 8월 28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후고 모어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2004년에 나온 “로마 순교록”은 8월 28일 목록에 1588년 후고 모어를 포함해 런던에서 순교한 8명을 ‘윌리엄 딘(William Dean) 사제와 동료 순교자’라는 이름으로 추가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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