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7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그리모니아, 레지나, 마델베르타, 총 19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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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7일 여자세례명 네모리오, 데시데리오, 랄프 코비, 마르코 크리진 멜키오르 그로데츠, 소존, 스테파노, 스테파노 폰그라츠, 아나스타시오, 아우구스탈리스, 알크문도, 에보르시오, 에우프시키오, 요한, 요한 더켓, 클로도알도, 틸베르토, 팜필로, 페스토, 총 3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9월 7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9가지
9월 7일 남자세례명 목록
- 네모리오
- 데시데리오
- 랄프 코비
- 마르코 크리진
- 멜키오르 그로데츠
- 소존
- 스테파노
- 스테파노 폰그라츠
- 아나스타시오
- 아우구스탈리스
- 알크문도
- 에보르시오
- 에우프시키오
- 요한
- 요한 더켓
- 클로도알도
- 틸베르토
- 팜필로
- 페스토
1. 네모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Nemo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51년
네모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네모리우스, 메모리오, 메모리우스.
네모리오 자료
성 네모리우스(또는 네모리오)는 프랑스 트루아(Troyes)의 부제로 그곳의 주교인 성 루푸스(Lupus)에 의해 다섯 명의 동료들과 함께 훈족(Hun)의 왕 아틸라(Attila)에게 자비를 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러나 훈족은 그들을 모두 참수시켰다.
그들의 이야기가 그다지 신빙성은 없지만 그들의 유해는 여전히 높은 공경을 받고 있다. 성 네모리우스는 메모리우스(Memorius, 또는 메모리오)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데시데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Deside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독서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5년경
데시데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시데리우스.
데시데리오 자료
이탈리아 캄파니아(Campania) 지방의 나폴리(Napoli) 출신으로 알려진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지만, 후대의 몇몇 순교록과 교회 전승에 따르면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 박해를 시작할 즈음에 베네벤토(Benevento)의 주교로 활동하고 있었다.
옛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성 야누아리우스는 오랜 친구이자 나폴리 북쪽 해안 도시인 미세노(Miseno)의 부제인 성 소시우스(Sossius)와 나폴리 서쪽 교외에 있는 항구도시 포추올리(Pozzuoli)의 부제인 성 프로쿨루스(Proculus) 그리고 평신도인 성 에우티키우스(Eutychius)와 성 아쿠티우스(Acutius)가 신앙을 증거하고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그들을 만나러 용감하게 감옥으로 달려갔다.
이때 그의 부제인 성 페스투스(Festus)와 독서직(讀書職)을 받은 성 데시데리우스(또는 데시데리오)가 성 야누아리우스 주교를 수행해 함께 갔다.
그런데 감옥에 갇힌 이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구할 방도를 찾던 성 야누아리우스 주교와 그 일행 또한 캄파니아의 총독에게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그들은 당당하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총독은 시민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그들을 포추올리의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의 밥으로 내던져 주었으나 맹수들이 그들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았다. 결국 군중들의 소요를 우려한 총독은 그들을 고대 화산 분화구가 있는 인근의 솔파타라(Solfatara)로 끌고 가서 참수형에 처하도록 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베네벤토의 주교이자 순교자인 성 야누아리우스가 나폴리 근처 포추올리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했다고 9월 18일 목록에서 간단히 기록하였다.
그리고 베네벤토의 부제인 성 페스투스와 독서자인 성 데시데리우스는 9월 7일 목록에, 미세노의 부제인 성 소시우스는 성 야누아리우스 주교를 구하려다가 함께 죽음을 맞아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고 9월 23일 목록에 따로 기록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도 성 소시우스에 대해서는 9월 23일 목록에서 별도로 기록하였다. 나머지 포추올리의 부제인 성 프로쿨루스와 평신도인 성 에우티키우스와 성 아쿠티우스는 10월 18일 목록에서 포추올리에서 순교자로서 공경받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성 야누아리우스와 동료 순교자들의 유해는 나폴리의 요한(Joannes) 주교에 의해 나폴리의 카포디몬테(Capodimonte) 카타콤바에 모셔졌다.
그 후 머리를 제외한 성 야누아리우스의 유해는 롬바르디아(Lombardia) 왕자였던 베네벤토의 시코네 1세(Sicone I)에 의해 831년 베네벤토로 옮겨졌고, 1154년 베네벤토의 안전이 위태로울 때 몬테비르지네(Montevirgine)의 대수도원으로, 그리고 1497년에 다시 나폴리로 되돌아와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치되었다. 그러면서 성 야누아리우스는 나폴리의 수호성인으로서 큰 공경을 받게 되었다.
현재 나폴리 대성당 내 아름다운 성 야누아리우스 경당에는 성 야누아리우스의 피로 여겨지는 검은색 물체가 작은 유리병에 담겨 보관되고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에우세비아(Eusebia)라는 여인이 순교자들의 피를 모으는 일을 하다가 우연히 성 야누아리우스의 피를 보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가 포추올리에서 나폴리의 카타콤바로 성인의 유해를 옮기는 중에 나폴리의 주교에게 전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딱딱하게 굳은 피가 1년에 여러 번, 특정한 시기에 액화되어 묽은 피로 변하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공식적으로 전시되었고, 이 기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과학적 시험과 분석을 시도했으나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신심 깊은 나폴리 사람들은 이를 기적으로 간주하며 성 야누아리우스의 혈액을 나폴리의 가장 소중한 유산으로 여기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그는 성 젠나로(Gennaro)로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랄프 코비
- 가톨릭 성인 이름
Ralph Corbie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98-1644년 영국
랄프 코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랠프, 코르비.
랄프 코비 자료
영국 잉글랜드 더럼가(Family of Durham)의 후손인 랄프 코비는 1598년 3월 25일 아일랜드의 더블린(Dublin)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박해를 피해 아일랜드로 이사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섯 살 때 더럼으로 돌아와 나중에 예수회 사제가 된 동생 앰브로즈 코비(Ambrose Corbie)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후 그의 가족은 잉글랜드를 떠나 프랑스 북부의 생토메르(Saint-Omer)로 이사했고, 그는 형제들과 함께 영국 대학에서 공부했다.
랄프 코비는 이어서 1619년 에스파냐 세비야(Sevilla)의 영국 대학에서, 1621년 바야돌리드(Valladolid)의 영국 대학에서 수학한 후 1625년 그곳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에 프랑스로 돌아와 예수회에 입회했다.
예수회의 양성 과정을 마친 그는 1631년 영국 선교를 위해 더럼으로 돌아왔다. 그는 캐링턴(Carlington)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더럼 지역에 흩어져 있는 가톨릭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12년 정도 선교 활동을 수행했다.
그는 1644년 7월 8일 햄스터리(Hamsterley)에서 의회 의원들에 의해 체포되어 제의를 입은 상태로 런던으로 끌려가 교구 사제인 요한 더켓(Joannes Duckett)과 함께 뉴게이트(Newgate) 감옥에 갇혔다.
그들은 1644년 9월 4일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9월 7일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랄프 코비는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순교한 날인 9월 7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랄프 코비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마르코 크리진
- 가톨릭 성인 이름
Mark Krizi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19년 코시체
마르코 크리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레크, 마르꼬, 마르꾸스, 마르쿠스, 마크, 말구, 코로시, 크리제프카닌.
마르코 크리진 자료
성 마르코 크리진(Marcus Krizin)은 크로아티아(Croatia) 지역의 유명한 가문 출신으로 태어났다. 청년 시절에 그는 로마(Roma)의 교황청 직속 신학교인 제르마니쿰(Germanicum)에서 공부하고 사제품을 받은 후 고향에서 사목하기 위해 귀향하였다. 그는 헝가리의 수석 주교 휘하에서 에스테르곰(Esztergom) 대교구의 평의회 의원이 되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평소 코시체 지역으로 가서 그곳 주민들이 가톨릭 신앙을 되찾는데 기여하고 싶었던 그는 마침내 선교사로서의 소명을 받고 코시체 지역으로 가게 되었다.
그를 도와 예수회원인 헝가리 출신의 성 스테파누스 폰그라츠(Stephanus Pongracz)와 체코 출신의 성 멜키오르 그로데츠(Melchior Grodecz)가 함께 가게 되었다. 그들은 슬로바키아(Slovakia)의 코시체 지역과 그 근방에서 선교사로서 열심히 사목하였다.
1619년 이들 사제들이 사도직과 교육 활동을 펴고 있던 중, 코시체 지역을 침공한 칼뱅교도로 구성된 신교도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며 배교를 강요당했다. 그러나 끝까지 참된 신앙과 교황에 대한 충성심을 고수하던 그들은 1619년 9월 7일 결국 야만적인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들은 1905년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95년 7월 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코시체 지역의 순교자로서 시성되었다. 성 마르코 크리진은 마레크 크리진(Marek Krizin), 마레크 코로시(Marek Korosy), 마레크 크리제프카닌(Marek Krizevcanin) 등으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멜키오르 그로데츠
- 가톨릭 성인 이름
Melchior Grodecz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19년 코시체
멜키오르 그로데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멜키올, 멜히오르.
멜키오르 그로데츠 자료
성 마르코 크리진(Marcus Krizin)은 크로아티아(Croatia) 지역의 유명한 가문 출신으로 태어났다. 청년 시절에 그는 로마(Roma)의 교황청 직속 신학교인 제르마니쿰(Germanicum)에서 공부하고 사제품을 받은 후 고향에서 사목하기 위해 귀향하였다. 그는 헝가리의 수석 주교 휘하에서 에스테르곰(Esztergom) 대교구의 평의회 의원이 되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평소 코시체 지역으로 가서 그곳 주민들이 가톨릭 신앙을 되찾는데 기여하고 싶던 그는 마침내 선교사로서의 소명을 받고 코시체 지역으로 가게 되었다.
그를 도와 예수회원인 헝가리 출신의 성 스테파누스 폰그라츠(Stephanus Pongracz)와 체코 출신의 성 멜키오르 그로데츠가 함께 가게 되었다. 그들은 슬로바키아(Slovakia)의 코시체 지역과 그 근방에서 선교사로서 열심히 사목하였다.
1619년 이들 사제들이 사도직과 교육 활동을 펴고 있던 중, 코시체 지역을 침공한 칼뱅교도로 구성된 신교도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며 배교를 강요당했다.
그러나 끝까지 참된 신앙과 교황에 대한 충성심을 고수하던 그들은 1619년 9월 7일 결국 야만적인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들은 1905년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95년 7월 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코시체 지역의 순교자로서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소존
- 가톨릭 성인 이름
Sozo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실리시아
소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쏘존.
소존 자료
성 소존은 세례명이고 보통으로는 타라시우스(Tarasius)라고 불렀다 한다. 그는 실리시아의 양치기였는데, 어느 날 나무 아래에서 잠을 자던 중에 주님이 발현하시어 말씀하시기를 “지금 양떼를 떠나 나를 따르라” 하셨다.
그가 잠을 깨서 가까운 마을인 폼페이오폴리스로 갔더니 마침 그곳에서 이교 축제가 한창이었다. 그는 곧장 이교 신전으로 가서 황금 신상을 끌어내리고 손을 떼어내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작은 조각으로 나누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다.
이 사건 때문에 수많은 무죄한 사람이 누명을 쓰고 체포되는 것을 보고, 그는 법정으로 가서 자신의 행위를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 후 그는 산 채로 화형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스테파노
- 가톨릭 성인 이름
Stephe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208년 샤티용
스테파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스더, 스테파누스, 스테판.
스테파노 자료
성 스테파누스(Stephanus, 또는 스테파노)는 프랑스 샤티용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포르테(Portes)의 카르투지오회 수도원에서 입회하여 1196년 그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1203년 그는 디에(Die)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스테파노 폰그라츠
- 가톨릭 성인 이름
Stephen Pongracz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19년 코시체
스테파노 폰그라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스더, 스테파누스, 스테판, 스테펜.
스테파노 폰그라츠 자료
성 마르코 크리진(Marcus Krizin)은 크로아티아(Croatia) 지역의 유명한 가문 출신으로 태어났다. 청년 시절에 그는 로마(Roma)의 교황청 직속 신학교인 제르마니쿰(Germanicum)에서 공부하고 사제품을 받은 후 고향에서 사목하기 위해 귀향하였다. 그는 헝가리의 수석 주교 휘하에서 에스테르곰(Esztergom) 대교구의 평의회 의원이 되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평소 코시체 지역으로 가서 그곳 주민들이 가톨릭 신앙을 되찾는데 기여하고 싶던 그는 마침내 선교사로서의 소명을 받고 코시체 지역으로 가게 되었다.
그를 도와 예수회원인 헝가리 출신의 성 스테파누스 폰그라츠(Stephanus Pongracz)와 체코 출신의 성 멜키오르 그로데츠(Melchior Grodecz)가 함께 가게 되었다. 그들은 슬로바키아(Slovakia)의 코시체 지역과 그 근방에서 선교사로서 열심히 사목하였다.
1619년 이들 사제들이 사도직과 교육 활동을 펴고 있던 중, 코시체 지역을 침공한 칼뱅교도로 구성된 신교도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며 배교를 강요당했다. 그러나 끝까지 참된 신앙과 교황에 대한 충성심을 고수하던 그들은 1619년 9월 7일 결국 야만적인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들은 1905년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95년 7월 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코시체 지역의 순교자로서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아나스타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Anastas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경?
아나스타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나스따시오, 아나스따시우스, 아나스타시우스.
아나스타시오 자료
로마 순교록에는 아퀼레이아(Aquileia)의 순교자인 성 아나스타시우스(또는 아나스타시오)의 순교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으나 순교 장소나 시기 등은 정확하지 못하다.
성 아나스타시우스는 아퀼레이아의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각자의 생업에 종사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라는 사도의 말씀을 상기하여 마전장이(Fuller)가 되었으며, 주로 달마티아(Dalmatia)의 살로나(Salona)에서 영업을 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그는 자신의 신앙을 굽히지 않고 오히려 용감하게 자기 집 문 밖에 십자가를 내걸었다.
그는 곧 체포되어 별다른 신문도 없이 목에 큰 바위를 건 채 바다에 던져져 순교하였다. 그 도시의 귀부인인 아쉴레피아가 노예들을 시켜 유해를 회수하여 장례를 지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아우구스탈리스
- 가톨릭 성인 이름
Augustali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450년 프랑스
아우구스탈리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우구스딸로, 아우구스딸루스, 아우구스딸리스, 아우구스탈로, 아우구스탈루스.
아우구스탈리스 자료
성 아우구스탈리스는 프랑스의 주교로 아마도 아를(Arles)의 주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아우구스탈루스(Augustalus, 또는 아우구스탈로)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알크문도
- 가톨릭 성인 이름
Alcmund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781년 헥삼
알크문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알크문두스, 알크문드.
알크문도 자료
성 알크문두스(Alcmundus, 또는 알크문도)와 성 틸베르투스(Tilbertus) 주교의 생애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영국 노섬벌랜드(Northumberland) 지방 헥삼 교구의 중요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성 알크문두스는 767년 헥삼 교구의 일곱번째 주교로 축성되었고, 성 틸베르투스가 781년에 그 뒤를 이었다고 한다. 성 알크문두스는 사망하여 성 아카(Acca, 10월 20일)의 묘 근처에 묻혔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에보르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vor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 오를레앙
에보르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보르시우스, 에보르씨오, 에보르씨우스, 에보르티오, 에보르티우스.
에보르시오 자료
성 에보르티우스(또는 에보르시오)는 프랑스 오를레앙의 초대주교인 듯하고, 그의 이름이 공동 기도서의 달력에 나오지만 그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
그는 처음에 로마 교회에서 봉사하던 부제였다고 하는데, 놀랍게도 프랑스 지방의 주교가 되었다는 이야기만 전해온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에우프시키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upsych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30년 카이사레아
에우프시키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우프시치오, 에우프시치우스, 에우프시키우스.
에우프시키오 자료
성 에우프시키우스(또는 에우프시키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통치 중에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카이사레아에서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요한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니코메디아
요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자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칙령이 니코메디아에까지 붙여졌을 때, 평신도 한 명이 맨 먼저 처형당하였는데 그의 정확한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요한’(Joannes)이란 이름으로 공경하곤 하였다.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성 요한은 황제의 이 잔인한 칙서를 보자마자 그것을 뜯어 광장에서 불태웠다고 한다. 이것이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가자 삽시간에 온 니코메디아에 박해의 손길이 뻗혔다고 한다. 시리아인들은 그를 에우티스(Euthis)라고 부른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요한 더켓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Duckett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13-1644년 영국
요한 더켓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두케트, 둑켓,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더켓 자료
요한 더켓(Joannes Duckett)은 1613년 영국 잉글랜드 북부 요크셔(Yorkshire)의 세드버그(Sedbergh)에서 제임스(James)와 프랜시스 더켓(Francis Duckett)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602년 가톨릭 관련 서적을 인쇄하여 전교하다 순교한 야고보 더켓(Jacobus Duckett)의 친척이거나 손자일 수도 있다.
그는 1614년 2월 24일 세례를 받고 세드버그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7살 때 그는 사제가 되기 위해 프랑스 북부 두에(Douai)에 있는 영국 대학에 들어가 수학한 후 1639년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그는 3년 동안 파리(Paris)에 있는 아라스 대학(College of Arras)에서 공부했는데, 기도의 특별한 은사를 받아 매우 높은 관상의 단계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그는 영국 선교를 결심한 후 가는 길에 벨기에의 니우포르트(Nieupoort)에 들러 카르투지오회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는 삼촌 존 더켓(John Duckett)의 지도로 두 달간 피정을 하며 준비했다.
그는 1643년 주님 성탄 대축일 무렵 잉글랜드 북동부의 뉴캐슬어폰타인(Newcastle upon Tyne)에 배를 타고 도착했다. 그는 주로 더럼(Durham)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펼쳤다.
당시 영국은 왕당파와 의회파 간의 영국 내전(The Civil War, 1642~1651년)이 한창이었는데, 그는 두 명의 어린이에게 세례를 주러 가던 길에 의회파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더럼 동부의 항구도시인 선덜랜드(Sunderland)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았다.
그곳에서 그는 가톨릭 신부임을 인정하고 비슷한 시기에 뉴캐슬어폰타인 근처에서 체포된 예수회의 랄프 코비(Ralph Corbie) 신부와 함께 런던(London)으로 이송되어 뉴게이트(Newgate) 감옥에 갇혔다. 그들은 1644년 9월 4일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9월 7일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요한 더켓은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순교한 날인 9월 7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요한 더켓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클로도알도
- 가톨릭 성인 이름
Clodoald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왕자 - 활동 연도와 지역
520-560년
클로도알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글로도알도, 글로도알두스, 글로우드, 클라우드, 클로도알두스, 클로우드.
클로도알도 자료
프랑크 왕국의 초대 국왕인 클로비스(Clovis)가 511년 파리(Paris)에서 사망한 후 그의 왕국은 네 명의 자녀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이 중 둘째인 클로도미르(Clodomir) 왕이 524년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그의 막내아들인 성 클로도알두스(Clodoaldus, 또는 클로도알도)와 그의 두 형제는 프랑크 왕 클로비스의 미망인인 할머니 성녀 클로틸다(Clotilda)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그들의 야심 많은 숙부 힐데베르트(Childebert)의 사주로 클로도알두스의 다른 두 형제는 어린 나이에 살해를 당했는데, 그는 이런 운명을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였다.
그는 성장하면서 프랑크 왕이 되라는 주변의 요구를 뿌리치고 은수자로서 삭발을 하였다. 그 다음에 그는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참으로 조용한 생활을 하였다.
그가 운명한 지점이 오늘날의 베르사유(Versailles) 광장 부근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따서 그곳을 생클라우드(Saint-Cloud)라 부른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틸베르토
- 가톨릭 성인 이름
Tilbert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789년 헥삼
틸베르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띨베르또, 띨베르뚜스, 틸베르투스.
틸베르토 자료
성 알크문두스(Alcmundus)와 성 틸베르투스(Tilbertus, 또는 틸베르토) 주교의 생애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영국 노섬벌랜드(Northumberland) 지방 헥삼 교구의 중요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성 알크문두스는 767년 헥삼 교구의 일곱번째 주교로 축성되었고, 성 틸베르투스가 781년에 그 뒤를 이었다고 한다. 성 알크문두스는 사망하여 성 아카(Acca, 10월 20일)의 묘 근처에 묻혔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8. 팜필로
- 가톨릭 성인 이름
Pamphil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400년 카푸아
팜필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빰삘로, 빰삘루스, 빰필로, 빰필루스, 팜필루스.
팜필로 자료
성 팜필루스(또는 팜필로)는 그리스 출신으로 교황 성 시리키우스(Siricius)에 의해 이탈리아 카푸아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그런데 그의 유해는 베네벤토(Benevento)에 모셔져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9. 페스토
- 가톨릭 성인 이름
Fes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5년경
페스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뻬스또, 뻬스뚜스, 페스투스.
페스토 자료
이탈리아 캄파니아(Campania) 지방의 나폴리(Napoli) 출신으로 알려진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지만, 후대의 몇몇 순교록과 교회 전승에 따르면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 박해를 시작할 즈음에 베네벤토(Benevento)의 주교로 활동하고 있었다.
옛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성 야누아리우스는 오랜 친구이자 나폴리 북쪽 해안 도시인 미세노(Miseno)의 부제인 성 소시우스(Sossius)와 나폴리 서쪽 교외에 있는 항구도시 포추올리(Pozzuoli)의 부제인 성 프로쿨루스(Proculus) 그리고 평신도인 성 에우티키우스(Eutychius)와 성 아쿠티우스(Acutius)가 신앙을 증거하고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그들을 만나러 용감하게 감옥으로 달려갔다.
이때 그의 부제인 성 페스투스(또는 페스토)와 독서직(讀書職)을 받은 성 데시데리우스(Desiderius)가 성 야누아리우스 주교를 수행해 함께 갔다.
그런데 감옥에 갇힌 이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구할 방도를 찾던 성 야누아리우스 주교와 그 일행 또한 캄파니아의 총독에게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그들은 당당하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총독은 시민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그들을 포추올리의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의 밥으로 내던져 주었으나 맹수들이 그들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았다. 결국 군중들의 소요를 우려한 총독은 그들을 고대 화산 분화구가 있는 인근의 솔파타라(Solfatara)로 끌고 가서 참수형에 처하도록 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베네벤토의 주교이자 순교자인 성 야누아리우스가 나폴리 근처 포추올리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했다고 9월 18일 목록에서 간단히 기록하였다.
그리고 베네벤토의 부제인 성 페스투스와 독서자인 성 데시데리우스는 9월 7일 목록에, 미세노의 부제인 성 소시우스는 성 야누아리우스 주교를 구하려다가 함께 죽음을 맞아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고 9월 23일 목록에 따로 기록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도 성 소시우스에 대해서는 9월 23일 목록에서 별도로 기록하였다. 나머지 포추올리의 부제인 성 프로쿨루스와 평신도인 성 에우티키우스와 성 아쿠티우스는 10월 18일 목록에서 포추올리에서 순교자로서 공경받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성 야누아리우스와 동료 순교자들의 유해는 나폴리의 요한(Joannes) 주교에 의해 나폴리의 카포디몬테(Capodimonte) 카타콤바에 모셔졌다.
그 후 머리를 제외한 성 야누아리우스의 유해는 롬바르디아(Lombardia) 왕자였던 베네벤토의 시코네 1세(Sicone I)에 의해 831년 베네벤토로 옮겨졌고, 1154년 베네벤토의 안전이 위태로울 때 몬테비르지네(Montevirgine)의 대수도원으로, 그리고 1497년에 다시 나폴리로 되돌아와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치되었다. 그러면서 성 야누아리우스는 나폴리의 수호성인으로서 큰 공경을 받게 되었다.
현재 나폴리 대성당 내 아름다운 성 야누아리우스 경당에는 성 야누아리우스의 피로 여겨지는 검은색 물체가 작은 유리병에 담겨 보관되고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에우세비아(Eusebia)라는 여인이 순교자들의 피를 모으는 일을 하다가 우연히 성 야누아리우스의 피를 보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가 포추올리에서 나폴리의 카타콤바로 성인의 유해를 옮기는 중에 나폴리의 주교에게 전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딱딱하게 굳은 피가 1년에 여러 번, 특정한 시기에 액화되어 묽은 피로 변하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공식적으로 전시되었고, 이 기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과학적 시험과 분석을 시도했으나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신심 깊은 나폴리 사람들은 이를 기적으로 간주하며 성 야누아리우스의 혈액을 나폴리의 가장 소중한 유산으로 여기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그는 성 젠나로(Gennaro)로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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