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0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가롤로 스피놀라, 네메시아노, 니콜라오, 다티보, 루치오, 리테오, 베드로 마르티네즈, 베라노, 빅토르, 살비오, 아폴리나리스 프랑코, 암브로시오 발로우, 야데르, 테오다르도, 펠릭스, 폴리아노, 프리테스탄, 핀니안, 총 18분 목록이에요.
9월 10일이 영명축일인 남자세례명은 어떤 이름이 좋을까요?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천주교 세례명 상세정보로 이동합니다. 어울리는 세례명을 지금 바로 찾아보세요.
9월 10일 여자세례명 님포도라, 메노도라, 메트로도라, 풀체리아 아우구스타, 총 4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9월 10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8가지
9월 10일 남자세례명 목록
- 가롤로 스피놀라
- 네메시아노
- 니콜라오
- 다티보
- 루치오
- 리테오
- 베드로 마르티네즈
- 베라노
- 빅토르
- 살비오
- 아폴리나리스 프랑코
- 암브로시오 발로우
- 야데르
- 테오다르도
- 펠릭스
- 폴리아노
- 프리테스탄
- 핀니안
1. 가롤로 스피놀라
- 가톨릭 성인 이름
Charles Spinola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22년 나가사키
가롤로 스피놀라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롤루스, 까롤로, 까롤루스, 샤를, 샤를르, 찰스, 카롤로, 카롤루스, 칼.
가롤로 스피놀라 자료
아폴리나리스 프랑코(Apolinaris Franco)와 카롤루스 스피놀라(Carolus Spinola, 또는 가롤로) 및 동료 순교자들은 1622년 일본의 대박해 때에 순교하신 분들로서, 1867년에 비오 9세(Pius IX)에 의하여 205명의 일본 순교자들로 시복되었다.
이들 중에는 18명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과 22명의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이 포함되어 있다. 1614년 도쿠가와가 그리스도교 박멸 정책을 반포한 이래, 위의 프란치스코 회원들이 1617년과 1632년에 순교하였고, 이 박해가 점점 확대되어 1622년에는 대박해로 발전하여 수많은 교우들이 순교하였다.
이들 중에는 아폴리나리스 프랑코 신부가 있다. 그는 에스파냐의 카스티야(Castilla) 사람으로 살라망카(Salamanca)에서 학위를 취득한 후에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었고, 1600년에 필리핀 선교사로 활약하다가 일본 선교단에 합류하였다.
1617년경에 그는 나가사키에 있었는데, 오무라 지방에 사제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소식을 듣고 용감하게 그곳으로 들어갔다가 5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였다.
이분 외에 유명한 순교자들은 다음과 같다. 리카르도 드 생 안느, 프랑소와 드 생 보나방튀르, 폴 드 생 클래르. 이들 외에 특기할만한 분은 카롤루스 스피놀라이다. 그는 이탈리아 태생으로 박학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예수회원이었다.
그는 나가사키에서 달을 관측하는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다가 6년 만에 체포되었는데, 이때 함께 체포된 사람은 일본인 사제인 세바스티아누스 기무라 등이다.
1622년 9월 10일, 두 명의 예수회원과 동료들이 나가사키에서 처형되었다. 바오로 나바로 신부(예수회)는 산채로 화형에 처해졌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네메시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Nemes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7년 누미디아
네메시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네메시아누스, 네메시안, 네메씨안.
네메시아노 자료
257년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카르타고(Carthago)의 주교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 9월 16일)는 아프리카 총독에 의하여 쿠루비스로 추방되었다.
이때 그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고 또 자기 교회의 박해 상황을 알려준 사람이 곧 성 네메시아누스(Nemesianus, 또는 네메시아노)이다. 그는 편지를 끝맺으면서 기도를 간청했고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다.
“저희들은 기도로써 서로를 돕고 있을 뿐이며, 하느님과 그리스도께서 저희들이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기도할 뿐입니다.”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시굼(Sigum)의 대리석 채석장에서 강제노역을 선고받은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극심한 노역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 순교자들 중에는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알제리 북부에 해당하는 북아프리카의 고대 지명)에서 온 9명의 주교와 사제 그리고 평신도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 중의 대표자가 바로 성 네메시아누스 주교라고 한다.
다른 8명의 주교들은 성 펠릭스(Felix), 성 루키우스(Lucius), 성 리테우스(Litteus), 성 폴리아누스(Polyanus), 성 빅토르(Victor), 성 야데르(Jader), 성 다티부스(Dativus) 그리고 또 다른 성 펠릭스(Felix)이다. 성 키프리아누스 주교는 자신의 유배지에서 그들에 대해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니콜라오
- 가톨릭 성인 이름
Nichola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사제, 은수자,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245-1305년 톨렌티노
니콜라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니콜라오 자료
성 니콜라우스(Nicolaus, 또는 니콜라오)는 이탈리아 안코나(Ancona) 지방의 산탈젤로(Sant'Angelo)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신심 깊은 신앙인이었으나 오랫동안 자녀가 없었다. 그래서 성 니콜라우스에게 전구를 청하며 이탈리아 남부 바리(Bari)에 있는 성인의 무덤을 순례한 후 아이를 낳자 그 이름을 니콜라우스라고 정했다.
어려서부터 독서와 공부하기를 즐기며 성소의 꿈을 키우던 그는, 어느 날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신부님으로부터 “이 세상은 지나가는 곳입니다. 세상의 것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하느님만이 참 행복을 주십니다.”라는 설교를 듣고 크게 감동해 수도자가 될 결심을 했다.
그는 열여덟 살 무렵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입회하여 1271년 사제품을 받았다. 수도회의 엄격한 규율을 충실히 지키며 살던 그는 사제품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꿈을 꿨는데, 세상을 떠난 수도회의 한 신부님이 나타나 연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자신과 다른 영혼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다음 날 수도원장과 꿈 이야기를 나눈 후 연옥 영혼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할 허락을 받았다. 그 후로도 그는 늘 연옥 영혼을 위한 미사와 기도를 잊지 않았고, 이런 이유로 이탈리아 신자들은 위령 성월이 되면 연옥 영혼을 위해 그에게 전구를 청하게 되었다.
1975년 그는 고향에서 멀지 않은 톨렌티노 지역으로 파견되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당시 톨렌티노 지역은 정치적 분쟁이 심해 대다수 주민이 신앙생활보다는 당파싸움에 더 열을 올렸다.
그는 텅 빈 성당에서 기다리기보다는 거리로 나가 설교하며 정열적인 사목활동을 펼쳤다. 그는 사람들이 외면하는 빈민촌, 교도소, 보육원, 병원 등을 찾아다니며 하느님 말씀을 전하고 사랑을 베풀었다.
성인이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주면 병이 낫는 기적도 일어났다. 많은 이들이 그를 통해 냉담을 풀고 교회로 돌아왔다. 말년에 병으로 고생하던 그는 1305년 9월 10일 톨렌티노에서 선종하며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도 바오로(Paulus)의 말씀을 남겼다.
"나는 양심에 조금도 거리끼는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게 죄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는 1446년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Eugenius IV)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다티보
- 가톨릭 성인 이름
Dativ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7년 누미디아
다티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다띠보, 다띠부스, 다티부스.
다티보 자료
257년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카르타고(Carthago)의 주교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 9월 16일)는 아프리카 총독에 의하여 쿠루비스로 추방되었다.
이때 그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고 또 자기 교회의 박해 상황을 알려준 사람이 곧 성 네메시아누스(Nemesianus)이다. 그는 편지를 끝맺으면서 기도를 간청했고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다.
“저희들은 기도로써 서로를 돕고 있을 뿐이며, 하느님과 그리스도께서 저희들이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기도할 뿐입니다.”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시굼(Sigum)의 대리석 채석장에서 강제노역을 선고받은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극심한 노역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 순교자들 중에는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알제리 북부에 해당하는 북아프리카의 고대 지명)에서 온 9명의 주교와 사제 그리고 평신도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 중의 대표자가 바로 성 네메시아누스 주교라고 한다.
다른 8명의 주교들은 성 펠릭스(Felix), 성 루키우스(Lucius), 성 리테우스(Litteus), 성 폴리아누스(Polyanus), 성 빅토르(Victor), 성 야데르(Jader), 성 다티부스(또는 다티보) 그리고 또 다른 성 펠릭스(Felix)이다. 성 키프리아누스 주교는 자신의 유배지에서 그들에 대해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루치오
- 가톨릭 성인 이름
Luc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7년 누미디아
루치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루기오, 루치우스, 루키오, 루키우스.
루치오 자료
257년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카르타고(Carthago)의 주교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 9월 16일)는 아프리카 총독에 의하여 쿠루비스로 추방되었다.
이때 그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고 또 자기 교회의 박해 상황을 알려준 사람이 곧 성 네메시아누스(Nemesianus)이다. 그는 편지를 끝맺으면서 기도를 간청했고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다.
“저희들은 기도로써 서로를 돕고 있을 뿐이며, 하느님과 그리스도께서 저희들이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기도할 뿐입니다.”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시굼(Sigum)의 대리석 채석장에서 강제노역을 선고받은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극심한 노역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 순교자들 중에는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알제리 북부에 해당하는 북아프리카의 고대 지명)에서 온 9명의 주교와 사제 그리고 평신도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 중의 대표자가 바로 성 네메시아누스 주교라고 한다.
다른 8명의 주교들은 성 펠릭스(Felix), 성 루키우스(또는 루치오), 성 리테우스(Litteus), 성 폴리아누스(Polyanus), 성 빅토르(Victor), 성 야데르(Jader), 성 다티부스(Dativus) 그리고 또 다른 성 펠릭스(Felix)이다. 성 키프리아누스 주교는 자신의 유배지에서 그들에 대해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리테오
- 가톨릭 성인 이름
Litte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7년 누미디아
리테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떼오, 리떼우스, 리테우스, 릿테오, 릿테우스.
리테오 자료
257년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카르타고(Carthago)의 주교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 9월 16일)는 아프리카 총독에 의하여 쿠루비스로 추방되었다.
이때 그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고 또 자기 교회의 박해 상황을 알려준 사람이 곧 성 네메시아누스(Nemesianus)이다. 그는 편지를 끝맺으면서 기도를 간청했고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다.
“저희들은 기도로써 서로를 돕고 있을 뿐이며, 하느님과 그리스도께서 저희들이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기도할 뿐입니다.”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시굼(Sigum)의 대리석 채석장에서 강제노역을 선고받은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극심한 노역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 순교자들 중에는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알제리 북부에 해당하는 북아프리카의 고대 지명)에서 온 9명의 주교와 사제 그리고 평신도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 중의 대표자가 바로 성 네메시아누스 주교라고 한다.
다른 8명의 주교들은 성 펠릭스(Felix), 성 루키우스(Lucius), 성 리테우스(또는 리테오), 성 폴리아누스(Polyanus), 성 빅토르(Victor), 성 야데르(Jader), 성 다티부스(Dativus) 그리고 또 다른 성 펠릭스(Felix)이다. 성 키프리아누스 주교는 자신의 유배지에서 그들에 대해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베드로 마르티네즈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Martinez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대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000년 콤포스텔라
베드로 마르티네즈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 마르티네즈 자료
성 베드로 마르티네스(Petrus Martinez)는 대주교이자 에스파냐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의 지도자였다. 그는 에스파냐 북서부 갈리시아(Galicia)에서 태어나서 950년경 베네딕토 수도원에 입회하였고, 모존조(Monzonzo)의 성 마리아(Maria) 수도원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후에 콤포스텔라의 성 마르티누스(Martinus)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986년경 콤포스텔라 교구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이슬람교도에게 빼앗긴 국토를 회복하기 위한 운동의 주창자로 유명하며, 전통적으로 '살베 레지나(Salve Regina)'의 작곡자 중 한 명으로 믿어진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베라노
- 가톨릭 성인 이름
Vera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480년 방스
베라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라누스, 베랑.
베라노 자료
성 베라누스(또는 베라노)는 프랑스 남부 방스의 주교였다. 그는 리옹(Lyon)의 성 에우케리우스(Eucherius, 11월 16일)의 둘째 아들로 수도승으로서 살다가 주교가 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빅토르
- 가톨릭 성인 이름
Victo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7년 누미디아
빅토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빅또르, 빅똘, 빅톨.
빅토르 자료
257년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카르타고(Carthago)의 주교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 9월 16일)는 아프리카 총독에 의하여 쿠루비스로 추방되었다.
이때 그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고 또 자기 교회의 박해 상황을 알려준 사람이 곧 성 네메시아누스(Nemesianus)이다. 그는 편지를 끝맺으면서 기도를 간청했고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다.
“저희들은 기도로써 서로를 돕고 있을 뿐이며, 하느님과 그리스도께서 저희들이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기도할 뿐입니다.”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시굼(Sigum)의 대리석 채석장에서 강제노역을 선고받은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극심한 노역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 순교자들 중에는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알제리 북부에 해당하는 북아프리카의 고대 지명)에서 온 9명의 주교와 사제 그리고 평신도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 중의 대표자가 바로 성 네메시아누스 주교라고 한다.
다른 8명의 주교들은 성 펠릭스(Felix), 성 루키우스(Lucius), 성 리테우스(Litteus), 성 폴리아누스(Polyanus), 성 빅토르, 성 야데르(Jader), 성 다티부스(Dativus) 그리고 또 다른 성 펠릭스(Felix)이다. 성 키프리아누스 주교는 자신의 유배지에서 그들에 대해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살비오
- 가톨릭 성인 이름
Salv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84년 알비
살비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살비, 살비우스, 소브, 쌀비오, 쌀비우스.
살비오 자료
성 살비우스(또는 살비오)는 프랑스 알비 가문의 후손으로 법학과 인문학을 공부한 후 법률가가 되어 고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현세를 떠나 살고픈 마음을 억누를 수 없어 결국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주로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세운 움막에서 은수자로 생활하며 기도 생활에 전념했다. 한번은 그가 고열로 인해 거의 죽을 지경에 도달했을 때, 하늘나라를 체험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생기를 되찾은 적도 있었다.
그 무렵인 574년경에 그는 알비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주교가 된 후에도 그의 개인 생활은 더욱 엄격했고, 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애정은 남이 추종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주교로서 강력한 힘을 휘두르던 킬페리크 1세(Chilperic I) 왕으로 인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신중하게 개입했고, 기근과 흑사병이 대유행하던 584년 끝까지 양 떼를 돌보기 위해 알비에 머물며 병자들을 돌보다가 결국 병에 걸려 선종했다.
그의 시신은 그가 살았던 수도원에 매장했다가 후에 알비에 있는 성 살비우스 성당으로 옮겨 모셨다. 킬페리크 1세 왕은 그를 위대한 신학자로 모셨고, 정통교리의 수호자로 선언했다.
그는 친구 사이였던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1월 17일)와 함께 수도원의 정통성은 물론 교구의 정통성 확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는 살비(Salvi) 또는 소브(Sauve)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아폴리나리스 프랑코
- 가톨릭 성인 이름
Apollinaris Franco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22년 나가사키
아폴리나리스 프랑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뽈리나리스, 아폴리나리스.
아폴리나리스 프랑코 자료
아폴리나리스 프랑코와 카롤루스 스피놀라(Carolus Spinola) 및 동료 순교자들은 1622년 일본의 대박해 때에 순교하신 분들로서, 1867년에 비오 9세(Pius IX)에 의하여 205명의 일본 순교자들로 시복되었다.
이들 중에는 18명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과 22명의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이 포함되어 있다. 1614년 도쿠가와가 그리스도교 박멸 정책을 반포한 이래, 위의 프란치스코 회원들이 1617년과 1632년에 순교하였고, 이 박해가 점점 확대되어 1622년에는 대박해로 발전하여 수많은 교우들이 순교하였다.
이들 중에는 아폴리나리스 프랑코 신부가 있다. 그는 에스파냐의 카스티야(Castilla) 사람으로 살라망카(Salamanca)에서 학위를 취득한 후에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었고, 1600년에 필리핀 선교사로 활약하다가 일본 선교단에 합류하였다.
1617년경에 그는 나가사키에 있었는데, 오무라 지방에 사제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소식을 듣고 용감하게 그곳으로 들어갔다가 5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였다.
이분 외에 유명한 순교자들은 다음과 같다: 리카르도 드 생 안느, 프랑소와 드 생 보나방튀르, 폴 드 생 클래르. 이들 외에 특기할만한 분은 카롤루스 스피놀라이다.
그는 이탈리아 태생으로 박학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예수회원이었다. 그는 나가사키에서 달을 관측하는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다가 6년 만에 체포되었는데, 이때 함께 체포된 사람은 일본인 사제인 세바스티아누스 기무라 등이다.
1622년 9월 10일, 두 명의 예수회원과 동료들이 나가사키에서 처형되었다. 바오로 나바로 신부(예수회)는 산채로 화형에 처해졌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암브로시오 발로우
- 가톨릭 성인 이름
Ambrose Barlow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85-1641년 영국
암브로시오 발로우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암브로시우스, 앰브로스.
암브로시오 발로우 자료
성 암브로시우스 발로우(Ambrosius Barlow, 또는 암브로시오)는 영국 잉글랜드 맨체스터(Manchester)의 발로우 홀에서 아버지 알렉산더 발로우 경(Sir Alexander Barlow)과 어머니 메리(Mary)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발로우 집안은 가톨릭 교회를 탄압하는 영국 성공회로 개종하기를 주저하였다.
성 암브로시우스 발로우의 할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한 해 전에 가톨릭 신앙을 지키다 감옥에서 사망했고, 아버지 역시 성공회의 새로운 규범을 따르지 않아 재산의 2/3를 몰수당했다. 그런 상황에서 태어난 그는 성공회에서 세례를 받고 성장하였다.
1607년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한 그는 사제 성소를 느껴 1614년에 프랑스 두에(Douai)에 있는 영국 신학교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공부하다가 에스파냐의 바야돌리드(Valladolid)의 성 알바누스 왕립 대학으로 갔다.
다음 해인 1615년 두에로 돌아온 그는 베네딕토회에 입회하여 암브로시우스란 수도명을 받았다. 1617년 사제품을 받은 후 그는 영국으로 돌아와서 랭커셔(Lancashire)에서 가톨릭 신자에 대한 사목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그는 2년 6개월 동안 네 차례나 체포되었으나 매번 석방되었다. 그러나 1641년 3월 7일 국왕 찰스 1세(Charles I)가 모든 가톨릭 사제들에게 한 달 내에 나라 밖으로 떠나지 않으면 체포하여 반역자로 처벌 또는 처형한다는 문서에 서명하면서 위기를 맞이했다.
본당 신자들은 그에게 나라 밖으로 피신하거나 은신처에 숨을 것을 권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하고 자리를 지키다가 그해 부활 대축일에 체포되었다. 그는 석방을 조건으로 사제직을 포기하라는 재판관의 설득을 거절하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의 친구들이 나서서 중재하게 해달라는 부탁마저 거절한 그는, 그해 9월 10일 랭커스터 성(Lancaster Castle)에서 처형장으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날은 그가 캔터베리(Canterbury)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된 지 일주일째 되던 날이었다.
성 암브로시우스 발로우는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순교일인 9월 10일에 기념하고, 시성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2000년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야데르
- 가톨릭 성인 이름
Jad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7년 누미디아
야데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야델, 자데르, 자델.
야데르 자료
257년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카르타고(Carthago)의 주교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 9월 16일)는 아프리카 총독에 의하여 쿠루비스로 추방되었다.
이때 그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고 또 자기 교회의 박해 상황을 알려준 사람이 곧 성 네메시아누스(Nemesianus)이다. 그는 편지를 끝맺으면서 기도를 간청했고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다.
“저희들은 기도로써 서로를 돕고 있을 뿐이며, 하느님과 그리스도께서 저희들이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기도할 뿐입니다.”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시굼(Sigum)의 대리석 채석장에서 강제노역을 선고받은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극심한 노역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 순교자들 중에는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알제리 북부에 해당하는 북아프리카의 고대 지명)에서 온 9명의 주교와 사제 그리고 평신도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 중의 대표자가 바로 성 네메시아누스 주교라고 한다.
다른 8명의 주교들은 성 펠릭스(Felix), 성 루키우스(Lucius), 성 리테우스(Litteus), 성 폴리아누스(Polyanus), 성 빅토르(Victor), 성 야데르, 성 다티부스(Dativus) 그리고 또 다른 성 펠릭스(Felix)이다. 성 키프리아누스 주교는 자신의 유배지에서 그들에 대해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테오다르도
- 가톨릭 성인 이름
Theodard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670년? 마스트리흐트
테오다르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떼오다르도, 떼오다르두스, 테오다르두스.
테오다르도 자료
성 테오다르두스(Theodardus, 또는 테오다르도)는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의 정열적인 주교였으나 그의 생애는 구름에 가리어져 있다.
그는 정당하게 구입한 교회 땅에 대하여 합당한 증거를 제시하고 설명할 목적으로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의 왕 칠데릭 2세(Childeric II)를 만나려고 하였다.
그가 독일 슈파이어(Speyer) 교외 비엔발드 숲에 이르렀을 때 강도들을 만나 무참히 살해되었다. 로마 순교록에는 그가 순교자로 기록되어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펠릭스
- 가톨릭 성인 이름
Felix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7년 누미디아
펠릭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펠리체.
펠릭스 자료
257년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카르타고(Carthago)의 주교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 9월 16일)는 아프리카 총독에 의하여 쿠루비스로 추방되었다.
이때 그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고 또 자기 교회의 박해 상황을 알려준 사람이 곧 성 네메시아누스(Nemesianus)이다. 그는 편지를 끝맺으면서 기도를 간청했고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다.
“저희들은 기도로써 서로를 돕고 있을 뿐이며, 하느님과 그리스도께서 저희들이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기도할 뿐입니다.”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시굼(Sigum)의 대리석 채석장에서 강제노역을 선고받은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극심한 노역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 순교자들 중에는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알제리 북부에 해당하는 북아프리카의 고대 지명)에서 온 9명의 주교와 사제 그리고 평신도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 중의 대표자가 바로 성 네메시아누스 주교라고 한다.
다른 8명의 주교들은 성 펠릭스(Felix), 성 루키우스(Lucius), 성 리테우스(Litteus), 성 폴리아누스(Polyanus), 성 빅토르(Victor), 성 야데르(Jader), 성 다티부스(Dativus) 그리고 또 다른 성 펠릭스이다. 성 키프리아누스 주교는 자신의 유배지에서 그들에 대해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폴리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Polya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7년 누미디아
폴리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뽈리아노, 뽈리아누스, 폴리아누스.
폴리아노 자료
257년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카르타고(Carthago)의 주교 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 9월 16일)는 아프리카 총독에 의하여 쿠루비스로 추방되었다.
이때 그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고 또 자기 교회의 박해 상황을 알려준 사람이 곧 성 네메시아누스(Nemesianus)이다. 그는 편지를 끝맺으면서 기도를 간청했고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다.
“저희들은 기도로써 서로를 돕고 있을 뿐이며, 하느님과 그리스도께서 저희들이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기도할 뿐입니다.”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시굼(Sigum)의 대리석 채석장에서 강제노역을 선고받은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극심한 노역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 순교자들 중에는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알제리 북부에 해당하는 북아프리카의 고대 지명)에서 온 9명의 주교와 사제 그리고 평신도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 중의 대표자가 바로 성 네메시아누스 주교라고 한다.
다른 8명의 주교들은 성 펠릭스(Felix), 성 루키우스(Lucius), 성 리테우스(Litteus), 성 폴리아누스(또는 폴리아노), 성 빅토르(Victor), 성 야데르(Jader), 성 다티부스(Dativus) 그리고 또 다른 성 펠릭스(Felix)이다. 성 키프리아누스 주교는 자신의 유배지에서 그들에 대해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프리테스탄
- 가톨릭 성인 이름
Frithest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933년 윈체스터
프리테스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프리떼스딴.
프리테스탄 자료
베네딕토회 주교인 성 프리테스탄은 성 그림발두스(Grimbaldus, 7월 8일)와 성 플레그문두스(Plegmundus, 8월 2일)의 제자였다. 그는 영국 윈체스터의 주교로서 거의 25년간을 사목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8. 핀니안
- 가톨릭 성인 이름
Finn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579년경 모빌
핀니안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삔니안.
핀니안 자료
북아일랜드 얼스터(Ulster) 스트랭퍼드(Strandford) 호수 교외에서 태어난 성 핀니안은 문헌상으로는 왕가 출신이다.
그는 성 콜만누스(Colmannus, 6월 7일)의 문하생으로 드러모어(Dromore)에서, 성 모케(Mochae)의 지도하에 마히 섬과 스트래스클라이드(Strathclyde)의 휘턴(Whithorn)에서 공부한 뒤에 은수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를 흠모하던 픽트족의 공주에 대한 그의 태도 때문에 휘턴을 떠나야 했고, 로마(Roma)로 가서 사제가 되었다. 그 후 얼스터로 돌아온 뒤에 모빌을 중심으로 몇 개의 수도원을 세웠으며 유명한 이오나(Iona)의 성 콜룸바(Columba, 6월 9일)를 제자로 두고 가르쳤다.
성 핀니안과 성 콜룸바는 논쟁에 말려들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콜룸바가 아일랜드에서 히에로니무스(Hieronymus)의 시편 사본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히에로니무스의 시편은 핀니안이 로마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콜룸바의 사본을 요구하였고 콜룸바가 이를 거절하자 국왕 디알마이드까지 끼어들게 되었다. 콜룸바는 하는 수 없이 사본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성 핀니안은 수많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유명하였고, 스코트랜드의 홀리우드(Holywood), 덤프리스(Dumfries) 등지를 돌며 순회설교를 하고 수도원을 세웠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그 외 세례명 날짜로 찾기
그 외 세례명 이름으로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