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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1일 남자세례명 13가지

pieonane 2023. 9. 3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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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1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다니엘, 디디모, 디오도로, 디오메데, 레우디노, 베드로, 빈첸시오, 에밀리아노, 요한 가브리엘 페르보이르, 파티엔스, 파프누시오, 프로토, 히야친토, 총 13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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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1일 여자세례명 테오도라, 총 1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9월 11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3가지

 

 

 

 

9월 11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다니엘

  2. 디디모

  3. 디오도로

  4. 디오메데

  5. 레우디노

  6. 베드로

  7. 빈첸시오

  8. 에밀리아노

  9. 요한 가브리엘 페르보이르

  10. 파티엔스

  11. 파프누시오

  12. 프로토

  13. 히야친토

 

9월 11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3가지 다니엘, 디디모, 디오도로, 디오메데, 레우디노, 베드로, 빈첸시오, 에밀리아노, 요한 가브리엘 페르보이르, 파티엔스, 파프누시오, 프로토, 히야친토

 

 

1. 다니엘

 

  • 가톨릭 성인 이름
    Daniel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84년 뱅거

 

 

다니엘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대니얼, 데이니올.

 

 

다니엘 자료

성 다니엘을 뱅거의 다니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웨일스(Wales) 지방 스노우도니아(Snowdonia) 지역을 가르는 메나이(Menai) 해협 동쪽의 뱅거 파르(Bangor Fawr)에 수도원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당시 웨일스의 귀네드(Gwynedd) 왕국에 속한 뱅거 교구의 초대 주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종교적인 가정 분위기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란카판(Llancarfan) 수도원의 성 카독(Cadoc, 1월 24일) 문하에서 공부했다.

616년경 체스터(Chester) 전투 때 노섬브리아(Northumbria)의 에텔프리드(Ethelfrid) 왕에 의해 그가 설립한 뱅거 수도원의 많은 수도승이 살해되었는데, 그 수가 1,200명을 넘었다는 기록을 통해 그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는 수도원장과 주교로서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며 살다가 584년 선종하여 바드시 섬(Bardsey Island)에 안장되었다.

그 후 그에 대한 공경은 웨일즈 북부 지방에서 널리 퍼졌고, 많은 성당이 그의 이름으로 봉헌되었는데 뱅거 수도원 자리에 건립된 주교좌성당 또한 그의 이름으로 봉헌되었다. 그는 웨일스에서 보통 데이니올(Deiniol)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디디모

 

  • 가톨릭 성인 이름
    Didym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디디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디디무스.

 

 

디디모 자료

성 디오도루스(Diodurus)와 성 디오메데(Diomedes) 그리고 성 디디무스(또는 디디모)는 시리아의 라오디케아(Laodicea)에서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디오도로

 

  • 가톨릭 성인 이름
    Diodor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디오도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디오도루스.

 

 

디오도로 자료

성 디오도루스(또는 디오도로)와 성 디오메데(Diomedes) 그리고 성 디디무스(Didymus)는 시리아의 라오디케아(Laodicea)에서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디오메데

 

  • 가톨릭 성인 이름
    Diomede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디오메데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디오메데스.

 

 

디오메데 자료

성 디오도루스(Diodurus)와 성 디오메데 그리고 성 디디무스(Didymus)는 시리아의 라오디케아(Laodicea)에서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레우디노

 

  • 가톨릭 성인 이름
    Leud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680년 이전 툴

 

 

레우디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레우디누스, 보도, 보돈.

 

 

레우디노 자료

사달베르가(Sadalberga)로도 불리는 성녀 살라베르가(Salaberga, 9월 22일)는 605년경 알자스(Alsace)의 공작인 군도인(Gundoin)의 딸로 오늘날의 프랑스 북동부 툴(Toul)에서 태어난 듯하다.

보비오(Bobbio) 수도원의 요나스(Jonas)라는 수도자가 쓴 “성 콜룸바누스의 생애”(Vita sancti Columbani)에서 부분적으로 전해지는 내용에 따르면, 성녀 살라베르가의 아버지는 나중에 뤽세이유(Luxeuil) 수도원의 원장이 된 성 발데베르투스(Waldebertus, 5월 2일)와 가까운 사이로, 성 발데베르투스는 나중에 성녀 살라베르가를 수도 생활로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해 외부에 드러나지 않게 집안에서 조심스럽게 생활해야 했다. 그녀가 소녀가 되었을 때 바이에른(Bayern) 지방에서 선교활동을 마치고 뤽세이유 수도원으로 돌아가던 성 에우스타시우스(Eustasius, 4월 2일)가 군도인 공작의 환대로 그의 집에서 쉬어 가게 되었다.

성 에우스타시우스는 군도인 공작 부부의 요청을 받고 앞을 못 보던 성녀 살라베르가의 눈에 성유를 바르고 기도하여 기적적으로 그녀의 시력을 치유하였다.

성녀 살라베르가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후 세속의 삶을 포기하고 수도 생활에 헌신하려 했으나 부모의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부모의 뜻에 따라 628년경 리치람누스(Richramnus)라는 프랑크 귀족과 결혼했으나 두 달 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녀는 이를 하느님의 뜻으로 여기고 부모의 동의 없이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불과 2년 뒤에 프랑크 왕국의 다고베르 1세(Dagobert I) 왕의 명령과 부모의 요청에 따라 수도 생활을 포기하고 왕의 고문 중 한 명인 블란디누스(Blandinus)와 재혼해야 했다.

그녀는 결혼 생활 중에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발도비누스(Baldovinus)와 안스트루다(Anstrudis)는 일부 지역과 베네딕토회에서 성인으로 10월 16/17일에 기념한다고 한다. 하지만 “로마 순교록”에 그들의 이름이 올라가지는 않았다.

평소 신심 깊은 부부로 행복한 부부생활을 영위하던 성녀 살라베르가와 블란디누스는 660년 이전에 세속의 삶을 떠나 각자 수도 생활에 들어가기 위해 헤어지기로 했다.

블란디누스는 자신의 영지에 있는 숲으로 들어가 은수자가 되었고, 성녀 살라베르가는 자신의 딸인 안스트루다와 함께 랑그르(Langres) 근처의 수녀원에 들어가 생활하다가 보다 안전한 곳으로 수녀원을 옮겨야 할 상황이 되자 뤽세이유의 성 발데베르투스의 권고를 받아들여 랭스(Reims)와 가까운 랑(Laon)에 베네딕토회 수녀원을 세웠다.

10여 년간 수녀원장으로 수도 생활에 전념한 성녀 살라베르가는 670년경 선종해 수녀원에 묻혔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를 뒤이어 안스트루다가 수녀원장이 되었다.

성녀 살라베르가의 동생인 성 레우디누스(또는 레우디노)는 누나의 설득과 모범을 따라 아내와 헤어져 각자 수도 생활에 들어갔다. 그의 아내 오딜리아(Odilia)는 그즈음 누나가 설립한 랑의 수녀원으로 들어갔고, 그 또한 누나가 설립한 남자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한 후 몇 개의 수도원을 더 설립했다.

667년 툴의 주교가 선종하자 그 도시의 사람들은 평소 거룩한 삶을 살던 성 레우디누스를 후임자로 선출했다. 그는 673년경 선종할 때까지 툴의 주교로서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은 9월 22일 목록에서 랑의 수녀원장인 성녀 살라베르가의 이름을 전해주었고,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과거 프랑크 왕국의 서부 지방인 네우스트리아(Neustria)의 랑에서 수녀원장으로 살았던 성녀 살라베르가에 대해 성 콜룸바누스(Columbanus, 11월 23일)에 의해 실명한 눈을 치료받아 눈을 뜨고 하느님을 섬기는 삶을 시작했다고 전하며, 선종 시기를 664년경으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동생인 성 레우디누스는 프랑크 왕국 동부 지방인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에 있는 툴의 주교로서, 처음에는 결혼하여 살다가 그의 아내 오딜리아처럼 수도 생활에 들어갔다고 전해주며 9월 11일 목록에 추가하고, 선종 시기는 680년 이전으로 기록하였다. 성 레우디누스는 레우디누스 보도(Leudinus Bodo) 또는 보돈(Bodon)으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베드로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003-1080년 샤바농

 

 

베드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 자료

성 베드로(Petrus)는 오트-로와르의 랑제악 출신으로 좋은 교육을 받던 중에 사제 성소를 발견하였다. 사제 서품 후 그는 고향 마을의 사제로 지냈는데, 극히 엄격하고 모범적인 생활을 함으로써 고향 사람들이 특히 존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본당사목보다는 공동체에서 수도규칙을 따르려고 하였는데, 자신을 모함하고 괴롭히던 어떤 부인이 결국은 회개하여 그에게 오베르뉴(Auvergne)의 페브락에 있는 땅을 희사하였다. 성 베드로는 이곳에다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규칙을 따르는 수도원을 세웠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빈첸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Vincent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554년 레온

 

 

빈첸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뱅상, 빈센트, 빈첸시우스, 빈첸티오, 빈첸티우스, 빈켄티오, 빈켄티우스, 원선시오.

 

 

빈첸시오 자료

성 빈첸시오(Vincentius)는 에스파냐 레온에 있는 성 클라우디우스(Claudius) 수도원의 원장으로 아리우스파 서고트족(Visigoths)에 의해 순교하였다.

성 빈첸시오 성인의 순교 연도에 대해 다소 혼돈이 있는데, 일부 목록에는 그가 630년에 순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에밀리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Emil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20년 베르첼리

 

 

에밀리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이밀리아노, 아이밀리아누스, 애밀리아노, 애밀리아누스, 에밀리아누스.

 

 

에밀리아노 자료

성 에밀리아누스(Aemilianus, 또는 에밀리아노)는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 지방 베르첼리의 주교였다. 그는 주교가 되기 전에 은수자로서 40년을 살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요한 가브리엘 페르보이르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Gabriel Perboyr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선교사,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2-1840년 중국

 

 

요한 가브리엘 페르보이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퍼보일러, 페르바르, 페르부아르, 한스, 후안.

 

 

요한 가브리엘 페르보이르 자료

성 요한 가브리엘 페르보이르(Joannes Gabriel Perboyre)는 1802년 1월 6일 프랑스 남부 로트(Lot)의 카오르(Cahors) 교구에 속한 르푸에쉬(Le Puech)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여덟 형제 중 다섯이 성 빈첸시오 드 폴(Vincentius de Paul, 9월 27일)이 설립한 수도회의 신부와 수녀가 됐을 정도로 신심 깊은 가정에서 자랐다. 15살 때 선교에 대한 강론을 듣고 외국으로 나가는 선교사가 되려는 꿈을 키운 그는 1818년 12월 형인 루이(Louis)와 함께 성 빈첸시오 드 폴의 선교 사제회(Congregation of the Mission)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2년 후 첫서원을 하고 1826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소망과는 달리 첫 부임지는 생 플뢰르(Saint-Fleur) 신학교의 교수로서 교의 신학을 담당했다.

1832년에는 새로 입회한 수련자들을 위해 파리에 세워진 수련원의 부원장이 되었다. 늘 중국 선교를 희망하던 그는 형 루이가 중국에서 선교하다 죽은 후에는 더욱 중국 선교 대한 열망을 키워갔다.

마침내 그는 1835년에 선교사로 중국으로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그해 3월 21일 유럽을 떠나 8월 29일 마카오(Macao)에 도착했다. 마카오에서 중국어를 배우며 낯선 중국 문화에 적응하는 훈련을 한 후 이듬해 6월 중국 땅에 도착해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 후에는 양쯔강 근처 허베이성(Hebei, 河北省)의 선교 사제로 임명되었다. 그러던 중 1839년 제1차 아편전쟁이 발발하면서 중국 전역에서 유럽인들과 그리스도교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었다.

당국과 중국인들의 감시를 피해 다니며 선교를 계속하던 그는 새로 신자가 되어 교리교사가 된 어떤 사람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1839년 9월 재판에 넘겨진 뒤 1년여 동안 잔인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킨 그는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고 1840년 9월 11일 후베이성(Hubei, 湖北省) 우한(Wuhan, 武漢)의 ‘붉은 산’이라 불리는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묶인 채 밧줄로 목이 졸려 순교하였다.

성 요한 가브리엘 페르보이르 신부의 선교 활동과 순교는 중국 선교의 마중물이 되어 그리스도교가 중국 전체에 급속도로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1889년 11월 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됨으로써, 중국 지역에서 순교한 이들 중에서 첫 번째로 시복된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1996년 6월 2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10월 22일)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유해는 용감한 신자가 어렵게 수습해 20년 전에 순교한 성 프란치스코 레지 클레(Franciscus Regis Clet, 7월 9일)의 무덤 곁에 모실 수 있었다. 그 후 다시 프랑스 파리의 성 빈첸시오 선교 사제회 모원 경당으로 옮겨 안치하여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파티엔스

 

  • 가톨릭 성인 이름
    Patien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480년 리옹

 

 

파티엔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빠시엔스, 빠티엔스, 파시엔스.

 

 

파티엔스 자료

성 파티엔스는 450년경에 리옹의 주교가 된 듯하다. 고트족의 부르고뉴(Bourgogne) 침략과 기근으로 도탄에 빠진 주민들에게 그는 대대적으로 구호사업을 펼친 인물로 유명하다. 이때 하느님께서는 구호품을 날로 늘려주셨다고 성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Sidonius Apollinaris)는 증언한다.

성 파티엔스의 친구이자 고위 성직자이던 시도니우스는 그를 일컬어 ‘거룩하고 활동적이며 은혜로운 사람’이라 불렀다. 사실 그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주교였고 가난한 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한 실천가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파프누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Paphnu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50년경 테베

 

 

파프누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파프누시우스, 파프누씨오, 파프누씨우스, 파프누티오, 파프누티우스.

 

 

파프누시오 자료

이집트 사람인 성 파프누티우스(또는 파프누시오)는 사막의 은수자인 성 안토니우스(Antonius, 1월 17일)의 문하생으로 몇 해 동안 지내던 중에 상(上) 테베(나일 강 중류에 위치한 고대 이집트 신왕국시대의 수도로 오늘날의 룩소르 Luxor)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막시미누스 다이아(Maximinus Daia)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동안에 고문을 받다가 오른쪽 눈을 실명당한 후 광산의 강제 노동형을 선고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325년의 제1차 니케아(Nicaea) 공의회에서 특별한 존경을 받았다.

공의회의 일부 교부들이 기혼자인 주교와 사제 그리고 부제에게 아내와 별거하는 의무를 부과시키고자 할 때, 성 파프누티우스는 이러한 제안에 반대하고 단지 성직자는 서품 후에 결혼할 수 없다는 점만 역설하였다.

또한 그는 아리우스(Arius) 이단과 대항하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주교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의 든든한 지지자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프로토

 

  • 가톨릭 성인 이름
    Pro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하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7년?

 

 

프로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쁘로또, 쁘로뚜스, 프로또, 프로뚜스, 프로투스.

 

 

프로토 자료

성 프로투스(또는 프로토)와 성 히야킨투스(Hyacinthus)의 생애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지만, 4세기의 순교자 명단과 초기 성무 집전서와 나폴리의 전례력 등에 두 성인의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350년경에 기록된 “로마 순교자 증언록”(Depositio Martyrum)에서도 두 순교자가 로마의 살라리아 가도(Via Salaria)에 있는 대성전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들의 무덤은 4세기에 산사태로 매몰되었는데, 교황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 12월 11일)가 이를 다시 보수한 후 성인들의 묘비명(墓碑銘)을 기록했고 그중 일부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고 한다.

1845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두 순교자가 합장되었음을 확인했는데, 순교자의 유해는 작은 묘실에 재의 형태로 안치되어 있었고, “순교자 히야킨투스 9월 11일에 묻히다”, “순교자 프로투스의 묘”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성 프로투스의 유해는 팔라티노(Palatino)의 산 살바토레(San Salvatore) 성당으로 옮겨졌고, 성 히야킨투스의 유해는 1849년 포교성성(布敎聖省, 현 인류복음화성성)의 경당으로 옮겨 모셨다.

그리고 “성녀 에우게니아의 수난기”(Passio S. Eugeniae)에 따르면, 형제 사이인 성 프로투스와 성 히야킨투스는 이집트의 총독이었던 성 필리푸스(Philippus, 9월 13일)의 딸 성녀 에우게니아(Eugenia, 12월 25일)의 환관이자 시종으로 그녀를 따라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로 갔다.

그들은 성녀 에우게니아와 함께 헬리오폴리스(Heliopolis)의 주교인 헬레누스(Helenus)에게 세례를 받고 열성적으로 성경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성녀 에우게니아가 결혼을 피해 동정을 지킬 수 있도록 남장을 하고 남자 수도원에 입회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들 또한 이집트의 은수자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성 필리푸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서 순교한 뒤에 성녀 에우게니아를 따라 로마로 갔다. 그곳에서 성녀 에우게니아에 의해 바실라(Basilla)에게 파견되어 그녀를 설득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도록 했다.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성 프로투스와 성 히야킨투스는 257년에 시작된 발레리아누스(Valerianus, 253~260년 재위)와 갈리에누스(Gallienus, 253~268년 재위)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체포되어 로마 신전에 희생제물을 바치도록 보내졌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제물 봉헌을 거부하고 신앙을 지켰고, 오히려 그들의 기도로 신전의 신상이 먼지로 변하자 심한 매를 맞고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그들의 유해는 살라리아 가도에 있는 바실라의 묘지에 묻혔고, 교황 성 다마수스 1세가 그들을 기념해 묘비명을 기록했다고 한다. 그런데 후대에 발굴된 유해의 상태가 재의 형태인 것으로 보아 화형으로 순교했다고 보기도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히야친토

 

  • 가톨릭 성인 이름
    Hyacinth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하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57년?

 

 

히야친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히야친또, 히야친뚜스, 히야친투스, 히야친트, 히야킨또, 히야킨뚜스, 히야킨토, 히야킨투스.

 

 

히야친토 자료

성 프로투스(Protus)와 성 히야킨투스(Hyacinthus, 또는 히야친토)의 생애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지만, 4세기의 순교자 명단과 초기 성무 집전서와 나폴리의 전례력 등에 두 성인의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350년경에 기록된 “로마 순교자 증언록”(Depositio Martyrum)에서도 두 순교자가 로마의 살라리아 가도(Via Salaria)에 있는 대성전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들의 무덤은 4세기에 산사태로 매몰되었는데, 교황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 12월 11일)가 이를 다시 보수한 후 성인들의 묘비명(墓碑銘)을 기록했고 그중 일부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고 한다.

1845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두 순교자가 합장되었음을 확인했는데, 순교자의 유해는 작은 묘실에 재의 형태로 안치되어 있었고, “순교자 히야킨투스 9월 11일에 묻히다”, “순교자 프로투스의 묘”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성 프로투스의 유해는 팔라티노(Palatino)의 산 살바토레(San Salvatore) 성당으로 옮겨졌고, 성 히야킨투스의 유해는 1849년 포교성성(布敎聖省, 현 인류복음화성성)의 경당으로 옮겨 모셨다.

그리고 “성녀 에우게니아의 수난기”(Passio S. Eugeniae)에 따르면, 형제 사이인 성 프로투스와 성 히야킨투스는 이집트의 총독이었던 성 필리푸스(Philippus, 9월 13일)의 딸 성녀 에우게니아(Eugenia, 12월 25일)의 환관이자 시종으로 그녀를 따라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로 갔다.

그들은 성녀 에우게니아와 함께 헬리오폴리스(Heliopolis)의 주교인 헬레누스(Helenus)에게 세례를 받고 열성적으로 성경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성녀 에우게니아가 결혼을 피해 동정을 지킬 수 있도록 남장을 하고 남자 수도원에 입회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들 또한 이집트의 은수자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성 필리푸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서 순교한 뒤에 성녀 에우게니아를 따라 로마로 갔다. 그곳에서 성녀 에우게니아에 의해 바실라(Basilla)에게 파견되어 그녀를 설득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도록 했다.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성 프로투스와 성 히야킨투스는 257년에 시작된 발레리아누스(Valerianus, 253~260년 재위)와 갈리에누스(Gallienus, 253~268년 재위)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체포되어 로마 신전에 희생제물을 바치도록 보내졌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제물 봉헌을 거부하고 신앙을 지켰고, 오히려 그들의 기도로 신전의 신상이 먼지로 변하자 심한 매를 맞고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그들의 유해는 살라리아 가도에 있는 바실라의 묘지에 묻혔고, 교황 성 다마수스 1세가 그들을 기념해 묘비명을 기록했다고 한다. 그런데 후대에 발굴된 유해의 상태가 재의 형태인 것으로 보아 화형으로 순교했다고 보기도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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