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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1일 남자세례명 11가지

피어나네 2023. 10. 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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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1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네스타보, 네스토르, 마태오, 멜레시오, 알렉산데르, 에우세비오, 요나, 이사치오, 제노, 카스토르, 팜필로, 총 11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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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1일 여자세례명 마우라, 이피제니아, 총 2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9월 21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1가지

 

 

 

 

9월 21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네스타보

  2. 네스토르

  3. 마태오

  4. 멜레시오

  5. 알렉산데르

  6. 에우세비오

  7. 요나

  8. 이사치오

  9. 제노

  10. 카스토르

  11. 팜필로

 

9월 21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1가지

 

 

1. 네스타보

 

  • 가톨릭 성인 이름
    Nestab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62년경  가자

 

 

네스타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네스따보, 네스따부스, 네스타부스.

 

 

네스타보 자료

팔레스티나의 가자 지역은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많은 주민이 집단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도 했고, 도시에서 3km 정도 떨어진 지중해와 면한 오늘날의 리말(Rimal) 해변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주교좌가 있던 마이우마(Maiuma)라는 고대 도시가 있었다.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361~363년 재위)가 통치하면서 로마의 전통을 살리고자 유일신을 믿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열심히 그리스도교를 믿던 성 에우세비우스(Eusebius)와 성 네스타부스(또는 네스타보)와 성 제노(Zeno)가 그들의 집에 있다가 이교도들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들은 형제지간으로 이전에 가자에서 있었던 이교도 신전의 우상 파괴 사건과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감옥에 갇혀 매질을 당했다. 흥분한 군중들은 원형 경기장에 모여 그들이 신전을 파괴한 죄를 지었다며 무조건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고, 악의적 의도를 지닌 선동가에 의해 폭도로 돌변한 군중들은 집단으로 난동을 부리며 감옥 문을 부수고 그들을 끌어냈다.

그리고 돌과 막대기 등 닥치는 대로 들고 때리며 자백을 강요했다. 세 명의 형제는 온갖 참혹한 고문을 당해 살이 찢어지고 두개골과 뼈가 깨지고 부러지는 등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죽임을 당한 뒤 길가에 버려졌다. 폭도들은 그들의 시신을 불태우고 남은 뼈마저 낙타와 나귀 등 짐승의 뼈와 섞어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세 명의 형제들이 참혹하게 순교할 때 성 네스토르(Nestor)라는 한 청년도 그들과 함께 참혹한 고문과 매질을 당했다. 폭도가 된 군중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길가에 버렸는데, 성 에우세비우스 형제의 사촌인 또 다른 성 제노(12월 26일)가 집으로 데려가서 보니 아직 살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상처가 깊어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세 명의 순교자들의 뼈는 그 후 어느 신심 깊은 부인이 밤에 가서 몰래 골라낸 후 질그릇에 담아 순교자들의 사촌인 성 제노에게 건네주었다. 성 제노는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시고 해안가 도시인 마이우마로 피신해 숨어 살았다.

그는 순교자들의 유해를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379~395년 재위)의 통치 때까지 잘 간직했고, 나중에 가자의 항구 도시가 된 마이우마의 주교가 되었다.

성 제노 주교는 그의 사촌형제이자 순교자인 성 에우세비우스와 성 네스타부스와 성 제노를 위한 성당을 건립했다. 그리고 그는 선종하는 날까지 가난한 이들을 돕고 그들을 위한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직조 일을 했다.

옛 “로마 순교록”은 형제 순교자인 성 에우세비우스와 성 네스타부스와 성 제노 그리고 그들과 함께 순교한 성 네스토르를 9월 8일 목록에 기록해 기념했다.

그런데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21일로 옮겨 네 명의 거룩한 순교자들을 기록하고 기념하도록 했다.

성 제노 주교에 대해서는 12월 26일을 유지하면서 9월 21일 기념하는 네 명의 순교자와의 관계와 행적 등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추가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네스토르

 

  • 가톨릭 성인 이름
    Nesto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62년경  가자

 

 

네스토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네스또르, 네스똘, 네스톨.

 

 

네스토르 자료

팔레스티나의 가자 지역은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많은 주민이 집단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도 했고, 도시에서 3km 정도 떨어진 지중해와 면한 오늘날의 리말(Rimal) 해변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주교좌가 있던 마이우마(Maiuma)라는 고대 도시가 있었다.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361~363년 재위)가 통치하면서 로마의 전통을 살리고자 유일신을 믿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열심히 그리스도교를 믿던 성 에우세비우스(Eusebius)와 성 네스타부스(Nestabus)와 성 제노(Zeno)가 그들의 집에 있다가 이교도들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들은 형제지간으로 이전에 가자에서 있었던 이교도 신전의 우상 파괴 사건과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감옥에 갇혀 매질을 당했다.

흥분한 군중들은 원형 경기장에 모여 그들이 신전을 파괴한 죄를 지었다며 무조건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고, 악의적 의도를 지닌 선동가에 의해 폭도로 돌변한 군중들은 집단으로 난동을 부리며 감옥 문을 부수고 그들을 끌어냈다.

그리고 돌과 막대기 등 닥치는 대로 들고 때리며 자백을 강요했다. 세 명의 형제는 온갖 참혹한 고문을 당해 살이 찢어지고 두개골과 뼈가 깨지고 부러지는 등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죽임을 당한 뒤 길가에 버려졌다. 폭도들은 그들의 시신을 불태우고 남은 뼈마저 낙타와 나귀 등 짐승의 뼈와 섞어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세 명의 형제들이 참혹하게 순교할 때 성 네스토르라는 한 청년도 그들과 함께 참혹한 고문과 매질을 당했다. 폭도가 된 군중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길가에 버렸는데, 성 에우세비우스 형제의 사촌인 또 다른 성 제노(12월 26일)가 집으로 데려가서 보니 아직 살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상처가 깊어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세 명의 순교자들의 뼈는 그 후 어느 신심 깊은 부인이 밤에 가서 몰래 골라낸 후 질그릇에 담아 순교자들의 사촌인 성 제노에게 건네주었다. 성 제노는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시고 해안가 도시인 마이우마로 피신해 숨어 살았다.

그는 순교자들의 유해를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379~395년 재위)의 통치 때까지 잘 간직했고, 나중에 가자의 항구 도시가 된 마이우마의 주교가 되었다.

성 제노 주교는 그의 사촌형제이자 순교자인 성 에우세비우스와 성 네스타부스와 성 제노를 위한 성당을 건립했다. 그리고 그는 선종하는 날까지 가난한 이들을 돕고 그들을 위한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직조 일을 했다.

옛 “로마 순교록”은 형제 순교자인 성 에우세비우스와 성 네스타부스와 성 제노 그리고 그들과 함께 순교한 성 네스토르를 9월 8일 목록에 기록해 기념했다.

그런데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21일로 옮겨 네 명의 거룩한 순교자들을 기록하고 기념하도록 했다. 성 제노 주교에 대해서는 12월 26일을 유지하면서 9월 21일 기념하는 네 명의 순교자와의 관계와 행적 등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추가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마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Matthew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사도, 복음사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경

 

 

마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두, 마태우스, 마테오, 마테우스, 매튜.

 

 

마태오 자료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인 성 마태오(Matthaeus)는 이스라엘 북부 갈릴래아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Capharnaum)에서 로마 제국을 위해 세금을 걷는 세리였으나, “나를 따라라.” 하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당시 세리는 로마 제국을 대신해 동족에게 세금을 걷었기 때문에 멸시의 대상이자 죄인으로 취급받았다.

그런데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마티야’에서 유래한 마태오라는 이름처럼, 어느 날 세관에 앉아 있던 성 마태오는 주님의 부르심 속에서 자비를 체험하고 열두 사도의 한 명이 되었다. 그는 갈릴래아 태생인 듯하며 마르코 복음에 의하면 알패오의 아들로 원래 이름은 레위였다(2,14).

시몬에게 베드로(Petrus)라는 이름을 주신 것처럼, 레위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마태오라는 새 이름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루카 복음은 레위라는 세리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5,27).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르게 언급하면서 마태오와 레위 사이의 관계에 대해 몇몇 주장이 있었으나 대체로 교회 전통은 둘을 동일 인물로 보아 왔다. ‘예수님의 고을’(마태 9,1)로 불리는 카파르나움과 그 인근에서 세관원으로 일했던 성 마태오는 이미 예수님에 관해 많은 소문을 들었고 어쩌면 제자로 불리기 전에 예수님을 먼저 뵐 기회가 있었을 수도 있다.

열두 사도 중의 한 명인 성 마태오는 일찍이 초대 교회부터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로 알려져 왔다. 그는 특별히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로 복음서를 저술했다고 한다.

교회사가 에우세비우스(Eusebius)의 “교회사”에 따르면 그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12년 동안 먼저 동족인 히브리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후에 다른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s)는 그가 은수자로서 채식만 하면서 생활했다고 주장했다.

전승마다 차이는 있지만, 성 마태오 사도는 유대 지방을 순회하다가 옛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에티오피아로, “예로니모 순교록”에 따르면 페르시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순교 장소가 전승에 따라 에티오피아와 페르시아로 알려진 것처럼 순교 방법 또한 칼에 찔리거나 화형 또는 돌에 맞아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은 성 마태오가 에티오피아에서 순교한 후 그곳에 묻혔다가 5세기 제노(Zeno) 황제 때에 기적적으로 사도 성 바르나바(Barnabas)의 유해와 함께 발견되었다고 기록하였다.

그 후 전승에 따르면 이탈리아에 모셔졌던 성 마태오의 유해가 10세 중엽 다시 발견되어 이탈리아 남부 항구도시인 살레르노(Salerno)로 옮겨져 대성당 지하에 안치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고 한다.

반면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레위라고 불리던 성 마태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응답해 세리의 직분을 떠나 사도이자 복음사가로서 복음서를 썼다고 소개하며, 그 복음서에서 구약성경의 모든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선포했다고 적었다. 전승에 따라 다르게 전해지는 순교 장소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교회 미술에서 성 마태오는 성경(에제 1,10; 묵시 4,7)에 언급된 ‘살아있는 네 생물’에서 유래한 상징에 의하면 날개 달린 사람(천사)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는 성 마태오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구세주의 인간성을 강조한 것에 착안해 네 생물과 복음서를 일치시킨 리옹의 주교이자 교부인 성 이레네우스(Irenaeus, 6월 28일)의 선택이었다.

사도 성 마태오 복음사가는 세리였던 경력으로 인해 특별히 은행원과 장부 기장자, 회계사와 세무 직원들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그래서 교회 미술에서도 장부를 펼쳐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를 많이 표현하고 있다. 동방 교회에서는 그의 축일을 11월 16일에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멜레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Mele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키프로스

 

 

멜레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멜레시우스, 멜레씨오, 멜레씨우스, 멜레티오, 멜레티우스.

 

 

멜레시오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9월 21일 목록에서 키프로스에서 순교한 성 이사키우스(Isacius) 주교와 같은 곳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증거한 성 멜레티우스(또는 멜레시오) 주교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였다. 그런데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그들의 이름을 더 이상 기록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알렉산데르

 

  • 가톨릭 성인 이름
    Alexande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세기 로마

 

 

알렉산데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알레산드로, 알렉산더, 알렉산델, 알렉싼데르, 알렉싼델.

 

 

알렉산데르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9월 21일 목록에서 성 알렉산데르 주교 순교자에 대해 비교적 자세한 내용을 전해 주었다. 그는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 138-161년 재위) 황제의 통치 중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했다.

무거운 족쇄를 찬 상태에서 채찍질과 횃불로 지지는 형벌을 받고, 쇠갈고리에 살이 찢기고 짐승과 불길에 던져지는 고통을 당했다. 그러나 그 모든 고문과 고통을 이겨낸 성 알렉산데르는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 모든 일은 로마에서 20마일 정도 떨어진 클라우디안 가도(Via Claudian)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신은 나중에 교황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 12월 11일)에 의해 11월 26일 로마로 이장되었고, 같은 교황에 의해 그날 그의 이장 축일을 지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21일 목록에서 간단히 그의 순교 사실을 전해 주는데, 주교 여부에 대한 언급은 없고 장소도 로마에서 20마일 떨어진 카시아 가도(Via Cassia)의 바카나스(Baccanas)로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에우세비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useb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62년경 가자

 

 

에우세비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우세비오스, 에우세비우스.

 

 

에우세비오 자료

팔레스티나의 가자 지역은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많은 주민이 집단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도 했고, 도시에서 3km 정도 떨어진 지중해와 면한 오늘날의 리말(Rimal) 해변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주교좌가 있던 마이우마(Maiuma)라는 고대 도시가 있었다.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361~363년 재위)가 통치하면서 로마의 전통을 살리고자 유일신을 믿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열심히 그리스도교를 믿던 성 에우세비우스(또는 에우세비오)와 성 네스타부스(Nestabus)와 성 제노(Zeno)가 그들의 집에 있다가 이교도들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들은 형제지간으로 이전에 가자에서 있었던 이교도 신전의 우상 파괴 사건과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감옥에 갇혀 매질을 당했다. 흥분한 군중들은 원형 경기장에 모여 그들이 신전을 파괴한 죄를 지었다며 무조건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고, 악의적 의도를 지닌 선동가에 의해 폭도로 돌변한 군중들은 집단으로 난동을 부리며 감옥 문을 부수고 그들을 끌어냈다.

그리고 돌과 막대기 등 닥치는 대로 들고 때리며 자백을 강요했다. 세 명의 형제는 온갖 참혹한 고문을 당해 살이 찢어지고 두개골과 뼈가 깨지고 부러지는 등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죽임을 당한 뒤 길가에 버려졌다. 폭도들은 그들의 시신을 불태우고 남은 뼈마저 낙타와 나귀 등 짐승의 뼈와 섞어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세 명의 형제들이 참혹하게 순교할 때 성 네스토르(Nestor)라는 한 청년도 그들과 함께 참혹한 고문과 매질을 당했다. 폭도가 된 군중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길가에 버렸는데, 성 에우세비우스 형제의 사촌인 또 다른 성 제노(12월 26일)가 집으로 데려가서 보니 아직 살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상처가 깊어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세 명의 순교자들의 뼈는 그 후 어느 신심 깊은 부인이 밤에 가서 몰래 골라낸 후 질그릇에 담아 순교자들의 사촌인 성 제노에게 건네주었다. 성 제노는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시고 해안가 도시인 마이우마로 피신해 숨어 살았다.

그는 순교자들의 유해를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379~395년 재위)의 통치 때까지 잘 간직했고, 나중에 가자의 항구 도시가 된 마이우마의 주교가 되었다. 성 제노 주교는 그의 사촌형제이자 순교자인 성 에우세비우스와 성 네스타부스와 성 제노를 위한 성당을 건립했다. 그리고 그는 선종하는 날까지 가난한 이들을 돕고 그들을 위한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직조 일을 했다.

옛 “로마 순교록”은 형제 순교자인 성 에우세비우스와 성 네스타부스와 성 제노 그리고 그들과 함께 순교한 성 네스토르를 9월 8일 목록에 기록해 기념했다.

그런데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21일로 옮겨 네 명의 거룩한 순교자들을 기록하고 기념하도록 했다. 성 제노 주교에 대해서는 12월 26일을 유지하면서 9월 21일 기념하는 네 명의 순교자와의 관계와 행적 등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추가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요나

 

  • 가톨릭 성인 이름
    Jonah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구약인물, 예언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요나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요나스, 조나스.

 

 

요나 자료

구약성경의 열두 소예언서 중 다섯 번째 자리에 배치된 요나서는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다른 예언서들과 매우 다르다. 예언서는 일반적으로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에, 예언자에 대한 전기나 자서전적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비중은 상당히 미미하다. 그런데 요나서는 ‘요나’(Jonas)라는 이름을 지닌 예언자가 한 가지 사명을 수행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한다.

그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선포한 예언의 말씀은 실제로는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라는 한마디뿐이었다(3,4). 요나서에 의하면, 요나 예언자는 주님으로부터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그 성읍을 거슬러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나에게까지 치솟아 올랐다.”(1,2)라는 말씀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피해 니네베 반대쪽으로, 당시 사람들이 세상의 서쪽 끝이라고 생각했던 타르시스로 달아나려고 배에 올라탔다. 주님은 바다에 큰 폭풍을 일으키셨다. 뱃사람들은 겁에 질려 저마다 자기 신에게 부르짖으며, 배를 가볍게 하려고 짐들을 바다로 내던지며 재앙을 피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모든 것이 소용없자 그들은 변고의 원인이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제비를 뽑았다. 그래서 제비를 뽑으니 배 밑창에서 잠을 자다 선장에게 이끌려 나온 요나가 뽑혔다. 그는 자기에게 모든 탓이 있음을 순순히 고백하고, 자기를 바다에 던지면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선원들은 “뭍으로 되돌아가려고 힘껏 노를 저었으나, 바다가 점점 더 거칠어져 어쩔 수가 없었다.”(1,13) 결국 그들은 주님께 자신들에게 죄를 지우지 말아 달라고 청하며 요나가 청한 대로 그를 들어 바다에 내던졌다.

그러자 “성난 바다가 잔잔해졌다. 사람들은 주님을 더욱더 두려워하며 주님께 희생 제물을 바치고 서원을 하였다.”(1,15-16)

주님께서는 곧 큰 물고기를 시켜 바다에 떨어진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 사흘 낮과 밤을 물고기 배 속에 있으면서 요나는 주 하느님께 기도하며 감사의 시편을 노래하였다.

“제가 곤궁 속에서 주님을 불렀더니 주님께서 저에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저승의 배 속에서 제가 부르짖었더니 당신께서 저의 소리를 들어 주셨습니다. … 그러나 저는 감사 기도와 함께 당신께 희생 제물을 바치고 제가 서원한 것을 지키렵니다. 구원은 주님의 것입니다.”(2,3-10)

주님께서는 사흘 뒤에 그 큰 물고기에게 요나를 육지에 뱉어내도록 명령하셨다. 그리고 두 번째로 요나에게 말씀하셨는데, 처음과 같은 말씀이자 사명이었다. 요나는 이번에는 주님의 말씀대로 니네베로 가서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3,4) 하고 외쳤다. 그러자 니네베의 임금을 비롯해 모든 사람이 주님 앞에 나와 참회하며 열심히 기도하였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하고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시고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거두셨다. 그런데 요나는 하느님의 이런 처사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니네베를 용서하시는 하느님과 그러한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요나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다.

요나는 주님께서 자비하신 하느님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니네베 사람들이 예상과는 달리 재빨리 회개하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시자, 요나는 오히려 화를 내며 자기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까지 했다. 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고 성 밖 동쪽으로 가서 초막을 짓고 그 그늘에 앉았다.

주님께서 그 위로 아주까리 하나를 자라게 하시어 그늘을 드리워 고통스러운 더위에서 구해주셨고, 요나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런데 이튿날 동이 틀 무렵 벌레 하나가 아주까리를 쏠아 시들게 하고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며 뜨거운 동풍까지 불자, 요나는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4,8)라고 투덜거렸다. 주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4,10-11)

요나서는 하느님의 이 말씀으로 끝을 맺는다.

요나서가 역사서가 아님은 모든 학자가 동의하는 부분이다. 저자와 저작 시기도 명확하지 않다. 대체로 바빌론 유배가 끝나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제2 이사야의 영향을 받아 저술된 것으로 추정한다.

요나서의 저자는 기존의 전통적 예언자와는 다른 요나의 모습을 통해 반성의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요나가 만난 뱃사람들, 특히 니네베 사람으로 대표되는 이민족 · 이교도들의 모습도 기존에 유다인이 생각하던 것과 아주 달랐다.

그들은 요나를 인간적으로 대하며 어떻게든 살려보려 했고, 폭풍이 멈춘 뒤에는 요나의 하느님께 경배를 드렸다. 요나 예언서는 이런 내용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기존의 관습과 선입관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지금까지의 좁은 안목을 버리고,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대양과 대도시 니네베처럼 전망을 넓혀 세상과 하느님을 생각할 것을 촉구하였다.

과거와는 다른 시각으로, 곧 바다와 뭍을 창조하시고(1,9) 이민족들의 하느님도 되시는(3,8 참조) 한결같으신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정의를 초월하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을 실현하도록 당신 백성을 부르시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요나서는 독특하지만, 하나의 예언서로서 다른 예언서들과 자리를 같이할 수 있을 것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21일 목록에서 예언자 성 요나를 언급하며 그가 큰 물고기 배 속에서 탈출한 것은 복음에서 주님의 부활을 예표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이사치오

 

  • 가톨릭 성인 이름
    Isac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키프로스

 

 

이사치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이사치우스, 이사키오, 이사키우스.

 

 

이사치오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9월 21일 목록에서 키프로스에서 순교한 성 이사키우스(또는 이사치오) 주교와 같은 곳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증거한 성 멜레티우스(Meletius) 주교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였다. 그런데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그들의 이름을 더 이상 기록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제노

 

  • 가톨릭 성인 이름
    Zeno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62년경 가자

 

 

제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없음.

 

 

제노 자료

팔레스티나의 가자 지역은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많은 주민이 집단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도 했고, 도시에서 3km 정도 떨어진 지중해와 면한 오늘날의 리말(Rimal) 해변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주교좌가 있던 마이우마(Maiuma)라는 고대 도시가 있었다.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361~363년 재위)가 통치하면서 로마의 전통을 살리고자 유일신을 믿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열심히 그리스도교를 믿던 성 에우세비우스(Eusebius)와 성 네스타부스(Nestabus)와 성 제노가 그들의 집에 있다가 이교도들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들은 형제지간으로 이전에 가자에서 있었던 이교도 신전의 우상 파괴 사건과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감옥에 갇혀 매질을 당했다.

흥분한 군중들은 원형 경기장에 모여 그들이 신전을 파괴한 죄를 지었다며 무조건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고, 악의적 의도를 지닌 선동가에 의해 폭도로 돌변한 군중들은 집단으로 난동을 부리며 감옥 문을 부수고 그들을 끌어냈다. 그리고 돌과 막대기 등 닥치는 대로 들고 때리며 자백을 강요했다.

세 명의 형제는 온갖 참혹한 고문을 당해 살이 찢어지고 두개골과 뼈가 깨지고 부러지는 등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죽임을 당한 뒤 길가에 버려졌다. 폭도들은 그들의 시신을 불태우고 남은 뼈마저 낙타와 나귀 등 짐승의 뼈와 섞어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세 명의 형제들이 참혹하게 순교할 때 성 네스토르(Nestor)라는 한 청년도 그들과 함께 참혹한 고문과 매질을 당했다. 폭도가 된 군중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길가에 버렸는데, 성 에우세비우스 형제의 사촌인 또 다른 성 제노(Zeno, 12월 26일)가 집으로 데려가서 보니 아직 살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상처가 깊어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세 명의 순교자들의 뼈는 그 후 어느 신심 깊은 부인이 밤에 가서 몰래 골라낸 후 질그릇에 담아 순교자들의 사촌인 성 제노에게 건네주었다. 성 제노는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시고 해안가 도시인 마이우마로 피신해 숨어 살았다.

그는 순교자들의 유해를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379~395년 재위)의 통치 때까지 잘 간직했고, 나중에 가자의 항구 도시가 된 마이우마의 주교가 되었다.

성 제노 주교는 그의 사촌형제이자 순교자인 성 에우세비우스와 성 네스타부스와 성 제노를 위한 성당을 건립했다. 그리고 그는 선종하는 날까지 가난한 이들을 돕고 그들을 위한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직조 일을 했다.

옛 “로마 순교록”은 형제 순교자인 성 에우세비우스와 성 네스타부스와 성 제노 그리고 그들과 함께 순교한 성 네스토르를 9월 8일 목록에 기록해 기념했다.

그런데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21일로 옮겨 네 명의 거룩한 순교자들을 기록하고 기념하도록 했다. 성 제노 주교에 대해서는 12월 26일을 유지하면서 9월 21일 기념하는 네 명의 순교자와의 관계와 행적 등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추가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카스토르

 

  • 가톨릭 성인 이름
    Casto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423년경 압트

 

 

카스토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가스또르, 가스토르, 가스톨, 까스똘, 까스토르, 카스또르, 카스톨.

 

 

카스토르 자료

성 카스토르는 350년 이후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의 님(Nimes)에서 부유한 상류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 남동부의 해안도시인 프레쥐스(Frejus)의 초대 주교로 알려진 성 레온티우스(Leontius, 12월 1일)와는 형제 사이로 알려져 있다.

어려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성 카스토르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어머니와 함께 아를(Arles)로 가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는 젊어서 마르세유(Marseilles)의 어느 부유한 과부와 결혼한 경력이 있지만 둘 다 결혼생활보다는 수도 생활을 하기로 합의하고 헤어졌다. 아내는 수녀원에 들어가고 성 카스토르는 프로방스(Provence) 지방 카바용(Cavaillon) 인근에 수도원을 세우고 원장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설립한 수도원 형제들에게 수도 생활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을 주고자 힘썼다. 그래서 그는 416년경에 친구이면서 이집트 수도승들의 생활과 영성에 대해 오랜 경험과 깊은 학식을 지니고 마르세유(Marseille)에 정착한 성 요한 카시아누스(Joannes Cassianus, 7월 23일)에게 부탁해 “공주 수도 생활 제도서”(De Institutis coenobiorum)를 작성하도록 요청했다.

그 후 419년에 수도원 인근 압트의 주교가 선종하자 그의 뜻과는 상관없이 신자들의 요청에 따라 후임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압트에도 수도원을 설립했고, 평생 수도 생활에 큰 관심을 두고 수도자처럼 살고자 노력했다.

그는 423년경 평화롭게 선종한 후 인근 수도원 성당에 묻혔다가 후대에 건립된 압트 주교좌대성당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에 그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9월 2일에 축일을 기념했었는데,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21일 목록에 압트의 주교 성 카스토르에 관한 내용을 추가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팜필로

 

  • 가톨릭 성인 이름
    Pamphil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팜필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빰삘로, 빰삘루스, 빰필로, 빰필루스, 팜필루스.

 

 

팜필로 자료

“로마 순교록”은 고대 ‘로마(Roma)의 소금 길’로 알려진 살라리아 가도(Via Salaria)에서 순교한 성 팜필루스(또는 팜필로)에 대해 그 이름만 전해주고 있다. 그 외에 알려진 내용은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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