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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6일 여자세례명 4가지

피어나네 2023. 10. 18.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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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6일에 해당하는 여자세례명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마리아 마르가리타 듀빌, 막시마, 헤드비지스, 총 4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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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6일 남자세례명 갈로, 네레오, 룰로, 마르티니아노, 뭄몰리노, 발데리코, 베르카리오, 베르트란드, 사투르니노, 사투리아노, 아나스타시오, 암브로시오, 엘리피오, 제라르도 마젤라, 플로렌티노, 총 15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10월 16일
천주교 여자세례명
4가지

 

 

 

 

10월 16일 여자세례명 목록

 

  1.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2. 마리아 마르가리타 듀빌

  3. 막시마

  4. 헤드비지스

 

10월 16일 천주교 여자세례명 4가지

 

 

1.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 가톨릭 성인 이름
    Margaret Mary Alacoque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수녀, 환시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47-1690년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메리, 알라콕.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자료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Margarita Maria Alacoque)는 1647년 6월 22일 프랑스 샤롤레(Charolais) 지방 베로브르(Verosvre)의 로트쿠르(Lauthecourt)에서 클로드 알라코크(Claude Alacoque)와 필리베르트 라멩(Philiberte Lamyn)의 7남매 중 다섯 번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대대로 많은 토지를 소유한 귀족 가문의 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숲에서 기도하고 성체 앞에 머무는 것을 좋아했다. 4살 때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후 그녀와 그녀의 가족은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며 지냈다. 성녀 알라코크는 대모의 집인 코르슈발(Corechval) 성(城)으로 보내져 8살까지 생활하면서 상류 가정의 예의범절과 교양을 배웠다.

그 후 그녀는 클라라회에서 운영하는 샤롤레의 기숙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첫영성체를 한 성녀 알라코크는 클라라회 수녀들의 생활에 감동해 수도 생활을 더 갈망하게 되었다. 하지만 신경계통의 병을 얻어 2년 만에 학교를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5년 정도 병상에 누워 지냈는데, 자신의 병만 낫게 해준다면 일생을 성모 마리아의 딸로 자신을 봉헌하며 살겠다고 간절히 기도했다. 기적적으로 병이 나은 후 그녀는 집안의 재산을 공동소유한 친척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학대를 받았다.

1669년 견진성사를 받은 그녀는 결혼을 거부하고 평소 생각해온 수도 생활을 실천하고자 1671년 6월 20일 파레르모니알(Paray-le-Monial)의 성모 방문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1월 6일 ‘마르가리타 마리아’라는 수도명으로 수도서약을 했다. 그녀는 엄격한 금욕과 기도 생활로 모범적인 수녀였으나 유머 없는 수녀로 통했던 것 같다.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는 1673년부터 1675년 사이에 예수 성심의 환시를 4번이나 경험하였다. 이 환시에서 그리스도는 그녀에게 당신의 성심께 대한 신심을 널리 전하는 도구로 선택되었음을 알렸다.

특별히 첫 번째 금요일에 영성체할 것과 매주 목요일 밤에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고 고통에 동참하는 성시간을 통해 구속사업에 참여하라는 신심을 그녀에게 알려주셨다. 그리고 성체 축일 다음 금요일을 당신의 성심을 공경하는 축일로 정하도록 요구하셨다.

그녀는 자신이 환시 중에 받은 그리스도의 교육을 따르려는 노력 중에 장상으로부터 수많은 퇴짜를 받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고 노력하여 온갖 장애를 극복해 나갔다.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발현 문제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고, 장상뿐만 아니라 동료 수녀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녀는 당시 수녀원의 고해신부였던 파레르모니알의 예수회 원장인 성 클로드 라 콜롱비에르(Claude La Colombiere, 2월 15일) 신부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그는 면담을 통해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의 환시가 올바르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1년 뒤 그는 영국으로 떠나게 되었고, 새로 부임한 원장 수녀는 신중한 자세를 취하기 위해 그녀에게 더욱 엄격하고 냉정하게 대했다.

1684년 원장으로 선출된 멀랭(Marie Christine Melin) 수녀는 덕과 재능이 출중하고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멀랭 수녀는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에 대한 수녀원 내의 반대를 종식하고 그녀를 딸처럼 돌보아 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부원장과 수련장직을 맡김으로써 수녀원 안에서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 예식이 가능하게 되었다.

1686년 초에는 수녀원에서 예수 성심 축일을 거행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고, 2년 후에는 예수 성심께 봉헌된 경당이 수녀원 뜰에 세워졌고, 곧이어 예수 성심 축일을 지내는 관습이 전 세계의 성모 방문 수녀회로 파급되기 시작하였다.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는 1690년 10월 17일 병으로 수녀원에서 선종할 때까지 예수 성심 공경의 신심을 전파하는 사도로서 활동하였다. 그녀는 1864년 9월 18일에 시복되었으며, 1920년 5월 13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와 성 요한 에우데스(Joannes Eudes, 8월 19일) 그리고 그녀의 고해신부였던 성 클로드 라 콜롱비에르는 ‘성심의 성인들’로 불린다.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은 1765년에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해 공식적으로 선포되었는데, 이는 그녀의 선종 75년 만의 일이었다.

1969년 전례 개혁에서는 예수 성심 축일을 대축일로 승격하고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지낸 다음 금요일에 지키도록 함으로써 성체의 신비와 예수 성심 사이 불가분의 관계를 더욱 분명히 천명하였다.

그리고 전례 개혁 이후 교회 전통대로 선종한 날인 10월 17일에 전례적으로 기념하던 그녀의 축일이 전날인 10월 16일로 변경되었다. 이는 안티오키아(Antiochia)의 성 이냐시오(Ignatius)의 축일이 보편 전례력의 10월 17일로 옮겨 지정되면서 중복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10월 16일 목록에서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의 성덕을 기록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마리아 마르가리타 듀빌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Margaret d'Youville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과부,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01-1771년 캐나다

 

 

마리아 마르가리타 듀빌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두비유,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따, 말가리타, 메리, 미르얌, 미리암.

 

 

마리아 마르가리타 듀빌 자료

성녀 마리아 마르가리타 듀빌(Maria Margarita d'Youville, 또는 Maria Margarita Dufrost de Lajemmerais)은 1701년 10월 15일 캐나다 퀘벡(Quebec)주 몬트리올(Montreal) 교외 바렌(Varennes)에서 태어나 캐나다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성인이 된 인물이다. 그녀는 크리스토퍼 뒤프로스트 드 라제므레(Christopher Dufrost de Lajemmerais)와 마리 르네 골티에(Marie-Renee Gaultier) 사이의 여섯 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7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극심한 가난 속에서 고생하던 그녀는 증조부인 피에르 부셰(Pierre Boucher)의 영향으로 퀘벡의 우르술라회에서 2년을 더 공부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어머니의 둘도 없는 협조자로서 동생들의 교육을 도맡게 되었다.

1722년 성녀 마리아 마르가리타는 프랑수아 듀빌(Francois d'Youville)과 결혼을 하고 시댁에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큰 고통이었다. 남편이 가정을 꾸려 나가는 데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의 잦은 외박과 인디언과의 불법 주류 거래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았다.

남편이 심각한 병에 걸렸을 때 이미 그녀는 여섯 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결국 1730년 29살의 나이로 남편을 잃은 그녀는 절망적인 가난을 경험하게 되었고, 여섯 명의 자녀 중 네 명이 유아 때 사망하는 고통을 겪었다.

이런 모든 일 중에서도 성녀 마리아 마르가리타는 자신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키워나갔고, 모든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부드러운 사랑을 더욱 깊이 경험하였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모든 이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녀는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많은 자선 사업을 하였다.

훗날 사제가 된 두 명의 아들을 교육하고 눈먼 여성을 집으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얼마 가지 않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함께 나눌 세 명의 젊은 여성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1737년 12월 31일 그들은 하느님께 서원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래서 성녀 마리아 마르가리타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몬트리올의 애덕의 수녀회, 일명 ‘회색 수녀회’의 설립자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일생을 통해 언제나 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위해 사회의 관습과 싸웠다. 자신의 친척과 이웃들에게 받는 조롱과 비웃음에도 당당하게 맞섰다. 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에 힘쓰던 중 공동체의 집이 화재로 전소되고 동료 중 한 명의 죽음을 경험하며 건강이 크게 나빠지기도 했지만 그 모든 일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헌신하고자 하는 그녀의 신심을 더 깊게 만들었다.

1745년 2월 2일 그녀와 초창기 두 명의 동료들은 공동으로 소유한 것들을 저당 잡혀서 도움이 필요한 수많은 사람들을 돕기로 하였다. 2년 후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라고 불리던 성녀 마리아 마르가리타는 다 쓰러져가던 몬트리올의 한 병원을 맡아줄 것을 요청받았다. 그래서 그녀와 동료 수도자들은 그 병원을 재건하여 가장 버림받은 이들을 돌보는데 사용하였다. 동료 수녀들과 평신도 협력자들의 도움으로 그녀는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볼 수 있는 재단을 설립하게 되었다.

1765년 발생한 화재로 병원이 파괴하였지만 그녀의 신앙과 용기마저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동료 수녀들과 병원에서 지내던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앙 안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보고 찬미 드리기를 요청하였다. 64살의 나이에 그녀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쉼터의 재건을 맡았다.

인생 전체를 통해 가난한 이들에게 자신을 내어준 성녀 마리아 마르가리타는 결국 지친 몸을 이끌고 1771년 12월 23일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녀는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 봉사한 사랑하는 어머니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성녀 마리아 마르가리타 듀빌은 비록 한 명의 여성이었지만 그녀가 가난한 이들을 돌보던 탁월한 노력은 널리 그리고 멀리 퍼져나갔다. 그녀가 설립한 수녀회는 캐나타 전역은 물론 미국과 남아메리카 그리고 아프리카 등지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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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성 요한 23세(Joannes XXIII)는 1959년 5월 3일에 그녀를 복자품에 올리면서 사랑과 연민으로 모든 이에게 다가가는 수녀회의 사명에 걸맞게 그녀에게 ‘보편적 애덕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붙여주었다.

그녀는 많은 고아들과 미래를 걱정하는 청소년들, 희망 없이 살며 환멸을 느낀 소녀들, 보상받지 못하는 사랑과 미망인들의 고통스럽고 불행한 환경에 큰 위로를 주었다.

또한 그녀는 다른 이들을 돕는데 자신의 삶을 봉헌한 이들에게 더욱 자비로운 정신으로 다가갔다. 결국 그녀는 1990년 12월 9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녀의 축일은 캐나다에서 10월 16일 또는 4월 11일에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막시마

 

  • 가톨릭 성인 이름
    Maxima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58년

 

 

막시마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막씨마.

 

 

막시마 자료

아리우스파(Arianism) 왕인 젠세릭이 아프리카에서 270명의 그리스도인들을 학살했을 때, 어느 반달족의 노예였던 성 마르티니아누스(Martinianus)와 사투리아누스(Saturianus)가 그들의 동료 노예였던 성녀 막시마에 의하여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들은 이방인 주인의 갖은 학대를 무릅쓰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켰으나 결국은 쫓겨나고 말았다. 그 후 그들은 어느 사제의 도움을 받아서 많은 야만인들을 개종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 후 그들은 평화롭게 일생을 마쳤다는 전기가 있는 반면에, 반달족의 박해 기록에 의하면 다소 그 내용이 다르다.

무사였던 마르티니아노는 주인이 막시마와 결혼하라고 강요하였으나, 막시마가 동정서원을 발한 것을 알고는 결혼하지 않고 오히려 이 두 사람이 어느 수도원으로 도망하였다는 것이다.

그 후 그들은 노예에서 해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로마 순교록에는 그들이 모두 아프리카 270명의 순교자들 속에 포함된다고 기록하여 순교자로 공경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헤드비지스

 

  • 가톨릭 성인 이름
    Hedwig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과부, 수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174?-1243년 슐레지엔

 

 

헤드비지스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야드비가, 헤드비가, 헤드비그, 헤드비제스, 헤드비히, 헤트비히.

 

 

헤드비지스 자료

성녀 헤드비지스(Hedwigis)는 독일 바이에른(Bayern)의 안덱스(Andechs) 성에서 베르톨트(Berthold) 공작의 여덟 자녀 중 하나로 태어났다.

그녀는 프랑코니아(Franconia)의 키칭겐(Kitzingen)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12살 때에 18살의 폴란드 왕자이자 나중에 슐레지엔(중부 유럽의 역사적 지역으로 대부분 폴란드 남서부 지역이나 체코, 슬로바키아, 독일에 걸쳐 있다)의 공작이 된 하인리히 1세(Henry the Bearded)와 결혼하였다.

남편은 매우 열심하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아내의 신앙생활과 자선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그는 아내의 요청에 따라 폴란드 브로츠와프(Wroclaw)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참사 수도회의 설립을 후원하였고, 그 외에도 여러 수도회에 아낌없는 후원을 보냈다.

또한 1202년 노이마크트(Neumarkt)의 병원에서 나환자 여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아내의 활동에 감동해 트레브니츠(Trebnitz)에 있는 자신의 땅에 시토회 수녀원을 지어 기부하였다. 이 수녀원은 슐레지엔(독일어 지명으로 영어로는 실레지아 Silesia, 폴란드어로는 실롱스크 Slask로 부른다) 지방에 세워진 첫 번째 여자 수도원이다.

성녀 헤드비지스와 하인리히 1세 사이에는 7명의 자녀가 있었다. 1238년에 남편과 사별한 성녀 헤드비지스는 남편의 도움을 받아 세운 트레브니츠 수녀원에서 수도 생활에만 전념하여 큰 덕을 쌓았다. 그녀는 농사를 짓기 위해 척박한 슐레지엔 땅을 개간하고 많은 독일 이주민을 초대해 새로운 도시와 촌락들을 만들었다.

그렇게 늘 주위 사람들의 물질적 · 영성적 이익을 위하여 헌신했으나, 성녀 헤드비지스 자신은 극도의 가난을 실천하며 하느님만을 섬겼다. 또한 수도복을 입고 딱딱한 침대에서 자며 추운 날씨에도 신발을 손에 들고 맨발로 다니며 기도 생활에 전념하는 등 고행과 절제의 생활을 실천했는데, 적어도 한겨울만은 신발을 신고 다니라는 브로츠와프 주교의 조언에 순종했다고 한다.

헤트비히, 야드비가(Jadwiga) 등으로도 불리는 성녀 헤드비지스는 1243년 10월 15일 자기 딸 제르트루다(Gertrude)가 원장으로 있던 트레브니츠의 시토회 수녀원에서 세상을 떠나 남편과 함께 수녀원 성당에 안치되었다.

살아 있는 동안에도 이미 성인으로 불렸던 그녀는 1267년 3월 26일 교황 클레멘스 4세(Clemens IV)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폴란드와 슐레지엔 지방의 수호성인으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20세기에 와서 성녀 헤드비지스는 폴란드와 독일의 화해의 수호자로서 공경받았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성녀 헤드비지스가 10월 15일에 트레브니츠 수녀원에서 선종했음을 언급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헌신하고, 가난한 사람과 나병 환자를 위한 병원을 설립했으며, 남편과 사별한 후 여생을 수도원에서 보낸 바이에른 출신의 폴란드 공작부인인 성녀 헤드비지스를 10월 16일에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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