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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남자세례명 18가지

피어나네 2023. 11. 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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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다치오, 디오니시오 후지시마, 리치니오, 마르첼로, 마투리노, 베니뇨,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 베드로 오니즈카 산다유, 비고르, 세베리노, 아우스트레모니오, 야고보, 요한, 율리아노, 체사리오 (부제), 체사리오 (순교자), 카드판, 클레멘스 큐에몬, 총 18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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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여자세례명 드보라, 라헬, 마리아, 율리아나, 치레니아, 총 5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11월 1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8가지

 

 

 

 

11월 1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다치오

  2. 디오니시오 후지시마

  3. 리치니오

  4. 마르첼로

  5. 마투리노

  6. 베니뇨

  7.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

  8. 베드로 오니즈카 산다유

  9. 비고르

  10. 세베리노

  11. 아우스트레모니오

  12. 야고보

  13. 요한

  14. 율리아노

  15. 체사리오 (부제)

  16. 체사리오 (순교자)

  17. 카드판

  18. 클레멘스 큐에몬

 

11월 1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8가지

 

 

1. 다치오

 

  • 가톨릭 성인 이름
    Dac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7세기?

 

 

다치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다치우스, 다키오, 다키우스, 데치오, 데치우스, 데키오, 데키우스.

 

 

다치오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11월 1일 목록에서 성 카이사리우스(Caesarius)와 성 다키우스(또는 다치오)와 다섯 명의 다른 동료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Damascous)에서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역사적 자료의 부족함 등으로 인해 더는 그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성 다키우스는 데키우스(Deci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디오니시오 후지시마

 

  • 가톨릭 성인 이름
    Dionysius Fugishima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사,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84-1622년 시마바라

 

 

디오니시오 후지시마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푸지쉬마, 푸지시마, 후지쉬마.

 

 

디오니시오 후지시마 자료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Petrus Paulus Navarro)는 1560년 이탈리아 남부 바실리카타(Basilicata)의 라이노(Laino)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1579년 놀라(Nola)에서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수련기부터 일본 선교를 희망했던 그의 뜻이 받아들여져 1884년에 인도의 고아(Goa)로 유학 갔고, 이듬해 그곳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1년 후인 1586년 8월에 일본 규수 북부 해안의 히라도섬(Hirado Island, 平戶島)에 도착했다.

그는 시코쿠(Shikoku)와 혼슈(Honshu)의 선교부에서 봉사하면서 일본 선교를 위해 언어뿐만 아니라 일본 문화에 대해 배우고 그것들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했다. 이를 통해 일본인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기들의 문화와 전통을 버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1612년 에도막부의 초대 쇼군[將軍]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금교령을 공포하고 1614년에 선교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추방령이 시행되자 일본에서 활동하던 80여 명의 예수회 동료들이 해외로 이동했고, 그를 포함해 24명은 일본에 남아 비밀리에 선교활동을 지속했다.

그는 주로 큐슈 서부의 시마바라 지역에서 거지, 장작 장수, 농부 등으로 위장하며 사제직을 수행했다. 이때 그는 일본인으로 교리 교사였던 베드로 오니즈카 산다유(Petrus Onizuka Sandayu)와 디오니시우스 후지시마(또는 디오니시오 후지시마)의 도움을 받았다.

베드로 오니즈카 산다유는 10대 소년이었지만 열심한 신자인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선교사들과 자주 만나 신앙생활을 했다. 디오니시우스 후지시마는 결혼했었으나 아내가 그를 떠난 1615년부터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 신부와 함께 지내며 그를 도왔다.

1621년 12월 말경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 신부와 그와 함께 활동하던 두 명의 교리 교사와 그들이 데리고 있던 하인 클레멘스 큐에몬(Clemens Kyuemon)이 모두 사제 사냥꾼에게 붙잡혔다. 다행히 그들을 체포한 아리마(Arima, 有馬)의 다이묘(大名)는 신자는 아니었지만 가톨릭에 호의적이어서 종종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고 다이묘와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다.

다이묘는 그들이 처형될 것을 알고 비밀리에 마카오로 탈출시키려고 했으나 1622년 10월 27일 상부로부터 그들을 화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 신부와 동료들은 슬퍼하기보다는 기뻐하며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처형일인 11월 1일,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 신부는 마지막으로 모든 성인 대축일 미사를 집전하면서 예수회원이 되기를 청하는 베드로 오니즈카 산다유와 디오니시우스 후지시마의 청을 받아들여 그들의 서원식을 거행했다.

오후가 되자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 신부와 새로 서원한 두 명의 수사와 신심 깊은 하인 클레멘스 큐에몬은 군인들에 의해 나가사키(Nagasaki) 시마바라의 바닷가 형장으로 끌려가 화형을 당해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그들은 모두 1867년 5월 7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다른 201명의 순교자와 함께 복자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리치니오

 

  • 가톨릭 성인 이름
    Licin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40?-610년경 앙제

 

 

리치니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레신, 레진, 리치니우스, 리키니오, 리키니우스.

 

 

리치니오 자료

프랑스 메로빙거 왕가 출신인 성 리키니우스(또는 리치니오)는 그의 사촌인 국왕 클로타르 1세(Chlothar I)의 궁에 들어가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높은 직책으로 올랐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한 번도 빠뜨린 적이 없었다. 그는 단식과 기도, 그리고 항상 하느님과 함께 하는 자세가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후임 왕인 킬페리크 1세(Chilperic I)는 그를 앙주(Anjou, 프랑스 중서부에 있는 옛 지명)의 공작으로 봉하고 친구로 지냈다. 그러다가 앙제의 주교가 선종하자 주민들이 그를 주교로 추대하였다. 그는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1월 17일) 주교로부터 직접 서품을 받았다.

왕가와의 관계 덕분에 그는 주교로 취임하자마자 굶주린 이를 돌보고 포로들을 귀향시키며 교구민들의 영육을 따뜻이 돌볼 수 있었다. 그의 설교는 매우 감동적이고 힘찼으며, 주교직을 수행하는 동안에도 자주 은둔소를 찾아 겸손과 쇄신의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그는 레진(Lezin, Lesin)으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마르첼로

 

  • 가톨릭 성인 이름
    Marcell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436년경? 파리

 

 

마르첼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셀로, 마르셀루스, 마르첼루스, 마르켈로, 마르켈루스.

 

 

마르첼로 자료

성 마르첼루스(또는 마르첼로)는 파리의 어느 보잘것없는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뛰어난 성덕으로 말미암아 만인의 공경을 받는다. 그는 파리의 주교인 프루덴티우스(Prudentius)의 격려와 추천으로 공부를 마치고 사제품을 받았는데, 이때 그에게서 놀라운 은혜가 수없이 나타났다.

프루덴티우스를 계승해 파리의 주교가 되었을 때는 그의 기도와 권위 덕분에 야만인들의 침략을 손쉽게 격퇴할 수 있었다. 그와 관련된 기적 중에는 생전에 남편에게 불충실했던 한 여인의 무덤에 사는 큰 뱀(용)을 쫓아내 친척과 마을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준 이야기도 있다.

친척들의 부탁으로 무덤을 찾은 성 마르첼루스는 자신의 목장(牧杖)으로 큰 뱀의 머리를 세 번 내리치고 망토 끝으로 눈을 가리며 사막이나 바다로 떠나라고 명령하자 큰 뱀이 겁을 먹고 떠났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센(Seine) 강변에 있는 마르첼루스 카타콤바에 안장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마투리노

 

  • 가톨릭 성인 이름
    Matur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초? 상스

 

 

마투리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뚜리노, 마뚜리누스, 마투리누스, 마투린, 마튀랭, 마튀렝.

 

 

마투리노 자료

성 마투리누스(또는 마투리노)는 프랑스 중북부 상스의 라르샹(Larchant)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이교도로서 그리스도교의 복음 말씀 듣기를 역겨워했을 뿐 아니라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황제로부터 그리스도교를 근절시키라는 명령까지 받았다.

하지만 성 마투리누스는 복음 말씀 듣기를 매우 좋아해 12살 때에 이미 세례받기에 적당할 정도로 교리를 배워 상스의 주교인 폴리카르푸스(Polycarpus)에게 비밀리에 세례를 받았다. 전설에 따르면, 세례성사를 받은 후 그는 기적을 행하기 시작했고, 특별히 악령을 쫓아내는 구마의 특은을 받아 마귀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을 치유해주었다.

성 마투리누스의 개종으로 인해 결국 그의 부모도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20살의 나이에 폴리카르푸스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고, 프랑스 중부 가티네(Gatinais) 지방을 두루 다니며 설교하여 나중에 그 지방의 사도이자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게 되었다.

구마자로서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마침 악령에 사로잡혀 고생하던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며느리 플라비아 막시미아나 테오도라(Flavia Maximiana Theodora)의 치료를 위해 황제의 요구로 로마에 불려갔다. 그의 기도로 결국 악령은 테오도라의 몸에서 쫓겨났다.

그는 로마에서 3년을 더 지내며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황제에게 탄원을 올렸다. 11월 1일 로마에서 선종한 그는 로마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알려진 성인의 뜻에 따라 다시금 고향인 상스의 라르샹으로 옮겨져 높은 공경을 받았다. 그는 마투린(Mathurin)으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베니뇨

 

  • 가톨릭 성인 이름
    Benig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세기경 디종

 

 

베니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니그노, 베니그누스, 베닉누스, 베닝누스.

 

 

베니뇨 자료

성 베니뇨에 대한 공경은 디종의 옛 무덤을 발견한 6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 그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그다지 많지 않은데, 그가 프랑스 리옹(Lyon)에서 선교 사제로 활약하다가 디종 근교인 에파니(Epagny)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온다.

그의 석관이 발견된 무덤 자리에 성 베니뇨 수도원이 건립되었고, 후대에 그 자리에 더 큰 성당이 세워졌다. 그 후 지진 등으로 성당이 무너진 뒤 석관을 꺼내 그에게 봉헌된 디종 주교좌성당 지하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6세기에 기록된 “성 베니뇨의 수난기”에 따르면, 그는 스미르나(Smyrna) 태생으로 그곳의 주교인 성 폴리카르푸스(Polycarpus, 2월 23일)의 제자로 추정된다.

그는 다른 동료와 함께 갈리아(Gallia) 지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지중해 북부 코르시카(Corsica)섬에 난파했다가 마르세유(Marseille)로 가서 론(Rhone)강과 손(Saone)강을 거쳐 오툉(Autun)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귀족 파우스투스(Faustus)의 아들인 성 심포리아누스(Symphorianus, 8월 22일)를 개종시켰는데, 성 심포리아누스는 후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오툉에서 순교했다.

성 베니뇨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갈리아 지방 여러 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수많은 기적을 행했다. 그는 에파니에서 체포되어 심문과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끝까지 배교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쇠 막대기로 죽을 때까지 매를 맞고 심장이 뚫리는 고문을 받고 순교했다. 그의 시신은 박해자들을 속이기 위해 이교도들의 것처럼 보이는 무덤에 안장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Paul Navarro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60-1622년 시마바라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울로, 바울루스, 베드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파울로, 파울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폴, 피터.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 자료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Petrus Paulus Navarro)는 1560년 이탈리아 남부 바실리카타(Basilicata)의 라이노(Laino)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1579년 놀라(Nola)에서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수련기부터 일본 선교를 희망했던 그의 뜻이 받아들여져 1884년에 인도의 고아(Goa)로 유학 갔고, 이듬해 그곳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1년 후인 1586년 8월에 일본 규수 북부 해안의 히라도섬(Hirado Island, 平戶島)에 도착했다.

그는 시코쿠(Shikoku)와 혼슈(Honshu)의 선교부에서 봉사하면서 일본 선교를 위해 언어뿐만 아니라 일본 문화에 대해 배우고 그것들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했다. 이를 통해 일본인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기들의 문화와 전통을 버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1612년 에도막부의 초대 쇼군[將軍]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금교령을 공포하고 1614년에 선교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추방령이 시행되자 일본에서 활동하던 80여 명의 예수회 동료들이 해외로 이동했고, 그를 포함해 24명은 일본에 남아 비밀리에 선교활동을 지속했다.

그는 주로 큐슈 서부의 시마바라 지역에서 거지, 장작 장수, 농부 등으로 위장하며 사제직을 수행했다. 이때 그는 일본인으로 교리 교사였던 베드로 오니즈카 산다유(Petrus Onizuka Sandayu)와 디오니시우스 후지시마(Dionysius Fujishima)의 도움을 받았다.

베드로 오니즈카 산다유는 10대 소년이었지만 열심한 신자인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선교사들과 자주 만나 신앙생활을 했다. 디오니시우스 후지시마는 결혼했었으나 아내가 그를 떠난 1615년부터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 신부와 함께 지내며 그를 도왔다.

1621년 12월 말경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 신부와 그와 함께 활동하던 두 명의 교리 교사와 그들이 데리고 있던 하인 클레멘스 큐에몬(Clemens Kyuemon)이 모두 사제 사냥꾼에게 붙잡혔다. 다행히 그들을 체포한 아리마(Arima, 有馬)의 다이묘(大名)는 신자는 아니었지만 가톨릭에 호의적이어서 종종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고 다이묘와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다.

다이묘는 그들이 처형될 것을 알고 비밀리에 마카오로 탈출시키려고 했으나 1622년 10월 27일 상부로부터 그들을 화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 신부와 동료들은 슬퍼하기보다는 기뻐하며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처형일인 11월 1일,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 신부는 마지막으로 모든 성인 대축일 미사를 집전하면서 예수회원이 되기를 청하는 베드로 오니즈카 산다유와 디오니시우스 후지시마의 청을 받아들여 그들의 서원식을 거행했다.

오후가 되자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 신부와 새로 서원한 두 명의 수사와 신심 깊은 하인 클레멘스 큐에몬은 군인들에 의해 나가사키(Nagasaki) 시마바라의 바닷가 형장으로 끌려가 화형을 당해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그들은 모두 1867년 5월 7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다른 201명의 순교자와 함께 복자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베드로 오니즈카 산다유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Onizuka Sandayu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사,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04-1622년 시마바라

 

 

베드로 오니즈카 산다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드루스, 오니주까, 오니주카, 오니즈까,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 오니즈카 산다유 자료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Petrus Paulus Navarro)는 1560년 이탈리아 남부 바실리카타(Basilicata)의 라이노(Laino)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1579년 놀라(Nola)에서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수련기부터 일본 선교를 희망했던 그의 뜻이 받아들여져 1884년에 인도의 고아(Goa)로 유학 갔고, 이듬해 그곳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1년 후인 1586년 8월에 일본 규수 북부 해안의 히라도섬(Hirado Island, 平戶島)에 도착했다.

그는 시코쿠(Shikoku)와 혼슈(Honshu)의 선교부에서 봉사하면서 일본 선교를 위해 언어뿐만 아니라 일본 문화에 대해 배우고 그것들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했다. 이를 통해 일본인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기들의 문화와 전통을 버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1612년 에도막부의 초대 쇼군[將軍]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금교령을 공포하고 1614년에 선교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추방령이 시행되자 일본에서 활동하던 80여 명의 예수회 동료들이 해외로 이동했고, 그를 포함해 24명은 일본에 남아 비밀리에 선교활동을 지속했다.

그는 주로 큐슈 서부의 시마바라 지역에서 거지, 장작 장수, 농부 등으로 위장하며 사제직을 수행했다. 이때 그는 일본인으로 교리 교사였던 베드로 오니즈카 산다유(Petrus Onizuka Sandayu)와 디오니시우스 후지시마(Dionysius Fujishima)의 도움을 받았다.

베드로 오니즈카 산다유는 10대 소년이었지만 열심한 신자인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선교사들과 자주 만나 신앙생활을 했다. 디오니시우스 후지시마는 결혼했었으나 아내가 그를 떠난 1615년부터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 신부와 함께 지내며 그를 도왔다.

1621년 12월 말경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 신부와 그와 함께 활동하던 두 명의 교리 교사와 그들이 데리고 있던 하인 클레멘스 큐에몬(Clemens Kyuemon)이 모두 사제 사냥꾼에게 붙잡혔다. 다행히 그들을 체포한 아리마(Arima, 有馬)의 다이묘(大名)는 신자는 아니었지만 가톨릭에 호의적이어서 종종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고 다이묘와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다.

다이묘는 그들이 처형될 것을 알고 비밀리에 마카오로 탈출시키려고 했으나 1622년 10월 27일 상부로부터 그들을 화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 신부와 동료들은 슬퍼하기보다는 기뻐하며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처형일인 11월 1일,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 신부는 마지막으로 모든 성인 대축일 미사를 집전하면서 예수회원이 되기를 청하는 베드로 오니즈카 산다유와 디오니시우스 후지시마의 청을 받아들여 그들의 서원식을 거행했다.

오후가 되자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 신부와 새로 서원한 두 명의 수사와 신심 깊은 하인 클레멘스 큐에몬은 군인들에 의해 나가사키(Nagasaki) 시마바라의 바닷가 형장으로 끌려가 화형을 당해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그들은 모두 1867년 5월 7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다른 201명의 순교자와 함께 복자품에 올랐다 .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비고르

 

  • 가톨릭 성인 이름
    Vigo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37년 바이외

 

 

비고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없음.

 

 

비고르 자료

프랑스 아르투아(Artois) 태생인 성 비고르는 아라스(Arras)에서 성 베다스투스(Vedastus, 2월 6일)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는 사제가 될 결심이었지만 귀족 출신인 아버지의 반대와 진노가 두려워 빈손으로 집을 나와 친구 한 명과 함께 프랑스 바이외의 라비에르(Raviere) 계곡으로 도망을 갔다.

그들은 여기서 주민들에게 설교도 하고 교육도 시행했는데, 그러던 중에 성 비고르는 사제품을 받게 되었다. 그 후 513년, 바이외의 주교가 된 그는 주민들이 언덕 위의 거대한 이교도 신상 앞에서 예배드린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무너뜨린 후 바로 그 자리에다 수도원을 세웠다.

그 후 그 도시는 그를 기념해 생비괴르르그랑(Saint-Vigeur-le-Grand)이라 불리게 되었다. 성 비고르는 볼뤼지앵(Volusien)이라는 영주의 땅에서 백성을 괴롭히며 공포를 조성하던 용을 쫓아낸 이유로 교회미술에서 용과 함께 등장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세베리노

 

  • 가톨릭 성인 이름
    Sever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승

  • 활동 연도와 지역
    +699년경 티볼리

 

 

세베리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세베리누스, 쎄베리노, 쎄베리누스.

 

 

세베리노 자료

베네딕토회 수도승이었던 성 세베리누스(또는 세베리노)는 이탈리아 로마(Roma) 근교의 티볼리에서 은수자로서 살았다. 그의 유해는 그 도시의 성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성당에 안치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아우스트레모니오

 

  • 가톨릭 성인 이름
    Austremon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선교사,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3세기 클레르몽

 

 

아우스트레모니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스트레모니오, 스트레모니우스, 아우스트레모니우스.

 

 

아우스트레모니오 자료

역사가인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1월 17일) 주교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성 아우스트레모니우스(또는 아우스트레모니오)는 3세기 중엽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이후 오늘날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갈리아 지방의 재복음화를 위해 성 파비아누스(Fabianus, 1월 20일) 교황에 의해 파견된 7명의 선교사 주교인 ‘갈리아의 사도들’ 중 한 명이라고 한다.

로마에서 파견된 7명의 사도는 클레르몽에 도착해 그곳의 초대 주교가 된 성 아우스트레모니우스 외에 나르본(Narbonne)의 성 바오로(Paulus, 3월 22일), 투르(Tours)의 성 가티아누스(Gatianus, 12월 18일), 툴루즈(Toulouse)의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11월 29일), 아를(Arles)의 성 트로피무스(Trophimus, 12월 29일), 파리(Paris)의 성 디오니시우스(Dionysius, 10월 9일), 리모주(Limoges)의 성 마르티알리스(Martialis, 6월 30일)가 있다. 그중에서 툴루즈의 성 사투르니누스와 파리의 성 디오니시우스는 순교하였다.

한편 중세 때 갈리아의 일곱 사도를 사도 시대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사도적 전통과 연결하여 지역교회의 전통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에 따르면 성 아우스트레모니우스는 사도 성 베드로(Petrus)가 직접 파견한 72명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개종한 유다인 출신으로 순교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하지만 역사적 신빙성을 기대할 수는 없다. 옛 “로마 순교록”은 그에 대해 오베르뉴(Auvergne) 지방의 클레르몽이란 도시의 초대 주교라고만 간단히 기록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오늘날 프랑스의 클레르몽페랑(Clermont-Ferrand)에서 그 도시에 구원의 말씀을 전한 성 아우스트레모니우스 주교를 기념한다고만 기록하였다. 그는 스트레모니우스(Stremoni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야고보

 

  • 가톨릭 성인 이름
    Jame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44년

 

 

야고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야고버, 야고부스, 야코보, 야코부스, 자크, 제임스.

 

 

야고보 자료

페르시아(Persia) 사람인 성 요한(Joannes) 주교와 성 야고보(Jacobus) 신부는 페르시아에서 사푸르 2세 왕의 박해 중에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요한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44년

 

 

요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자료

페르시아(Persia) 사람인 성 요한(Joannes) 주교와 성 야고보(Jacobus) 신부는 페르시아에서 사푸르 2세 왕의 박해 중에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율리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Jul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세기경

 

 

율리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율리아누스, 줄리안, 줄리언.

 

 

율리아노 자료

성 카이사리우스(Caesarius)는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Carthago)에 정착한 로마의 저명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그는 부제가 된 후 복음 선포에 헌신했는데, 배를 타고 로마로 여행하던 중 난파하여 라치오(Lazio) 해안가의 테라치나에 상륙했다.

그는 그곳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힘썼다. 그런데 당시 테라치나에서는 매년 1월 1일에 로마 제국의 번영과 황제의 건강을 위해 그 도시의 수호신인 아폴로에게 젊은이를 바치는 야만적인 관습이 있었다.

시민들은 몇 달 동안 준비한 뒤에 한 젊은이를 아폴로 신 앞에서 분신 제사로 지내고 그 시신은 절벽 위에서 바다로 던져버렸다.

아프리카에서 온 성 카이사리우스 부제는 우연히 이 야만적인 광경을 목격하고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시민들에게 그와 같은 미신적 행위를 중단할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연설을 했다.

아폴로 신전의 사제들은 자기들을 관습을 비난하는 그를 즉시 체포해 총독 앞으로 끌고 갔다. 성 카이사리우스는 심문을 받으면서 로마의 신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도록 강요받았으나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그의 기도로 인해 아폴로 신전이 무너져내렸다.

그는 거의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지냈다. 그 사이에 그 지역을 담당하는 로마의 총독 레온티우스(Leontius)를 개종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아마도 트라야누스 황제의 통치 중에 새로 온 총독의 명으로 자루에 넣어 묶인 상태로 절벽 위에서 바다로 던져져 순교하였다.

이때 그 지역의 사제인 성 율리아누스(Julianus, 또는 율리아노)도 같은 이유로 자루에 담겨 그와 함께 바다에 던져졌다. 이 두 순교자에 관한 이야기는 초기 순교록에서 늘 언급되었고, 로마에 6세기 이후 성 카이사리우스에게 봉헌된 성당이 건립되었다.

그는 테라치나의 수호성인으로서 아프리카의 성 카이사리우스로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익사의 위험과 홍수 등의 자연재해에서 보호를 청하는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체사리오 (부제)

 

  • 가톨릭 성인 이름
    Caesa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세기경 테라치나

 

 

체사리오 (부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체사리우스, 카에사리오, 카에사리우스, 카이사리오, 카이사리우스.

 

 

체사리오 (부제) 자료

성 카이사리우스(또는 체사리오)는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Carthago)에 정착한 로마의 저명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그는 부제가 된 후 복음 선포에 헌신했는데, 배를 타고 로마로 여행하던 중 난파하여 라치오(Lazio) 해안가의 테라치나에 상륙했다.

그는 그곳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힘썼다. 그런데 당시 테라치나에서는 매년 1월 1일에 로마 제국의 번영과 황제의 건강을 위해 그 도시의 수호신인 아폴로에게 젊은이를 바치는 야만적인 관습이 있었다. 시민들은 몇 달 동안 준비한 뒤에 한 젊은이를 아폴로 신 앞에서 분신 제사로 지내고 그 시신은 절벽 위에서 바다로 던져버렸다.

아프리카에서 온 성 카이사리우스 부제는 우연히 이 야만적인 광경을 목격하고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시민들에게 그와 같은 미신적 행위를 중단할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연설을 했다.

아폴로 신전의 사제들은 자기들을 관습을 비난하는 그를 즉시 체포해 총독 앞으로 끌고 갔다. 성 카이사리우스는 심문을 받으면서 로마의 신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도록 강요받았으나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그의 기도로 인해 아폴로 신전이 무너져내렸다. 그는 거의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지냈다.

그 사이에 그 지역을 담당하는 로마의 총독 레온티우스(Leontius)를 개종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아마도 트라야누스 황제의 통치 중에 새로 온 총독의 명으로 자루에 넣어 묶인 상태로 절벽 위에서 바다로 던져져 순교하였다.

이때 그 지역의 사제인 성 율리아누스(Julianus)도 같은 이유로 자루에 담겨 그와 함께 바다에 던져졌다. 이 두 순교자에 관한 이야기는 초기 순교록에서 늘 언급되었고, 로마에 6세기 이후 성 카이사리우스에게 봉헌된 성당이 건립되었다.

그는 테라치나의 수호성인으로서 아프리카의 성 카이사리우스로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익사의 위험과 홍수 등의 자연재해에서 보호를 청하는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체사리오 (순교자)

 

  • 가톨릭 성인 이름
    Caesa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7세기?

 

 

체사리오 (순교자)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체사리우스, 카에사리오, 카에사리우스, 카이사리오, 카이사리우스.

 

 

체사리오 (순교자)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11월 1일 목록에서 성 카이사리우스(또는 체사리오)와 성 다키우스(Dacius)와 다섯 명의 다른 동료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Damascous)에서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역사적 자료의 부족함 등으로 인해 더는 그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카드판

 

  • 가톨릭 성인 이름
    Cadf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6세기 웨일스

 

 

카드판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까드판.

 

 

카드판 자료

성 카드판은 6세기에 웨일스 지방의 여러 곳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그는 웨일스 북서부 귀네드(Gwynedd) 해안가에 있는 타이윈(Tywyn)과 포이스(Powys)의 작은 마을인 란가으팬(Llangadfan)에 교회와 수도원을 세웠다.

그리고 516년경 왕에게 바드시(Bardsey) 섬을 받아 그곳으로 이동해 수도원을 설립하고 오랫동안 원장으로 봉사하며 그 지역을 크게 발전시켰다고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8. 클레멘스 큐에몬

 

  • 가톨릭 성인 이름
    Clement Kyuemon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하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22년 시마바라

 

 

클레멘스 큐에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규에몬, 글레멘스, 끌레멘스, 클레멘쓰, 클레멘트.

 

 

클레멘스 큐에몬 자료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Petrus Paulus Navarro)는 1560년 이탈리아 남부 바실리카타(Basilicata)의 라이노(Laino)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1579년 놀라(Nola)에서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수련기부터 일본 선교를 희망했던 그의 뜻이 받아들여져 1884년에 인도의 고아(Goa)로 유학 갔고, 이듬해 그곳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1년 후인 1586년 8월에 일본 규수 북부 해안의 히라도섬(Hirado Island, 平戶島)에 도착했다.

그는 시코쿠(Shikoku)와 혼슈(Honshu)의 선교부에서 봉사하면서 일본 선교를 위해 언어뿐만 아니라 일본 문화에 대해 배우고 그것들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했다. 이를 통해 일본인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기들의 문화와 전통을 버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1612년 에도막부의 초대 쇼군[將軍]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금교령을 공포하고 1614년에 선교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추방령이 시행되자 일본에서 활동하던 80여 명의 예수회 동료들이 해외로 이동했고, 그를 포함해 24명은 일본에 남아 비밀리에 선교활동을 지속했다.

그는 주로 큐슈 서부의 시마바라 지역에서 거지, 장작 장수, 농부 등으로 위장하며 사제직을 수행했다. 이때 그는 일본인으로 교리 교사였던 베드로 오니즈카 산다유(Petrus Onizuka Sandayu)와 디오니시우스 후지시마(Dionysius Fujishima)의 도움을 받았다.

베드로 오니즈카 산다유는 10대 소년이었지만 열심한 신자인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선교사들과 자주 만나 신앙생활을 했다. 디오니시우스 후지시마는 결혼했었으나 아내가 그를 떠난 1615년부터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 신부와 함께 지내며 그를 도왔다.

1621년 12월 말경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 신부와 그와 함께 활동하던 두 명의 교리 교사와 그들이 데리고 있던 하인 클레멘스 큐에몬(Clemens Kyuemon)이 모두 사제 사냥꾼에게 붙잡혔다. 다행히 그들을 체포한 아리마(Arima, 有馬)의 다이묘(大名)는 신자는 아니었지만 가톨릭에 호의적이어서 종종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고 다이묘와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다.

다이묘는 그들이 처형될 것을 알고 비밀리에 마카오로 탈출시키려고 했으나 1622년 10월 27일 상부로부터 그들을 화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 신부와 동료들은 슬퍼하기보다는 기뻐하며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처형일인 11월 1일,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 신부는 마지막으로 모든 성인 대축일 미사를 집전하면서 예수회원이 되기를 청하는 베드로 오니즈카 산다유와 디오니시우스 후지시마의 청을 받아들여 그들의 서원식을 거행했다.

오후가 되자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 신부와 새로 서원한 두 명의 수사와 신심 깊은 하인 클레멘스 큐에몬은 군인들에 의해 나가사키(Nagasaki) 시마바라의 바닷가 형장으로 끌려가 화형을 당해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그들은 모두 1867년 5월 7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다른 201명의 순교자와 함께 복자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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