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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데가리오 천주교 남자세례명

pieonane 2024. 3. 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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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세례명 레오데가리오는 레오데가리우스, 레제르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남자세례명 레오데가리오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레오데가리오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레오데가리오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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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데가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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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데가리오 남자세례명 목록

 

  1. 레오데가리오 (10월 2일)

 

레오데가리오 천주교 남자세례명

 

 

1. 레오데가리오

 

  • 세례명 축일
    10월 2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Leodegarius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616-679년 오툉

 

 

레오데가리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레오데가리우스, 레제르.

 

 

레오데가리오 이야기

성 레오데가리우스(또는 레오데가리오)는 클로테르 2세(Clotaire II)의 궁정에서 자랐고, 그의 삼촌인 푸아티에(Poitiers)의 디돈(Didon) 주교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는 디돈 주교에 의해 부제품과 사제품을 받은 후 651-653년경에 막센티우스(Maxentius) 수도원의 원장이 되어 그 수도원에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의 수도규칙을 도입하였다. 이 시기에 성 레오데가리우스는 겸손한 영혼을 가진 사제로서 생활하였다.

그가 궁정에 자발적으로 갔는지 소집되어 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655년 프랑크의 왕 클로비스 2세(Clovis II)가 사망하고 훗날 클로테르 3세가 될 아들이 아직 어려 왕비인 성녀 바틸다(Bathildis, 1월 30일)가 섭정을 할 때 성 레오데가리우스는 왕비를 보좌하였다. 663년에 오툉의 주교로 임명된 후에도 그는 여왕을 계속 도왔다.

당시 오툉 교구는 완벽한 무질서 상태였다. 2년 동안 주교가 없었고 그 전에는 두 명이 주교좌를 놓고 서로 다투기까지 하였다. 그 중 한 명은 살해당했고 다른 한 명은 권력의 남용으로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그래서 성 레오데가리우스는 마을의 성곽과 주교좌성당을 재건하는 것부터 시작하였다.

“설교를 통해 평화와 화합으로 이끌지 못하는 이는 정의와 두려움을 통해서 평화에로 이끈다.”라는 속담이 있었다. 성 레오데가리우스는 매우 엄격한 주교라는 평을 듣곤 했지만 교구를 분열시켰던 파벌싸움을 화해시키고, 개혁 정책을 도입하여 모든 수도원에 성 베네딕투스의 수도규칙을 도입하였으며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으로 유명해졌다.

성녀 바틸다가 섭정에서 물러나고 클로테르 3세가 죽자 그는 궁정 대신이었던 에브로인(Ebroin)이 후원하는 티에리(Thierry)의 동생인 어린 칠데릭 2세(Childeric II)를 왕으로 지지하였다.

결국 칠데릭 2세가 왕위에 올랐고 에브로인은 뤽세이유(Luxeuil)로 귀양을 가서 그곳에서 삭발 수도사가 되었고, 칠데릭 왕의 조언자가 된 성 레오데가리우스의 신랄한 반대자가 되었다.

성 레오데가리우스는 많은 일들을 엄격하게 처리하면서 불화를 일으켰기 때문에 그의 높은 지위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칠데릭 왕이 그의 삼촌의 딸과 결혼하는 것을 비판하여 왕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어느 부활절에 성 레오데가리우스는 주교좌성당에서 거행되는 부활 대축일 미사에 칠데릭 왕을 초대했으나 왕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 왕은 술에 취한 상태로 와서 큰 소리로 무례하게 소리를 지르며 미사를 방해했지만 왕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제지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왕의 분노를 피해 도망가기로 결정했으나 오래지 않아 붙잡혀 궁정으로 소환되어 재판을 받고 675년에 뤽세이유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675년 칠데릭 왕이 살해당하자 그의 후계자인 테오도릭 3세(Theodoric III)는 성 레오데가리우스와 에브로인을 다시 궁정으로 불러들였다. 그런데 에브로인이 오툉을 공격하였을 때 성 레오데가리우스는 마을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항복하였다.

결국 그는 에브로인에 의해 눈이 두 눈이 뽑히는 등 잔혹한 형벌을 당한 후 숲으로 쫓겨났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는 굶주림 속에서 죽어갔으나 그를 지키던 경비병이 불쌍하게 생각하여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치료하고 돌보아주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은 에브로인은 몇 년 후 칠데릭 왕이 성 레오데가리우스와 그의 형 성 게리누스(Gerinus, 10월 2일)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왕에게 주장하였다.

결국 성 게리누스는 돌에 맞아 죽었고, 성 레오데가리우스는 고문을 당한 후 불구자가 되어 노르망디(Normandie)에 있는 페캉(Fecamp)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그가 자신의 형 성 게리누스의 죽음에 관해 어머니께 보낸 편지가 전해지고 있다.

2년 후 에브로인에 의해 궁정에 소환된 그는 주교좌에서 축출되었고, 그의 무죄 주장에도 불구하고 적대자들에 의해 아르투아(Artois) 부근의 숲에서 살해되었다.

로마 순교록은 그를 복자와 순교자로 호칭하고 있고, 성 레제르(Leger)로 널리 알려져 공경을 받고 있는데 어떻게 그에게 이러한 영예가 부여되었는지에 대해 학자들은 많은 의심을 갖고 있다. 예술 작품에서 그는 눈이 도려내어지고 송곳으로 뚫린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는 시각 장애인의 수호성인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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