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세례명/세례명 이름 찾기

로사 여자세례명 5인 목록

피어나네 2023. 1. 17.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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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세례명 로사는 로싸, 로즈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여자세례명 로사 5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로사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로사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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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사
천주교 여자세례명
5인 목록

 

 

 

 

로사 여자세례명 목록

 

  1. 로사 베네리니 (5월 7일)

  2. 로사 (8월 23일)

  3. 로사 (9월 4일)

  4. 김노사 로사 (9월 20일)

  5. 로사 필리핀 뒤셴 (11월 18일)

 

로사 천주교 여자세례명 5인 목록

 

 

1. 로사 베네리니

 

  • 세례명 축일
    5월 7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Rose Venerini

  • 신분과 직업
    동정녀,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56-1728년

 

 

로사 베네리니 세례명과 같은 이름

로싸, 로즈.

 

 

로사 베네리니 이야기

성녀 로사 베네리니(Rosa Venerini)는 1656년 2월 9일 이탈리아의 비테르보(Viterbo)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인 고프레도(Goffredo)는 안코나(Ancona)의 카스텔레오네 디 수아사(Castelleone di Suasa) 출신으로 로마(Roma)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비테르보의 대형 병원에서 의사 직무를 훌륭히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비테르보의 오래된 가문 출신인 마르지아 잠피체티(Marzia Zampichetti)와 결혼하여 네 명의 자녀, 즉 도메니코(Domenico),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ddalena), 로사 베네리니, 오라지오(Orazio)를 두었다.

로사 베네리니는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함과 비범한 감성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가정교육을 통해 확고한 그리스도교적 원칙 안에서 형성된 많은 심리적인 재능을 개발할 수 있었다. 그녀의 첫 번째 전기 작가인 지롤라모 안드레우치(Girolamo Andreucci) 신부에 의하면 그녀는 7살 때 이미 자신의 삶을 봉헌하기 위한 서원을 했다고 한다.

청소년기 동안 그녀는 세상의 매력과 하느님께 드린 약속 사이에서 고민하며 지냈는데, 이 위기를 의심 없는 기도와 금욕으로써 이겨냈다. 20살 때 로사 베네리니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녀가 살던 시대에 여성들의 삶은 결혼 아니면 수도생활이라는 두 가지 방향의 선택만이 가능할 뿐이었다. 그녀는 이 두 가지 모두를 존중했지만, 하느님께서는 교회의 유익과 당시 사회를 위해 다른 계획을 깨닫도록 그녀를 부르셨다.

이러한 예언적인 내적 움직임에 의해 그녀는 완전히 혁신적인 해결책에 도달할 때까지 고통과 탐색의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1676년 가을, 그녀는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자신의 서원을 완성하리라는 기대를 갖고 성녀 카타리나(Catharina)의 도미니코회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그녀의 이모인 안나 체칠리아(Anna Cecilia) 옆에서 그녀는 침묵과 묵상 중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방법을 배웠다. 하지만 그녀의 수도원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고통 중에 있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입회 몇 달 만에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가족에게 주어진 불행의 짐을 짊어지게 되었다.

그녀의 오빠인 도메니코가 2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고, 그로부터 몇 달 뒤에 어머니 또한 세상을 떠나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러는 중에 언니 마리아 막달레나는 결혼을 했고, 집에는 이제 막내 오라지오와 24살이 된 로사 베네리니만이 남게 되었다.

하느님을 위해 뭔가 큰일을 하고 싶었던 그녀는 1684년 5월에 주변의 처녀와 부인들을 모아 저녁마다 묵주기도를 바치기 시작했다. 그들과 기도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기도 전후의 대화를 통해 당시의 슬픈 현실에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

당시 여성들은 문화적 · 교육적 · 영성적 가난의 노예와도 같았다. 로사 베네리니는 하느님께서 젊은 여성들의 교육과 그리스도교적 양성이라는 보다 높은 사명을 위해 자신을 부르고 계심을 이해했고, 산발적인 만남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현실적이고 참된 감각을 갖고 투신해야 할 긴급한 필요성을 확인하였다.

1685년 8월 30일 아버지의 집을 떠난 로사 베네리니는 비테르보의 주교인 우르바노 사케티(Urbano Sacchetti) 추기경의 승인을 받고, 두 명의 친구이자 협력자인 제롤라마 콜루첼리(Gerolama Coluzzelli)와 포르지아 바키(Porzia Bacci)와 함께 혁신적인 계획을 따라 기도 안에서 성숙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는 첫 번째 여학교를 시작하였다.

설립자로서 로사 베네리니의 첫 번째 목적은 소녀들을 그리스도교적 정신으로 양성하고 사회생활을 준비하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거창한 주장은 없었지만 그녀는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소녀들을 위한 공립학교를 개교한 것이었다. 비록 시작은 대단하지 않았지만 그 의미만큼은 예언적이라 할만 했다.

여성들의 인간적 증진과 영성적 향상이 현실화되었고, 교회와 시 당국으로부터 승인을 받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론 첫 시작이 쉽지는 않았다. 자신의 직무로서 교리교육을 담당하는 성직자들의 저항에 직면하기도 했고, 무지한 소녀들의 교육을 마음으로 받아들인 비테르보의 중상류 계층 여성들의 대담함에 충격을 느낀 순응주의자들로부터 호된 의혹을 사기도 했다.

로사 베네리니는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 이 모든 것을 극복하며 자신이 하느님의 계획을 올바로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 확실해질 때까지 주어진 길을 계속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가 옳았다는 것은 교육사업의 결과로써 입증되었다. 같은 일에 종사하는 사목자들로부터 그녀의 교육방법이 가져온 교육적 개선을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창시한 혁신적 교육방법의 타당성이 인정받으면서 그녀의 명성은 교구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비테르보 프로젝트의 특징을 잘 이해한 몬테피아스코네(Montefiascone) 교구의 마르코 안토니오 바르바리고(Marco Antonio Barbarigo) 추기경은 로사 베네리니를 자신의 교구로 초대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항상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던 그녀는 이 초대에 기꺼이 응답하였다. 그래서 1692년부터 1694년까지 몬테피아스코네와 볼세나(Bolsena) 호수 주변 마을에 열 개의 학교를 개교하였는데, 바르바리고 추기경은 적극적인 물질적 후원을 제공하였다.

한편 교사들의 훈련과 학교들을 조직할 기구의 필요성을 느낀 로사 베네리니는 추기경의 도움으로 교사 훈련원을 세웠고, 이곳에서 비슷한 사명을 수행하던 성녀 루치아 필립피니(Lucia Filippini, 3월 25일)를 만나 그녀와 함께 ‘자비로운 교사회’를 공동으로 설립하였는데, 오늘날 베네리니의 자매회로 불린다.

비테르보와 몬테피아스코네에 여학교를 개교한 로사 베네리니는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 서부 라치오(Lazio) 지방에서 또 다른 학교들을 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706년에 로마로 진출했으나 한 동안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시 당국의 신뢰를 얻기까지 6년의 긴 시간을 기다린 끝에 1713년 12월 8일 베네리니 가족의 위대한 친구인 아바테 데글리 아티(Abate Degli Atti)의 도움으로 로마의 중심지인 캄피도글리오(Campidoglio) 바로 아래에 학교를 개교할 수 있었다.

1716년 10월 24일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는 8명의 추기경을 동반하고 그녀가 설립한 학교를 시찰하기 위해 방문하여 “당신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에 행복을 가져다 줄 이 학교에 대해 너무도 고맙습니다.”라며 치하하였다.

이를 계기로 여러 지역의 당국자와 추기경들로부터 자신들의 지역에 학교를 세워달라는 요청이 쇄도하였다. 그녀는 힘겨운 여행을 계속하며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기쁨과 희생이 뒤섞인 고된 작업을 이어갔다. 그녀가 새로운 학교를 시작하는 곳 어디서든 짧은 기간 안에 젊은이들 안에서 높은 교육적 증진의 효과를 가져왔다.

로사 베네리니는 1728년 5월 7일 오후 로마의 성 마르코 공동체에서 성인다운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녀는 일생 동안 40개 이상의 학교를 개교하였다.

그녀의 유해는 평소 그녀가 사랑했던 제수(Gesu)의 성당 근처에 안장되었고, 시복식을 즈음하여 로마에 있는 관구 본부의 경당으로 이장하였다. 그녀는 1952년 5월 4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6년 10월 15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로사

 

  • 세례명 축일
    8월 23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Rose

  • 신분과 직업
    은수자, 3회원

  • 활동 연도와 지역
    1586-1617년 리마

 

 

로사 세례명과 같은 이름

로싸, 로즈.

 

 

로사 이야기

1586년 4월 20일 페루 리마의 에스파냐 가문에서 태어나 이사벨 플로레스 데 올리바(Isabel Flores de Oliva)라는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은 성녀는 14살 때에 로사(Rosa)라는 이름으로 견진성사를 받았다.

용모가 빼어나게 아름다웠던 그녀는 양친의 결혼 계획을 끝내 반대하고, 어릴 때부터 자신의 모델 성녀로 삼았던 시에나(Siena)의 성녀 카타리나(Catharina)를 본받기 위해 엄격한 고행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결국 성녀 로사는 도미니코회 제3회에 입회했다. 하지만 부모의 생계를 도와야 했기에 부모의 집 정원에 통나무집을 마련해 은수생활을 하며 고된 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여러 가지 신비로운 특은을 비롯해 환시를 보았는데, 초자연적인 일들이 자주 일어나자 사제와 전문가들로 구성된 조사위원회가 그녀를 심사하는 일까지 생겼다.

그들은 조사 끝에 성녀 로사 주변의 모든 일들이 초자연적인 사실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성녀 로사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퍼져나가 그녀의 집 정원은 마치 영성 센터처럼 변했다.

건강이 나빴던 관계로 성녀 로사는 돈 곤잘로 데 마사와 그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여 3년 동안 리마에 있는 그들의 집에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1617년 8월 예수님의 이름을 세 번 부르며 선종하였다.

그녀는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하여 1671년 4월 12일 아메리카 대륙의 첫 번째 성인으로 시성되었고, 페루와 남아메리카, 서인도 제도, 필리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로사

 

  • 세례명 축일
    9월 4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Rose

  • 신분과 직업
    동정녀, 3회원

  • 활동 연도와 지역
    1234?-1251/1252년 비테르보

 

 

로사 세례명과 같은 이름

로싸, 로즈.

 

 

로사 이야기

이탈리아의 비테르보에서 태어난 성녀 로사(Rosa)는 병을 앓던 8세 때에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보았는데, 이때 성 프란치스코의 수도복을 입으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후에도 집에서 그냥 지내면서 평범한 여성으로 자랐다.

병에서 회복된 그녀는 평신도의 회개 복장을 하였고, 우리 주님의 고난을 더욱 절실히 체험하게 되었으며, 죄인들의 무례함과 배은망덕을 대신 속죄하였다. 그 후 12세경부터 그녀는 타오르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길 수 없어 거리로 뛰쳐나가서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그 당시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무수한 경고를 하였다. 그로 인해 그녀는 집에 감금되었고, 만일 다시 정치 지도자들을 비방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경고를 받았다. 결국 성녀 로사와 그녀의 부모는 추방되어 소리아노(Soriano)로 갔는데, 여기서 그녀는 그 당시의 독재자인 프레데릭 황제의 죽음을 예고하였고, 그것은 꼭 13개월 후에 일어났다.

이때부터 그녀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고향으로 귀향할 수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비테르보에 있던 로사의 성 마리아 수녀원 입회를 청했지만 거절당하였다. 그래서 그녀의 본당사제가 성당 곁에 수녀원을 만들고 몇몇 동료들과 함께 살도록 주선하였으나 집으로 돌아와서 곧 선종하였다. 그녀는 1457년 교황 칼리스투스 3세(Callistus 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김노사 로사

 

  • 세례명 축일
    9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金老沙 Rose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4-1839년 한국

 

 

김노사 로사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로사, 김로사, 로사, 로싸, 로즈.

 

 

김노사 로사 이야기

성녀 김노사 로사(Rosa)는 서울의 어느 외교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성교회를 모르고 자랐고 결혼까지 하였으나,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 후 그녀는 교우 친척과 함께 살게 되니, 자연히 교리와 수계생활에 남다른 발전이 있었고, 신앙의 보배를 얻을 것을 매우 기뻐하여 다른 사람들 특히 어머니와 오라비에게 그 보배를 나누어 주고자 하였다. 그 후 조선에 신부가 입국하였음으로 자주 성사를 받았음으로 그녀의 신심은 날로 깊어갔다.

1838년 12월 2일경 포졸들이 갑자기 자기 집에 들이닥치자, 그녀는 위주치명할 마음이 있었으므로 자기 집에서 별안간 체포되어 순교에 이르기까지 신앙을 증거하려고 큰 소리로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면서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판관은 곧 그녀를 재판장으로 불러내어 그 앞에 각종 형틀을 늘어놓고 보여주면서 배교를 강박하고 동교인의 이름을 대라고 협박하였다.

“다리를 부러트리고 몸을 토막토막 잘라 내기 전에 천주를 버리고 너의 무리들의 이름을 대라.”

“천주를 배반할 수도 없고 교우를 댈 수도 없습니다.”

“어째서 못하겠느냐?”

“천주는 모든 사람의 창조자시오, 아버지이시며 덕을 사랑하시고 악을 벌하시며 덕 있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상을 주시고 악한 사람에게는 끝없는 벌을 주십니다. 천주를 배반함은 죄악이니 삼가야 할 것이요, 사람을 해하는 것도 나쁜 일이니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이상 더 강권하셔도 쓸 데 없습니다. 저는 피를 흘려 이 진리를 증명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임금님께서 그 교를 금하고 계시지 않느냐?”

“그렇소이다. 저는 임금님께 매어 있기는 합니다만 그보다 먼저 천주께 속하여 있습니다.”

이에 판관은 로사에게 갖은 형벌을 주게 한 후 사형 판결을 내렸으나, 사형집행을 하지 않고 감옥에 가두었다. 그 후 정부로부터 사형을 빨리 집행하라는 독촉이 있자, 1839년 7월 20일에 서소문 밖에서 다른 7명의 신자와 함께 참수 순교하니, 그녀의 나이는 56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로사 필리핀 뒤셴

 

  • 세례명 축일
    11월 18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Rose Philippine Duchesne

  • 신분과 직업
    수녀원장, 선교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769-1852년

 

 

로사 필리핀 뒤셴 세례명과 같은 이름

뒤센, 뒤센느, 뒤셴느, 로싸, 로즈, 필리피나, 필립핀.

 

 

로사 필리핀 뒤셴 이야기

성녀 로사 필리핀 뒤셴(Rosa-Philippine Duchesne)은 1769년 8월 29일 프랑스 그르노블(Grenoble)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피에르 프랑수아 뒤셴(Pierre Francois Duchesne)은 저명한 법률가였고, 어머니 로즈 유프로신 페리에(Rose-Euphrosine Perier)는 프랑스에서 존경받는 유력한 가문의 딸이었다.

그녀는 그르노블 근교에 있는 생트 마리 당 오(Sainte-Marie-d’en-Haut)의 성모 방문 수녀회에서 교육을 받으며 수도 성소를 키웠고, 강력하게 결혼을 요구하던 양친을 요구를 뿌리치고 1788년에 성모 방문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부터 시작된 프랑스 혁명의 불길이 전국을 휩쓸면서 수도원도 약탈당하고 강제로 폐쇄되면서 수도자들은 프랑스에서 추방되었다.

그녀는 1791년에 몰래 집으로 돌아와 병자들을 방문하거나 고통받는 이들을 돌보며 가능한 수도 규칙에 따른 삶을 이어가고자 노력했다. 또한 혁명의 희생자로 감옥에 갇힌 성직자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하는 데에도 힘썼다.

1801년 교황 비오 7세(Pius VII)와 나폴레옹 간에 교회와 국가의 평화로운 관계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협정이 체결된 후, 그녀는 자신이 생활했던 성모 방문 수녀회로 돌아와 수녀원을 재건하려고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그 무렵 성녀 로사 필리핀 뒤셴은 이제 막 성심 수녀회를 설립한 성녀 막달레나 소피아 바라(Magdalena Sophia Barat, 5월 25일) 원장을 만나 수녀원 재건에 대한 도움을 청했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었다.

성녀 막달레나 소피아 바라는 그녀의 열정과 용기에 감명받아 그녀를 성심 수녀회로 초대했고, 이를 받아들인 성녀 로사 필리핀 뒤셴은 1804년 12월 31일 성심 수녀회의 수녀로 서원을 했다.

1818년 그녀는 네 명의 동료 수녀들과 함께 신대륙인 미국으로 파견되어 분원장이 되었고, 영어를 배우면서 미주리(Missouri) 주에서 가장 외딴 마을이었던 세인트찰스(St. Charles)에 정착해 미국에서 첫 번째 성심 수녀회 수도원을 세웠다.

그들은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 서안에서 무료 학교와 인디언들을 위한 학교 등을 운영하다가, 다음 해에 세인트루이스(St. Louis)의 플로리전트(Florisant)에도 진출했다. 영어뿐만 아니라 인디언과의 소통 및 문화적 차이 등 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공동체는 크게 성장했고, 1828년경에는 미시시피강을 따라 여섯 개의 분원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1840년에 미국 지부장직을 사임하고 이듬해에 예수회 선교사와 함께 슈거 크리크(Sugar Creek)를 따라 캔자스(Kansas) 동부의 인디언 보호구역인 포타와토미(Potawatomi)에서 인디언을 위한 학교 운영을 도왔다.

비록 그들의 말을 할 수 없어서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늘 기도와 묵상에 잠긴 모습을 통해 ‘항상 기도하는 여인’(Quahkahkanumad)이란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인디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불과 1년 후 건강이 나빠져 다시 세인트찰스로 돌아와 여생을 기도하며 보내다가 1852년 11월 18일 83세의 나이로 선종해 수녀원 묘지에 묻혔다가 3년 뒤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작은 성당에 안치되었다.

미국 교회를 위해 헌신한 성녀 로사 필리핀 뒤셴은 1940년 5월 12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8년 7월 3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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