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세례명 리카르도는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남자세례명 리카르도 21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리카르도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리카르도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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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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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르도 남자세례명 목록
- 리카르도 (1월 28일)
- 리카르도 (2월 7일)
- 리카르도 (4월 3일)
- 리카르도 팜푸리 (5월 1일)
- 리카르도 레이놀즈 (5월 4일)
- 리카르도 티르켈드 (5월 29일)
- 안군심 리카르도 (5월 29일)
- 리카르도 뉴포트 (5월 30일)
- 리카르도 (6월 9일)
- 리카르도 (6월 14일)
- 리카르도 랭혼 (7월 14일)
- 리카르도 페더스톤 (7월 30일)
- 리카르도 커크먼 (8월 22일)
- 리카르도 허스트 (8월 29일)
- 리카르도 로이드 (8월 30일)
- 리카르도 리 (8월 30일)
- 리카르도 마틴 (8월 30일)
- 리카르도 롤 (9월 29일)
- 리카르도 그윈 (10월 17일)
- 리카르도 화이팅 (11월 15일)
- 리카르도 랭리 (12월 1일)
1. 리카르도
- 세례명 축일
1월 28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Richard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169년 보첼르
리카르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리카르도 이야기
영국 사람인 성 리카르두스(Richardus, 또는 리카르도)는 시토회 수도승이었다. 그는 클레르보(Clairvaux)의 성 베르나르두스(Bernardus, 8월 20일)에 의해 프랑스의 캉브레(Cambrai) 근방 보첼르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리카르도
- 세례명 축일
2월 7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Richard - 신분과 직업
순례자 - 활동 연도와 지역
+720년경 웨식스
리카르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까르도,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차드, 리처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리카르두스.
리카르도 이야기
‘순례자 성 리카르도’로도 불리는 성 리카르두스(Richardus, 또는 리카르도)는 영국 웨식스(Wessex) 출신의 족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나중에 아이히슈테트(Eichstatt)의 초대 주교가 된 성 빌리발도(Willibaldus, 7월 7일)와 하이덴하임(Heidenheim) 수도원의 수도원장이 된 성 비니발도(Winibaldus, 12월 18일)와 성녀 발부르가(Walburga, 2월 25일)의 아버지로, 720년경 성 빌리발도와 성 비니발도를 데리고 로마(Roma)로 순례 여행을 떠났다.
그들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프랑스 북부의 센(Seine) 강을 따라 루앙(Rouen)에 도착해 그곳의 성지를 방문한 후 이탈리아 북부 루카(Lucca)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성 리카르도는 중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아들들에 의해 루카에 있는 성 프레디아노(San Frediano) 대성당에 안장되었고, 두 아들은 로마까지 순례를 계속하였다. 그런데 성 리카르도의 무덤에서 기적이 일어나면서 루카 사람들이 그를 공경하기 시작했고, 그를 ‘리카르도 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사실 성 리카르도와 그의 성인 자녀들의 이야기는 8세기에 하이덴하임 수도원의 전기학자인 하이게부르크(Hygeburg) 수녀가 쓴 “호도에포리콘”(Hodoeporicon, 여행기)에 처음 등장하는데, 그 여행기 안에 아버지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리카르도’라는 이름과 ‘영국의 왕’이라는 그의 정체성은 10세기 이후 하인덴하임 수도원과 그 이후의 성인전에서 등장하였다.
12세기 중엽 하이덴하임 수도원 개혁에 관한 보고서에 세 명의 남매 성인들과 그들의 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있었고, 루카에서 선종한 성 리카르도의 유물에 대한 문의를 받은 루카 시민들은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성인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성 리카르도의 유물을 수습해 2월 7일 성당 제단에 다시 안장했는데, 그날을 그의 축일로 지내게 되었다.
성 리카르도가 실제로 영국의 왕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옛 “로마 순교록”은 2월 7일 목록에서 영국의 왕 성 리카르도가 토스카나(Toscana) 지방 루카에서 선종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720년경 영국에서 로마로 성지 순례를 가던 중 성 빌리발도와 성 비니발도의 아버지인 성 리카르도가 루카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리카르도
- 세례명 축일
4월 3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Richard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197-1253년 치체스터
리카르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리카르도 이야기
잉글랜드(England)의 위치(Wych)에서 태어난 성 리카르두스(Richardus, 또는 리카르도)는 옥스퍼드를 비롯하여 파리(Paris)와 볼로냐(Bologna)에서 수학했고, 1235년에 옥스퍼드 대학의 사무국장이 되었으나, 당시 캔터베리(Canterbury)의 대주교인 애빙던(Abingdon)의 성 에드문두스 리치(Edmundus Rich, 11월 16일)를 만나 그를 돕기 위해 즉시 사무국장의 직책을 사임하였다.
그 후 1240년 성 에드문두스 대주교가 프랑스의 퐁티니로 망명했을 때 그를 수행한 성 리카르두스는 에드문두스 성인이 사망한 후 오를레앙(Orleans)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에서 은거하며 신학을 연구하고 서품을 받은 후 영국으로 돌아왔다.
1244년 성 리카르두스는 치체스터 교구의 주교가 되었다. 그의 업적은 교구의 완전한 개혁으로 교회 내의 친족 등용과 성직매매를 적극 반대하고 금지시킨 것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리카르도 팜푸리
- 세례명 축일
5월 1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Richard Pampuri - 신분과 직업
수사, 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897-1930년
리카르도 팜푸리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리카르도 팜푸리 이야기
성 리카르두스 팜푸리(Richardus Pampuri, 또는 리카르도)는 1897년 8월 12일 이탈리아의 파비아(Pavia) 근처 트리볼지오(Trivolzio)에서 태어났다.
안젤라 팜푸리(Angela Pampuri)와 인노첸테 필리포(Innocente Filippo)의 11남매 중 10번째 태어난 에르미니오(Erminio)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다. 세 살 때 어머니를 잃고 인근 마을에 사는 이모 집에 맡겨졌는데 7년 후인 1907년에 아버지 또한 밀라노(Milano)에서 돌아가셨다.
그는 인근에 있는 두 곳의 초등학교를 다녔고 밀라노로 가서 중학교를 마쳤다. 그리고 파비아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1915년 파비아 대학의 의대에 들어갔다.
그는 1915년과 1920년 사이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하사관과 의무병으로 근무했다. 1921년 7월 6일 파비아 대학의 약학과와 외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의사로 있던 삼촌 밑에서 3년간 의료 실습을 마친 후 밀라노의 한 병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환자들을 돌보던 그는 그리스도교 사도직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 사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선교사제가 되고 싶었지만 건강 문제 때문에 단념했었다.
젊은 시절 어느 곳을 가던지 그리스도교적 덕행의 모범이었던 그는 세상 속에 살면서도 복음의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고백하고 너그러움과 열정을 갖고 자선사업을 실천했었다.
바쁜 일정 중에도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다. 열심히 미사에 참례하고 성체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성모님께 대한 깊은 신심으로 하루에 한 번 이상 묵주기도를 바쳤고, 파비아 대학 가톨릭 액션 단체의 근면한 회원이었으며,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와 작은 형제회의 3회원으로도 활동했다.
소년 시절부터 가톨릭 액션 단체에 참여했던 그는 실습을 위해 모리몬도(Morimondo)에 갔을 때 본당 신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음악 밴드와 가톨릭 액션 젊은이 단체를 조직하여 그 첫 번째 대표로서 성 비오 10세(Pius X)의 전구 아래 두 단체를 두었다.
그는 또한 본당의 선교 후원회의 간사를 맡기도 했고 자비를 들여 청년 모임과 농민과 지역 노동자들을 위한 정기 피정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의사로서 유능하며 자비로운 그는 환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의술을 베푸는 데 있어서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가난했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약과 돈 그리고 음식과 이불을 가져다주곤 하였다. 그의 자선사업은 모리몬도 근교의 도시 근로자들과 이웃의 손길이 필요한 노인들에게 퍼져나갔고 다른 마을과 도시로도 확산되었다.
6년 동안 의사로 일한 그는 수도원에 입회하고자 했고, 이에 ‘거룩한 의사’를 잃을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슬픔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컸고 지역 신문에서까지 기사화하였다.
그는 결국 1927년 6월 22일 밀라노의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에 입회하여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자신의 의학기술을 지속하고 동시에 복음적 거룩함에 더 가까이 가는 길을 택하였다.
그는 리카르두스라는 수도명을 받고 브레시아(Brescia)에서 지원기를 마치고 1928년 10월 24일 서원을 하였다. 서원 후 그는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브레시아의 천주의 성 요한 병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곳에서 성 리카르두스 팜푸리 수사는 아름다운 자선을 실천하여 모든 이의 존경을 받았다. 수도자로서 그의 삶은 수도회에 입회하기 전에도 그랬듯이 동료, 환자, 의사, 진료 보조원, 간호사, 그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덕과 자선의 탁월한 모범이었다.
성 리카르두스 팜푸리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을 때 얻은 병으로 인해 일종의 폐병을 앓고 급속히 건강이 악화되었다. 밀라노로 치료를 받으러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030년 5월 1일 33살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그는 ‘자신의 전문지식을 자비의 사명으로 변형시키는 방법을 아는 의사로서, 자신 안에 천주의 성 요한의 진정한 아들로서의 카리스마를 살았던 수도자로서의 기억을 남기고’ 하느님께로 돌아간 것이다. 그의 시신은 고향에 돌아와 묻혔으며 그를 기리는 성당이 세워졌다.
그는 1981년 10월 4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는데 이날 강론에서 교황은 이렇게 말하였다.
“짧지만 열정적인 삶을 산 리카르두스 팜푸리 수사는 모든 하느님 백성에게 자극이 되는데 특히 젊은이와 의사, 수도자들에게 큰 자극이 된다. 그는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인생을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기쁘고 용기 있게 살도록 초대하며, 항상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가르침을 따라 다른 이들을 위한 봉사에 스스로를 헌신하도록 초대한다.”
그는 1989년 11월 1일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리카르도 레이놀즈
- 세례명 축일
5월 4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Richard Reynolds - 신분과 직업
신부, 수도승,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492?-1535년 영국
리카르도 레이놀즈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리카르도 레이놀즈 이야기
성 리카르두스 레이놀즈(Richardus Reynolds, 또는 리카르도 레이놀즈)는 1492년경 잉글랜드 남서부 데번(Devon)에서 태어났다.
그는 케임브리지(Cambridge) 대학교에서 수학할 때 옥스퍼드(Oxford) 대학교의 코르푸스 크리스티 대학(Corpus Christi College)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3년 뒤인 1513년에 학위를 취득하고 그 대학의 설교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런던(London) 교외 템스 강변 아일워스(Isleworth)에 있는 시온(Zion) 수도원에 들어가 브리지타 수도회(Bridgettines)의 수도승이 되었다.
캔터베리 교구의 레지날드 폴(Reginald Pole, 1556~1558년 재임) 추기경이 말한 바에 따르면, 성 리카르도 레이놀즈는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세 가지 언어에 정통한 유일한 영국 수도승이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고, 많은 이들이 영적 상담과 조언을 청하고자 그를 찾았다.
1534년 헨리 8세(Henry VIII) 왕은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공포하면서 영국 교회의 최고 수위권이 국왕에게 있음을 서약하도록 강요했다.
성 리카르도 레이놀즈는 1535년 4월 중순 무렵에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혔다. 그리고 특별위원회에 불려 나가 수장령을 거부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때 카르투지오회의 성 요한 후톤(Joannes Houghton), 성 로베르토 로렌스(Robertus Lawrence), 성 아우구스티노 웹스터(Augustine Webster)도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1535년 5월 4일, 성 리카르도 레이놀즈 신부는 세 명의 카르투지오회 신부와 아일워스의 본당 신부인 복자 요한 하일레(Joannes Haile)와 함께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리카르도 레이놀즈 신부는 1886년 12월 2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순교한 날인 5월 4일에 기념하고, 시성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5월 4일 목록에서 각각 카르투지오회의 수도원장직을 맡은 성 요한 후톤, 성 로베르토 로렌스, 성 아우구스티노 웹스터 그리고 브리지타 수도회의 성 리카르도 레이놀즈 신부가 헨리 8세 왕 때에 두려움 없이 교부들의 신앙을 고백하고 런던의 타이번으로 끌려가 잔인하게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했고, 그들과 함께 런던 교외 아일워스의 본당 신부인 복자 요한 하일레도 같은 교수대에서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리카르도 티르켈드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Richard Thirkeld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83년
리카르도 티르켈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리카르도 티르켈드 이야기
리카르두스(Richardus, 또는 리카르도)가 1579년에 사제서품을 받았을 때에는 이미 고령이었다. 그는 프랑스의 두에(Douai)와 랭스(Reims)에서 사제수업을 받았다.
그 후 영국 선교 길에 올라 요크에서 활동하던 중, 어느 날 밤에 감옥에 갇힌 신자를 방문하러 갔다가 가톨릭 사제임이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그는 고령이었으므로 죽음을 조금도 두렵게 여기지 않고, 함께 있던 다른 죄수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면서 죽음을 준비하였다. 그는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이 날은 주님이 예비하신 날이다. 그러니 기뻐하고 즐겨 용약하자!”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안군심 리카르도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安-- Richard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74-1835년 한국
안군심 리카르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안 리카르도, 안리카르도.
안군심 리카르도 이야기
1774년 충청도 보령에서 태어난 안군심 리카르도(安--, Richardus)는 청년 시절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려고 가족과 함께 고향을 떠나 경상도로 이주하였으며, 가족의 생계를 위해 교회 서적을 베끼는 일에 몰두하면서 살았다.
본디 명랑한 데다가 겸손하고 친절하였던 안 리카르도는 누구나 애덕으로 대하였고, 그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정성스럽게 가르쳐 주는 것을 낙으로 알고 생활하였다. 또 그는 자식들의 교육에도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기도와 묵상을 하루도 빠트리지 않았으며, 보통 일주일에 세 번씩은 금식재를 지켰다.
언제인가 안 리카르도는 포졸들에게 체포된 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모호한 말로 대답하여 석방되었고, 이후로는 언제나 그때 분명하게 신앙을 증언하지 못한 것과 용기가 부족하였던 것을 후회하였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안 리카르도는, 언젠가는 자신도 체포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동안 교우들에게 나누어 준 서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얼마 동안 숨어 지내면서 순교할 준비를 하였는데, 상주 포졸들이 마침내 그곳을 찾아내서 그를 체포하였다.
상주 관장은 안 리카르도를 보자마자 천주교 신자인지를 확인하였다. 그런 다음 교리를 외워 보라고 하자, 그는 몇 가지 중요한 교리를 외우고서는 간단하면서도 명백하게 천주교 교리에 대해 설명하였다. 또 관장이, “국법을 어기는 것은 임금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냐?”라고 하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천주는 우주의 큰 임금이고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므로, 우리는 그분을 만물 위에 공경해야 합니다. 임금님과 관장님과 부모님은 천주 다음으로 공경해야 합니다.”
이어 관장은 천주를 배반하고 동료들을 밀고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안 리카르도는 이를 거절하고 형벌을 받았다. 이후에도 그는 자주 옥에서 끌려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언제나 끈기 있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그를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대구로 이송토록 하였다.
안군심 리카르도는 대구 감영에 도착한 뒤에도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의 몸은 이내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고통을 당하면 당할수록 천주에 대한 그의 사랑은 더욱 열렬해지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사형 선고를 받고는 다시 옥으로 끌려가 동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8년 동안 옥에서 고통을 받다가 1835년 이질에 걸려 사망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61세였다.
안군심 암브로시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리카르도 뉴포트
- 세례명 축일
5월 30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Richard Newport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12년 영국
리카르도 뉴포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스미스.
리카르도 뉴포트 이야기
리카르두스 뉴포트(Richardus Newport, 또는 리카르도 뉴포트)는 영국 잉글랜드 중부 노샘프턴셔(Northamptonshire)의 해링워스(Harringworth)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 북부 두에(Douai)와 이탈리아 로마(Roma)의 영국 대학에서 수학한 후 1597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잉글랜드로 돌아온 그는 교구 사제로서 몇 년 동안 런던에서 가톨릭 신자들을 위해 성공적인 사목을 했으나 두 번이나 체포되고 추방되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다시 돌아온 그는 세 번째로 체포되어 런던의 성공회 주교에게 심문을 받으며 제임스 1세(James I) 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제안받았지만, 그 서약이 교황과 가톨릭교회에 불충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서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성 베네딕토회의 복자 마우로 스콧(Maurus Scott) 신부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1612년 5월 30일 아침에 타이번(Tyburn)으로 함께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복자 리카르도 스미스(Richardus Smith)로도 불린다.
복자 리카르도 뉴포트 신부는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순교한 날인 5월 30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복자 리카르도 뉴포트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5월 30일 목록에서 영국 런던에서 성 베네딕토회의 복자 마우로 스콧 신부와 교구 사제인 복자 리카르도 뉴포트가 제임스 1세 치하에서 가톨릭 사제라는 이유로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리카르도
- 세례명 축일
6월 9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Richard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2세기경? 안드리아
리카르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리카르도 이야기
성 리카르두스(Richardus, 또는 리카르도)는 잉글랜드(England) 사람으로 이탈리아 남동부 풀리아(Puglia)의 안드리아 교구의 초대주교였다.
그는 로마(Roma)에서 안드리아로 와서 주교로 선출되었고, 교황 성 젤라시오 1세로부터 몬테 가르가노에 성소를 봉헌토록 위촉받은 3인의 고위 성직자 가운데 한 명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올바른 듯한 전설에 의하면, 1118년 전에 안드리아에는 영국인 주교가 있었고, 그는 1179년에 라테라노(Laterano) 공의회에 참석하였으며, 성 에라스무스와 폰티아누스(Pontianus)의 유해를 치비텔라에서 안드리아로 이장했다는 것이다. 성 리카르두스는 안드리아의 수호성인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리카르도
- 세례명 축일
6월 14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Richard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046년 생반
리카르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리카르도 이야기
리카르두스(Richardus, 또는 리카르도)는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늘 사용하던 말이기 때문이다.
그는 프랑스 베르됭(Verdun)의 생반에서 베네딕토회 수도승이 되기 전에는 랭스(Reims)의 주교좌 성당에서 사목활동을 했다.
리카르두스는 클뤼니(Cluny)의 성 오딜로(Odilo, 1월 1일)와 그에게 수도생활을 권유했던 성 헨리쿠스 2세(Henricus II, 7월 13일) 황제의 친구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리카르도 랭혼
- 세례명 축일
7월 14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Richard Langhorne - 신분과 직업
법률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24?-1679년 영국
리카르도 랭혼 세례명과 같은 이름
랑고른, 랑혼, 랭고른,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리카르도 랭혼 이야기
복자 리카르두스 랭혼(Richardus Langhorne, 또는 리카르도 랭혼)은 1624년경 영국 잉글랜드의 베드퍼드셔(Bedfordshire)에서 변호사인 윌리엄 랑혼(William Langhorne)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647년에 런던의 대표적 법학원인 이너 템플(Inner Temple)에 들어가 수확한 후 1654년 11월 변호사가 되었다. 가톨릭 신자로서 정의롭고 신심 깊은 법률가라는 평을 들었던 그는 예수회에 대한 법적 · 재정적 자문을 제공했다.
1666년의 런던 대화재 이후 반가톨릭적 정서가 극심할 때 그는 잠시 체포되기도 했지만 바로 풀려났다. 그의 아내인 도로시 레가트(Dorothy Legatt)는 에식스(Essex)의 헤이버링(Havering) 출신의 열심한 프로테스탄트 신자였다.
1678년 티투스 오츠(Titus Oates)의 ‘가톨릭 음모 사건’(Popish Plot)이 발생했을 때, 세 명의 예수회 신부와 성 베네딕토회 신부 한 명이 체포되었다.
이 음모는 영국 국교회 사제이자 가톨릭의 배교자인 티투스 오츠가 가톨릭교회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찰스 2세(Charles II) 왕을 암살하고 가톨릭 신자이자 나중에 국왕 제임스 2세(James II)가 된 요크의 공작을 왕으로 세울 음모를 꾸민다고 주장하여 런던을 공포정치에 빠뜨린 사건이었다.
그해 9월 찰스 2세 왕이 직접 추밀원에서 티투스 오츠를 심문해 그 모든 것이 거짓임이 드러났지만, 그로 인한 공포 상태는 1681년까지 계속되면서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예수회의 법률 고문이었던 복자 리카르도 랭혼은 네 명의 사제에 대한 서류를 검토하고 그들에게 아무런 혐의도 없음을 즉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네 사제가 체포된 후 한 주 만에 바로 체포되어 뉴게이트(Newgate) 감옥에 갇혔고 반역죄가 적용되었다.
그는 1679년 6월 14일 재판을 받았는데, 반역죄로 기소된 사람은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변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반가톨릭적 분위기 속에서 그의 주장과 결백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1679년 7월 14일 런던의 타이번(Tyburn)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형 집행을 앞두고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주 예수님, 당신의 손에 제 영혼을 맡겨드립니다. 지금, 이 순간 천국에 들어가게 하소서. 저는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교수형 집행자에게 “나는 준비가 되었소. 나 때문에 지체할 필요는 없소”라고 당당히 말하였다.
복자 리카르도 랭혼은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순교한 날인 7월 14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복자 리카르도 랭혼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7월 14일 목록에서 영국 런던에서 저명한 변호사였던 복자 리카르도 랭혼이 찰스 2세 왕 때 거짓 혐의로 체포되어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타이번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리카르도 페더스톤
- 세례명 축일
7월 30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Richard Fetherstone - 신분과 직업
신부, 신학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40년 영국
리카르도 페더스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페터스톤.
리카르도 페더스톤 이야기
복자 리카르두스 페더스톤(Richardus Fetherstone, 또는 리카르도 페더스톤)의 생애는 거의 알려진 바 없지만, 그는 교구사제로서 케임브리지(Cambridge)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박식한 사제였다.
그는 뛰어난 학식과 신심 덕분에 캐서린(Catharine of Aragon) 왕비의 왕실 전담 사제이자 그녀의 딸인 메리(Mary) 공주의 라틴어 가정교사가 되었다.
그는 헨리 8세 국왕의 결혼 무효소송에 있어서 캐서린 왕비 측 네 명의 법률가 중 하나로 뽑혔다. 그는 1529년 4월부터 시작된 회의에서 캐서린 왕비의 결혼이 유효하다는 편에 투표하였다.
1534년 그는 왕의 영국 교회에 대한 최고 수위권을 법률화한 수장령(Act of Supremacy)에 따라 앤 불린(Anne Boleyn)과의 재혼을 인정하는 계승권 승복 선서(Oath of Succession)를 강요당했을 때 이를 거부한 반역죄로 위원회를 같이 했던 로체스터(Rochester)의 성 요한 피셔(Joannes Fisher, 6월 22일) 추기경과 복자 에드워드 파월(Edward Powell) 신부 및 다른 개신교 동료들과 함께 그해 12월 런던탑에 갇혔다.
오랫동안 감옥에서 생활하던 그는 1540년 7월 30일, 가톨릭 신학자인 복자 토마스 아벨(Thomas Abel) 신부와 복자 에드워드 파월(Edward Powell) 신부와 함께 국왕의 수장령에 끝까지 반대하여 런던 중심부에 있는 스미스필드(Smithfield)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복자 리카르도 페더스톤 신부는 1886년 12월 2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순교한 날인 7월 30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복자 리카르도 페더스톤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7월 30일 목록에서 신부이자 신학 박사인 복자 리카르도 페더스톤과 동료들이 헨리 8세가 요청한 이혼에 반대하고 끝까지 로마 교황에 대한 충성을 지키다가 영국 런던의 스미스필드에서 교수대에 매달려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리카르도 커크먼
- 세례명 축일
8월 22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Richard Kirkman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82년 영국
리카르도 커크먼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커크맨.
리카르도 커크먼 이야기
복자 리카르두스 커크먼(Richardus Kirkman, 또는 리카르도 커크먼)은 영국 잉글랜드 북부 요크셔(Yorkshire)의 웨스트 라이딩(West Riding)에 있는 애딩햄(Addingham)에서 태어났다.
그는 1577년 프랑스 북부 두에(Douai)에 도착했고, 이어서 랭스(Reims)의 영국 대학에 들어가 사제직을 준비했다. 1579년 성주간에 랭스에서 교구 소속으로 사제품을 받은 그는 성 베네딕토 수녀회 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고, 그해 8월 3일 영국 선교를 위해 성 알렉산데르 브라이언트(Alexander Briant, 12월 1일) 신부와 다른 세 명의 동료와 함께 파견되었다.
잉글랜드로 돌아온 그는 링컨셔(Lincolnshire)의 스크라이블스비(Scrivelsby)에 사는 로버트 다이모크(Robert Dymoke, 1580년 9월 11일 링컨 감옥에서 신앙 때문에 옥사함) 집을 피신처로 삼아 머물게 되었다.
그는 로버트 다이모크의 세 아들의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몰래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사목을 전개했다. 로버트 다이모크가 영국 성공회의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혐의로 체포되었을 때, 그는 북쪽으로 피신해 요크셔에서 활동하다가 1582년 8월 8일 웨이크필드(Wakefield) 부근에서 가톨릭 사제라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는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여왕의 통치 중에 즉시 사형 선고를 받고 빛도 음식도 침대도 없는 지하 감방에 갇혀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8월 22일 요크(York)에서 복자 윌리엄 레이시(William Lacy) 신부와 함께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복자 리카르도 커크먼 신부는 1886년 12월 2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순교한 날인 8월 22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복자 리카르도 커크먼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22일 목록에서 영국 요크에서 복자 리카르도 커크만과 복자 윌리엄 레이시가 가톨릭 사제로서 영국에 입국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때 교수대로 끌려가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리카르도 허스트
- 세례명 축일
8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Richard Herst - 신분과 직업
평신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28년 영국
리카르도 허스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리카르도 허스트 이야기
복자 리카르두스 허스트(Richardus Herst/Hurst, 또는 리카르도 허스트)는 영국 잉글랜드 북서부 랭커셔(Lancashire)의 프레스턴(Preston) 근교에서 태어났으며 소지주의 아들이었다.
그는 영국 성공회를 공식적으로 반대하던 사람이었다. 1628년 어느 날, 그는 밭을 갈던 중에 체스터(Chester)의 성공회 주교가 보낸 사람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 과정에서 그의 하인들과 체포하러 온 사람들 사이에 큰 싸움이 일어났고, 주교가 보낸 듀허스트(Dewhurst)라는 사람이 쟁기질한 들판을 뛰다가 넘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치명상을 입었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부상은 단순한 사고의 결과라는 맹세까지 했다. 하지만 정부 당국자들은 복자 리카르도 허스트를 살인 혐의로 기소했고, 그럼으로써 성공회를 반대하는 이에게 본보기를 보이려 했다.
그의 친구들이 국왕 찰스 1세(Charles I)에게 청원서를 보내고 가톨릭 신자인 헨리에타 마리아(Henrietta Maria of France) 왕비의 지원도 있었지만, 그는 결국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성공회의 전례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왕에게 충성 서약을 하면 살려준다는 제의마저 거절했다. 그 서약문에 자신의 믿는 신앙과 반대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1628년 8월 29일 랭커스터(Lancaster)의 처형장으로 끌려가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교수대 위에서 그는 이런 말로 자신의 신앙을 당당히 고백했다. “나는 거룩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믿습니다.”
복자 리카르도 허스트는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순교한 날인 8월 29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복자 리카르도 허스트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29일 목록에서 한 가족의 아버지이자 농부였던 복자 리카르도 허스트가 살인죄의 누명을 쓰고 찰스 1세 왕 때에 신앙 때문에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리카르도 로이드
- 세례명 축일
8월 30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Richardus Lloyd - 신분과 직업
평신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88년 영국
리카르도 로이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플라워.
리카르도 로이드 이야기
리카르도 플라워(Richard Flower)로도 많이 알려진 복자 리카르두스 로이드(Richardus Lloyd, 또는 리카르도 로이드)는 1566년경 영국 웨일스(Wales) 지방 북서쪽에 있는 앵글시섬(Isle of Anglesey)의 유명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1584년 가톨릭 사제에게 편의를 제공한 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당시 법은 가톨릭 사제를 받아들여 피신처를 제공하거나 돕는 행위를 중범죄를 다루고 있었다.
게다가 1588년에 7월에 에스파냐 무적함대의 침공과 함께 반가톨릭 정서가 팽배한 분위기 속에서 복자 리카르도 로이드는 윌리엄 호너(William Horner)라는 신부에게 도움을 제공한 혐의로 기소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8월 30일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다른 동료들과 함께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약 22세였다.
복자 리카르도 로이드는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순교한 날인 8월 30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복자 리카르도 로이드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30일 목록에서 영국 런던의 타이번에서 성녀 마르가리타 워드(Margarita Ward)가 가톨릭 사제를 도왔다는 이유로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때 교수형으로 순교했는데, 이날 같은 곳에서 가톨릭 신부라는 이유로 복자 리카르도 리(Richardus Leigh)와 사제에게 환대를 베풀었다는 이유로 평신도 영국인인 복자 에드워드 셸리(Edward Shelley)와 복자 리카르도 마틴(Richardus Martin), 아일랜드인인 복자 요한 로체(Joannes Roche), 웨일스인인 복자 리카르도 로이드가 함께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리카르도 리
- 세례명 축일
8월 30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Richard Leigh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88년 영국
리카르도 리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리카르도 리 이야기
복자 리카르두스 리(Richardus Leigh, 또는 리카르도 리)는 1557년경 영국 잉글랜드의 캠브리지(Cambridge)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모에 의해 앤 벨필드(Anne Belfield)와 중매로 결혼을 했다. 하지만 나중에 법적으로 결혼하기에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무효 판정을 받고 취소하였다.
그는 슈루즈베리(Shrewsbury)에서 수학한 후 프랑스의 랭스(Reims)와 이탈리아의 로마(Roma)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586년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선교를 위해 영국으로 돌아왔으나 목적지인 체셔(Cheshire)에 도착하기 전에 런던(London)에서 체포되어 추방되었다. 그는 굴복하지 않고 잉글랜드로 돌아왔다가 1588년 7월에 다시 체포되었다. 그의 귀환과 체포는 에스파냐 무적함대의 침공 즈음에 일어났는데, 그로 인해 반가톨릭 정서가 더욱 극심해졌다.
결국 그는 런던탑에 갇혔다가 올드 베일리(Old Bailey)에서 가톨릭 사제라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8월 30일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복자 리카르도 리 신부는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순교한 날인 8월 30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복자 리카르도 리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30일 목록에서 영국 런던의 타이번에서 성녀 마르가리타 워드(Margarita Ward)가 가톨릭 사제를 도왔다는 이유로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때 교수형으로 순교했는데, 이날 같은 곳에서 가톨릭 신부라는 이유로 복자 리카르도 리와 사제에게 환대를 베풀었다는 이유로 평신도 영국인인 복자 에드워드 셸리(Edward Shelley)와 복자 리카르도 마틴(Richardus Martin), 아일랜드인인 복자 요한 로체(Joannes Roche), 웨일스인인 복자 리카르도 로이드(Richardus Lloyd)가 함께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리카르도 마틴
- 세례명 축일
8월 30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Richard Martin - 신분과 직업
평신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88년 영국
리카르도 마틴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 마르띠노, 마르띠누스, 마르티누스, 마르틴 , 말딩.
리카르도 마틴 이야기
복자 리카르두스 마틴(Richardus Martin, 또는 리카르도 마틴)은 영국 잉글랜드(England) 중서부 슈롭셔(shropshire)에서 태어나 옥스퍼드(Oxford) 대학에서 수학하고 1583년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복자 로베르토 모턴(Robertus Morton, 8월 28일)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나서 사제들을 위한 피난처나 편의를 제공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런던의 뉴게이트(Newgate) 감옥에 갇혔다.
당시 법은 가톨릭 사제를 받아들여 피신처를 제공하거나 돕는 행위를 중범죄를 다루고 있었다. 게다가 1588년에 7월에 에스파냐 무적함대의 침공과 함께 반가톨릭 정서가 팽배한 분위기 속에서 복자 리카르도 마틴은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8월 30일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다른 동료들과 함께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복자 리카르도 마틴은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순교한 날인 8월 30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복자 리카르도 마틴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30일 목록에서 영국 런던의 타이번에서 성녀 마르가리타 워드(Margarita Ward)가 가톨릭 사제를 도왔다는 이유로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때 교수형으로 순교했는데, 이날 같은 곳에서 가톨릭 신부라는 이유로 복자 리카르도 리(Richardus Leigh)와 사제에게 환대를 베풀었다는 이유로 평신도 영국인인 복자 에드워드 셸리(Edward Shelley)와 복자 리카르도 마틴(Richardus Martin), 아일랜드인인 복자 요한 로체(Joannes Roche), 웨일스인인 복자 리카르도 로이드(Richardus Lloyd)가 함께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8. 리카르도 롤
- 세례명 축일
9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Richard Rolle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300-1349년
리카르도 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리카르도 롤 이야기
리카르두스 롤(Richardus Rolle, 또는 리카르도)은 영국 잉글랜드(England) 요크셔(Yorkshire)의 토른톤 출신으로 옥스퍼드에서 수학하고, 19세의 나이로 파리(Paris)의 소르본(Sorbonne) 대학교를 다니던 중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사제로 서품되었다.
1326년경에 잉글랜드로 돌아간 그는 요한 달톤의 영지에서 은수자 생활을 시작하여 헴폴에 정착하기 전까지 여러 곳을 전전하였다. 그는 헴폴에서 시토 수녀들의 영적 지도자가 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만 지냈다.
그는 라틴어와 지방언어로 신앙적인 글을 쓴 최초의 작가로 꼽히며, 당대 최고의 신비적인 저술가로 명성이 높았다. 그의 작품 가운데 “생활의 개선에 대하여”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다른 은수자를 위하여 쓴 것이다. 또 시편을 번역하였고 9,600연의 시가 남아 있다. 또 신비적인 저술로는 “사랑의 향기에 대하여”가 유명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9. 리카르도 그윈
- 세례명 축일
10월 17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Richard Gwyn - 신분과 직업
교사,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37?-1584년 영국
리카르도 그윈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리카르도 그윈 이야기
성 리카르두스 그윈(Richardus Gwyn, 또는 리카르도 그윈)은 1537년경 영국 웨일스 지방의 몽고메리셔(Montgomeryshire)에서 태어나 프로테스탄트 신자로 성장했다.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20살에 옥스퍼드(Oxford) 대학에서 잠시 공부한 뒤에 케임브리지(Cambridge)의 성 요한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1562년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렉섬(Wrexham)에서 교사로 활동하며 개인적으로 공부를 이어갔다. 그리고 캐서린(Catherine)과 결혼해서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우연히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부터 고향을 떠났으나 1579년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는 다행히 탈옥에 성공해 1년 반 정도를 도망자 신분으로 살았으나 다시 체포되어 4년 동안 감옥을 전전했다.
결국 그는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1584년 10월 15일 렉섬에서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리카르도 그윈은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순교한 날인 10월 17일에 기념하고, 시성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한편 웨일스 지방에서는 5월 4일 외에도 기존의 10월 25일을 ‘웨일스의 6위 순교성인’을 기념하는 별도의 축일로 유지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17일 목록에서 한 가족의 아버지이자 학교 교사였던 성 리카르도 그윈이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고 다른 사람에게 가톨릭 신앙을 갖도록 설득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오랜 감옥 생활 끝에 영국 웨일스의 렉섬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0. 리카르도 화이팅
- 세례명 축일
11월 15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Richard Whiting - 신분과 직업
신부, 수도원장,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461?-1539년 영국
리카르도 화이팅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휘팅.
리카르도 화이팅 이야기
복자 리카르두스 화이팅(Richardus Whiting, 또는 리카르도 화이팅)은 1461년경 영국 잉글랜드 남서부 서머싯(Somerset)의 링톤(Wrington) 부근에서 태어나 글래스턴베리 수도원(Glastonbury Abbey)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어 케임브리지(Cambridge)에서 성 베네딕토회의 몽크스 호스텔(Monk’s Hostel)에서 수학하여 1483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곳은 1542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막달라 대학(Magdalene College)으로 거듭난 곳이다.
그는 1501년에 웨일스(Wales)에서 사제품을 받고, 1505년에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글래스턴베리 수도원에서 기숙사와 공동체의 세면장과 옷장 등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 수행했다.
1525년 2월에 글래스턴베리 수도원의 원장이 선종한 후 그는 토마스 울지(Thomas Wolsey) 추기경에 의해 후임 수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10여 년간은 그에게 평화로운 시기였다. 그는 배려심 깊은 영적 지도자로서 또 현명한 관리자로서 수도원의 일상을 이끌었다.
당시 글래스턴베리 수도원은 영국 내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곳 중의 하나였다. 100여 명의 수도승이 함께 살고 있었고, 귀족과 상류층 자제들이 대학에 진학하기 전 교육을 받는 곳으로 유명했다.
1534년 헨리 8세(Henry VIII) 왕이 자신의 이혼과 재혼 과정에서 가톨릭교회와 결별하며 수장령(首長令, Act of Supremacy)을 발표하고 서명을 강요했을 때 그와 수도원의 수도승들은 일단 서명을 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왕의 수장령에 대해 성 토마스 모어(Thomas More, 6월 22일)와 성 요한 피셔(Joannes Fisher, 6월 22일) 추기경 및 카르투지오회와 작은 형제회 수도자들의 반대 운동이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수장령에 서명하기를 거부한 많은 사제와 수도자들이 순교하면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1536년과 1539년에 수도원 해산과 재산에 대한 몰수가 강제로 집행되면서 이에 반대하는 이들에 대한 혹독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1539년 1월까지 글래스턴베리 수도원은 서머싯에 남아있던 유일한 수도원이었다. 하지만 수도원 해산과 재산 몰수에 끝까지 반대한 복자 리카르도 화이팅 원장은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혔다.
그는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글래스턴베리로 돌아와 11월 15일 서머싯의 웰스(Wells)로 끌려가 수도회의 회계 담당인 복자 요한 손(Joannes Thorne) 신부와 성구(聖具) 담당인 복자 로제로 제임스(Rogerus James) 신부와 함께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복자 리카르도 화이팅 대수도원장은 1895년 5월 13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순교한 날인 11월 15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복자 리카르도 화이팅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1월 15일 목록에서 영국 글래스턴베리에서 성 베네딕토회 대수도원장인 복자 리카르도 화이팅과 복자 로제로 제임스와 복자 요한 손이 거짓 고발을 당해 반역죄와 신성 모독죄로 헨리 8세 왕 때 잔인하게 고문을 당한 후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1. 리카르도 랭리
- 세례명 축일
12월 1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Richard Langley - 신분과 직업
평신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86년 영국
리카르도 랭리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리카르도 랭리 이야기
복자 리카르두스 랭리(Richardus Langley, 또는 리카르도 랭리)는 영국 잉글랜드(England) 북부 요크셔에서 태어나 생애 대부분을 부모에게 물려받은 이스트라이딩오브요크셔(East Riding of Yorkshire) 주의 그림소프(Grimthorpe)와 우즈소프(Ousethorpe)에 있는 집에서 지내며 결혼하여 다섯 명의 아들딸을 낳았다.
그는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58~1603년 재위) 여왕 시대에 자기 집을 가톨릭 사제들을 위한 은신처로 제공했다. 그의 집에 은신처가 있다는 사실이 북부 평의회(Council of the North)에 알려져 1586년 10월 28일 일단의 시민과 군인들 그리고 성공회 신부들이 들이닥쳐 집을 수색했다.
그 결과 두 명의 가톨릭 사제가 그림소프의 집에서 체포되었고, 복자 리카르도 랭리는 우즈소프의 집에서 체포되어 함께 요크(York)로 이송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는 재판받는 중에 여왕의 교회에 대한 수위권에 동의하지 않았고, 북부 평의회의 환심을 사려고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 이웃들로 구성되어 그에게 동정적인 배심원들은 모두 해임되고 새로 임명된 배심원들에 의해 유죄 증거도 입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복자 리카르도 랭리는 사제들을 보호하고 숨겼다는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1586년 12월 1일 요크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그의 시신은 당국에 의해 매장조차 거부되었다.
복자 리카르도 랭리는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순교한 날인 12월 1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복자 리카르도 랭리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2월 1일 목록에서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치하에서 복자 리카르도 랭리가 몇몇 사제들에게 환대를 베풀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고 요크에서 교수형을 당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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