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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다르크
천주교 여자세례명
잔다르크 여자세례명 목록
- 잔다르크 (5월 30일)
1. 잔다르크
- 세례명 축일
5월 3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Jeanne d’Arc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412-1431년 아르크
잔다르크 세례명과 같은 이름
요안나, 요한나, 잔, 잔느, 잔다르크, 잔다크, 쟌, 쟌다르크, 쟌다크,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후아나.
잔다르크 이야기
일명 ‘오를레앙(Orleans)의 거룩한 처녀’로 불리는 성녀 잔 다르크(아르크의 요안나, Joanna Arcensis)는 1412년 1월 6일 프랑스 동북부 샹파뉴(Champagne) 근처에 있는 동레미(Domremy)에서 열심한 가톨릭 신자인 농부의 다섯 자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출생한 시기는 백년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때였고, 당시 동레미는 영국군의 침략으로 큰 피해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1425년 13세가 될 무렵에 대천사 성 미카엘(Michael, 9월 29일)이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성녀 가타리나(Catharina, 11월 25일)와 안티오키아(Antiochia)의 성녀 마르가리타(Margaret, 7월 20일)와 함께 나타나 아버지의 집을 떠나 프랑스 군대의 사령관을 찾아가고 나아가 오를레앙을 점령하고 있던 영국 군대를 몰아내라는 초자연적인 ‘음성’을 들었다.
그녀는 이 목소리를 하느님이 보내신 것으로 생각했고, 그 ‘음성’의 지시에 따라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다는 표시로 순결 서약을 했다고 한다. 이 신비 체험은 성녀 잔 다르크의 삶에 일대 전환을 가져온 사건이었다.
1428년 5월에 그녀는 샤를 7세(Charles VII)를 도와 부르고뉴(Bourgogne)가 영국과 동맹을 맺음으로 인해 영국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 오를레앙 지역을 탈환하고, 내전으로 분열된 프랑스를 국왕의 통치 아래 하나가 되도록 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한 소명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샤를 7세가 보쿨뢰르(Vaucouleurs)에 파견한 장군을 찾아가 프랑스를 위해 싸울 수 있는 허락을 요청했으나 무시와 조롱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예언대로 샤를 7세의 상황은 더욱 불리해졌고, 1428년 10월 12일 그의 거점 지역인 오를레앙이 포위되었다.
1429년 프랑스군이 오를레앙 교외의 전투에서 영국군에 의해 패배하자, 남장을 한 성녀 잔 다르크는 로렌(Lorraine)의 공작 샤를 2세의 도움을 받아 그해 3월 시농(Chinon)에 피신해 있던 샤를 7세를 찾아갔다. 샤를 6세의 아들인 그는 백년 전쟁에서 영국인들에 의해 프랑스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녀는 그가 못된 인물인 줄 알았으나 계시에 따라 그에게 순종하였고, 그가 자신의 사명을 인정하게끔 하여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군사 작전에 나서기 전 푸아티에(Poitiers)로 가서 주교와 학자들 앞에서 최종적인 심문을 받아야 했다. 이때 성녀 잔 다르크는 그녀가 들은 초자연적 ‘음성’의 진실성 여부에 대한 조사를 받았다.
그 결과 그 ‘음성’은 사실로 인정받았고, 그녀의 주장에서 이단이나 미신적인 요소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받았다. 이후 그녀는 하느님이 파견한 예언자이자 투사로 알려졌고, 그녀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흰 갑옷을 입고 전투에 참여한 그녀는 1429년 5월 7일 오를레앙에 입성하고 5월 8일에 영국군을 퇴각시킴으로써 프랑스군에 최초의 승리를 안겨주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마침내 1429년 7월 17일 샤를 7세는 랭스(Reims)에서 대관식을 올릴 수 있었다. 이때 그녀는 왕의 옆자리에 앉았으나 그때부터 왕은 더욱 교만해져서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1430년 4월에 성녀 잔 다르크는 위험에 빠진 콩피에뉴(Compiegne)를 구하기 위해 출정하였다가 포로가 되었다. 그녀가 포로가 되자 영국에 동조하는 파리 대학교의 학자들과 성직자들은 성녀 잔 다르크가 마녀이며 이단의 혐의가 있음을 강조하며 이단 심문을 주장했다.
프랑스인들이 당시 프랑스의 포로였던 영국군 사령관과 그녀를 교환할 것은 샤를 7세에게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성녀 잔 다르크는 1431년 1월 엄청난 액수의 몸값을 받은 콩피에뉴가 속한 보베(Beauvais) 교구장에 의해 영국군에게 넘겨졌다.
영국 왕은 그녀가 ‘미신과 혹세무민, 위대한 하느님을 여러 가지로 거스른 죄’를 지었다고 보고 재판을 열도록 했다. 결국 그녀에 대한 이단 심문이 루앙(Rouen)에서 열리게 되었다.
그해 5월까지 진행된 심문을 통해 초자연적 ‘음성’에 대한 내용은 물론 남장을 해서 하느님을 모독하고 군대를 선동한 것 등 12가지의 죄목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동시에 전향을 종용받았다.
그녀는 자신을 이단으로 모는 정치와 종교 지도자들 틈새에서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결국 세속 법정으로 넘겨졌고, 5월 30일 루앙에서 화형을 당했다.
성녀 잔 다르크의 화형 이후 파리와 루앙을 탈환한 샤를 7세는 그녀에 대한 재판을 새롭게 검토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래서 1455년 11월 파리의 노트르담 주교좌성당에서 복권 재판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녀 가족들의 탄원으로 교황 칼리스토 3세(Callistus III)는 새로운 조사 위원회를 설치하도록 지시했다.
조사 결과에 따라 1456년 7월, 성녀 잔 다르크에게 화형 판결을 내린 기존 재판을 폐기하고 무효화하는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그녀의 명예 역시 복권되었다. 하지만 교황청은 성녀 잔 다르크의 명예 회복에 대해 수백 년 동안 침묵을 지켜왔다. 하지만 1869년부터 그녀의 신앙과 순결, 영혼의 순수함을 기리며 시복 시성 움직임이 확산하였다.
특히 오를레앙을 중심으로 프랑스에서 그녀는 이미 많은 이들 안에서 성녀로서 공경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 대해 새로운 인식, 특히 정치적 · 신앙적으로 극도의 절망 속에 있던 프랑스에서 한 시골 처녀가 보여준 놀라운 일들은 그 자체로 희망이자 기적임을 깨닫게 되었다.
결국 20세기에 들어와서 성녀 잔 다르크는 1909년 4월 18일 교황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시복되었고, 1920년 5월 16일 교황 베네딕토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녀는 동정 순교자로서, 프랑스의 두 번째 수호성인으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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