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세례명/세례명 이름 찾기

마태오 남자세례명 7인 목록

피어나네 2025. 3. 1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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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세례명 마태오는 마두, 마태우스, 마테오, 마테우스, 매튜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남자세례명 마태오 7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마태오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마태오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본받고 싶은 남자 세례명 찾기

마태오
천주교 남자세례명
7인 목록

 

 

 

 

마태오 남자세례명 목록

 

  1. 마태오 (2월 3일)

  2. 마태오 (3월 27일)

  3. 김현우 마태오 (5월 29일)

  4. 유중성 마태오 (5월 29일)

  5. 마태오 (9월 21일)

  6. 마태오 카레리 (10월 5일)

  7. 마태오 (11월 12일)

 

마태오 천주교 남자세례명 7인 목록

 

 

1. 마태오

 

  • 세례명 축일
    2월 3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Matthew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450년 지르젠티(Girgenti)

 

 

마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두, 마태우스, 마테오, 마테우스, 매튜.

 

 

마태오 이야기

시칠리아(Sicilia)의 지르젠티(오늘날의 아그리젠토, Agrigento) 태생인 마태오(Matthaeus)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일찍이 포기하고, 18세 때에 콘벤투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으나,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시에나(Siena)의 성 베르나르두스(Bernardus, 5월 20일)의 명성을 듣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콘벤투알회를 떠나 그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는 성 베르나르두스와 함께 이탈리아 전역을 다니면서 설교하였는데, 특히 성직자의 규율이 극히 해이하고 성직매매가 극성을 부리던 시칠리아의 성직자들에게 개심하는 계기를 마련하는데 성공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지르젠티 주민들은 그가 주교로서 봉직해 줄 것을 바라고 호소하여 교황의 동의를 받았다.

그가 첫 번째 수행한 임무는 규율 이완을 막고 성직매매를 금지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수많은 적을 만든 결과, 그는 평화를 깨트리고 불화를 조성한다는 누명으로 인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세운 수도원으로 갔으나, 그 수도원의 원장조차도 그를 배척하므로 하는 수 없이 팔레르모(Palermo)에 있는 콘벤투알 프란치스코회의 옛 친구에게서 피신처를 얻어 지내다가 선종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767년에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마태오

 

  • 세례명 축일
    3월 27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tthew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098년 보베(Beauvais)

 

 

마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두, 마태우스, 마테오, 마테우스, 매튜.

 

 

마태오 이야기

프랑스의 보베에서 태어난 성 마태오(Matthaeus)는 이슬람의 지배로부터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하기 위해 교황 복자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 7월 29일)의 호소로 시작된 제1차 십자군 원정에 보베의 로제루스(Rogerus) 주교의 휘하로 참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원정 중에 사라센인들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혔다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하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김현우 마태오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金顯禹 Matthew

  • 신분과 직업
    중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75-1801년 한국(Korea)

 

 

김현우 마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마태오, 김마태오, 마두, 마태우스, 마테오, 마테우스, 매튜.

 

 

김현우 마태오 이야기

김현우 마태오(金顯禹, Matthaeus)는 한양 명례방의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1786년경 유배지에서 사망한 김범우 토마스는 그의 맏형이자 이복형이고, 1801년 포도청에서 매를 맞아 순교한 김이우 바르나바(金履禹, Barnabas)는 그의 친형이다.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어, 맏형 김 토마스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한 김 마태오는 형인 김 바르나바와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당시 그들 형제에게 세례를 준 사람은 이승훈 베드로였다. 이어 1785년에 일어난 ‘명례방 사건’으로 김 토마스가 유배를 가면서 그들 형제는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며, 비밀리에 기도 생활을 계속해 나갔다.

1794년 말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Jacobus)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 김 마태오는 형과 함께 적극적으로 교회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홍필주 필립보(洪弼周, Philippus)의 집으로 가서 주 야고보 신부를 만났으며, 정인혁 타대오(鄭仁赫, Thaddaeus), 최필제 베드로(崔必悌, Petrus) 등 몇몇 교우들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들은 이 공동체 안에서 자주 기도 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강습하였다.

이후 김 마태오는 주 신부가 박해의 위험 때문에 잠시 형의 집을 피신처로 삼자, 그곳으로 가서 미사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형과 함께 주 야고보 신부가 설립한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또 1800년에 주 신부가 다시 한 번 형의 집을 방문하자, 김현우 마태오도 그곳으로 가서 교우들과 함께 미사에 참여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김 마태오는 형 김 바르나바와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특히 김 마태오가 체포될 때는 찬란하고 커다란 십자가가 나타나, 그의 앞에서 옥으로 가는 길을 가리켰다고 전한다.

포도청에서는 곧바로 김 마태오에게 엄한 문초와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거나 그동안의 행적을 추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알려진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입 밖에 내지 않았으며, 어느 누구의 종적도 밀고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다시 형조로 이송되어 굳센 신앙의 의지로 형벌을 이겨 내고 다음과 같이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다.

“삼 형제가 함께 천주교에 빠져 똑같은 악행을 함께 저질렀으며, 남녀가 뒤섞여 지내면서 천주교 서적을 외웠다. 많은 사람들을 속여서 그릇된 길로 이끌고 세상을 어지럽혔다. 비록 형벌을 당해 죽는다고 할지라도 ‘천주교는 끝내 옳은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김현우 마태오는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김현우 마태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유중성 마태오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柳重誠 Matthew

  • 신분과 직업
    양반,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784?-1802년 한국(Korea)

 

 

유중성 마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두, 마태우스, 마테오, 마테우스, 매튜, 유 마태오, 유마태오.

 

 

유중성 마태오 이야기

‘완석’(完碩)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유중성 마태오(柳重誠, Matthaeus)는 전라도 전주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아주 어렸을 때 집안의 장남이던 부친이 35세의 나이로 돌아가셔서, 그는 전주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있는 작은 아버지 유항검 아우구스티노(柳恒儉, Augustinus)의 집에서 자라게 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 순교자인 유중철 요한(柳重哲, Joannes)과 유문석 요한(柳文碩, Joannes)은 그의 사촌 형제들이다.

유 마태오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데에는 작은아버지 유 아우구스티노와 그 가족의 영향이 컸다. 실제로 유 아우구스티노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가족과 친지들에게 널리 교리를 전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1801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유 마태오의 집안에서는 유 아우구스티노와 유 요한이 먼저 체포되었고, 그는 9월 중순 무렵에 어머니를 비롯하여 다른 친척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그의 어머니는 체포된 지 얼마 안 있어 석방되었다. 그러나 유중성 마태오는 사촌 형수인 이순이 루갈다(李順伊, Lutgardis) 등 다른 친척들과 함께 순교를 약속하면서 굳게 마음을 다졌다.

그러나 유 마태오와 친척들은 유배형을 받고, 함경도 회령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때 유 마태오가 사촌 형수인 이 루갈다와 함께 친척들을 대표하여 ‘법에 따라 처형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유 마태오는 친척들과 유배지로 가는 동안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관장이 국법에 따라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지 않고 유배를 보냈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전주 감사는 그들을 다시 잡아 오도록 하여 옥에 가두었다. 이후 유 마태오는, 다시 감사 앞에 끌려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고, 다음과 같은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였다.

“천주교는 집안에서 전해 오던 신앙입니다. 유항검 등 삼촌들이 영광스럽게 죽었으므로 그들과 같이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감사는 결국 조정에 사형 판결을 요청하였고, 얼마 뒤에 임금의 윤허가 내려왔다. 이에 따라 유중성 마태오는 1802년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친척들과 함께 ‘숲정이’라고 불리는 전주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약 18세가량이었다. 당시까지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었다.

유중성 마태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마태오

 

  • 세례명 축일
    9월 21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tthew

  • 신분과 직업
    사도, 복음사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경

 

 

마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두, 마태우스, 마테오, 마테우스, 매튜.

 

 

마태오 이야기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인 성 마태우스(Matthaeus, 또는 마테우스, 마태오)는 이스라엘 북부 갈릴래아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Capharnaum)에서 로마 제국을 위해 세금을 걷는 세리였으나, “나를 따라라.” 하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당시 세리는 로마 제국을 대신해 동족에게 세금을 걷었기 때문에 멸시의 대상이자 죄인으로 취급받았다. 그런데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마티야’에서 유래한 마태오라는 이름처럼, 어느 날 세관에 앉아 있던 성 마태오는 주님의 부르심 속에서 자비를 체험하고 열두 사도의 한 명이 되었다. 

그는 갈릴래아 태생인 듯하며 마르코 복음에 의하면 알패오의 아들로 원래 이름은 레위였다(2,14). 시몬에게 베드로(Petrus)라는 이름을 주신 것처럼, 레위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마태오라는 새 이름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루카 복음은 레위라는 세리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5,27).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르게 언급하면서 마태오와 레위 사이의 관계에 대해 몇몇 주장이 있었으나 대체로 교회 전통은 둘을 동일 인물로 보아 왔다. ‘예수님의 고을’(마태 9,1)로 불리는 카파르나움과 그 인근에서 세관원으로 일했던 성 마태오는 이미 예수님에 관해 많은 소문을 들었고 어쩌면 제자로 불리기 전에 예수님을 먼저 뵐 기회가 있었을 수도 있다.

열두 사도 중의 한 명인 성 마태오는 일찍이 초대교회부터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로 알려져 왔다. 그는 특별히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로 복음서를 저술했다고 한다.

교회사가 에우세비우스(Eusebius)의 “교회사”에 따르면 그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12년 동안 먼저 동족인 히브리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후에 다른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s)는 그가 은수자로서 채식만 하면서 생활했다고 주장했다.

전승마다 차이는 있지만, 성 마태오 사도는 유대 지방을 순회하다가 옛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에티오피아로, “예로니모 순교록”에 따르면 페르시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순교 장소가 전승에 따라 에티오피아와 페르시아로 알려진 것처럼 순교 방법 또한 칼에 찔리거나 화형 또는 돌에 맞아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은 성 마태오가 에티오피아에서 순교한 후 그곳에 묻혔다가 5세기 제노(Zeno) 황제 때에 기적적으로 사도 성 바르나바(Barnabas, 6월 11일)의 유해와 함께 발견되었다고 기록하였다.

그 후 전승에 따르면 이탈리아에 모셔졌던 성 마태오의 유해가 10세 중엽 다시 발견되어 이탈리아 남부 항구도시인 살레르노(Salerno)로 옮겨져 대성당 지하에 안치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고 한다.

반면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레위라고 불리던 성 마태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응답해 세리의 직분을 떠나 사도이자 복음사가로서 복음서를 썼다고 소개하며, 그 복음서에서 구약성경의 모든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선포했다고 적었다. 전승에 따라 다르게 전해지는 순교 장소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교회 미술에서 성 마태오는 성경(에제 1,10; 묵시 4,7)에 언급된 ‘살아있는 네 생물’에서 유래한 상징에 의하면 날개 달린 사람(천사)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는 성 마태오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구세주의 인간성을 강조한 것에 착안해 네 생물과 복음서를 일치시킨 리옹의 주교이자 교부인 성 이레네오(Irenaeus, 6월 28일)의 선택이었다.

사도 성 마태오 복음사가는 세리였던 경력으로 인해 특별히 은행원과 장부 기장자, 회계사와 세무 직원들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그래서 교회 미술에서도 장부를 펼쳐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를 많이 표현하고 있다. 동방교회에서는 그의 축일을 11월 16일에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마태오 카레리

 

  • 세례명 축일
    10월 5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Matthew Carreri

  • 신분과 직업
    신부, 설교가

  • 활동 연도와 지역
    1420-1470년 만투아(Mantua)

 

 

마태오 카레리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까레리, 까리에리, 마두, 마태우스, 마테오, 마테우스, 매튜, 카리에리.

 

 

마태오 카레리 이야기

이탈리아 만투아에서 태어난 요한 프란치스코 카레리(Joannes Franciscus Carreri)는 1440년 고향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면서 마태오(Matthaeus)라는 수도명을 얻었다. 그는 수도회의 엄격한 규율을 모범적으로 준수하며 설교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특히 설교를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영성 수련과 관상의 시간을 가졌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제노바(Genova)에서 피사(Pisa)로 여행하던 중에 터키 해적들에 의하여 나포된 적이 있었다. 그는 해적 두목에게 단호하고 분명하게 자신들의 여행 목적을 설명해 두 명의 동료 수사들과 함께 석방 허가를 받았다.

그때 그는 배 안에 한 여인과 그녀의 딸이 여전히 갇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알제리에 노예로 팔려갈 처지였다. 그래서 그는 해적 두목에게 그들을 대신해 자신을 데려가라고 했고, 그의 희생적 용기에 충격을 받은 두목은 그들 모두를 풀어주었다.

마태오 카레리는 도미니코회 3회원인 복녀 스테파나 드 퀸차니 (Stephana de Quinzani, 1월 2일)의 어린 시절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는 어린 그녀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장차 자신의 영적 상속자가 되리라고 알려주었다. 그 말의 의미는 후에 복녀 스테파나 드 퀸차니가 그와 비슷하게 그리스도의 수난에 깊이 헌신한 결과로 얻은 상흔을 경험하기 시작했을 때 분명해졌다.

그는 1470년 10월 5일에 파비아 지방의 비제바노(Vigevano)에서 선종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482년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에 의해 그의 유해에 대한 이장과 공적 전례 안에서의 기념이 승인되었고, 1518년에는 비제바노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마태오 카리에리(Matthaeus Carrieri)로도 불리는 그의 축일은 10월 7일에 기념하기도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마태오

 

  • 세례명 축일
    11월 12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tthew

  • 신분과 직업
    수도승,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005년 폴란드(Poland)

 

 

마태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두, 마태우스, 마테오, 마테우스, 매튜.

 

 

마태오 이야기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는 쿠에르푸르트(Querfurt)의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6월 19일)의 친구인데 라벤나(Ravenna) 수도원에서 성 로무알두스(Romualdus, 6월 19일)의 지도를 받으며 크게 성장하였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오토 3세가 포모제(Pomorze, 또는 포메라니아)의 슬라브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성 아달베르투스(Adalbertus, 4월 23일)에게 요청했을 때, 성 베네딕투스와 다른 수도자들이 그를 따라나섰다.

우선 그들은 볼레슬라우스(Boleslaus) 공작의 궁에서 슬라브어를 배우고, 그니에즈노(Gniezno) 교외 카지미에르스에 거처를 정하고 활동하던 중 성 베네딕투스와 그의 동료인 성 요한(Joannes), 성 마태오(Matthaeus), 성 이사악(Isaac), 성 크리스티누스(Christinus) 모두 이교인 강도들의 침략으로 살해되었다.

그들은 순교자로서 널리 알려졌는데, 비록 그들이 폴란드인은 아니지만 지금도 폴란드에서는 ‘다섯 명의 폴란드 수도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으며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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