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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아노 남자세례명 4인 목록

피어나네 2025. 5. 1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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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아노
천주교 남자세례명
4인 목록

 

 

 

 

막시밀리아노 남자세례명 목록

 

  1. 막시밀리아노 (3월 12일)

  2. 막시밀리아노 (8월 14일)

  3. 막시밀리아노 (8월 26일)

  4. 막시밀리아노 (10월 12일)

 

막시밀리아노 천주교 남자세례명 4인 목록

 

 

1. 막시밀리아노

 

  • 세례명 축일
    3월 12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ximilian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95년 테베스테(Theveste)

 

 

막시밀리아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막시밀리아누스, 막시밀리안, 막씨밀리아노, 막씨밀리아누스, 맥시밀리안, 맥시밀리언.

 

 

막시밀리아노 이야기

성 막시밀리아누스(Maximilianus, 또는 막시밀리아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순교 당시의 재판 기록을 통해 그가 용감하게 순교한 젊은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274년경 북아프리카에서 퇴역 군인인 파비우스 빅토르(Fabius Victor)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참전 용사의 아들들 역시 군 복무의 의무가 있었다. 적절한 나이에 도달한 성 막시밀리아노는 295년에 아버지와 변호사와 함께 로마군의 신병 모집 담당관을 만나러 누미디아(Numidia, 오늘날의 북아프리카 지역)의 테베스테(오늘날 알제리 북동부의 테베사[Tebessa]로 튀니지 국경과 가까운 지역)로 갔다.

그는 담당관 앞에서 당당히 “나는 그리스도인이라 군인이 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군 복무를 거부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에도 전혀 물러서지 않아 디온(Dion) 총독 앞으로 끌려가 재판을 받았다. 총독은 그의 아버지에게 아들을 설득하라고 했으나 아버지 또한 그리스도교로 개종했기에 아들의 뜻을 존중해주었다.

총독 앞에서도 성 막시밀리아누스는 용감하게 주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이방 신을 섬기거나 무기를 들 수 없다고 말했다. 총독은 그에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년 재위)의 모습이 새겨진 군인 배지를 주며 황제의 군대에 복무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많다고 설득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총독은 군 복무에 헌신하든지 아니면 죽음뿐이라며 위협했다. 성 막시밀리아노는 끝까지 “나는 결코 우상을 섬길 수 없고, 나는 이 세상의 군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군인이다.”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결국 그는 재판 끝에 군 복무를 거부한 군대 모독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총독은 그리스도인이라 군 복무를 거부한다는 그의 태도가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퍼지는 것을 두려워해 서둘러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는 참수형으로 21살의 젊은 나이에 순교하였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폼페이아나(Pompeiana)라는 부인이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카르타고로 옮긴 후 성 치프리아노(Cyprianus, 9월 16일)의 무덤 근처에 묻어주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3월 12일 목록에서 성 마밀리아누스(Mamilianus, 또는 마밀리아노)가 로마(Roma)에서 순교했다고 짧게 적었는데, 이는 순교 장소와 이름에 대해 잘못 기술한 것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3월 12일 목록에서 오늘날 알제리에 속한 누미디아의 테베스테에서 참전 용사 빅토르의 아들인 성 막시밀리아노가 총독 디온 앞에서 충실한 그리스도인은 군에 복무하는 것이 불법이라며 군인 선서를 거부해 참수형으로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성 막시밀리아노는 오래전부터 그리스도교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엄격한 의미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라기보다는 군사적 의무 이행과 관련된 종교 행위를 거부해 순교했다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당시 로마 제국의 군인이 된다는 것은 황제에 대한 우상 숭배 행위를 수반하고, 동시에 부당한 폭력 행위가 포함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 세례명 축일
    8월 14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ximilian Mary Kolbe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94-1941년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세례명과 같은 이름

꼴베, 막시밀리아누스, 막시밀리안, 막씨밀리아노, 막씨밀리아누스, 맥시밀리안, 맥시밀리언.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이야기

성 막시밀리아누스 마리아 콜베(Maximilianus-Maria Kolbe, 또는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는 1894년 1월 7일 폴란드의 즈둔스카볼라(Zdunska Wola)에서 태어나 라이문도(Raimundus)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신심 깊은 부모의 신앙 교육 덕분에 강한 성모 신심을 갖고 성장한 그는 1907년 10월 당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레오폴리의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3년 뒤인 1910년 9월 4일 콘벤투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면서 막시밀리아노라는 수도명을 택했다.

이곳에서는 그는 중등 교육과 수련을 받고 1911년 9월 5일 첫 서원을 하고 1912년 12월 로마로 가서 공부를 계속했다. 그는 로마의 프란치스코회 국제 신학원에 머물면서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보나벤투라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무렵 23세였던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는 여섯 명의 동료와 함께 신학원장 신부의 허락하에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Militia Immaculatae)라는 모임을 결성했다(1917년 10월 16일). 이 모임은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에게 자신을 철저히 봉헌하고,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서 활동하는 일종의 신심 단체이다.

1914년 11월 1일 종신서원을 하고, 1918년 4월 28일 사제품을 받은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는 1919년에 고국인 폴란드로 돌아왔다. 귀국 직후 크라쿠프(Krakow)의 프란치스코회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동료 수사들은 물론 대학생들과 군종신부들 안에서 기사회 조직을 만들었다.

그러나 귀국할 때부터 폐결핵을 앓고 있던 그는 1년 6개월을 요양소에서 생활했고, 1921년부터는 한쪽 폐로만 살아야 했다. 1922년부터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Rycerz Niepokalanje)라는 잡지를 발행하면서 대중매체를 통한 사도직을 시작했다. 이 잡지는 초기에 그로드노(Grodno)에서 발행되다가, 1927년에는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Miepokalanow)이라는 수도 생활 공동체에서 발행하였다.

이 마을은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가 바르샤바(Warszawa)에서 40km 떨어진 방대한 지역에 설립한 공동체이다. 그리고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나가사키 근처에 ‘원죄 없으신 성모의 뜰’이라는 작은 수도 마을을 세우고,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를 일본어로 번역해 발행했다. 6년 동안 일본 선교를 위해 노력한 그는 중국 · 한국 · 인도에도 공동체를 세우려고 했으나 외부적인 이유로 실현하지 못했다.

1936년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 총책임자로 임명된 그는 전 세계에 분원을 세우는 데 큰 공을 들였다. 1938년 무렵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 분원이 전 세계에 762개나 되었다.

폴란드 내에서 유명해진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는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나치에게 체포되어 수용소에 갇혔다가 곧 풀려났다. 이후 그는 가난한 이들과 박해받는 유대인들을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에 거주토록 하면서, 이들을 보호하고 돕기 위해 노력했다.

1941년 그가 “자유”라는 기고문을 발표하자, 나치는 유대인들을 도왔다는 이유로 2월 17일 그를 체포하여 바르샤바의 파비악 형무소에 감금했다가 2월 28일 ‘죽음의 수용소’라고 불리는 아우슈비츠로 옮겼다.

이곳에서 그는 저명한 가톨릭 신부라는 이유로 더욱 혹독한 매질과 고문을 받으면서도 동료 수감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끊임없이 격려하였다. 그러던 중 1941년 7월 말경, 한 수감자가 수용소를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치는 한 명이 탈출하면 그 벌로 열 명을 처형했다.

나치에 의해 지목된 열 명의 처형 대상자 중 한 폴란드 사람이 자기에게는 가족과 아이들이 있다고 울부짖자 이를 본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는 자원해서 대신 죽겠다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나치의 허락을 받고 다른 아홉 명과 함께 지하 감옥에 갇힌 그는 아사형에 처해졌다.

다른 동료들이 모두 굶어 죽을 때까지 2주 이상을 물과 음식 없이 생존한 그에게 나치는 결국 독극물을 주사했고, 그는 1941년 8월 14일 성모 승천 대축일 전날 아우슈비츠의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다음 날 그의 시신은 아우슈비츠의 시신 소각장에서 불태워지고 말았다.

오늘날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가 죽음을 맞이한 감옥은 수많은 순례자가 찾는 장소가 되었다. 1948년 그에 대한 시복 절차가 파도바(Padova)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1971년 10월 17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나치 희생자들 가운데 처음으로 복자품에 올랐다.

1982년 10월 10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그에게 ‘자비의 순교자’(Martyr of Charity)라는 칭호를 부여하며 시성식을 거행했다.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매우 깊었으며, 성모 마리아에게 특별한 공경을 바친 성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수감자들의 주보성인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14일 목록에서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를 만들고 아우슈비츠에서 동료를 대신해 사형당한 자비의 순교자인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에 대해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막시밀리아노

 

  • 세례명 축일
    8월 26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ximilian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로마(Roma)

 

 

막시밀리아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막시밀리아누스, 막시밀리안, 막씨밀리아노, 막씨밀리아누스, 맥시밀리안, 맥시밀리언.

 

 

막시밀리아노 이야기

성 막시밀리아누스(Maximilianus, 또는 막시밀리아노)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옛 “로마 순교록”에서 그의 이름을 찾을 수는 없지만,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26일 목록에서 이탈리아 로마의 고대 살라리아 가도(Via Salaria)에 있는 바실라(Basilla) 묘지에 성 막시밀리아노 순교자의 묘지가 있다고 기록하였다.

그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예로니모 순교록”(Martyrologium Hieronymianum)의 같은 날 목록에 나오는데, 7세기에 순례자들이 그의 무덤을 찾았다고 전해주었다. 그 외에 그의 생애와 순교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막시밀리아노

 

  • 세례명 축일
    10월 12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ximilian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284년경? 로르흐(Lorch)

 

 

막시밀리아노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막시밀리아누스, 막시밀리안, 막씨밀리아노, 막씨밀리아누스, 맥시밀리안, 맥시밀리언.

 

 

막시밀리아노 이야기

성 막시밀리아누스(Maximilianus, 또는 막시밀리아노)는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대부분과 슬로베니아 지역을 포함하는 로마제국의 속주 ‘노리쿰(Noricum)의 사도’로서 파사우(Passau) 교외에 로르흐 교구를 설정한 주교이자 순교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노리쿰 지방의 첼레(Celje, 오늘날 슬로베니아 중북부의 도시)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리스도교 신앙 교육을 받았다.

상당히 부유했던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서 유산으로 많은 재산을 남겨주었지만, 그는 자선사업으로 모두 기증하고 노예들에게 자유를 준 후 로마로 순례길을 떠났다.

교황 성 식스토 2세(Sixtus II, 8월 7일)는 그를 선교사 주교로 임명해 노리쿰 지역의 라우리아쿰(Lauriacum, 오늘날 오스트리아 린츠[Linz] 인근 도시인 엔스[Enns] 교외의 로르흐)으로 파견했다. 성 막시밀리아노는 선교사로서 활발히 활동하며 로르흐에 주교좌를 세웠다. 그는 발레리아누스와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박해를 용케 모면하고 20여 년을 사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누메리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고향인 첼레의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돕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 그리고 로마의 우상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라고 강요하는 집정관 앞에서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해 선포한 후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8세기경부터 활발해졌는데, 잘츠부르크(Salzburg)의 성 루페르토(Rupertus, 3월 27)가 잘차흐(Salzach) 계곡의 비쇼프스호펜(Bischofshofen)에 성당을 지어 그의 이름으로 봉헌하고 그의 유해를 모셨다.

985년에 그의 유해는 다시 파사우(Passau) 교구의 성 슈테판(St. Stephan) 대성당으로 옮겨져 파사우 교구의 두 번째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오늘날의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바이에른(Bayern) 지역에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이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모두 10월 12일 목록에서 로르흐의 주교인 성 막시밀리아누스에 대해 언급했는데, 순교자라는 설명은 빠져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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