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세례명 말라키는 말라기, 말라끼, 말라끼아스, 말라키아스, 맬러키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남자세례명 말라키 2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말라키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말라키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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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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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키 남자세례명 목록
1. 말라키
- 세례명 축일
11월 2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lachy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094?-1148년 아마(Armagh)
말라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말라기, 말라끼, 말라끼아스, 말라키아스, 맬러키, 오모르.
말라키 이야기
성 말라키아스(Malachias, 또는 말라키)는 1094년경 북아일랜드의 아마에서 그곳 수도원 학교 강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젊어서 아마의 성 첼소(Celsus, 4월 1일) 대주교를 도와 그레고리오 개혁을 실천하도록 도운 임하르 오하간(Imhar O’Hagan) 은수자의 제자가 되었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 20살의 나이에 성 말라키는 수도원장이 된 임하르 오하간 밑에서 수도승이 되었다. 그리고 1119년경 성 첼소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고, 그가 시행하는 교회 개혁의 협력자가 되었다. 당시 아일랜드는 반란과 노르만의 침략 등으로 시달리고 있었고, 교회 조직 또한 불안하고 성직자들의 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제품을 받고 얼마 후에 성 첼소가 더블린(Dublin)으로 갔을 때 그가 교구장 대리로서 얼마간 교구를 돌봐야 했다. 그는 전례와 교회 생활에 있어서 로마 교회의 관습을 받아들여 정착시키려 노력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는 성 첼소 주교의 허락을 받고 리스모어(Lismore)로 가서 워터퍼드(Waterford)의 성 말코(Malchus, 4월 10일) 주교의 지도하에 개혁 프로그램과 수도원 생활에 대한 학업을 이어갔다.
1123년에 성 말라키는 고향 인근 뱅거(Bangor)에 있는 유명하지만 버려진 수도원을 삼촌으로부터 물려받았다. 그는 아마에서 온 10명의 수도승의 도움을 받아 뱅거 수도원을 복원하였다.
1124년경 그는 다운과 코너(Down and Connor)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뱅거 수도원에서 머물면서 교구민의 신앙심을 일깨우고 교구의 여러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1127년 도적들이 뱅거(Bangor) 수도원을 침략했을 때 그는 다른 수도승과 함께 리스모어로 피했고, 그곳에 새로운 수도원을 세우고 사목 활동과 지역 사회 교육에 힘썼다.
1129년 위대한 개혁가였던 성 첼소 주교가 선종하면서 그의 후계자로 성 말라키를 아마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러자 아마의 수도원과 오랜 세월 주교좌를 세습해 왔던 성 첼소 가문의 극심한 반발에 부딪혀 생명의 위협까지 감수해야 했다. 결국 성 말라키는 아마를 떠나 데리(Derry) 수도원으로 갔다가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1134년에야 주교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년간의 논쟁 속에서 그레고리오 개혁을 추진한 그는 1137년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데리의 수도원장 갈라(Galla)를 후임자로 지지하며 아마의 주교좌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다운과 코너 교구를 더 작게 둘로 나눠 다운패트릭(Downpatrick) 주변 다운의 주교직을 맡았다.
1139년에 그는 아일랜드의 교회 조직과 개혁 등에 대한 교황 인노첸시오 2세(Innocentius II)의 동의를 얻기 위해 아일랜드 주교단을 대신해 로마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원하는 결과를 얻지는 못했으나 교황 특사로 임명되어 아일랜드 교회의 개혁, 특별히 로마 전례의 도입을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을 명받았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시토회의 클레르보(Clairvaux) 수도원에서 성 베르나르도(Bernardus, 8월 20일)를 만났다. 그리고 일행 중 네 명을 그곳에 남아 수도 생활을 배우도록 배려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1142년에 멜리폰트(Mellifont)에 아일랜드 최초의 시토회 수도원을 세우기 위해 성 베르나르도의 도움을 청했고, 성 베르나르도는 성 말라키가 교육을 위탁한 복자 크리스티아노 오코나키(Christian O’Conarchy, 3월 18일)와 동료 수도승들을 보내주었다. 그들은 성 말라키 주교를 도와 멜리폰트에 첫 시토회 수도원을 세우고 시토회 정신을 알리는데 헌신했다.
8년 동안 교황 특사로 활동한 성 말라키는 1148년에 아일랜드 교회 조직 개혁에 대한 교황의 승인이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두 번째 로마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여행 중 열병에 걸린 그는 클레르보(Clairvaux) 수도원에 도착해 성 베르나르도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해 11월 2일 선종하여 그곳 수도원에 묻혔다.
성 베르나르도가 그의 생애에 대한 전기를 쓰면서 그에 대한 공경이 클레르보에서부터 시작되었고, 1190년 교황 클레멘스 3세가 그에 대한 공경을 승인하여 공식적으로 시성된 최초의 아일랜드 사람이 되었다. 그의 축일은 위령의 날과 겹치지 않도록 11월 3일로 옮겨 기념해왔다.
옛 “로마 순교록”은 11월 3일 목록에서 클레르보 수도원에서 아일랜드 아마의 주교인 성 말라키가 선종했는데, 그는 당대에 많은 덕행으로 명성을 얻었고, 성 베르나르도 수도원장이 그의 전기를 썼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원래 선종한 날인 11월 2일로 축일을 옮기고,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 지방 클레르보 수도원에서 아일랜드 다운과 코너의 주교인 성 말라키가 선종했는데, 그는 교회의 삶을 새롭게 하고자 노력했고 로마로 가는 길에 클레르보에서 성 베르나르도 수도원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님께 자기 영혼을 봉헌했다고 기록하였다. 그는 말라키 오모르(Malachy/Malachi O’More/O’Mongoir/O’Morgair)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말라키
- 세례명 축일
12월 18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Malachy - 신분과 직업
구약인물, 예언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말라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말라기, 말라끼, 말라끼아스, 말라키아스, 맬러키.
말라키 이야기
성 말라키아스(Malachias, 또는 말라키)는 구약성경 12 소예언서의 마지막 책이며 46권으로 이루어진 구약성경 전체의 마지막 책인 말라키서의 저자로 등장한다. 말라키서는 “말라키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내리신 주님의 말씀”(1,1), 즉 신탁을 기록하고 있다.
말라키서는 종교와 사회생활에 대해 가치 있는 증언을 수록하고 있는 하까이서와 즈카르야서와 함께 유배 시대 이후의 예언을 담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말라키’라는 이름은 말라키서 1장 1절의 머리글에만 등장한다. 히브리어로 말라키는 ‘나의 사자(使者)’ 또는 ‘나의 천사’라는 뜻이다.
4세기의 유대 전승들을 모은 “예언자들의 삶”(Lives of the Prophets)에는 말라키가 즈불룬(Zebulun)의 소파(Sopha) 출신으로 레위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전승에 따르면 말라키는 신앙심이 깊고 온유하여 백성들로부터 공경을 받았는데, ‘보는 것이 공정하여’ 말라키라는 이름이 주어졌다고 한다.
가(假)에피파니우스(Pseudo-Ephiphanius)와 다른 교부들은 이 전승을 받아들였으나, 오늘날의 학자들은 이러한 전승들이 기원이 늦고 비현실적이어서 예언자의 생애에 관한 증명으로는 역사적 가치가 없다고 여긴다. 다만 예언 내용을 통해서 볼 때, 그는 하느님의 거룩함과 인간 죄의 심각함(2,17-3,4; 3,6-7. 13-20)을 파악한 인격적인 신앙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그뿐만 아니라 우상 숭배에 따른 혼혈혼과 이혼(2,10-16), 사회 불의(3,5)에 반대한 매우 헌신적이고 통합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성전과 사제와 희생 제사 등 종교의 형식에 대한 외적인 관찰자의 관점에서 설교했지만, 단지 형식주의자나 예식주의자가 아니고 윤리적 · 영성적으로 수준 높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말라키가 예루살렘에서 예언을 하던 때는 남부 유다 왕국이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1,8) 있었고, 사마리아에 대한 반감이 팽배하던 시기였다. 유배에서 돌아온 뒤에 하까이와 즈카르야의 노력으로 두 번째 성전은 완성되었지만(기원전 516/5년), 백성들의 마음은 예배에 무관심했고 구원의 때는 오지 않았다.
다윗의 후손인 즈루빠벨은 메시아로 등장하지 않았으며, 하까이가 예언한 물질적인 번영도 실현되지 않았다(하까 2,6-9. 20-23). 또한 즈카르야의 더 깊은 영적 삶에 대한 소명은 무시당하였고, 심지어 계약의 축복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즈카 8,4-13)은 조롱받았다(즈카 10,1-2; 말라 3,13-15).
말라키가 하느님의 특사로서 백성들 앞에 나선 때는 이처럼 종교적 회의주의와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불의가 만연하던 시대였다. 다만 그가 활동하던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언급을 말라키서 안에서 찾을 수는 없다. 대체로 학자들은 그가 활동하던 시기를 에즈라 이전의 쇠퇴기(기원전 515-458년)라고 보고 있다.
말라키의 예언 신탁에서 ‘계약’은 예언자의 근본적인 가르침으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사랑의 행위요 사랑의 관계이다(1,2). 그럼으로써 그는 회의주의가 만연하는 가운데 실의에 빠진 백성들의 마음에 신앙의 불길을 다시 놓고자 했다.
말라키의 메시아 대망 사상은 ‘그날’을 준비시키는 계약의 사자(3,1)와 엘리야 예언자(3,23)를 보낸다는 점에서 신약의 복음사가들에게 세례자 요한을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시키는 엘리야와 관련시키도록 제시하였다(마태 11,7-15; 루카 1,16-17).
옛 “로마 순교록”은 1월 14일 목록에서 유다에서 성 말라키 예언자를 기념한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2월 18일로 축일을 옮겨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뒤에 주님께서 다시 오실 위대한 날을 예언하며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이름으로 순수한 예물을 바쳐야 한다고 선포한 성 말라키 예언자에 대해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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