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세례명 율리아나는 율리안나, 줄리아나, 쥴리아나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여자세례명 율리아나 11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율리아나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율리아나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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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아나
천주교 여자세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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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아나 여자세례명 목록
- 율리아나 (2월 7일)
- 율리아나 (2월 16일)
- 율리아나 (3월 20일)
- 율리아나 (4월 5일)
- 율리아나 (5월 13일)
- 김연이 율리아나 (5월 29일)
- 율리아나 팔코네리아 (6월 19일)
- 율리아나 (8월 12일)
- 율리아나 (8월 17일)
- 율리아나 (8월 18일)
- 율리아나 (11월 1일)
1. 율리아나
- 세례명 축일
2월 7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Juliana - 신분과 직업
과부 - 활동 연도와 지역
+435년 볼로냐
율리아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율리안나, 줄리아나, 쥴리아나.
율리아나 이야기
이탈리아 밀라노(Milano)의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12월 7일)는 성녀 율리아나의 신심과 애덕을 높이 칭찬하였다. 성녀 율리아나는 사제가 되려는 남편을 위해 서로 합의하에 헤어졌다. 그 후 성녀 율리아나는 네 명의 자녀들을 헌신적으로 양육하고, 교회와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며 살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율리아나
- 세례명 축일
2월 16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Juliana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5년 니코메디아
율리아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율리안나, 줄리아나, 쥴리아나.
율리아나 이야기
소아시아 니코메디아 출신의 성녀 율리아나는 소녀였을 때 아버지 아프리카누스(Africanus)에 의해 이교도 청년 에빌라수스(Evilasus)와 결혼할 것을 강요당했다. 하지만 성녀 율리아나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로 인해 아버지로부터 모진 매를 맞았고, 원한을 품고 있던 에빌라수스가 그 마을의 집정관으로 부임하면서 체포되어 갖은 형벌을 받았다. 결국 그녀는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청혼자에 의해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성녀 율리아나는 아버지와 청혼자의 뜻대로 결혼하도록 설득하려는 악마와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로마 순교록(Martyrologium Romanum)은 그녀가 니코메디아에서 순교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Napoli)에서 서쪽으로 약 25km 떨어진 쿠마(Cuma)라는 마을에서 순교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래서 그녀는 니코메디아의 성녀 율리아나 또는 쿠마의 성녀 율리아나로 불린다.
성녀 율리아나가 순교한 후 한 귀족 신자에 의해 그녀의 유해가 나폴리 인근 포추올리(Pozzuoli)로 옮겨졌다가, 568년 롬바르드족으로부터 유해를 지키기 위해 쿠마로 다시 옮겨졌다.
그녀의 수난기는 중세 시대에 널리 알려졌고, 특별히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에 의해 나폴리에 성녀를 기리는 성역이 조성되었다.
1207년 성녀의 유해가 장엄한 예식을 통해 나폴리로 이장되면서 나폴리 왕국 전체와 이탈리아와 에스파냐, 프랑스 등 여러 지역으로 성녀 율리아나에 대한 공경이 확산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율리아나
- 세례명 축일
3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Juliana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0년
율리아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율리안나, 줄리아나, 쥴리아나.
율리아나 이야기
성녀 알렉산드라(Alexandra), 성녀 클라우디아(Claudia), 성녀 에우프라시아(Euphrasia), 성녀 마트로나(Matrona), 성녀 율리아나, 성녀 에우페미아(Euphemia), 성녀 테오도시아(Theodosia), 성녀 데르푸타(Derphuta)와 그녀의 자매는 모두 파플라고니아(Paphlagonia) 지방 아미수스(Amisus)의 여성 그리스도인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화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율리아나
- 세례명 축일
4월 5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Juliana - 신분과 직업
신비가, 수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191/2-1258년 코르닐롱산
율리아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율리안나, 줄리아나, 쥴리아나.
율리아나 이야기
성녀 율리아나와 그녀의 쌍둥이 자매인 아녜스(Agnes)는 벨기에 플랑드르(Flandre) 지방 리에주(Liege) 교외의 레틴느(Retinnes)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다섯 살 때 고아가 되어 고향 인근 코르닐롱산에 새로 설립된 시설에서 수녀들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했다.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기도와 봉헌 생활을 접하고 수녀들의 봉사활동을 거들며 환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던 성녀 율리아나는 13살에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또한 일찍이 성체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이미 10대 때에 여러 차례 기도 중에 성체 환시를 경험했다. 반복되는 환시를 통해 성녀 율리아나는 전례 중에 교회의 생명과도 같은 성체를 공경하고 현양하는 축일이 없음을 일깨워주셨음을 깨닫고 성체 축일 제정을 원했으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1225년에 수녀원장으로 선출된 후 성녀 율리아나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환시 내용을 기초로 성체 축일을 만들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먼저 자신의 고해 사제에게 환시 사실을 고백했고, 이어 여러 신학자와 주교들과 접촉하며 환시의 진실성을 확인해 갔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오해도 받고 제재를 당하기도 했지만, 마침내 리에주의 주교가 1246년 교구 내에서 처음으로 ‘주님의 성체 성혈 축일’을 제정해서 전례 중에 기념했다.
그런데 리에주의 주교가 그해 말에 선종하면서 성녀 율리아나의 사도직 활동도 순탄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수도 규칙을 도입해 엄격한 규율을 되살리려고 했지만, 성직매매로 사제가 된 한 성직자의 모함으로 수녀원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당시 성녀 율리아나가 살던 리에주 지역은 교황파와 황제파로 나뉘어 종교적, 정치적으로 갈등이 극심했었다. 성녀 율리아나는 일단 다른 지역으로 피신해 지내면서 모든 상황을 기도로 용서하고 참아냈다.
그 후 지인의 도움으로 나무르(Namur) 지역의 시토회 수도원에 피난처를 마련해 은수자로 살면서 여생을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축일 제정과 보급을 위해 애쓰며 성체 신심을 현양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1258년 4월 5일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포세스라빌(Fosses-la-Ville)에서 평화로이 선종하였다.
성녀 율리아나가 선종한 후 1261년에 교황으로 선출된 우르바누스 4세(Urbanus IV)는 성녀 율리아나와 같은 성체 환시를 체험한 후 당시 몇몇 나라에서 지켜오던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축일을 보편교회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자 했다.
그래서 당대 석학들에게 성무일도와 미사 전례문에서 사용할 성체 찬미가 작성을 맡겼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월 28일)의 성체 찬미가를 선택해 1264년 보편교회 전례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축일’을 지내도록 선포하였다. 성녀 율리아나는 1869년 교황 복자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리고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1996년 5월 28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제정 750주년을 기념하는 서한에서 그녀에 대해 언급하였고,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 또한 2010년 11월 17일 일반알현에서 성녀 율리아나의 삶과 성체 성혈 축일 제정에 이바지한 공로에 대해 칭송하였다.
리에주의 성녀 율리아나(St. Juliana of Liege)로도 불리는 그녀의 축일은 4월 6일에 기념하기도 하고, 리에주 교구에서는 8월 7일에 더 성대히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율리아나
- 세례명 축일
5월 13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Juliana - 신분과 직업
신비가, 동정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342-1416년경 노리치
율리아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율리안나, 줄리아나, 줄리안, 쥴리아나
율리아나 이야기
영국 노리치의 성 율리아누스(Julianus) 성당 벽 외곽에서 베네딕토회 규칙을 따르는 은수자가 될 때까지 율리아나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1373년 5월 8일, 그녀는 심한 고통 중에 하느님으로부터 16차례나 되는 환시를 경험하였는데 이때마다 탈혼 중에 그리스도의 수난과 삼위일체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
그녀는 그 후 20년 동안이나 계속하여 위의 두 신비를 묵상하였다. 그 결과로 그녀는 환시 중에 경험한 '하느님의 사랑, 강생, 구속, 죄, 보속 그리고 하느님의 위로' 등에 관한 내용을 모아 "계시"라는 책을 썼다. 이것은 영문학에서도 매우 중요시하는 저서이다.
특히 그녀는 하느님의 모성에 대한 언급을 통해 하느님의 부성을 보완한다고 보았고, 이러한 그녀의 영성은 교황 요한 바오로 1세(Joannes Paulus I)를 통해 하느님은 아버지일뿐 아니라 어머니로 고백할 수 있다는 메시지 선포를 가능하게 했다. 그녀는 복녀로 불리며 공경을 받고 있지만 공식적으로 시복되지는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김연이 율리아나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金連伊 Juliana - 신분과 직업
양인, 부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1년 한국
김연이 율리아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율리아나, 김율리아나, 율리안나, 줄리아나, 쥴리아나.
김연이 율리아나 이야기
김연이(金連伊) 율리아나는 양인 출신의 부인으로서, 한양에 살 때에 한신애 아가타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리고 1795년 이후에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의 집에서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김 율리아나는 이때부터 자주 교리 강습이나 미사에 참석하면서 점차 신심이 깊어 갔다. 또 ‘천주교의 매파’(媒婆 : 중매인 노파)라고 불릴 정도로 교리를 전하는 데 열중하였으며, 얼마 안 있어 그녀의 이름은 교우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이렇게 복음 전파에 노력하는 동안 김 율리아나는 ‘폐궁’이라고 불리던 양제궁을 자주 드나들었다. 당시 그 집에는 왕실의 친족인 송 마리아와 그녀의 며느리 신 마리아, 궁녀 강경복 수산나 등이 거처하고 있었다.
김 율리아나는 이들과 사귀면서 자주 그들을 안내하여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여시켰으며, 이러한 일로 한때는 그녀의 딸이 양제궁에서 나인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800년 12월 박해가 시작되자, 김 율리아나는 여회장 강 골롬바의 부탁을 받고 김계완 시몬을 자신의 집에 숨겨 주었다. 이어 다음 해 초, 공식적으로 박해령이 내려진 뒤에는 황사영 알렉시오가 그녀의 집으로 피신해 왔고, 이로 말미암아 그녀 자신도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실제로 김 율리아나는 얼마 안 있어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내 포도청으로 압송된 그녀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형벌과 문초를 받았지만, 어느 누구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조금도 약한 마음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엄한 형벌 가운데서도 “만 번 죽더라도 천주교를 믿어 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런 다음, 김연이 율리아나는 강완숙 골룸바, 강경복 수산나, 한신애 아가타 등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형조에서 그녀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김연이는 천주교를 중매하는 노파로, 각처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양민을 유혹하여 그릇된 길로 이끌었으니,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강완숙과 체결하여 주문모에게 세례를 받고, 양제궁과 통하여 서로 오가면서 교리를 전하였으며, 달아나는 무리들을 집 안에 숨겨줌으로써 천주교의 우두머리인 황사영이 도망하도록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합당하다.”
김연이 율리아나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율리아나 팔코네리아
- 세례명 축일
6월 19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Juliana Falconeria - 신분과 직업
설립자, 수녀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270-1341년
율리아나 팔코네리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율리안나, 줄리아나, 쥴리아나, 팔코니에리.
율리아나 팔코네리아 이야기
성녀 율리아나 팔코네리아(또는 율리아나 팔코니에리, Juliana Falconieri)는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열심한 신자인 부모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 카리시모(Carissimo)가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성녀 율리아나 팔코네리아는 마리아의 종 수도회(Ordo Servorum Mariae, O.S.M.)의 일곱 명의 창설자 중 한 명인 숙부 성 알렉시우스 팔코니에리(Alexius Falconieri, 2월 17일)와 어머니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녀가 어려서 아버지가 사망했기 때문에 집안사람들은 그녀를 유력한 집안의 남자와 결혼시키려 했다. 하지만 일찍이 숙부의 영향으로 봉헌 생활을 꿈꿔온 성녀 율리아나 팔코네리아는 결혼을 완강히 거부했다.
14살 때부터 그녀는 나중에 마리아의 종 수도회의 총장이 된 성 필리푸스 베니티우스(Philippus Benitius, 8월 22일)에게 영적 지도와 교육을 받으며 참회와 기도 생활을 충실히 실천해갔다.
성녀 율리아나 팔코네리아는 자신의 영적 지도자였던 성 필리푸스 베니티우스의 권유에 따라 사촌인 요안나와 성 필리푸스의 누이와 함께 마리아의 종 수도회의 제3회원이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여 년간 집에 머물며 재속 수도자처럼 기도와 자선 활동에 전념하였다. 어머니 선종 후에 성녀 율리아나 팔코네리아는 동료들과 함께 병자들을 돌보고 소녀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기 위해 새로운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1304년에 교황 베네딕투스 11세(Benedictus XI)는 그녀가 설립한 공동체를 정식 수녀회로 허가하였다. 성녀 율리아나 팔코네리아는 처음에는 사양하였으나 결국 초대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거리와 집, 병원에서 헌신적으로 환자를 돌보았던 그들은 마리아의 종 수도회와 비슷한 수도복을 입었는데, 그로 인해 ‘망토 수녀회’(Mantellate)라는 별명을 얻었다.
오랫동안 엄격한 단식과 기도, 자선에 충실했던 성녀 율리아나 팔코네리아는 선종하기 전에 한동안은 극심한 위염으로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영성체조차 할 수 없었다.
어느 날 한 신부가 그녀의 간절한 청을 받고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의 가슴 위에 성체를 올려놓아 주었는데, 그 순간 성체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리고 1341년 6월 19일 성녀 율리아나 팔코네리아가 선종한 후, 그녀의 가슴에 성체에 있던 표지가 새겨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교회 미술에서 성녀 율리아나 팔코네리아는 가슴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 형상(IHS)이 빛나고 있는 모습으로 종종 표현된다.
1678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Innocentius XI)는 성녀 율리아나 팔코네리아에게 행해지던 공경을 정식으로 허가했고, 1737년 교황 클레멘스 12세(Clemens XII)는 그녀를 성인품에 올렸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율리아나
- 세례명 축일
8월 12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Juliana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율리아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율리안나, 줄리아나, 쥴리아나.
율리아나 이야기
성녀 힐라리아(Hilaria), 성 크레스켄티아누스(Crescentianus), 성녀 디냐(Digna), 성녀 에우노미아(Eunomia), 성녀 에우프레피아(Euprepia), 성녀 율리아나, 성 라르기오(Largio), 성녀 님미아(Nimmia), 성 퀴리아쿠스(Quiriacus)와 동료 신자들이 함께 순교하였다.
성녀 힐라리아는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의 성녀 아프라(Afra)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세 명의 하녀들과 함께 성녀 아프라의 무덤을 방문했다가 체포되어 산 채로 불태워졌다. 25명의 순교자에 속하는 다른 사람들은 이탈리아 로마(Roma)의 오스티아노(Ostiano) 가도에서 화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율리아나
- 세례명 축일
8월 17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Juliana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70년경
율리아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율리안나, 줄리아나, 쥴리아나.
율리아나 이야기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남매 사이인 성 바오로(Paulus)와 성녀 율리아나는 270년경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에 의한 그리스도교 박해가 시작될 무렵 페니키아(Phoenicia) 연안의 항구도시인 팔레스티나(Palestina)의 프톨레마이스(Ptolemais)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비록 역사적 근거는 부족하지만,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한 번은 프톨레마이스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스스로 십자가의 상징을 지니고 자랑스럽게 드러내는 성 바오로를 만났다.
황제는 즉시 그를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 다음날 재판관이 심문할 때, 성 바오로는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고백했다. 그로 인해 그는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성 바오로가 고통당하는 것을 지켜본 성녀 율리아나는 모든 사람 앞에서 황제의 불의와 잔혹함에 대해 고발했다. 그래서 그녀 또한 체포되어 같은 방법으로 고문을 받았다.
거룩한 남매는 무수히 매를 맞고 날카로운 쇠 갈고리로 온몸이 찢기고 뜨겁게 달군 쇠로 지지는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그 모든 고문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대한 거룩한 남매의 고백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들을 고문하던 세 명은 군인들은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남매에게 충격을 받아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세 명의 군인들, 즉 콰드라투스(Quadratus)와 아카키우스(Acacius)와 스트라토니쿠스(Stratonicus)는 그 즉시 처형되었다.
성녀 율리아나를 고문하던 사람이 한 번은 만약 그리스도를 배반하면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약속으로 유혹하기도 했다. 하지만 성녀 율리아나는 그 제안을 단호히 거부하고 변함없는 마음을 유지했다.
황제의 명령으로 성녀 율리아나를 더럽히기 위해 평판이 안 좋은 집으로 보냈지만, 그곳에서도 그녀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황제는 거룩한 남매를 화형에 처하려고 했으나, 군중들이 몰려들어 고통받는 순교자들을 보며 점점 크게 웅성거리자 즉시 참수형에 처하도록 명령했다. 거룩한 남매는 웃는 얼굴로 처형장에 들어서며 하느님을 찬양했다.
성 바오로와 성녀 율리아나의 순교 이야기는 다소 역사적 근거가 부족하지만, 로마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을 둘러싼 열주(列柱) 위를 장식한 140명의 성인 중 일원으로 포함되어 공경을 받아왔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율리아나
- 세례명 축일
8월 18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Juliana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율리아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율리안나, 줄리아나, 쥴리아나.
율리아나 이야기
성 레오(Leo)와 성녀 율리아나는 나란히 이름을 병기하는 것이 무의미한 또 다른 한 쌍의 성인성녀이다. 성 레오는 리키아(Lycia, 고대 소아시아 남서쪽 끝에 있던 지방)의 미라(Myra)에서 순교했고, 성녀 율리아나는 소아시아의 스트로비룸(Strobylum)에서 순교하였다. 그녀는 아마 프톨레마이스(Ptolemais)의 성녀 율리아나(8월 17일)와 동일 인물일 수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율리아나
- 세례명 축일
11월 1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Juliana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6년
율리아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율리안나, 줄리아나, 쥴리아나.
율리아나 이야기
옛 “로마 순교록”과 교회 전승에 따르면, 성녀 키레니아(Cyrenia)와 성녀 율리아나는 갈레리우스 황제의 통치(305~311년) 중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난한 이를 돌보고 병자를 치료하는 등 자선 사업에 헌신하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후 소아시아의 타르수스(Tarsus)에서 화형을 당해 순교하였다고 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역사적 자료의 부족함 등으로 인해 더는 그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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