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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7일 남자세례명 17가지

피어나네 2023. 2. 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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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7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라우렌시오, 루카, 리체리오, 리카르도, 모세, 비오 9세, 빌리암 솔트무슈, 아나톨리오, 아다우코, 아우굴로, 안토니오, 야고보 살레, 에지디오 마리아(성 요셉의), 크리솔리오, 테오도로, 토마스 셔우드, 피델리스, 총 17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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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7일 여자세례명 에우제니아 스멧, 율리아나, 총 2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2월 7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7가지

 

 

 

 

2월 7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라우렌시오

  2. 루카

  3. 리체리오

  4. 리카르도

  5. 모세

  6. 비오 9세

  7. 빌리암 솔트무슈

  8. 아나톨리오

  9. 아다우코

  10. 아우굴로

  11. 안토니오

  12. 야고보 살레

  13. 에지디오 마리아(성 요셉의)

  14. 크리솔리오

  15. 테오도로

  16. 토마스 셔우드

  17. 피델리스

 

2월 7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7가지

 

 

1. 라우렌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Lawrenc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46년 시폰토

 

 

라우렌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라우렌시우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스, 로렌조.

 

 

라우렌시오 자료

성 라우렌티우스 마조라누스(Laurentius Majoranus, 또는 라우렌시오)는 시폰토의 주교로서 492년부터 선종할 때까지 50년을 넘게 교구를 돌보았다. 그는 이탈리아 가르가노(Gargano) 산 위에 성 미카엘(Michael) 성당을 건립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루카

 

  • 가톨릭 성인 이름
    Luk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946년경

 

 

루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가, 루가, 루까, 루카스, 루크.

 

 

루카 자료

성 루카(Lucas, 또는 루가)의 별명은 '타우마투르구스'(Thaumaturgus,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며 그리스 출신이다. 그러나 출생지는 아이이나(Aegina) 섬이고, 사라센인들의 침공으로 그리스 중북부 지역인 테살리아(Thessalia)로 이주하여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열심하고 순종 잘하는 소년이었고, 양떼를 돌보거나 들일을 거들며 살았다. 그는 가끔 걸인을 먹이기 위해 자신이 굶거나 자기 옷을 벗어 헐벗은 이에게 주곤 하였다. 그 때문에 부친의 분노를 산 적이 많았다고 한다.

부친이 사망하자 그는 들일을 그만두고 수도자가 되려는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났으나 군인들에게 붙잡혀 노예가 되고 말았다. 그들이 성 루카에게 묻기를 너는 누구냐 하자, “나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하고 대답하였으나 그들은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그는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또다시 수도자가 되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래서 그는 코린토스(Corinthos) 교외의 요안닛사(Joannitsa) 산에 은둔소를 짓고 은수자로서 18년을 살았다.

그는 항상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살았지만 때로는 유혹과 밤새도록 씨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기적을 행하는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를 통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다. 그가 임종한 자리는 나중에 성당이 되었는데 소테리온(Soterion)이라 부른다. 소테리온은 기적의 장소라는 뜻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리체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Rizzerio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236년

 

 

리체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니에리, 리쩨리오.

 

 

리체리오 자료

이탈리아 마르케(Marche) 지방의 무치아(Muccia) 태생인 리체리오는 부유한 집안의 자손으로 볼로냐(Bologna) 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여기서 팔레로네(Falerone)의 페레그리누스(Peregrinus, 9월 6일)를 만났는데,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가 1222년에 볼로냐에서 행한 설교에 깊은 감명을 받고 페레그리누스와 함께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였다.

그 후 리체리오는 사제품을 받았고 성 프란치스코의 사랑받는 동료가 되었으며 마르케 지방의 관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놀라운 금욕과 고행을 실천하였으며 덕이 출중하였다.

그는 '성 프란치스코의 잔꽃송이' 속에서 리니에리(Rinieri)로 불리고 있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36년에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리카르도

 

  • 가톨릭 성인 이름
    Richard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왕, 순례자

  • 활동 연도와 지역
    +720년 웨식스

 

 

리카르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리까르도, 리까르도, 리까르두스, 리까르두스, 리차드, 리차드, 리처드, 리처드, 리카르두스, 리카르두스.

 

 

리카르도 자료

720년 봄 일단의 순례단이 로마(Roma)와 예루살렘(Jerusalem) 성지를 향하여 떠났는데, 이들은 웨식스가의 사람들로서 부친의 이름은 모르고 그 아들들은 성 빌레발두스(Willebaldus, 7월 7일)와 성 비네발드(Winebald, 12월 18일)였다.

그들은 센(Seine) 강을 따라 루앙(Rouen)에 상륙하여 프랑스의 성지를 둘러보고 로마에 도착했는데, 이때 그들의 아버지는 루카(Lucca)에서 운명하여 성 프레디아노(Frediano) 성당에 묻혔고, 그의 아들 성 빌레발두스는 후에 바이에른(Bayern) 지방 아이히슈테트(Eichstatt)의 초대주교가 되었다.

그런데 이 주교의 부친이 성 리카르두스(Richardus, 또는 리카르도) '왕'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영국의 왕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로마 순교록에는 '영국의 왕 리카르두스'라고 기록되어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모세

 

  • 가톨릭 성인 이름
    Mose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72년경 사라센

 

 

모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모이세스, 모제스.

 

 

모세 자료

 '사라센의 사도'인 성 모세(Moyses)는 아랍 사람으로 오랫동안 시리아와 이집트 사이의 사막에서 은수자로서 살았다. 이 지방은 주로 사라센 유목민들이 거주하는 땅으로 별을 섬기는 자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주교 루키우스(Lucius)는 그를 주교로 축성하여 선교 사업을 주도하기를 희망하였으나 그가 아리우스파(Arianism)에 속한 주교였기 때문에 성 모세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 후 성 모세는 정통교리를 따르는 주교가 되었는데, 그의 주요 업적은 로마인과 사라센인 간의 평화를 유지시킨 것이다. 사라센이란 말은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시로-아라비아(Syro-Arabia) 사막의 유목민에게 붙인 이름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비오 9세

 

  • 가톨릭 성인 이름
    Pius IX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교황

  • 활동 연도와 지역
    1792-1878년

 

 

비오 9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비우스, 피오, 피우스.

 

 

비오 9세 자료

1792년 5월 13일 이탈리아 안코나(Ancona) 근처 세니갈리아(Senigallia)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조반니 마리아 마스타이-페레티(Giovanni Maria Mastai-Ferretti)는 1803년 볼테라(Volterra) 대학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간질병을 얻어 1809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건강이 회복되자 그는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고 로마 대학에서 공부한 후 1819년 4월 10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한때 그는 예수회 회원이 되려고 하였으나 포기하고 로마의 타타 조반니(Tata Giovanni) 고아원에서 사제로서의 첫 활동을 시작하였다.

1822년부터 1824년까지 칠레와 페루의 교황대사인 무치(G. Muzi) 주교를 보좌하면서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이해와 사도적인 열성을 얻고 돌아온 그는, 1825년부터 1827년까지 로마의 산 미셸(San Michele) 구호원의 관리 책임을 맡았으며, 1827년에는 스폴레토(Spoleto)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832년에는 반성직주의와 교황의 세속권을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던 이몰라(Imola) 교구의 교구장으로 전임되었다.

개혁에 대한 그의 입장은 1833년에 라벤나(Ravenna)의 대주교 팔코니에리(Falconieri) 추기경에게 보낸 서한과 1845년에 작성하여 로마로 보낸 “교황령 행정에 관한 고찰들”에 잘 나타나 있는데, 여기에서 그는 당시의 자유사상과 행동을 배격하면서 바른 그리스도교적인 환경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밝혔다.

1840년 추기경으로 임명된 조반니 마리아는 1846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 1831-1846년)가 사망했을 때는 후보자로 거론조차 되지 않았으나, 그레고리우스 16세의 체제를 계승하려는 보수파들의 대표자인 람브루스키니(L. Lambruschini) 추기경이 교황이 되는 것을 저지하려는 이들에 의해 교황 후보자로 강력히 부상되었다.

그리고 교황 선거가 시작된 지 이틀 만인 1846년 6월 16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어 이몰라의 주교였던 비오 7세 교황(1800-1823년)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비오라는 이름을 택하였다.

그는 1846년 회칙 “퀴 플루리부스”(Qui Pluribus)를 통해 사제 지원자들의 엄격한 선발과 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같은 해에 수도회성을 설립하여 수도회의 개혁을 촉진하였다.

1848년 오스트리아에 대항하여 이탈리아의 독립과 해방을 주장하는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는 민족적 단합을 지지하였으나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거부하여 이탈리아 혁명군에게 쫓겨 교황청을 떠났다가 프랑스군이 로마를 함락했을 때 다시 돌아왔다.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는 대칙서를 통해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를 선포함으로써 마리아 신심을 증진시키고 신학적 발전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정치에 있어서 자유주의를 포기하였고,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1859년 로마냐(Romagna) 그리고 1860년에는 움브리아(Umbria)와 마르케(Marche)를 잃었고 1870년 9월 20일 이탈리아 군대가 로마와 교황령을 점령하고 이듬해 일방적으로 ‘보장법’을 발표함으로써 교황의 모든 세속주권을 빼앗겼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실패하였지만 영성 및 교회문제에 있어서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가장 큰 성과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년)에서 교황의 무류성(無謬性)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는 또한 현대의 합리주의, 범신론, 종교적 자유주의와 반가톨릭적 형태의 현대철학들을 단죄하여 가톨리시즘을 수호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공의회 이후 그는 이탈리아 정부와 더 멀어졌고, 공의회의 결과로 발생한 이교인 구가톨릭교(Altcatholizismus)와 서유럽 전역에서 발생한 반성직주의 운동을 목격하였다.

한국 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교황 비오 9세는 재위중인 1857년 조선 순교자 82명을 가경자로 선포하였고, 1866년 초 조선에 병인박해가 발생했을 때 그 해 12월 19일자 편지를 통해 교우들을 위로하고 박해를 받는 이들에게 위로와 언약된 보상을 상기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정치적이지도 외교적이지도 않았으며 본질적으로 사목자였다. 하지만 그가 재임할 때의 역사적인 상황, 즉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 국가 통일 운동)의 시기는 그를 정치와 연루시켰다.

그는 정치적으로 원만한 해결을 보지 못하였고 근대 세계와 문명에 대한 이해 또한 충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영성과 교회의 엄격한 수도회의 부활에 강한 영향력을 미쳤으며, 반얀센주의 신심을 일깨우고 재속 성직자와 수도자를 개혁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세속화에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격려하였고, 교회 특히 교황의 자주와 독립을 확립하였다. 1878년 2월 7일 사망한 교황 비오 9세의 유해는 1881년 7월 13일 베드로 대성당에서 산 로렌조 성당(San Lorenzo fuori le Mura)으로 옮겨졌으며, 1985년부터 그의 영웅적인 삶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과 함께 시성을 위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는 2000년 9월 3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시복식에 참여한 약 10만 명의 신자들에게 강론을 통해 비오 9세 교황에 대해 “모든 상황에서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으며 언제나 하느님과 영적인 가치들을 그 무엇보다 우위에 두었다”면서 “그분은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증오와 비방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교황 비오 9세는 1700년 이후 최연소 교황이었으며 베드로 사도 이후 가장 오랜 기간(32년) 교황직을 수행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빌리암 솔트무슈

 

  • 가톨릭 성인 이름
    William Sauletmouche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사,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93년

 

 

빌리암 솔트무슈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굴리엘모, 기욤, 빌헬름, 윌리암, 윌리엄.

 

 

빌리암 솔트무슈 자료

야고보 살레(Jacobus Sales)는 프랑스 중남부 오베르뉴(Auvergne) 태생으로 부친의 도움으로 빌롱의 예수회 대학에 들어갔다가 17세 때에 수련자가 되었다. 그리고 빌리암 솔트무슈는 그 대학에 고용된 젊은이였으나 나중에 평수사가 되었다.

그 후 야고보는 파리(Paris)에서 수학하던 중에 인도 선교를 지망하였다. 그런데 야고보의 설교 능력과 지도력을 인정한 장상은 그를 보내려다가 취소하고 오버나스(Aubenas)로 파견하였다. 이때 빌리암이 야고보를 수행하였다.

이 지역은 칼뱅파가 주도하는 지역이었다. 야고보의 선교가 매우 성공적인 조짐을 보이자 칼뱅파에서 사람들을 보내어 야고보 신부를 난자하였고, 빌리암은 그의 시신을 움켜잡은 채 운명하였다.

빌리암 솔트무슈는 윌리엄 솔트무슈 또는 빌헬름(Wilhelm) 솔트무슈로도 불린다. 그들은 1926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아나톨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Anatol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카오르

 

 

아나톨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나똘리오, 아나똘리우스, 아나톨리우스.

 

 

아나톨리오 자료

성 아나톨리우스(또는 아나톨리오)의 유해는 프랑스 베르됭(Verdun)의 성 미하이엘(Mihiel) 수도원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프랑스 카오르의 주교였다고 전해지나 그의 생애에 대해 확실히 기록되거나 알려진 것은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아다우코

 

  • 가톨릭 성인 이름
    Adauc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경

 

 

아다우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다우꼬, 아다우꾸스, 아다우쿠스.

 

 

아다우코 자료

이탈리아의 귀족 출신인 성 아다우쿠스(또는 아다우코)는 프리지아(Phrygia, 고대 소아시아 중서부 지역)의 황제궁에서 여러 가지 직책을 수행하던 중 그리스도인임이 밝혀져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그는 황제 갈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의 명에 따라 프리지아의 많은 신자들과 함께 화형을 당했다. 에우세비우스(Eusebius)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소도시 프리지아에는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이 군인들에게 완전히 포위당하였다. 군인들이 불을 질러 남녀노소 모두 죽었는데,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부르며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아우굴로

 

  • 가톨릭 성인 이름
    Augul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3년

 

 

아우굴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우구리오, 아우구리우스, 아우굴루스, 아울레.

 

 

아우굴로 자료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의 순교록 목록에 성 아우굴루스(또는 아우굴로)는 주교로 기록되어 있다. 그에 대한 다른 묘사는 그가 순교자로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런던(London)에서 순교했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성인전 작가들은 보통 그를 노르망디(Normandie)의 성 아울레(Aule)와 동일인으로 보고 있다. 그는 또한 아우구리우스(Auguri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안토니오

 

  • 가톨릭 성인 이름
    Anthony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381-1461년 스트론코네

 

 

안토니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안토니오 자료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 지방 스트론코네에서 프란치스코 재속 3회원이던 루이지와 이사벨라 비치의 아들로 태어난 안토니우스 비치(Antonius Vici, 또는 안토니오 비치)는 순탄하게 프란치스코회 평수사로서 수도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12세였다.

건강이 별로 좋지 않던 이 소년은 스스로 엄격한 생활을 선택하고 또 자발적인 기도를 즐겨하는 작은 수도자였다. 26세 때에는 그가 피에졸레(Fiesole)의 수련장인 피렌체(Firenze)의 토마스 벨라치(Thomas Bellacci)를 도와드릴 만큼 크게 성장하였고, 그 후 그가 이 자리에 임명되었다.

그는 소위 프란치스코회 내부의 ‘영적인 형제’ 그룹에 속하는 사람이었고, 또 사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10여 년 동안이나 선교활동에 가담하였다.

후일 그는 카르체리 수도원으로 돌아와서 30여 년 동안이나 극도의 고행을 통하여 겸손의 화신이라 불릴 만큼 높은 덕을 쌓았다.

그는 1461년 2월 7일 80세의 일기로 역사적인 수도원인 아시시(Assisi)의 산다미아노(San Damiano)에서 선종했다. 그는 1687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Innocent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야고보 살레

 

  • 가톨릭 성인 이름
    James Sales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93년

 

 

야고보 살레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살레스, 야고버, 야고부스, 야코보, 야코부스, 자크, 제임스.

 

 

야고보 살레 자료

야고보 살레(Jacobus Sales)는 프랑스 중남부 오베르뉴(Auvergne) 태생으로 부친의 도움으로 빌롱의 예수회 대학에 들어갔다가 17세 때에 수련자가 되었다. 그리고 빌리암 솔트무슈(William Saultemouche)는 그 대학에 고용된 젊은이였으나 나중에 평수사가 되었다.

그 후 야고보는 파리(Paris)에서 수학하던 중에 인도 선교를 지망하였다. 그런데 야고보의 설교 능력과 지도력을 인정한 장상은 그를 보내려다가 취소하고 오버나스(Aubenas)로 파견하였다.

이때 빌리암이 야고보를 수행하였다. 이 지역은 칼뱅파가 주도하는 지역이었다. 야고보의 선교가 매우 성공적인 조짐을 보이자 칼뱅파에서 사람들을 보내어 야고보 신부를 난자하였고, 빌리암은 그의 시신을 움켜잡은 채 운명하였다. 빌리암 솔트무슈는 윌리엄 솔트무슈로도 불린다. 그들은 1926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에지디오 마리아(성 요셉의)

 

  • 가톨릭 성인 이름
    Aegidius Mary of Saint Joseph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1729-1812년

 

 

에지디오 마리아(성 요셉의)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이기디오, 아이기디우스, 에지디우스, 자일스, 질.

 

 

에지디오 마리아(성 요셉의) 자료

이탈리아 남동부 풀리아(Puglia)의 타란토(Taranto) 출신인 성 요셉(Josephus)의 성 에지디우스 마리아(Aegidius Maria, 또는 에지디오 마리아)는 끈 장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곤란한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25세 때에 그는 성 베드로 알칸타라(Petrus Alcantara)의 작은 형제회에 들어가 수도자가 되었다.

거기서 그는 문지기로 일생을 보내면서도 병자들에게 깊은 사랑을 전하며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서 큰 성덕을 쌓았다. 그는 나폴리(Napoli) 시내를 돌며 탁발을 하였으며, 그의 손에는 항상 애긍으로 얻은 음식들이 들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성 요셉에 대한 신심이 탁월하여 요셉 신심을 크게 전파하였다.

그는 사람의 눈에는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보였으나 하느님의 눈에는 위대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는 질(Giles)로도 불린다.

그는 1888년 교황 레오 12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96년 6월 2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크리솔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Chrysol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세기

 

 

크리솔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끄리솔리오, 끄리솔리우스, 끄리쏠리오, 끄리쏠리우스, 크리솔리우스.

 

 

크리솔리오 자료

아르메니아(Armenia) 출신의 성 크리솔리우스(또는 크리솔리오)는 북동부 갈리아(Gallia) 지방의 복음화를 위해 선교사로서 활동하였으며, 그곳에서 주교품을 받은 듯하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중 오늘날의 플랑드르(Flandre) 지방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그의 유해는 벨기에의 브뤼헤(Bruges)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테오도로

 

  • 가톨릭 성인 이름
    Theodor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19년 헤라클레아

 

 

테오도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오도로, 데오도루스, 떼오도로, 떼오도루스, 테오도루스.

 

 

테오도로 자료

소아시아 지방 폰투스(Pontus)의 헤라클레아 주민인 성 테오도루스(Theodorus, 또는 테오도로)는 리키니우스(Licinius) 황제군의 장군이자 폰투스와 인근 지역의 지방장관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임이 드러나 고문을 받고 리키니우스 황제의 명에 의해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테오도루스는 가끔 '테오도루스 장군'이라고도 불리며 그리스인들이 '가장 위대한 순교자'라고 부르는 4명의 순교자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아마시아(Amasya)의 성 테오도루스(Theodorus, 11월 9일)와 동일인물로 보인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토마스 셔우드

 

  • 가톨릭 성인 이름
    Thomas Sherwood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평신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51?-1578년 영국

 

 

토마스 셔우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마, 토머스.

 

 

토마스 셔우드 자료

토마스 셔우드는 1551년경 영국 잉글랜드의 런던에서 가톨릭 신앙 때문에 감옥생활까지 겪은 아버지 헨리 셔우드(Henry Sherwood)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셔우드(Elizabeth Sherwood)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모직물 소매상인이었다.

15살 때 그는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학교를 떠나 10년 동안 모직물 사업을 함께했다. 1576년 그는 사제가 되기 위해 프랑스 북부의 두에(Douai)에 있는 영국 대학으로 떠날 결심을 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계좌를 정리해 공부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했다.

그는 런던에서 도싯셔(Dorsetshire) 출신의 트레곤웰(Tregonwell) 부인의 집을 방문했는데, 그 집은 가끔 비밀리에 미사가 봉헌되는 곳이었다. 프로테스탄트 신자였던 부인의 한 아들은 이를 매우 싫어했다.

그러던 중 길거리에서 토마스 셔우드를 만나자 콘소리로 ‘반역자’라고 외쳤다. 결국 토마스 셔우드는 판사 앞에 서게 되었다. 그는 런던탑의 지하 감옥에 갇혀 영국 교회에 대한 여왕의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죄목으로 혹독한 고문과 굶주림과 추위와 싸워야 했다.

그렇게 6개월 정도 고초를 겪은 그는 1578년 2월 7일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주 예수님, 저는 당신을 위하여 이 같은 고통을 받는 것도 부당합니다. 하오나 당신을 고백하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저에게도 풍성하게 허락하소서.”

토마스 셔우드는 1886년 12월 2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순교한 날인 2월 7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토마스 셔우드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피델리스

 

  • 가톨릭 성인 이름
    Fideli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70년 메리다

 

 

피델리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삐델리스.

 

 

피델리스 자료

아시아 태생의 성 피델리스는 일단의 상인들과 함께 에스파냐로 가서 메리다에 정착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그 도시의 주교인 성 바오로(Paulus)에게 가르침을 받고 그를 계승하여 메리다의 주교가 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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