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기록/나혼자 파리 성당 투어

관광객은 모르는 파리 조용한 성당 5곳 |근처 로컬 빵집과 느린 산책 코스

피어나네 2026. 3. 6.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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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지인의 부탁으로 성체조배 하루피정 안내문을 만들다가 문득 파리에서 조용히 앉아 십자가를 바라보던 성당들이 떠올랐어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고, 그때그때 마음이 잠시 머물렀던 장소들입니다.

그거 아세요? 서울 강남구에는 성당이 18개인데, 강남구만 한 크기의 파리에는 성당이 116개나 있어요.

그래서 파리 노트르담처럼 늘 관광객으로 가득한 성당 말고도, 거미줄처럼 이어진 작은 골목의 개성과 속도를 그대로 받아들여 동네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성당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아요. 마치 센느강이 하늘빛을 품어 조용히 비추듯이요.

 

 

골목 따라 숨 쉬는 파리의 성당

파리에서 성당은 저에게 언제나 같은 이유로 찾게 되는 장소가 아니에요.

어떤 날은 미사를 위해서,
어떤 날은 기도를 위해서,
어떤 날은 그림을 구경하려고,
어떤 날은 파이프 오르간 연주 들으려고,
어떤 날은 파리의 변덕스러운 날씨를 피해서,
또 어떤 날은 잠깐 앉아 쉬고 싶어서...

이렇게 다양한 이유로 문을 열게 됩니다.

이 글은 그렇게 특별한 목적 없이 성당 문을 열고 들어갔던 날들이 조금씩 쌓여 만들어진, 관광객은 잘 모르는 파리의 조용한 성당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파리 골목과 성당 풍경, 관광객이 잘 모르는 조용한 파리 성당 여행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대표 이미지

 

 

파리에서 성당을 찾게 되는, 아주 사소한 이유들

처음부터 ‘파리 성당 투어’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요. 오히려 시작은 아주 사소했습니다.

점심에 샌드위치를 사려고 자주 가던 빵집에 들렀다가, 문득 가까운 곳에서 종소리가 들려왔어요. 어느 순간부터는 그 소리에 이끌려 성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더라고요.

추억이 있는 동네,
이미 익숙한 동네,
왠지 편안한 동네,
별로 가고 싶지 않은 동네,
그리고 처음 가보는 낯선 동네까지.

그렇게 걷다 보니 여러 성당들이 하나씩, 서로 다른 분위기로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성당마다 다른 종소리의 울림을 따라 걷다 보면, 파리에는 조용히 앉아 있을 수 있는 성당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오늘 걷다 마주치게 된
파리의 조용한 성당들

 

파리에서 조용히 머물기 좋은 성당 5곳 모음 이미지, 생세브랭 성당부터 몰리토르 성당까지 한눈에 보기

 

 

파리에 살다 보면 특별한 계획 없이도 이런 성당들 앞을 지나치게 되는 날이 있어요. 지도에 표시해 두고 찾아가기보다는, 빵집과 골목 사이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주치게 되는 파리의 성당들입니다.

 

 

이렇게 기억에 남은 파리의 성당들

마음이 먼저 닿는 성당부터, 제가 머물렀던 시간들을 따라가 보셔도 좋아요. 성당 이름을 누르면, 그날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1. 문 하나 너머로 붐비는 거리와 고요가 나뉘는 성당
    Église Saint-Séverin 75005
  2. 고요 속에서 신비로운 벽화가 드러나는 성당
    Église du Saint-Esprit 75012
  3. 옛 기차역을 연상시키는, 오르세 미술관을 닮은 성당
    Église Notre-Dame-du-Travail 75014
  4. 이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벽화에 스며든 성당
    Église Saint-Christophe de Javel 75015
  5. 길과 성당 사이에 문턱이 없는, 빛이 머무는 성당
    Église Saint-François de Molitor 75016

 

 

느린 파리에서 조금 천천히 살던 날의 기록

이번 글은 ‘꼭 가야 하는 파리 성당’을 소개하기보다는, 파리에서 자주 머물렀던 성당들의 시간을 담고 있어요.

관광객이 몰리는 시간을 피해 성당 안에 잠시 앉아 있고, 나와서는 동네 로컬 빵집에서 바게트 샌드위치나 크루아상을 사서 몇 블록을 걷던 날들.

이런 하루가 반복되다 보니 성당과 빵집, 그리고 산책 코스가 자연스럽게 하나의 리듬처럼 엮이게 됐어요.

파리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면 유명한 명소를 하나 더 추가하기보다는, 이 중 한 곳만이라도 일정에 살짝 끼워 넣어보세요. 그날의 파리가 조금 다른 얼굴로 기억될지도 모릅니다.

 

 

파리의 조용한 성당 5곳 위치 지도, 여행 동선과 산책 코스를 함께 보기 좋은 파리 성당 지도

 

 

이 지도에 표시된 성당들은 하루에 모두 다 돌아봐야 할 장소들이 아니라, 그날의 리듬에 따라 하나쯤 들르면 충분한 파리 성당들이에요. 이제부터 각 성당마다 머물렀던 순간과 그 곁에 함께 있던 로컬 빵집과 산책 코스를 하나씩 꺼내보려고 합니다.

 

 


 

 

Église Saint-Séverin
문 하나 너머로
붐비는 거리와
고요가 나뉘는 성당

 

파리 5구 라틴지구의 생세브랭 성당, 붐비는 거리 바로 곁에 있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고요해지는 성당

 

사람 많은 동네에서 조용해지는 방식

파리 5구 라틴지구, 늘 사람으로 가득한 먹자골목 근처에 있는데도 생세브랭 성당(Église Saint-Séverin : Église Saint-Séverin 75005 Paris) 안은 이상할 만큼 차분합니다. 이 성당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세상이 달라지는 곳 같아요. 바깥의 소란스러움과 안쪽의 고요가 또렷하게 갈라지고, 사람이 적어서 조용하다기보다는 공간 자체가 사람을 흩어 놓는 느낌입니다.

 

생세브랭 성당 내부 전경, 초를 켜는 여인생세브랭 성당 소성당 내부 전경

 


제대 주변을 따라 걷다 보면 누구도 서두르지 않고, 각자 자기 속도로 머무르게 되어서인지 같은 공간에 있어도 소란스럽지 않아요. 조금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조용히 시선을 붙잡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 순간을 지나치지 못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 성당을 기억하게 되는 것 같아요.

 

 

생세브랭 성당 내부 전경, 제대와 기둥 사이로 차분한 분위기가 감도는 파리의 조용한 성당 내부

 

잠깐 들렀다가, 한 바퀴 더

 

이 성당은 제대 쪽의 나선형으로 꼬여 올라간 기둥, 이른바 ‘야자수 기둥(Piliers torts)’을 보기 위해 일부러 들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기둥이 비틀리듯 위로 올라가다가 끝에서 갈라지며 퍼지는 모습은 사진으로 볼 때보다 실제로 마주했을 때 훨씬 인상적입니다. 이 공간 안에 서 있으면 시선이 자연스럽게 위쪽으로 끌려 올라가는 느낌이 들어요.

 

 

생세브랭 성당의 야자수 기둥, 나선형으로 꼬여 올라가는 독특한 구조가 인상적인 파리 성당의 명소

 


제대 뒤쪽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발걸음보다 시선이 먼저 그 기둥을 따라가고 있어요. 그냥 잠깐 들렀다 나오려다가도, 기둥의 리듬에 이끌리듯 한 바퀴를 더 걷게 됩니다. 그렇게 다시 제대 쪽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 성당에서는 ‘보고 나간다’기보다 ‘걷다 보니 머물게 된다’는 말이 더 잘 어울려요.

 

 

생세브랭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중세와 현대의 빛이 함께 어우러지는 파리 성당 풍경

 

 

이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장 르네 바젠(Jean René Bazaine)이 1964년부터 1970년 사이에 작업한 현대적인 스테인드글라스가 눈에 들어옵니다. 예수님이 교회에 맡긴 일곱 가지 성사, 이른바 ‘칠성사(七聖事)’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는데, 장면을 설명하기보다는 색과 빛으로 묵상하게 만드는 창들이에요.

중세에 제작된 스테인드글라스와 나란히 놓여 있어도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한 공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집니다. 과거와 현재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조용히 받아들이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남아요. 그렇게 잠시 머물다 발걸음을 멈추면, 비로소 시선이 오래 머무는 순간이 찾아와요.

 

 

빛이 닿는 순간, 고개를 들게 만드는 십자가

 

생세브랭 성당의 십자가는 기둥과 곡선 사이에서 눈에 띄게 드러나기보다는, 빛을 머금은 채 단정하게 서 있습니다.

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으면 중심에 있으면서도 중심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어요. 제대 한가운데 분명히 자리하고 있는데도 공간을 압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뒤편의 스테인드글라스와 기둥을 통과한 빛이 먼저 흐르고, 십자가는 그 흐름 속에 조용히 몸을 맡기고 있는 것 같아요.

 

 

생세브랭 성당 제대 십자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이 닿으며 더욱 고요하게 느껴지는 십자가

 

 

빛이 기둥을 따라 내려오다 십자가에 닿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으면 관광객과 학생들로 늘 붐비는 라틴지구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이 잠시 잊혀집니다. 옆에 앉아 있던 한 관광객이 “unexpectedly peaceful”이라고 속삭였는데, 제대 앞에 앉아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으면 왜 그런 말이 나오는지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져요.

 

 

생세브랭 성당 제대 십자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이 닿으며 예수님의 형상이 드러나 더욱 고요하게 느껴지는 십자가



예수님의 형상도 과하게 강조되지 않고요. 고통을 드러내기보다, 그 자리에 오래 머물러 결국 빛과 같은 호흡을 하게 된 몸처럼 보입니다. 복잡한 거리 한가운데 있어도, 빛이 닿는 자리에만 서 있으면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잠시 그렇게 앉아 있다가 성당을 나서면, 다시 파리의 일상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저의 다음 목적지는 자연스럽게 빵집이 됩니다.

 

 

 

성당과 빵집은 늘 한 세트

 

생세브랭 성당에서 나오면 저는 늘 이 빵집으로 직진해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제가 먹어본 크로아상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크로아상을 파는 곳이거든요. 오래 전부터 자주 들르던 빵집이라 더 애착이 있어요. 이후 여러 번 상을 받으면서 점점 유명해졌고, 지금은 언제나 줄을 서야 해요. 반갑기도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저만 알고 싶은 빵집이라 살짝 뺏긴 기분이 들 때도 있어요. 저는 절대로 이 빵집을 그냥 지나치지 못합니다.

 

 

생세브랭 성당 근처 빵집에서 산 파리식 크로아상, 라틴지구 산책 전에 들르기 좋은 빵집 메뉴

 

 

보통은 크로아상을 사서 센강 쪽으로 걸어 내려가, 노트르담 성당을 바라보며 먹곤 해요. 그런데 운 좋게 갓 구운 크로아상을 만난 날에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빵이 손에 쥐어진 순간부터 이미 반쯤은 사라져 있고, 센강에 도착하기 전에 완전히 없어지는 날도 적지 않아요. 이게 크로아상을 대하는 저의 인내심입니다. 의지가 약해서라기보다는, 그만큼 따뜻하고 빵 냄새가 좋았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어요. 그래서 이 빵집에서는 크로아상을 하나만 사는 날이 거의 없어요. 그리고 줄이 너무 길거나, 다 팔렸거나, 혹시라도 문이 닫힌 날에는, 자연스럽게 발길이 향하는 다른 선택지도 하나쯤 생기게 됩니다.

 

 

이 동네에서 크로아상을 사는 두 가지 방법

  • La Maison d'Isabelle
    47ter Bd Saint-Germain 75005 Paris
    이곳은 대로변 시장통에 있는 버터 크로아상으로 특히 유명한 빵집이에요. 2018년 ‘베스트 버터 크루아상’을 수상한 이후로 늘 사람이 많지만, 회전이 빠른 편이라 줄이 길어 보여도 의외로 기다릴 만해요. 타이밍 좋게 방금 오븐에서 나온 크로아상을 받는 날에는, 기다린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게 느껴집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딱 정석적인 파리식 크로아상을 좋아한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에요.
  • La Parisienne
    52 Bd Saint-Germain 75005 Paris
    Maison d’Isabelle에 줄이 너무 길거나, 이미 다 팔렸거나, 문이 닫힌 날이면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발길이 옮겨져요. 두 빵집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거의 마주 보고 있어서 선택하기도 편해요. 기본 크로아상, 아몬드 크로아상, 비에누아즈, 바게트, 샌드위치까지 전반적으로 퀼리티가 좋아서 어떤 걸 골라도 실망할 일이 없어요. Maison d’Isabelle의 크로아상을 놓친 날이라면, 이곳에서는 아몬드 크로아상으로 방향을 바꿔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에요.

 

 

빵먹고 이어지는 느린 산책 코스

크로아상을 다 먹고 나면, 특별히 어딜 가야겠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아요. 그냥 손에 남은 빵 봉투를 접어 넣고, 그날의 속도에 맞춰 걷게 됩니다. 이 동네에서는 그렇게 걷는 시간이, 언제나 자연스럽고 편안한 산책이 돼요. 목적지가 있어서 걷는다기보다는, 걷고 나서야 ‘아, 여기까지 왔구나’ 생각합니다.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닿게 되는 장소들

  • Square René-Viviani
    노트르담이 보이는 작은 공원이에요.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가 이곳에 있는데, 센강 변의 붐비는 길에서 한 발짝만 들어와도 분위기가 확 달라져요. 벤치에 앉아 있으면 바로 앞에 노트르담이 보이는데도, 이상하게 관광지에 와 있다는 느낌이 거의 없어요. 잠깐 앉아 숨을 고르기 좋은, 라틴지구 안쪽의 작은 쉼표 같은 곳입니다.
  • Shakespeare and Company
    라틴지구 산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오래된 서점이에요. 여행자들에게는 ‘사진 찍는 장소’로 더 알려져 있지만,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오래된 책과 종이 냄새, 계단을 오르내린 세월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요. 굳이 책을 사지 않아도, 잠깐 내부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Square René-Viviani 바로 앞에 있어서 산책 동선에 자연스럽게 끼워 넣기 좋습니다.
  • Salvador Dalí의 해시계
    일부러 찾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포인트예요. 벽 한쪽에 조용히 걸려 있어서, “봤어도 기억 못 했을 것 같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알고 나서 보면 괜히 한 번 더 돌아보게 돼요. 골목 곳곳에 숨어 있는 이런 작은 장난 같은 디테일들이, 파리의 산책을 더 재미있게 만들어줍니다.

 

 

이렇게 천천히 한 바퀴를 돌고 나면, 어느새 다시 생세브랭 성당 근처에 와 있게 됩니다. 붐비는 거리 한가운데서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고요로 들어갔던 그 장소가, 이 산책의 시작이자 끝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져요. 그래서 이 성당은 제게 늘, 한 바퀴를 돌고 나면 다시 서게 되는 자리로 기억됩니다. 마치 여행을 떠났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요.

 

다른 성당 이야기 보러가기

 

 


 

 

Église du Saint-Esprit
어둠 속에서 신비로운
벽화가 드러나는 성당

 

파리 12구 성령 성당 외관, 관광객이 적고 조용히 기도하며 머물기 좋은 동네 성당

 

시간만 바뀐 채 다시 마주한 공간, 어둠이 먼저 안아주는 성당

파리 성령 성당(Église du Saint-Esprit, 186 Av. Daumesnil 75012 Paris)은 파리 12구 주거지역에 자리한 성당이에요. 이 동네는 저에게 제2의 고향 같은 곳입니다. 파리에서 처음 살았던 동네이기도 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어가 본 성당이 바로 이곳이거든요. 당시 저는 비신자였고, 개신교 가정에서 자라 천주교 신자를 가까이에서 만날 기회도 거의 없었어요.

오랜만에 이곳을 다시 찾아가니 예전 기억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면서 전혀 다른 감정이 함께 스며듭니다.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제가 천주교 신자로 이 성당의 문을 열고 들어갔기 때문이에요.

 

 

파리 성령 성당 출입문 입구



이 성당은 관광객이 거의 없고 내부가 다소 어두운 편이라 기도하고 묵상하기에 특히 좋아요. 어둡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오히려 따뜻한 품 안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빛이 적은 공간 안에서 고요함이 먼저 다가오고, 그 안에서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거든요.

조용히 성체조배를 하거나 방해받지 않고 기도하고 싶은 날에 가장 먼저 생각나는 성당이에요. 규모는 크지만 늘 차분한 분위기가 유지되고, 오래 머물러도 흐트러지지 않는 고요가 있습니다.

 

 

파리 성령 성당 내부, 어둑한 분위기 속에서 프레스코화와 모자이크가 천천히 드러나는 성당 내부



성당 내부를 채우고 있는 프레스코화와 모자이크, 조각, 스테인드글라스를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성당이라기보다 하나의 전시 공간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가톨릭 예술가 그룹(Ateliers d’Art Sacré ) 소속 작가들의 작품으로, 성령강림(오순절)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교회의 시간이 공간 전체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파리 성령 성당 내부, 어둑한 분위기 속에서 드러나는 프레스코화



내부가 어두운 편이라 사진 촬영이 목적이라면 빛이 조금 더 들어오는 한낮에서 오후 초입이 좋아요. 파리 성령 성당은 관광지가 아닌, 파리의 일상 속에서 조용히 성령의 숨결을 품고 있는 성당입니다.

 

 

어둠 속에서 더 또렷해지는 십자가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처음에는 조금 어두워요.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형태보다 침묵이 먼저 느껴집니다. 그 침묵 속에서 마음이 자연스럽게 가라앉습니다. 시선보다 감각이 먼저 적응하는 성당이에요.

성령 성당의 십자가는 생세브랭 성당의 십자가와 정반대의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이 곧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아요. 시간을 두고 천천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어둠을 통과한 뒤에야 허락되는 십자가처럼 보여요.

조금 시간이 지나면, 어둠 속에서 빛을 받아 예수님의 윤곽이 서서히 또렷해집니다. 밝아서 드러나는 십자가가 아니라, 어둠 덕분에 드러나는 십자가에요.

 

 

어둠 속에 머물다 서서히 윤곽이 드러나는 묵상하기 좋은 파리 성당의 십자가

 

 

그래서 이 십자가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요.

“나를 바라보라”가 아니라 “네가 준비되면, 나는 이미 여기 있다."

그 앞에 앉아 있으면 괜히 말을 아끼게 됩니다. 기도 안에서도 꼭 남겨야 할 말만 천천히 떠올라요. 불필요한 문장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마음도 그만큼 단순해집니다.

그렇게 충분히 머물다 성당 문을 나서면, 고요해진 마음과 달리 발걸음은 조금 빨라집니다. 이제는 빵집으로 갈 차례니까요.

 

 

 

성당과 빵집은 늘 한 세트

 

성당에서 나오면, 생각보다 빠른 걸음으로 동네 빵집 쪽으로 향하게 돼요. 파리 12구에서 사랑받는 이 빵집은 파리 성령 성당에서 가까워요. 마침 아이들 하교 시간이라, 갓 구운 빵들이 하나둘 진열대에 올라오고 있었어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장아장 걸음으로 빵집에서 뜨끈한 뺑 오 쇼콜라를 집어 들던 친구의 아이가 떠올랐어요.

 

 

성령 성당 근처 동네 빵집의 뺑 오 쇼콜라, 파리 12구에서 산책 전후로 즐기기 좋은 빵

 

 

지금은 세상을 떠난 아이라서, 이 날은 혼자 먹는 빵이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때 그 시절의 아이와 함께 나눈다는 기분으로 뺑 오 쇼콜라를 골랐어요. 평소에는 바게트를 주로 사는 편이에요. 이미 배가 불러도, 이 집 바게트만큼은 그냥 지나치기가 쉽지 않거든요.

 

 

진짜 동네 단골 빵집

  • Boulangerie- Pâtisserie AU BEC SUCRE by Frederick Comyn
    254 Av. Daumesnil, 75012 Paris
    이곳은 프랑스 바게트 대회에서 수상한 제빵사 Frederick Comyn의 바게트를 만날 수 있는 빵집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관광객을 겨냥한 유명 빵집처럼 느껴지지는 않고, 여전히 동네 사람들이 매일같이 들렀다 가는 생활의 일부 같은 공간이에요. 바게트뿐 아니라 비엔누아즈리, 크로아상, 뺑 오 쇼콜라, 타르트, 샌드위치까지 메뉴가 다양해서 그날 기분에 따라 고르는 재미도 있고요. 특히 갓 구운 바게트는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쫄깃하고 촉촉해서,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왜 이곳이 상을 받았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져요. 줄이 길지 않은 날에는 동네 단골이 된 기분으로, 바쁜 날에는 따뜻한 빵 하나에 위로받는 마음으로 들러보셔도 좋아요.

 

 

빵먹고 이어지는 느린 산책 코스

이 동네는 제2의 고향처럼 느껴져서인지, 괜히 발걸음이 이끄는 대로 목적 없이 걷고 싶어져요. 잠시 앉아 있다가 다시 걷고 싶어질 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그 리듬이 참 좋아요. 산책을 한다기보다 동네의 일상 속으로 스며드는 느낌에 가까워요. 아래에서 소개하는 두 산책 코스는 방향이 서로 달라서, 그날의 기분과 체력에 맞춰 고르기만 하면 됩니다. 프로므나드 플랑떼는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시내 쪽으로 이어지고, 뱅센느 숲은 파리의 바깥을 향해 열리는 길이에요.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닿게 되는 장소들

  • 프로므나드 플랑떼
    프로므나드 플랑떼 (Promenade plantée / Coulée verte René-Dumont)는 한때 바스티유에서 뱅센느 방향으로 달리던 기차길이 산책길로 바뀐 곳이에요. 걷다 보면 길은 어느 순간 거리 위로 올라가 있다가, 다시 낮은 길과 터널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조금씩 달라지는 풍경이 프로므나드 플랑떼의 가장 큰 매력이에요.특히 리옹역 방향으로 이어지는 구간에서는 아래로 차들이 오가고, 그 위로 나무와 산책길이 겹쳐진 ‘층이 있는 풍경’을 만나게 됩니다. 일부러 각을 잡지 않아도, 단골 빵집에서 산 바게트를 한 손에 들고 사진을 남기고 싶어 멈춰 서게 돼요. 파리 성령 성당 근처에서 출발해 리옹역까지, 기찻길처럼 이어지는 약 4~5km 정도의 산책 코스입니다.
  • 뱅센느 숲
    어느 여름날, 뱅센느 숲(Bois de Vincennes)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난 적이 있어요. 비를 피해 큰 나무 아래에 서 있었는데, 빗줄기가 쉽게 그치지 않아 나무에 기대어 잠들었던 기억이 나요. 이곳은 하루를 조금 길게 쓰고 싶은 날에 잘 어울리는 장소입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호수 근처에서 돗자리를 깔고 시간을 보내도 좋고, 더 걷고 싶은 날에는 계절마다 다른 꽃을 만날 수 있는 파르크 플로랄(Parc Floral de Paris) 쪽으로 방향을 틀어도 좋아요. 아주 큰 숲이고 파리 외곽의 시작점이라, 이곳에서는 분명히 도심과는 다른 공기가 느껴집니다. 같은 파리 안에 있지만, 속도가 확실히 달라지는 장소예요.

 

 

느린 산책이 끝나면, 파리는 어떤 얼굴로 돌아올까요? 그 답은 곧 들어서게 될 성당 안에 있어요. 천천히 걷던 시간을 뒤로하고, 이제 일하는 사람들의 삶이 그대로 새겨진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겨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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Église Notre Dame du Travail
옛 기차역을 연상시키는
오르세 미술관을 닮은 성당

 

파리 노동자의 성모 성당 외관, 오르세 미술관과 기차역을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분위기의 성당

 

일상의 한가운데에 놓인 성당

파리 노동자의 성모 성당(Paroisse Notre-Dame-du-Travail, 59 Rue Vercingétorix, 75014 Paris) 문을 열면 가장 먼저 철골 구조가 다가와요. 다른 성당에서 흔히 기대하게 되는 장식적인 분위기보다, 이곳에서는 ‘구조’가 먼저 말을 거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들어서는 순간 에펠탑이나 기차역을 개조한 오르세 미술관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기도 합니다.

 

 

에펠탑이나 기차역을 떠올리게 하는 철골 구조의 성당



처음에는 조금 낯설지만, 이상하게도 금세 익숙해져요. 이 안에 있으면 현실과 멀어지기보다 오히려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거든요. ‘노동의 성당’이라는 이름처럼, 화려함 대신 일하는 사람들의 기운이 먼저 전해지고, 성당이 일상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는 사실이 또렷해집니다. 철골의 리듬을 따라 걷다 보면, 신앙은 일상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말을 누군가 조용히 건네는 것 같아요. 그러다 어느 순간, 이 성당에서 가장 고요한 중심에 시선이 멈춥니다.

 

 

지금 이 땅에서 자라나는 십자가

 

성당 정면 위쪽 벽에, 군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장식처럼 물러나 있지도 않은 십자가를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일부러 시선을 끌지 않아서인지, 오래 머물러야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보고 있으면 ‘걸어 들어온 사람을 내려다보지 않는 십자가’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요. 세상을 감싸 안기보다,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조용히 위로 자라나라고 말하는 모습에 가깝거든요.

 

 

생세브랭 성당 제대 십자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이 닿으며 예수님의 형상이 드러나 더욱 고요하게 느껴지는 십자가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십자가 아래에 그려진 나무입니다. 높은 곳에 있지만, 이 십자가는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라기보다 이 땅에서 뿌리내려 자라나 하늘로 뻗어나간 것처럼 보이거든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고개를 들어 바라보게 되더라고요.

이 십자가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너희가 서 있는 그 땅에서 자라났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저 내 곁에만 머물러라.”

 

 

 

성당과 빵집은 늘 한 세트

 

파리에 여행온 친구가 이 근처에 숙소를 잡았는데, 이 빵집이 마음에 들어 하루도 빠짐없이 들렀다며 추천해 준 곳이에요. 노동자의 성당이 자리한 동네답게, 점심시간이 되면 근처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샌드위치를 사러 하나둘 모여들어요. 그 풍경을 보고 있으면, 이 동네에서는 일과 빵이 자연스럽게 한 세트처럼 이어진다는 생각이 들어요.

 

 

노동자의 성모 성당 근처 빵집의 프레첼, 알자스풍 빵과 함께 즐기는 파리 14구 동네 빵집 분위기

 

 

처음 방문했을 때, 계산대에서 샌드위치를 건네며 직원이 “곧 다시 만나자”고 인사했는데 그 말이 유난히 오래 남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이 동네에 오면 괜히 한 번 더 들립니다.

 

 

여행온 친구가 추천한 빵집

  • La Petite Alsacienne
    45 Rue Raymond Losserand, 75014 Paris
    이곳은 빵집의 이름처럼 프랑스 동부 알자스 지방 스타일의 프레첼과 구겔호프로 잘 알려진 빵집이에요. 유리 진열대 안을 보면 짭짤한 빵들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차곡 차곡 쌓인 여러 종류의 샌드위치에서 이 빵집의 성격이 바로 드러납니다. 왠지 다시 일터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처럼 느껴져요. 느린 파리에서 이 빵집은 주문도 포장도 유독 빠른 편입니다. 그 속도 안에 성의와 친절함도 함께 녹아 있고요. 그래서 일부러 계획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다시 찾게 됩니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묘한 이끌림이 있는 곳이에요.

 

 

빵먹고 이어지는 느린 산책 코스

저는 프레첼을 사서 근처 몽파르나스 묘지 쪽으로 걸어갔어요. 이곳에서는 무덤을 바라보며 빵을 먹는 일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삶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고, 하루의 한 장면처럼 이어져 있기 때문이에요.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닿게 되는 장소들

  • 몽파르나스 묘지
    몽파르나스 묘지(Cimetière du Montparnasse)는 파리에서 가장 조용한 산책 코스 중 하나예요. ‘방문한다’기보다, 잠시 머문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곳이에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보들레르 같은 이름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그 이름을 따라 움직이기보다 벤치에 앉아 쉬거나 천천히 산책하는 쪽에 더 가까워요. 특별한 목적 없이 걷고, 앉고, 다시 일어나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려지며 시간을 내려놓게 만들었던 묘지를 나와, 이제는 ‘멈춤’보다 ‘움직임’이 더 어울리는 Église Saint-Christophe-de-Javel로 발걸음을 옮겨볼게요.

 

성당 5곳 한눈에 보기

 

 


 

 

Église Saint-Christophe de Javel
이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벽화에 스며든 성당

 

파리 자벨 성당 외관, 이동하는 사람들과 일상의 삶을 품은 파리 15구의 조용한 성당

 

길 위의 사람들을 품은 공간

성당의 이름이기도 한 성 크리스토포로(Saint-Christophe)는 여행자와 운전자, 그리고 이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수호성인이에요. 번개와 폭풍, 길 위의 위험으로부터 사람들을 지켜주는 존재로 전해지는데, 공장과 교통 산업을 중심으로 성장해 온 이 동네와 참 잘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제대 천장 벽화에는 성 크리스토포로를 중심으로, 보호를 청하는 당시의 여행자와 운전자들이 그려져 있어요. 기차와 배, 비행기 같은 ‘이동수단 풍경’이 함께 그려져 있어서, 이 지역의 삶이 그대로 성화 안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듭니다.

 

 

자벨 성당 제대 천장 벽화, 성 크리스토포로와 기차 배 비행기 등 이동의 상징이 담긴 파리 성당 벽화



이 성당에서는 믿음이 멀리 있지 않아요. 마치 예수님이 늘 그랬듯, 일상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움직이며 살아가는 사람들 곁에 조용히 머물러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안으로 새겨진 십자가

 

이 십자가는 밝음으로 드러나는 십자가라기보다, 어둠 안에 조용히 남아 있는 흔적에 가까워요. 그래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쉽게 지나치게 됩니다. 오히려 오래 머무는 사람에게만 천천히 모습을 내어주는 십자가에요.

대부분의 십자가가 양각으로 표현되어 고통을 바깥으로 드러낸다면, 이 십자가는 음각으로 새겨져 있거든요. 마치 고통을 밖으로 드러내기보다 안으로 품고 견디고 있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자벨 성당 제대 십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오래 바라볼수록 형태가 드러나는 조용한 파리 성당의 십자가

 

 

십자가에 파여 들어간 예수님은 몸을 내밀지도, 시선을 끌지도 않아요. 참고 버티는 쪽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고, 조금 더 바라봐야 형태가 드러나고, 그 다음에야 비로소 선명해집니다.

이 십자가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요.

“나는 네가 버티고 있는 그 자리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여기 있다.”

노동자의 성당이 신앙을 일상의 한가운데로 불러왔다면, 이 십자가는 드러내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버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고요. 드러내는 믿음보다 버티는 믿음. 한눈에 알아보는 십자가가 아니라, 오래 머물러야 비로소 알아차리게 되는 십자가입니다.

 

 

 

성당과 빵집은 늘 한 세트

 

사실 이 성당 앞을 수없이 지나다녔는데도, 한 번도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은 없었어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늘 빵집만 보고 걷다 보니, 바로 옆에 있던 성당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거든요.

 

 

자벨 성당 근처 빵집의 바게트,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쫄깃한 파리 동네 바게트



그러던 어느 날, 양손 가득 빵을 사서 나오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져 성당 안으로 뛰어들어갔어요. 그때 마주한 십자가에 이끌려, 그날 이후로는 빵집에 들르듯 성당에도 출근 도장을 찍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지금 소개할 이 빵집은, 성당을 못 보고 지나치게 만들 만큼 매력적인 빵집인 셈이죠. 죄는 없지만 유죄입니다.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빵집

  • L'Artisan Des Gourmands
    60 Rue de la Convention, 75015 Paris
    파리 15구, 성 크리스토포로 성당 바로 옆에 있는 동네 빵집이에요. 현지에서도 평이 좋아서 바게트와 크로아상, 비에누아즈는 물론, 샌드위치, 사과 파이, 에클레르까지 무엇을 골라도 실망할 일이 없어요. 여러 제품으로 상도 받았다고 하는데, 그런 설명이 없어도 한 입 먹어보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쫄깃한 바게트는 단언컨대 저에게는 최고의 바게트이고, 길쭉한 모양의 특별한 사과 파이도 이 동네에서는 은근히 유명해서 금방 품절이에요. 무엇보다 여름 바캉스 시즌에도 완전히 문을 닫지 않아 이 빵집을 특별히 아낍니다. 대신 영업시간을 조금 줄이는데, 그 배려가 괜히 고맙게 느껴집니다.
  • Boulangerie Paris & Co
    4 Rue de la Convention, 75015 Paris
    이 빵집은 플랑(flan), 그러니까 프랑스식 커스터드 타르트로 잘 알려져 있어요. 일요일이 되면 마치 ‘플랑 바’를 연 것처럼 여러 가지 맛의 플랑이 진열되고, 그 앞에는 자연스럽게 줄이 길어집니다. 그래서 오전에 이미 다 팔려버리는 날도 많아요. 기본 바닐라 플랑부터 피칸 프랄린, 검은깨, 고구마, 초콜릿까지 종류가 다양한데, 공통점은 분명해요. 묵직하고 진해서, 한 조각만으로도 충분히 배부르다는 것. 바게트나 크로아상도 잘하지만, 이 집에 오면 망설이다가 결국 플랑을 고르게 됩니다.

 

 

빵먹고 이어지는 느린 산책 코스

양손에 빵을 가득 들고 센강 쪽으로 나오면, 오늘은 어디로 걸어볼까 잠시 서서 생각하게 됩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미리 정해두지 않아도 괜찮은 갈림길이 나오거든요. 미라보 다리를 가운데 두고, 한쪽에는 시트로엥 공원의 넓은 잔디가, 다른 쪽에는 세느강을 따라 길게 이어진 백조의 섬이 놓여 있어요.이 선택은 늘 사소하지만, 그래서 더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빵을 먹는 자리가 곧 오늘의 산책이 되니까요.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닿게 되는 장소들

  • Pont Mirabeau
    미라보 다리(Pont Mirabeau)는 여기서 일부러 찾아가지 않아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마주치게 되는 다리예요. 세느강 위를 건너는 다리라기보다, 잠시 강의 흐름에 발걸음을 맞추게 만드는 자리 같아요. 아폴리네르의 시처럼 이곳에서는 사랑도 시간도 흘러가지만, 이상하게 서두를 필요는 느껴지지 않아요. 난간에 기대 강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파리에서의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받아들이게 됩니다.
  • Parc André Citroën
    앙드레 시트로앵 공원(Parc André Citroën)은 파리에서 보기 드문 방식으로 정돈된 공원이에요. 예전 시트로엥 자동차 공장 부지 위에 만들어진 공간답게, 자연도 어딘가 ‘설계된 침묵’처럼 느껴집니다. 넓은 잔디와 하늘을 향해 떠오르는 열기구 덕분에 걷다 멈추고, 앉았다가 다시 일어나는 리듬이 자연스럽게 반복됩니다.
  • Ile aux Cygnes, Statue of Liberty
    백조의 섬(Ile aux Cygnes)은 파리 안에 있지만, 파리 같지 않은 시간으로 들어가는 길이에요. 양옆으로 세느강이 흐르고, 한가운데 길게 이어진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도시가 점점 뒤로 물러나는 느낌이 듭니다. 섬 끝에 서 있는 미국에서 선물한 자유의 여신상(Statue of Liberty)은 기념비라기보다,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과 서로 함께 바라보고 있는 위치라 뉴욕과 연결된 기분이 들어요.

 

 

이제 제가 자주 찾는 성당 5곳 중 마지막 성당에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십자가를 만나러 갑니다.

 

다른 성당 이야기 이어보기

 

 


 

 

Église Saint-François de Molitor
길과 성당 사이에
문턱이 없는
빛이 머무는 성당

 

파리 몰리토르 성당 외관, 길과 성당 사이에 문턱이 없어 자연스럽게 들어서게 되는 현대 성당

 

빛이 머무는 단정한 공간

 

몰리토르 성당(Église Saint-François de Molitor)은 파리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당이에요. 슈퍼 가는 길에 우연히 발견했는데, 길과 성당 사이에 문턱이나 계단이 없어 자석에 이끌리듯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몰리토르 성당 입구, 길과 성당 사이 문턱이 없어 장애가 없는 성당 출입구



파리에서도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성당으로, 2005년에 봉헌된 현대 성당입니다. 건축가 코린 칼리에(Corinne Callies)와 장 마리 뒤티유(Jean-Marie Duthilleul)가 설계했고, 전례가 중심이 되도록 공간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어요.

 

 

몰리토르 성당 내부, 제대와 유리 벽 너머 정원이 어우러져 빛이 머무는 파리 현대 성당의 공간



좌석은 자연스럽게 중심을 향해 모이고, 중앙의 제대와 정원을 품은 유리 벽이 빛을 끌어들여 공간 전체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바꿔 놓습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는 무언가를 찾아 바라보기보다, 빛이 이끄는 방향으로 시선이 조용히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오래 기억에 남는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아무것도 더하지 않은 십자가

 

이 성당의 십자가는 한눈에 들어와요. 어둠 속에서 찾아야 하는 것도, 오래 머물러야 드러나는 것도 아닙니다. 창 앞에 서 있는 단순한 형태의 십자가가 처음부터 그대로 보이거든요.

장식도 없고, 상처를 과장하지도 않고, 상징을 설명하지도 않아요. 대신 빛이 전부를 말하게 둡니다.

유리창을 통과한 빛이 십자가를 비추기도 하고, 바닥에 그림자를 남기기도 해요. 시간에 따라 위치를 바꾸면서 십자가의 표정도 조금씩 달라집니다. 이 십자가는 고정된 상징이라기보다 시간 속에서 계속 달라지는 조용한 존재처럼 느껴져요.

그래서 이 십자가 앞에서는 묵상이 깊어지기보다 생각이 비워집니다.

 

 

몰리토르 성당 십자가, 유리창 앞 빛의 흐름 속에 단순하게 서 있는 파리 성당의 십자가

 

 

벽에 기대지도 않고, 제대 위에서 중심을 주장하지도 않아요. 유리창 앞, 빛의 흐름 한가운데에 마치 사람처럼 서 있는 십자가입니다. 이곳의 십자가는 “저기를 바라봐” 하고 가리키는 대상이라기보다 같은 공간에 함께 서 있는 존재 같아요.

이 십자가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여기에 있다.”

“너도 그냥 여기 있어도 된다.”

그저 존재 자체로 충분하기에, 이 십자가 앞에서는 기도를 붙잡기보다 그대로 흘려보내게 됩니다.

 

 

 

여기선 빵보다 장보기

 

16구는 빵집도 좋지만, 현지 체류자 입장에서는 슈퍼마켓이 더 실용적인 날이 많아요. 특히 이 근처 까르푸 매장은 대형이라 종류가 다양해서, 귀국 선물을 사기에도 부담이 덜하거든요. 기념품 가게에서 비싸게 사기보다, 파리 사람들이 평소에 집에 두고 먹는 것들을 그대로 고르면 실패할 확률이 낮아요. 그리고 한국 식품 코너도 있어요.

 

 

파리 슈퍼마켓에서 고른 귀국 선물들, 현지 마트에서 실용적으로 사기 좋은 파리 여행 선물 추천 이미지, 한국 식품 코너 구경하기도 좋아요

 

 

파리 사람들이 실제로 장 보는 슈퍼

  • Carrefour Paris AUteuil
    1 Av. du Général Sarrail, 75016 Paris
    파리에서도 꽤 큰 규모의 까르푸라 초콜릿, 버터 쿠키, 잼, 트러플 과자 같은 간식류를 백화점이나 관광 기념품 숍보다 훨씬 합리적인 가격으로 살 수 있어요. 여행 마지막 날 들르면 선물을 정리하듯 장보기 좋은 곳입니다.

 

 

많이 걷지 않아도 충분한 저녁 산책

이 동네의 산책은 멀리 갈 필요가 없어요. 몰리토르 성당 주변은 파리에서도 조용한 주거 지역이라, 몇 블록만 걸어도 하루를 정리하기에 충분한 분위기에요. 센강과도 가까워서 마음이 자연스럽게 열리는 동네이기도 하고요. 성당에서 나와 Rue Molitor 방향으로 천천히 걷다 보면, 파리의 다른 고요함을 만날 수 있어요.

 

파리 성당 5곳 다시 보기

 

 


 

 

파리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다섯 가지 방식

파리의 성당 다섯 곳을 돌아보며 느낀 건, 십자가가 하나의 의미로만 서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어요.

어떤 십자가는 빛이 닿는 순간 고개를 들게 만들었고, 어떤 십자가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윤곽을 드러냈습니다.

또 어떤 십자가는 일하는 하루 곁에 조용히 머물러 있었고, 어떤 십자가는 안으로 파여 들어가 버티는 침묵을 보여주었어요.

그리고 마지막 성당의 십자가는 아무것도 더하지 않은 채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었고요.

이 다섯 개의 십자가는 서로 다른 모습이지만 “이렇게 믿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이렇게 묻는 것 같았어요. 지금 너는 어떤 방식으로 십자가 앞에 서 있느냐고요.

파리에서 성당을 찾는다는 건, 어쩌면 신앙을 배우는 일이라기보다 살아가는 방식과 속도를 십자가에 비춰보는 시간에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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