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0일에 해당하는 여자세례명 발데군다, 소테리스, 스콜라스티카, 아우스트레베르타, 클라라, 총 5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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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2월 10일
천주교 여자세례명
5가지
2월 10일 여자세례명 목록
1. 발데군다
- 가톨릭 성인 이름
Baldegundis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수녀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580년
발데군다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발데군디스.
발데군다 자료
성녀 발데군다는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 중의 하나인 푸아티에(Poitiers)의 생트크루아(Sainte-Croix) 수도원의 원장이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소테리스
- 가톨릭 성인 이름
Soteris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 로마
소테리스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소떼라, 소떼리스, 소떼리아, 소테라, 쏘떼리아, 쏘테리아.
소테리스 자료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12월 7일)는 그의 집안에서 성녀 소테리스를 크게 공경해왔다고 증언하였다. 어느 집정관의 딸이었던 성녀 소테리스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신분과 재산 그리고 한없이 아름다운 모습까지 포기하고 오로지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과 미모 때문에 수없이 많은 유혹과 위험을 당했기 때문에 모든 장신구를 떼어버리고 평민의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
그 즈음에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반대하는 칙령을 반포하였다. 그녀는 단호히 순교할 결심으로 준비하던 중 그리스도인으로 고발되어 재판관에게 끌려갔다. 재판관은 귀족의 딸이기에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회유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성녀 소테리스는 결국 모진 고문 끝에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때 성녀의 나이는 불과 15세였다고 한다. 그녀는 소테라(Sotera)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스콜라스티카
- 가톨릭 성인 이름
Scholastica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수녀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480?-555/560년?
스콜라스티카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스꼴라스띠까, 스콜라스띠까.
스콜라스티카 자료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7월 11일)의 쌍둥이 누이동생인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480년경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 지방의 누르시아에서 부유한 귀족 가문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신심 깊은 가정에서 어릴 때부터 하느님께 봉헌한 사람으로 살아왔으나 아마도 부모의 집에서 기거한 듯 보인다.
그 후 그녀는 오빠인 성 베네딕투스가 수비아코(Subiaco)의 한 동굴에서 은수자로 생활할 때 오빠처럼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할 결심을 하고 여러 귀족 청년들의 청혼도 모두 거절하였다.
그녀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자기 몫의 재산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 후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와 멀지 않은 곳에 초막을 짓고 은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가 처음부터 혼자 생활했는지 아니면 공동생활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점차 그녀와 같이 생활하려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그 당시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오빠인 성 베네딕투스를 만나 기도 생활의 도움을 받은 것 같다.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가 쓴 “이탈리아 교부들의 생활과 기적에 관한 대화집” 제33장에 의하면, 성 베네딕투스가 몬테카시노에 대수도원을 설립한 뒤 그곳에서 남쪽으로 약 8km 정도 떨어진 피우마롤라(Piumarola)에 베네딕토 수녀원을 설립하여 누이동생인 성녀 스콜라스티카에게 맡겼다. 그래서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베네딕토 수녀회의 첫 번째 수녀이자 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1세의 “대화집” 제33장에는 이들 남매의 유명한 일화가 하나 전해져 온다. 성녀 스콜라스티카가 마지막으로 성 베네딕투스를 방문했을 때 성녀는 예년과 같이 수도원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성 베네딕투스가 몇몇 수사들을 데리고 나와 수도원에서 약간 떨어진 어느 집에서 만났다.
그들은 만나서 늘 하던 대로 함께 기도하고 영적 담화를 나누었다. 밤이 되자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오빠에게 다음 날 아침까지 함께 있기를 간청했으나 성 베네딕투스는 수도회 규칙에 충실해야 한다며 거절하였다. 그래서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잠시 기도를 하자 곧 세찬 비바람이 몰아쳐서 성 베네딕투스와 수도승들은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대로 머물게 된 성 베네딕투스는 “누이야,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너의 뜻을 허락하셨구나. 대체 네가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고, 성녀는 “오빠는 제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지만, 주님께서는 제 말을 귀담아들으셨습니다. 자, 이제 나가서 수도원으로 돌아가 보시지요.” 하고 대답하였다. 이렇게 해서 남매는 밤새도록 영적인 생활과 천상 생활의 기쁨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마지막 만남이 있은 지 3일 후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선종하였다. 이날 성 베네딕투스는 수도원에서 기도하던 중 창밖으로 동생이 있는 수녀원에서 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동생이 하느님께로 돌아갔음을 알게 되었다.
성 베네딕투스는 누이동생의 시신을 자신을 위해 몬테카시노 수도원 내에 마련해 두었던 무덤에 안장했다고 한다. 몬테카시노 대수도원이 붕괴된 후 8세기경에 성 베네딕투스와 성녀 스콜라스티카의 유해는 프랑스 중부 플뢰리(Fleury)의 성 베네딕토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면서 이탈리아 지역 밖에서도 성녀 스콜라스티카에 대한 공경이 확산하기 시작했다.
8세기 말에는 베네딕토회의 시간 전례(성무일도)에 성녀의 축일이 수록되었고, 9세기경에는 전 세계 수도원에서 이 축일을 기념하였다. 성녀 스콜라스티카에 대한 공경 예절이 전 세계의 교회로 확산하게 된 것은 11-13세기에 이르러서였지만, 로마 전례력에 정식으로 축일이 수록된 것은 18세기경이었다.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베네딕토 수녀회의 주보 성녀로 공경받고 있고, 비둘기는 그녀의 상징이 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아우스트레베르타
- 가톨릭 성인 이름
Austreberta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동정녀 - 활동 연도와 지역
630-704년 파빌리
아우스트레베르타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우스뜨레베르따, 아우스트레베르따, 에우스뜨레베르따, 에우스트레베르따, 에우스트레베르타.
아우스트레베르타 자료
성 프라메칠디스(Framechildis)의 딸인 성녀 아우스트레베르타는 프랑스의 테루안(Therouanne) 교외에서 태어났는데, 신심이 매우 깊었고 항상 교회 일에만 관심을 가졌다.
어느 날 우연히 물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는데, 자기가 쓰지 않은 베일을 쓴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 경험 때문에 그녀는 부친의 결혼 강요를 뿌리치기 위하여 오빠의 인도를 받아 궁중을 몰래 빠져나갔다.
그녀는 성 아우도마루스(Audomarus, 9월 9일)를 만나 아브빌(Abbeville) 수도원에서 그의 지도하에 베네딕토회의 수도서원을 발하였다.
결국 부친의 동의를 얻고 아브빌 수도원에서 지내던 그녀는 수녀원장이 되었고, 후에 노르망디(Normandie) 지방에 새로 설립된 파빌리 수도원의 개혁을 돕기 위해 아브빌을 떠났다. 그녀의 신심과 겸손은 만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그녀는 에우스트레베르타(Eustreberta)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클라라
- 가톨릭 성인 이름
Clare - 호칭 구분
복녀 - 신분과 직업
과부 - 활동 연도와 지역
1282-1346년경 리미니
클라라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글라라, 끼아라, 클레어, 키아라.
클라라 자료
이탈리아 리미니의 부유한 집 딸로 태어난 클라라 아골란티(Clara Agolanti)는 어려서 결혼하였으나 곧 과부가 되었다. 그러나 남편 집안의 반대자들에 의하여 얼마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부친의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 그녀는 충동적으로 살았고 또 조심성이 없어서 많은 빈축을 샀다고 한다. 30세 되던 해의 어느 날, 그녀는 어느 프란치스코회의 성당에 갔다가 신비스런 목소리를 들었다.
“클라라야, 아무런 잡념 없이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 한 번만 바쳐보아라."
이때부터 그녀는 아주 신중히 처신하게 되었고, 그 얼마 후에는 같은 성당에서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하였다. 큰 충격과 더불어 완전히 개심한 그녀는 작은 형제회의 제3회에 입회하여 보속생활을 시작하였다.
온갖 보석으로 치장하던 그녀는 철로 된 고행복을 입고 철저한 고행을 시작하였다. 지난날의 허영과 육욕을 벌하기 위하여 스스로 허름한 널빤지 위에서 잠을 잤고, 자신의 입맛을 희생하였다. 그녀는 가끔 기아 직전까지 갈 정도로 음식을 절제하였다.
몇몇 부인들이 그녀의 지도하에 재속 수도자의 길을 걸었다. 어느 해 성 금요일에는 사람들이 그녀의 목에 새끼줄을 매고서 개처럼 끌고 다니게 한 적도 있었다. 또 주님을 본받기 위하여 문전걸식을 하였다.
이처럼 그녀의 행동이 지나칠 정도로 엄격했기 때문에 반대자들도 생겼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의 목마름을 실감하기 위하여 물도 먹지 않고 오랫동안 지내기도 하였으니, 정말로 놀라운 사람이라고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이런 그녀의 수덕생활은 그녀가 죽으면서 즉시 성녀로 공경을 받는 놀라운 빛을 발하게 하였다. 교황 비오 6세(Pius VI)는 1784년에 그녀에 대한 공경을 승인하였다. 그녀는 흔히 재속 수도자의 앞길을 밝힌 분으로 공경을 받는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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