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세례명 타대오는 다대오, 다두, 타대우스, 타데오, 타데우스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남자세례명 타대오 4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타대오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타대오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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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대오
천주교 남자세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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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대오 남자세례명 목록
1. 구한선 타대오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具漢善 Thaddeus - 신분과 직업
중인, 복사,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44-1866년 한국
구한선 타대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구 타대오, 구타대오, 다대오, 다두, 타대우스, 타데오, 타데우스.
구한선 타대오 이야기
구한선(具漢善) 타대우스(Thaddaeus, 또는 타대오)는 경상도 함안 미나리골(현, 경남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그는 글을 많이 읽었는데, 천주교에 입교하기 전에는 어떤 요술에 빠진 적도 있었다.
어느 날 구 타대오는 우연히 천주교 신자를 만나 교리를 듣게 되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이를 받아들여 그에게 교리를 배운 다음, 성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약 10년 동안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다가 리델(F. Ridel, 李福明) 신부의 복사로 선택되어 거제도 전교에 동행한 적도 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된 뒤에, 구 타대오는 리델 신부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지내던 중에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그곳 관아로 압송되었다. 이윽고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간 그는 갖가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또한 옥에 갇혀서는 주요 교리를 설명한 글을 적어 관장의 부인에게 전하였다.
구 타대오의 글을 읽은 그 부인은, 관장에게 그를 석방해 주라고 청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관장은 더욱 화가 나서 구 타대오를 옥에서 끌어내어 혹독하게 매질을 하라고 시켰다. 그럼에도 구 타대오는 ‘아프다.’는 신음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이에 관장이 화가 나서 ‘제대로 매질을 하지 못한다.’며 형리들을 꾸짖자, 형리들은 ‘제대로 매질을 하는 것입니다. 만일 더 때리면 그가 죽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관장이 이번에는 구 타대오를 향해 “어찌하여 ‘아프다.’는 소리 한번 내지 않느냐?”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늙으신 어머니가 문밖에 있을 터인데, 만일 신음 소리를 내면 어머니가 이를 듣고 기절하실 것이므로 신음 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또 관장이 “그러면 어찌하여 천주교를 신봉하였느냐?” 하고 묻자, 구 타대오는 “부모에게 효도를 하라고 가르치므로 천주교를 신봉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처럼 모진 형벌을 당한 뒤, 구 타대오는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형벌로 7일 만에 죽었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순교한 뒤 그의 이마에는 ‘품’(品)자 모양의 붉은 점이 찍혀 있었다고 한다. 구한선 타대오의 시신은 가족이 고향 인근에 안장하였다.
구한선 타대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정인혁 타대오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鄭仁赫 Thaddeus - 신분과 직업
중인, 약재상,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01년 한국
정인혁 타대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다대오, 다두, 정 타대오, 정타대오, 타대우스, 타데오, 타데우스.
정인혁 타대오 이야기
한양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약국을 운영하며 생활하던 정인혁(鄭仁赫) 타대우스(Thaddaeus, 또는 타대오)는, 1790년 무렵 최필제 베드로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형제들에게 교리를 가르쳤으며,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제사도 폐지하였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정 타대오는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어 형조로 압송되었다. 이때 그의 형제들과 몇몇 동료들은 엄한 형벌에 굴복하였으나, 정 타대오만은 형벌에 굴복하지 않고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러자 관리들은 그의 가족이 그를 회유할 수 있도록 3일 동안의 기한을 두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정 타대오가 집으로 돌아오자, 그의 맏형은 형조로 들어가 ‘우리 집안에서는 앞으로 누구도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다짐하였으며, 형조에서는 이를 믿고 정 타대오를 다시 부르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는 더 용감하게 신앙을 증언하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동료들과 교류하면서 더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하였다. 이에 가족이 그를 말리면서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하였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그는 최필공 토마스 형제들과 김이우 바르나바 등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교리를 연구하는 데 몰두하였다.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정 타대오는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하고 성사도 받았다. 또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회원이 되어 교리를 전하는 데 노력하였으며, 교우들에게 한글로 번역한 교회 서적들을 전해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들로 정 타대오는,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있어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어 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각각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은 조금도 입 밖에 내지 않고 자신의 신앙만을 고백하였다.
그런 다음 최필제 베드로 등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형조에서 정인혁 타대오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너는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묵은 악행을 바로잡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매월 7일에는 동료들과 함께 신부를 데려다 미사를 봉헌하고, 천주교 서적을 외웠으며, 여러 사람을 나쁜 길로 인도하고 온 세상을 미혹시켰다.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정인혁 타대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타대오 매카시
- 세례명 축일
10월 25일 - 호칭 구분
복자 - 가톨릭 성인 이름
Thaddeus MacCarthy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492년
타대오 매카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다대오, 다데오, 매카시, 맥카르디, 타대우스, 타데오, 타데우스.
타대오 매카시 이야기
아일랜드 남서부 먼스터(Munster)의 매카시가(家) 사람인 성 타대우스(또는 타대오)는 킬크레아에 있던 작은 형제회 회원들과 함께 공부한 뒤에 로마(Roma)로 갔으며, 1482년 27세의 나이로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에 의하여 로스(Ross)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 후 그는 코크(Cork)와 클로인(Cloyne) 교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 후 타대우스는 도보로 순례여행을 떠나 알프스 산 밑인 이탈리아 사보이아(Savoia)의 이브레아(Ivrea)에 당도하였으나 그날 밤에 운명하였다. 그의 자세한 생애는 알 수 없다. 그는 1895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유다 타대오
- 세례명 축일
10월 28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Jude Thaddaeus - 신분과 직업
사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경
유다 타대오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다대오, 다두, 유다스, 주다스, 주드, 타대우스, 타데오, 타데우스.
유다 타대오 이야기
예수님에 의해 열두 사도로 뽑힌 제자 중에는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둘 있다. 루카 복음 6장 16절에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 나온다. 마르코 복음과 마태오 복음의 열두 사도 명단에는 유다 대신 ‘타대오’(마르 3,18; 마태 10,3)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이는 유다 이스카리옷과 구분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사실 예수님 시대에 한 사람이 유다식 이름과 그리스식 이름을 동시에 갖는 일이 흔했다. 따라서 유다(Judas)의 그리스식 이름이 타대오(Thaddaeus)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런 이유로 사도 성 유다는 자연스럽게 ‘유다 타대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에 따르면, 사도 성 유다는 신약성경에 있는 유다 서간의 저자와 같은 인물로 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야고보의 동생인 유다가 부르심을 받은 이들, 곧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켜 주시는 이들에게 인사합니다.”(유다 1,1)
이에 따르면 그는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친척 형제 중 한 명이 된다(마르 6,3; 마태 13,55). 그는 또한 팔레스티나를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성서학자들은 가톨릭 서간 중 하나인 유다서 1장 1절에 나오는 유다가 예수님의 열두 사도에 속한 유다이지만 유다 서간의 저자는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사도 성 유다의 이름을 빌려 익명의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을 전하려 쓴 ‘가명 서간’으로 보고 있다.
초기 문헌인 “시몬과 유다의 수난기”에 따르면, 성 유다 타대오는 성 시몬(Simon)과 함께 시리아와 소아시아를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했고, 페르시아(Persia)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고 한다.
페르시아에서 이교도의 사제와 예언자들과 논쟁하다가 그들의 신상을 무너뜨려 처형되었는데, 성 유다 타대오는 창에 찔리거나 도끼로 참수형을 당했고 성 시몬은 십자가형이나 톱으로 몸이 잘려 순교했다고 한다.
그래서 교회 미술에서 성 유다 타대오를 표현할 때 보통 창(미늘창) 또는 도끼, 그 외에 고문 도구였던 곤봉이 많이 등장한다. 그 외에도 성 유다 타대오는 성령 강림 때 다른 사도들과 함께 있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이마에 불꽃 모양의 성령을 표시하거나(사도 1,13) ‘에데사의 성화’로 알려진 예수님 이콘인 ‘만딜리온’(천 위에 새겨진 것)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표현된다.
이는 예수님 시대 에데사 왕국의 아브가르 왕의 치유 기적과 관련 있는데, 예수님에 의해 파견된 일흔두 제자(루카 10,1-12) 중 하나인 타대오와 성 유다 타대오가 혼동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그 오류가 발견되었을 무렵 성인의 가슴에 만딜리온을 그리는 유행은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서방 교회에서는 성 시몬과 성 유다 타대오가 함께 순교했다는 전승에 따라 8세기 이후 10월 28일을 두 사도의 축일로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 정교회는 유다와 타대오를 다른 사람으로 간주해, 예수님의 형제인 유다는 6월 19일에, 타대오는 8월 21일에 기념해 왔다.
성 유다 타대오에 대한 공경은 아마도 동명이인인 유다 이스카리옷 때문에 비교적 늦게 시작되었다. 18세기에 비로소 그에 대한 공경이 활력을 찾았는데, 그동안 성 유다 타대오에게 봉헌된 성당이나 세례명으로 선택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이유로 그에게 전구를 청하면 꼭 이루어진다는 말이 퍼졌다.
그래서 신자들은 특별히 가장 곤란한 일을 겪을 때나 아무런 희망도 없는 경우에도 성 유다 타대오에게 전구를 청하면 꼭 도와주신다며 ‘절망에 빠진 이들의 수호자’로 공경하게 되었다. 그의 유해는 후대에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의 부속 제대인 성 요셉 제대 아래 안장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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