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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9일 남자세례명 7가지

피어나네 2023. 3. 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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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9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그레고리오, 도미니코 사비오, 보사, 안토니오, 치리온, 칸디도, 파치아노, 총 7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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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9일 여자세례명 가타리나, 프란치스카, 총 2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3월 9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7가지

 

 

 

 

3월 9일 남자세례명 목록

 

  1. 그레고리오

  2. 도미니코 사비오

  3. 보사

  4. 안토니오

  5. 치리온

  6. 칸디도

  7. 파치아노

 

3월 9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7가지

 

 

1. 그레고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Gregory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교부, 신학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35?-395년? 니사

 

 

그레고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그레고리오 자료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성 바실리우스(Basilius, 5월 30일)와 성녀 엠밀리아(Emmilia, 5월 30일)의 아들로서,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카이사레아(Caesarea)에서 태어나 그의 형인 성 대 바실리우스(1월 2일)와 누나인 성녀 마크리나(Macrina, 7월 19일)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였다.

성 그레고리우스는 훌륭한 교육을 받았기에 수사학자가 되어 테오세베이아(Theosebeia)와 결혼하였다. 그는 수사학 교수가 되었으나 나지안주스(Nazianzus)의 성 그레고리우스(1월 2일)의 영향으로 수도생활을 시작한 후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아르메니아(Armenia)의 니사 교구의 주교가 되었으나, 아리우스파(Arianism)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폰투스(Pontus)의 집정관으로부터 교회 재산을 남용했다는 무고를 받고 투옥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도망쳤는데, 그라티아누스(Gratianus) 황제가 그를 다시 복직시켰다.

379년 그는 멜레티우스(Meletius) 이단을 단죄한 안티오키아(Antiochia) 공의회에 참석하였고, 이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팔레스티나(Palestina)와 아라비아의 이단들을 척결하도록 파견되었다.

또한 그는 381년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공의회에도 참석하여 아리우스(Arius) 이단을 공격하고, 니케아(Nicaea) 선언문을 재확인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래서 그는 정통교회의 수호자로 칭송을 받았다. 그는 오리게네스(Origenes)와 플라톤(Platon)의 영향을 많이 받은 신학자로서 많은 논문을 남겼다. 제2차 니케아 공의회(680-681년)는 그를 '교부들 중의 교부'로 선포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도미니코 사비오

 

  • 가톨릭 성인 이름
    Dominic Savio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소년,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42-1857년

 

 

도미니코 사비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메니꼬, 도메니코, 도미니꼬, 도미니꾸스, 도미니쿠스, 도미니크, 도미닉, 도밍고.

 

 

도미니코 사비오 자료

성 도미니코 사비오(Dominicus Savio)는 1842년 4월 2일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 지방 토리노(Torino) 근처의 산 조반니 디 리바(San Giovanni di Riva)에서 가난한 대장장이인 아버지 카를로 사비오(Carlo Savio)와 재봉사인 어머니 비르지타(Birgitta) 사이의 10남매 가운데 하나로 태어났다.

그는 5살 때부터 매일 미사의 복사를 섰고, 7살 때에 예외적으로 첫영성체를 하였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사제가 되려는 소망을 불태워왔다.

성 요한 보스코(Joannes Bosco, 1월 31일)가 청소년 교육을 위한 사목을 준비하면서 토리노의 성직자들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을 위한 자신의 사업을 도와주도록 부탁했는데, 성 도미니코 사비오의 본당 신부가 그를 추천하였다.

면담에서 성 요한 보스코 성인은 이 소년의 영혼 속에 은총이 충만한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12살 때에 토리노의 종합기숙학교인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1월 24일)의 오라토리오에 입학하였다.

성 도미니코 사비오는 성인이 되려는 열망으로 여러 가지 특이한 고행을 원했으나 성 요한 보스코 신부의 지도에 따라 특이한 고행보다는 매일의 일상 속에서 자기가 하는 일을 하나하나 충실히 하는 데서 성화의 길을 찾았다. 그리고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회’를 결성하여 친구들과 더불어 성덕을 닦았다.

성인이 조직한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회는 신심적인 목적 외에도 성 요한 보스코를 여러 가지 구체적인 면에서 도와주었는데, 성 요한 보스코가 살레시오회의 모체가 되는 모임을 결성했을 때 그 모임의 회원 22명이 주요 회원이 되었다.

한 번은 학교 내에서 두 학생이 돌을 들고 싸울 때, 성 도미니코 사비오는 작은 십자가를 들고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이렇게 말하였다.

“싸우기 전에 이 십자가를 먼저 보아라. 예수 그리스도는 무죄한 분이셨지만, 당신의 박해자들을 용서하시고 운명하셨다. 나는 죄인이다. 그리고 나는 앙심을 갖게 됨으로써 그분을 욕되게 한다. 자, 이제 싸워도 된다. 그러나 그 돌을 먼저 나에게 던져라.”

나이 어린 소년의 이 한마디 말은 그의 인품과 성덕을 밝히는 중요한 말이다.

그는 학교 규칙을 지키는데 지나칠 정도로 세심하였고, 그의 기도 정신은 당대의 어느 큰 성인에 못지않았다. 가끔 성 요한 보스코가 그의 과도한 열성을 탓하고 중지시킬 정도였다. 이럴 때마다 그는 “저는 큰일은 하지 못합니다”라고 하면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작은 일이라도 그것을 하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성 요한 보스코가 고행에 몰두하는 그를 다소 저지했을 때도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신심은 우리가 숨을 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어느 추운 겨울밤 성 도미니코 사비오가 얇은 시트 한 장을 덮고 떨고 있는 것을 본 성 요한 돈보스코가 “왜, 이런 짓을 하느냐, 폐렴에 걸리면 어쩌려고?” 하자, 그는 “우리 주님께서는 베들레헴의 구유에 누워계셔도 폐렴에 걸리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성 요한 보스코를 놀라게 하였다.

또한 성 도미니코 사비오는 아침 미사 때부터 몇 시간 동안 기도에 빠져 있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는 이런 내밀한 기도 시간을 ‘나의 기분 전환’이라고 불렀는데, 이 순간이 그에게는 마치 하늘이 열리는 광경을 보는 듯하다고 말했었다.

한 번은 그가 이런 기도 중에서 일종의 환시를 보았는데, 황량한 들판에 수많은 군중이 있고, 그곳으로 횃불을 들고 가는 어떤 사람을 보았다. 그는 이것을 성 요한 보스코에게 이렇게 설명하였다.

“이 횃불은 영국 국민에게 전해야 할 가톨릭 신앙입니다.”

성 요한 보스코는 이 사실을 당시의 교황 비오 9세(Pius IX)에게 알렸고, 교황은 이 말을 듣고 영국에 대해 더 큰 사목적 배려와 관심을 두게 되었다고 한다.

성 도미니코 사비오의 건강이 날로 악화하고 폐렴까지 겹치자 건강 회복을 위해 1857년 3월 1일 집으로 보내졌다. 그는 예수님의 수난을 생각하며 수술의 고통을 견뎌냈지만, 3월 9일 아스티(Asti)의 몬도니오(Mondonio)에서 15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하느님, 당신께 영원한 찬미를 드리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아! 나는 정말로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있습니다”였다.

그의 시복식은 1914년에 로마에서 거행할 예정이었으나, 몇 가지 반대에 부딪혀서 성 요한 보스코의 시성 후인 1950년 3월 5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1954년 6월 12일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는데, 교회 역사상 가장 나이 어린 성인 가운데 한 명으로서 소년 성가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의 축일은 선종한 날인 3월 9일에 지내나, 살레시오회 등에서는 성인의 축일이 늘 사순시기와 겹치는 이유로 5월 6일로 옮겨 기념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3월 9일 목록에서 “달콤하고 행복한 영혼을 지닌 어린 시절부터, 아직 청소년기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리스도교의 완덕의 길을 걸었다”라고 성 도미니코 사비오의 성덕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도메니코 사비오(Domenico Savio)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보사

 

  • 가톨릭 성인 이름
    Bosa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705년경 요크

 

 

보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보싸.

 

 

보사 자료

영국의 휘트비(Whitby)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회의 수도자인 성 보사는 678년에 데이라(Deira, 오늘날의 요크셔)의 주교가 되었다.

성 발프리두스(Walfridus, 10월 12일)가 국왕 에그프리드에 의해 축출될 때 그는 요크 교구의 분할을 반대하면서 국왕에게 항거하였다.

성 발프리두스가 686년에 다시 돌아왔으나 성 보사는 691년까지 교구를 관장하였다. 성 보사는 죽을 때까지 위대한 성덕으로 이름이 높았고, 재능 또한 뛰어나 일반 시민들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은 인물이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안토니오

 

  • 가톨릭 성인 이름
    Anthony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승,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0세기 프로와드몽

 

 

안토니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안토니오 자료

성 안토니우스(Antonius, 또는 안토니오)는 뤽세이유(Luxeuil)에서 베네딕토회 수도승이 되었고, 프랑스 동부 프랑슈콩테(Franche-Comte)의 프로와드몽에서 은수자가 되어 높은 성덕을 쌓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치리온

 

  • 가톨릭 성인 이름
    Cyrio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20년

 

 

치리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키리온.

 

 

치리온 자료

성 키리온(또는 치리온)과 성 칸디두스(Candidus)는 군인 순교자로 3월 10일에 기념하는 40명의 아르메니아(Armenia) 순교자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들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칸디도

 

  • 가톨릭 성인 이름
    Candid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20년

 

 

칸디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간디도, 간디두스, 깐디도, 깐디두스, 칸디두스.

 

 

칸디도 자료

성 키리온(Cyrion)과 성 칸디두스(또는 칸디도)는 군인 순교자로 3월 10일에 기념하는 40명의 아르메니아(Armenia) 순교자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들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파치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Pac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저술가

  • 활동 연도와 지역
    310?-390년? 바르셀로나

 

 

파치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빠시안, 빠치아노, 빠치아누스, 파시안, 파치아누스, 파치안, 파키아노, 파키아누스.

 

 

파치아노 자료

성 파키아누스(Pacianus, 또는 파치아노)는 310년경 에스파냐에서 태어나서 한때 결혼생활을 했던 사제로 테오도시우스 황제 치하에서 로마의 장관이자 집정관을 역임한 덱스테르(Flavius Dexter)의 아버지이다. 그는 후에 바르셀로나의 주교가 되었고, 장수하면서 많은 책을 저술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 대부분은 회개에 대한 권고, 세례 때의 강론 그리고 심프로니아누스(Sympronianus)라는 귀족에게 보낸 편지인데, 특히 후자의 편지들은 노바티아누스(Novatianus) 이단의 주장들을 반박하는 내용이다.

심프로니아누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나의 이름은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나의 성(姓)은 가톨릭이다."

여기에서 성인이 말하는 가톨릭의 의미는, 교회가 온 세계로 퍼져 나간다는 것과 그 모든 지체들 안에서 신앙은 단일하다는 것, 그리고 그 모두가 하나인 머리에 복속한다는 뜻이다.

이 구절은 이단이 판을 치던 그 시대에 이런 말을 쉽게 할 수 없었던 분위기를 참작하여 알아들어야 한다. 또 교회의 일치와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그의 말은 다음과 같다.

“주님은 베드로에게만 ‘너는 베드로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그분에게서 일치가 나온다.”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는 그의 성덕과 애덕 그리고 학문에 대해 칭송하는 글을 썼다. 그는 392년 이전에 바르셀로나에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여겨진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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