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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일 남자세례명 29가지

피어나네 2023. 3. 2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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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니체타, 마르코, 마르티노, 마우리시오, 바오로, 밥티스타, 베니뇨, 불프람, 빅토르, 세르지오, 세바스티아노, 아나톨리오, 아르키포, 암브로시오 산세도니, 에반젤리스트, 에우제니오, 요셉, 요셉 빌체프스키, 요한 (수도원장), 요한 (수도승, 순교자), 요한 (신부, 순교자), 윌리엄, 치릴로, 쿠트베르토, 파라스케베, 페레그리노, 포티오, 헤르베르토, 히폴리토 갈란티니, 총 29분 목록이에요.

 

3월 20일이 영명축일인 남자세례명은 어떤 이름이 좋을까요?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천주교 세례명 상세정보로 이동합니다. 어울리는 세례명을 지금 바로 찾아보세요.

 

3월 20일 여자세례명 데르푸타, 마리아 요세파(예수 성심의), 마트로나, 알렉산드라, 에우페미아, 에우프라시아, 율리아나, 치리아카, 클라우디아, 테오도시아, 포티나, 포티데스, 총 12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3월 20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29가지

 

 

 

 

3월 20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니체타

  2. 마르코

  3. 마르티노

  4. 마우리시오

  5. 바오로

  6. 밥티스타

  7. 베니뇨

  8. 불프람

  9. 빅토르

  10. 세르지오

  11. 세바스티아노

  12. 아나톨리오

  13. 아르키포

  14. 암브로시오 산세도니

  15. 에반젤리스트

  16. 에우제니오

  17. 요셉

  18. 요셉 빌체프스키

  19. 요한 (수도원장)

  20. 요한 (수도승, 순교자)

  21. 요한 (신부, 순교자)

  22. 윌리엄

  23. 치릴로

  24. 쿠트베르토

  25. 파라스케베

  26. 페레그리노

  27. 포티오

  28. 헤르베르토

  29. 히폴리토 갈란티니

 

3월 20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29가지

 

 

1. 니체타

 

  • 가톨릭 성인 이름
    Niceta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735년 아폴로니아

 

 

니체타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니체따, 니체따스, 니체타스, 니케따스, 니케타.

 

 

니체타 자료

성 니케타(또는 니체타)는 고대 소아시아 북서부 비티니아(Bithynia) 지방 아폴로니아의 주교였다. 그는 성상파괴자인 레오 3세 황제에 의해 박해를 받고 아나톨리아(Anatolia, 오늘날의 터키)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마르코

 

  • 가톨릭 성인 이름
    Mark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설교가

  • 활동 연도와 지역
    1426?-1497년경 몬테갈로

 

 

마르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꼬, 마르꾸스, 마르쿠스, 마크, 말구.

 

 

마르코 자료

이탈리아 아스콜리피체노(Ascoli Piceno) 교구의 산타 마리아 디 몬테갈로 출신인 마르코(Marcus)는 페루자(Perugia)와 볼로냐(Bologna)에서 수학한 뒤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결혼하였다. 그러나 그 얼마 후부터 이들 부부는 각각 수도 성소를 감지하고는 합의하여 아내는 클라라회, 남편은 프란치스코회로 들어갔다.

그는 뛰어난 순회 설교가로 곧 명성을 얻었는데, 거의 40년 동안 놀라운 정렬로 활동하였다. 한번은 그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중에 “마르코 형제여, 사랑을 설교하여라.”는 말씀을 듣고 나서 그의 설교 주제는 거의 항상 사랑이 되었다.

그는 늘 새벽에 일어나 편태하였고, 한밤중에는 고행을 함으로써 자신을 단련시켰다. 또 카메리노에서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 사람들이 회개하면 즉시 극복된다는 예언을 하여 그대로 적중시킨 이후 그는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그는 비첸차(Vicenza)에서 운명했는데, 임종하는 바로 그날 그는 수난 복음을 읽어달라고 한 뒤에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이제는 다 끝났다”는 말을 남기고 영면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그를 흔히 ‘사랑의 샛별’이라고 부른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39년에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마르티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ti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579년 브라가

 

 

마르티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르띠노, 마르띠누스, 마르티누스, 마틴, 말딩.

 

 

마르티노 자료

프랑스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의 기록에 의하면 성 마르티누스(Martinus, 또는 마르티노)는 당대의 최고 학자였고, 그리스도인 시인 포르투나투스는 그를 은혜를 수없이 입은 사람으로 묘사하였다.

그는 원래 헝가리 판노니아(Pannonia) 지방 사람인데, 팔레스티나(Palestina)를 순례한 후에는 에스파냐의 갈리시아(Galicia)까지 갔다. 그는 여기서 국왕 테오도미르를 개종시켰다. 그 결과 수많은 다른 아리우스파(Arianism) 사람들과 배교자들을 로마 교회와 화해시켰다.

그의 선교 중심지는 두미오(Dumio)였다. 그는 '왕가의 주교'라는 별명으로 불렸지만, 자신의 생활은 지극히 엄격하여 은수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 후 그는 포르투갈 브라가 교구의 주교로서 죽을 때까지 교구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책임을 다하였다.

선교사의 직무 외에도 그는 저술로도 교회에 기여하였으니, "올바른 생활양식들"이란 저서를 비롯하여 "거친 사람들의 교화에 대하여"라는 윤리 서적도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마우리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Maurice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336년 헝가리

 

 

마우리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우리시우스, 마우리씨오, 마우리씨우스, 마우리티오, 마우리티우스, 모리스.

 

 

마우리시오 자료

마우리티우스 크사키(Mauritius Csaky, 또는 마우리시오)는 헝가리 왕족이다. 어릴 때부터 그는 성인들의 이야기를 듣기 좋아했고, 성장해서는 수도생활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깨어지고 20세에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부부는 서로 극진히 사랑하고 또 이해할 줄 알았으므로, 불과 몇 년을 살고난 뒤에는 서로 헤어져서 수도원으로 가는데 합의하였다. 마우리티우스는 설교자회를 선택하여 성 마가레트 섬의 수도원으로 갔다.

이 부부의 수도원 입회는 큰 소문을 일으키게 되었으므로, 부다페스트의 행정관 라디슬라우스(Ladislaus)가 그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그는 수도원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석방되었으나, 수도생활에의 꿈을 일생동안 버리지 못하고 성당지기가 되어 성체조배 하는 일로 여생을 지냈다. 그는 라압에서 운명하였으나 야바렝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바오로

 

  • 가톨릭 성인 이름
    Paul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바오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파울로, 파울루스, 폴.

 

 

바오로 자료

성 바오로(Paulus), 성 키릴루스(Cyrillus), 성 에우게니우스(Eugenius)를 포함해서 7명의 순교자들이 로마인들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시리아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에 대해 알려진 다른 것은 거의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밥티스타

 

  • 가톨릭 성인 이름
    Baptista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516년 만투아

 

 

밥티스타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밥띠스따.

 

 

밥티스타 자료

부친은 에스파냐계이고 모친은 이탈리아계인 밥티스타는 만투아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혈통 때문에 ‘스파뉴올로’(에스파냐 사람)라는 별명을 얻었다. 어릴 때부터 재능이 많아서 주위의 부러움을 사더니 커서는 철학과 수사학을 배웠다. 그는 가족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페라의 카르멜회에 입회하여 험난한 완덕의 길에 도전하였다.

그는 수도원에서 문학과 성서 등을 계속 연구하였는데, 그의 라틴어 문장과 시는 당대의 가장 유명한 인본주의 작품으로 손꼽혔다. 하느님은 그에게 상담자로서의 놀라운 능력을 주셨다. 그는 6번이나 개혁 카르멜회의 부총장으로 뽑혔다.

그는 성모님께 대한 특별한 신심을 지녔으며, 마리아 공경을 전파하는데 지칠 줄을 몰랐다. 그는 로레토(Loreto)의 기적을 노래하였으며, 좋은 글을 통하여 이교도들의 마음을 회개에로 인도하였다. 그는 16세기 최고의 그리스도교 시인으로서 높은 공경을 받아왔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베니뇨

 

  • 가톨릭 성인 이름
    Benig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725년 플라이

 

 

베니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베니그노, 베니그누스, 베닉누스, 베닝누스.

 

 

베니뇨 자료

성 베니뇨는 프랑스 퐁트넬(Fontenelle) 수도원의 원장이었다. 그는 정치적인 요인 때문에 퐁트넬 수도원에서 추방되어 플라이로 갔는데, 그곳의 수도자들에 의해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샤를 마르텔(Charles Martel)이 승리를 거두어 다시 프랑스에 대한 통치권을 얻었을 때 그는 퐁트넬 수도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퐁트넬로 돌아온 후에도 성 베니뇨는 플라이 수도원의 원장직을 유지하다가 얼마 뒤에 선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불프람

 

  • 가톨릭 성인 이름
    Wulfram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703년? 상스

 

 

불프람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불프란, 불프란노, 불프란누스, 불프람노, 불프람누스, 울프란, 울프란노, 울프란누스, 울프람, 울프람노, 울프람누스.

 

 

불프람 자료

프랑크 왕국의 다고베르트 1세(Dagobert I) 왕 아래에서 일하던 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성 불프람은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다.

일찍이 사제가 될 꿈을 안고 궁중을 떠나 사제품을 받은 그는 람베르투스(Lambertus)가 상스의 주교좌를 떠날 때 그의 후임자로 주교좌를 계승하였으나, 불과 2년 반 만에 물러나야 할 입장에 처했다.

그는 직책에 연연하지 않고 오히려 프리슬란트(Friesland)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그는 선교사 일행과 더불어 해로를 통하여 프리슬란트에 상륙했는데, 국왕 라드보드(Radbod)의 아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개종자를 얻는데 성공하였다.

그 후 그는 퐁트넬(Fontenelle)의 수도원으로 돌아와 703년경 3월 20일 선종했고, 그의 유해는 1058년에 아브빌(Abbeville)로 옮겨져 그곳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불프람누스(Wulframnus, Vulframnus), 불프란누스(Wulfrannus, Vulfrannus), 불프란(Wulfran, Vulphran) 등으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빅토르

 

  • 가톨릭 성인 이름
    Victo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경

 

 

빅토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빅또르, 빅똘, 빅톨.

 

 

빅토르 자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Samaria) 지방을 가로질러 가실 때 시카르(Sychar)라는 고을의 ‘야곱의 우물’에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며 한 여인과 대화를 나누셨는데(요한 4,1-42), 성경에 이름이 나오지는 않지만 성녀 포티나(Photina)가 바로 그 사마리아 여인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물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온 여인은 예수님 말씀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대화를 이어가면서 예수님을 예언자로 알아보았다. 그리고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장소에 관한 대화에 이어서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라고 고백했을 때,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는 말씀을 들었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곧바로 고을로 가서 자신이 만난 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하며 고을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였다.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을 통해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가 갈릴래아로 가셨다.

전승에 따르면, 사마리아 여인인 성녀 포티나는 예수님을 만난 후 그분의 제자가 되었고, 사도들에게 세례를 받은 후 두 아들과 자매들과 함께 카르타고(Carthago)로 가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네로 황제의 박해 때 그곳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성녀 포티나는 그녀의 두 아들과 다섯(또는 세) 자매들과 다른 사마리아 출신 신자들과 함께 카르타고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어 네로 황제 때 순교했다고 한다.

성녀 포티나는 순교하기 전에 네로 황제의 딸 돔니나(Domnina)와 백여 명에 달하는 그녀의 노예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고 한다. 이 사실에 분노한 네로 황제는 성녀 포티나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한 후 마른 우물에 던져 죽였다고 한다. 성녀 포티나는 특히 동방정교회에서 사도에 버금가는 성녀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은 3월 20일 목록에서 사마리아 여인인 성녀 포티나와 그녀의 두 아들인 성 요셉(Josephus)과 성 빅토르, 사마리아 출신으로 군 장교인 성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 사마리아 출신의 성 아나톨리우스(Anatolius)와 성 포티우스(Photius) 그리고 성녀 포티나의 자매인 성녀 포티데스(Photides) · 성녀 파라스케베스(Parasceves) · 성녀 키리아카(Cyriaca)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모두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성녀 포티나와 동료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의 불확실성으로 같은 날 목록에서 그들에 대한 기록을 삭제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세르지오

 

  • 가톨릭 성인 이름
    Serg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승,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796년

 

 

세르지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세르기예프, 세르기오, 세르기우스, 세르지우스.

 

 

세르지오 자료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성 요한(Joannes)과 성 세르기우스(또는 세르지오) 그리고 20여명의 동료 수도승들이 예루살렘 인근의 마르 사바 대수도원에서 그리스도교를 반대하는 아랍인들의 급습을 받아 순교하였다.

또한 더 많은 수도승들이 부상을 입었고, 몇몇은 습격을 피해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이들 중의 한 명인 스테파누스(Stephanus)는 이 사건의 전말과 순교자들의 영예로운 죽음에 대한 시를 지어 남겼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세바스티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Sebast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장군,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경

 

 

세바스티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세바스띠아노, 세바스띠아누스, 세바스찬, 세바스챤, 세바스티아누스, 쎄바스띠아노, 쎄바스띠아누스.

 

 

세바스티아노 자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Samaria) 지방을 가로질러 가실 때 시카르(Sychar)라는 고을의 ‘야곱의 우물’에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며 한 여인과 대화를 나누셨는데(요한 4,1-42), 성경에 이름이 나오지는 않지만 성녀 포티나(Photina)가 바로 그 사마리아 여인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물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온 여인은 예수님 말씀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대화를 이어가면서 예수님을 예언자로 알아보았다.

그리고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장소에 관한 대화에 이어서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라고 고백했을 때,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는 말씀을 들었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곧바로 고을로 가서 자신이 만난 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하며 고을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였다.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을 통해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가 갈릴래아로 가셨다.

전승에 따르면, 사마리아 여인인 성녀 포티나는 예수님을 만난 후 그분의 제자가 되었고, 사도들에게 세례를 받은 후 두 아들과 자매들과 함께 카르타고(Carthago)로 가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네로 황제의 박해 때 그곳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성녀 포티나는 그녀의 두 아들과 다섯(또는 세) 자매들과 다른 사마리아 출신 신자들과 함께 카르타고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어 네로 황제 때 순교했다고 한다. 성녀 포티나는 순교하기 전에 네로 황제의 딸 돔니나(Domnina)와 백여 명에 달하는 그녀의 노예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고 한다.

이 사실에 분노한 네로 황제는 성녀 포티나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한 후 마른 우물에 던져 죽였다고 한다. 성녀 포티나는 특히 동방정교회에서 사도에 버금가는 성녀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은 3월 20일 목록에서 사마리아 여인인 성녀 포티나와 그녀의 두 아들인 성 요셉(Josephus)과 성 빅토르(Victor), 사마리아 출신으로 군 장교인 성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 또는 세바스티아노), 사마리아 출신의 성 아나톨리우스(Anatolius)와 성 포티우스(Photius) 그리고 성녀 포티나의 자매인 성녀 포티데스(Photides) · 성녀 파라스케베스(Parasceves) · 성녀 키리아카(Cyriaca)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모두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성녀 포티나와 동료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의 불확실성으로 같은 날 목록에서 그들에 대한 기록을 삭제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아나톨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Anatol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경

 

 

아나톨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나똘리오, 아나똘리우스, 아나톨리우스.

 

 

아나톨리오 자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Samaria) 지방을 가로질러 가실 때 시카르(Sychar)라는 고을의 ‘야곱의 우물’에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며 한 여인과 대화를 나누셨는데(요한 4,1-42), 성경에 이름이 나오지는 않지만 성녀 포티나(Photina)가 바로 그 사마리아 여인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물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온 여인은 예수님 말씀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대화를 이어가면서 예수님을 예언자로 알아보았다.

그리고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장소에 관한 대화에 이어서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라고 고백했을 때,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는 말씀을 들었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곧바로 고을로 가서 자신이 만난 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하며 고을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였다.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을 통해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가 갈릴래아로 가셨다.

전승에 따르면, 사마리아 여인인 성녀 포티나는 예수님을 만난 후 그분의 제자가 되었고, 사도들에게 세례를 받은 후 두 아들과 자매들과 함께 카르타고(Carthago)로 가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네로 황제의 박해 때 그곳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성녀 포티나는 그녀의 두 아들과 다섯(또는 세) 자매들과 다른 사마리아 출신 신자들과 함께 카르타고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어 네로 황제 때 순교했다고 한다. 성녀 포티나는 순교하기 전에 네로 황제의 딸 돔니나(Domnina)와 백여 명에 달하는 그녀의 노예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고 한다.

이 사실에 분노한 네로 황제는 성녀 포티나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한 후 마른 우물에 던져 죽였다고 한다. 성녀 포티나는 특히 동방정교회에서 사도에 버금가는 성녀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은 3월 20일 목록에서 사마리아 여인인 성녀 포티나와 그녀의 두 아들인 성 요셉(Josephus)과 성 빅토르(Victor), 사마리아 출신으로 군 장교인 성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 또는 세바스티아노), 사마리아 출신의 성 아나톨리우스(Anatolius)와 성 포티우스(Photius) 그리고 성녀 포티나의 자매인 성녀 포티데스(Photides) · 성녀 파라스케베스(Parasceves) · 성녀 키리아카(Cyriaca)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모두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성녀 포티나와 동료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의 불확실성으로 같은 날 목록에서 그들에 대한 기록을 삭제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아르키포

 

  • 가톨릭 성인 이름
    Archipp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 콜로새

 

 

아르키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르치포, 아르치푸스, 아르키뽀, 아르키뿌스, 아르키푸스, 아르킵포, 아르킵푸스.

 

 

아르키포 자료

전설적이긴 하지만 성 아르키푸스(또는 아르키포)는 소아시아 프리지아(Phrygia) 지방 콜로새의 첫 번째 주교였다. 그는 성 바오로(Paulus)로부터 “그리스도인으로서 받은 사명을 완수하라”는 권고를 받았다(골로 4,17).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암브로시오 산세도니

 

  • 가톨릭 성인 이름
    Ambrose Sansedoni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도승, 설교가

  • 활동 연도와 지역
    1220-1287년 시에나

 

 

암브로시오 산세도니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암브로시우스, 앰브로스.

 

 

암브로시오 산세도니 자료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사본 채식사(彩飾師)의 아들로 태어난 암브로시우스 산세도니(Ambrosius Sansedoni, 또는 암브로시오 산세도니)는 머리가 비정상적으로 컸고 또 손과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로 태어났다.

어느 날 그의 유모가 도미니코회 수도원 성당으로 아이를 데리고 갔을 때 그는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어릴 때부터 병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이 지나칠 정도였으며, 주일마다 병원을 그리고 금요일에는 감옥을 방문했다.

17세 때 그는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도미니코회 회원으로 입회하였으나 그를 미심쩍게 여긴 원장이 그를 프랑스 파리(Paris)로 보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파리와 독일 쾰른(Koln)에서 성 대 알베르투스(Albertus, 11월 15일)를 스승으로 또 성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 1월 28일)를 친구로 만나게 되었다. 위대한 스승과 뛰어난 친구의 도움으로 그는 높은 학덕을 얻었고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은둔생활을 갈망하여 장상의 허락을 얻었지만 설교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결정에 따라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를 돌아다니며 설교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청중들은 설교하는 그의 머리 위에 비둘기 모양의 성령이 계시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그는 교황청의 요청에 따라 성좌와 시에나의 정치적 알력을 해소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복자 그레고리우스 10세(Gregorius X, 2월 16일) 교황이 서거함에 따라 자기 수도원으로 은신해 버렸다.

그는 하루에 4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고 새벽 기도 후에는 2시간 동안 기도하였으며 나머지 시간은 공부하였다. 44년간의 수도생활에서 그는 매주 금요일에는 꼭 빵과 물로만 식사를 하였다.

그는 1287년 3월 20일 시에나에서 선종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62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에반젤리스트

 

  • 가톨릭 성인 이름
    Evangelist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250년경

 

 

에반젤리스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반젤리쓰뜨.

 

 

에반젤리스트 자료

에반젤리스트와 페레그리누스(Peregrinus)는 이탈리아의 베로나(Verona)에서 학창 시절에 만나 우정을 나눈 이래 무덤에 갈 때까지 함께 생활한 보기 드문 친구이다.

두 사람은 수도원에 들어가 하느님만 섬기기로 결심하고 입회하였는데 그 수도회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 후 그들은 환시를 보게 되었고, 그때 받은 환시에 따라 베로나 교외에 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회의 공동체에 들어갔다.

그들의 행동은 모범적이었다. 원장이 어느 날 당신들은 왜 그토록 자주 문 밖에서 하늘만 응시하고 기도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천주 성자를 팔에 안고 계시는 성모님과 성녀 안나(Anna)를 그곳에서 뵈옵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고, 그분들이 바로 자신들에게 은수생활을 하도록 인도하신 분들이라고 하였다.

그들이 받은 초자연적 은혜는 이 두 친구들에게 원기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항상 겸손한 자로 처신토록 하였으며, 가장 힘든 노동까지 자발적으로 하게 만들었다. 또 그들은 치유의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은둔소를 찾아오는 환자들을 낫게 하여 그곳은 날로 유명해졌다.

에반젤리스트는 천사의 발현을 받고 머지않아 임종하리라는 말씀을 듣고는 무릎을 꿇고 감사드리자 그 천사는 평화로이 물러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페레그리누스도 하느님께 간청하여 친구와 같이 불러 달라고 기도하였는데, 에반젤리스트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너도 곧 나를 따르리라고 말한 뒤에 페레그리누스가 운명하여 같은 무덤에 안장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에우제니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ugen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에우제니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우게니오, 에우게니우스, 에우제니우스, 유진.

 

 

에우제니오 자료

성 바오로(Paulus), 성 키릴루스(Cyrillus), 성 에우게니우스(Eugenius, 또는 에우제니오)를 포함해서 7명의 순교자들이 로마인들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시리아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에 대해 알려진 다른 것은 거의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요셉

 

  • 가톨릭 성인 이름
    Joseph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경

 

 

요셉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요세푸스,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호세.

 

 

요셉 자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Samaria) 지방을 가로질러 가실 때 시카르(Sychar)라는 고을의 ‘야곱의 우물’에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며 한 여인과 대화를 나누셨는데(요한 4,1-42), 성경에 이름이 나오지는 않지만 성녀 포티나(Photina)가 바로 그 사마리아 여인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물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온 여인은 예수님 말씀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대화를 이어가면서 예수님을 예언자로 알아보았다.

그리고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장소에 관한 대화에 이어서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라고 고백했을 때,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는 말씀을 들었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곧바로 고을로 가서 자신이 만난 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하며 고을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였다.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을 통해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가 갈릴래아로 가셨다.

전승에 따르면, 사마리아 여인인 성녀 포티나는 예수님을 만난 후 그분의 제자가 되었고, 사도들에게 세례를 받은 후 두 아들과 자매들과 함께 카르타고(Carthago)로 가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네로 황제의 박해 때 그곳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성녀 포티나는 그녀의 두 아들과 다섯(또는 세) 자매들과 다른 사마리아 출신 신자들과 함께 카르타고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어 네로 황제 때 순교했다고 한다. 성녀 포티나는 순교하기 전에 네로 황제의 딸 돔니나(Domnina)와 백여 명에 달하는 그녀의 노예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고 한다.

이 사실에 분노한 네로 황제는 성녀 포티나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한 후 마른 우물에 던져 죽였다고 한다. 성녀 포티나는 특히 동방정교회에서 사도에 버금가는 성녀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은 3월 20일 목록에서 사마리아 여인인 성녀 포티나와 그녀의 두 아들인 성 요셉(Josephus)과 성 빅토르(Victor), 사마리아 출신으로 군 장교인 성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 사마리아 출신의 성 아나톨리우스(Anatolius)와 성 포티우스(Photius) 그리고 성녀 포티나의 자매인 성녀 포티데스(Photides) · 성녀 파라스케베스(Parasceves) · 성녀 키리아카(Cyriaca)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모두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성녀 포티나와 동료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의 불확실성으로 같은 날 목록에서 그들에 대한 기록을 삭제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8. 요셉 빌체프스키

 

  • 가톨릭 성인 이름
    Joseph Bilczewski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대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860-1923년 리비프

 

 

요셉 빌체프스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빌체브스키, 요세푸스,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호세.

 

 

요셉 빌체프스키 자료

성 요셉 빌체프스키(Josephus Bilczewski)는 1860년 4월 26일 당시 크라쿠프(Krakow) 교구의 일부였고, 오늘날은 비엘스코 지비에츠(Bielsko Zywiec) 교구에 속한 켄티(Kety)의 빌라모비체(Wilamowice)에서 태어났다.

빌라모비체는 우크라이나(Ukraine) 북서부에서 폴란드 남동부에 걸친 갈리치아(Galicia) 지역에 속한 곳으로, 당시에는 오스트리아(Austria)의 지배하에 있었고 오늘날에는 폴란드(Poland)의 영토에 속하는 곳이다.

그는 빌라모비체와 켄티에서 초등교육을 마친 후 바도비체(Wadowice)에서 고등교육을 받아 1880년에 학위를 받았다. 이어 크라쿠프 인근의 신학교에 들어가 1884년 7월 6일 크라쿠프 교구의 알비노 두나제프스키(Albino Dunajewski) 추기경으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품을 받은 그는 1886년 오스트리아의 빈 대학교(the University of Vienna)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로마(Roma)와 파리(Paris)에서 계속 수학하여 1890년 크라쿠프에 있는 야기엘로니아(Jagiellonia) 대학교의 교수 자격심사를 통과하였고, 다음해에 리비프의 요한 카시미르(Joannes Casimir) 대학교의 교의신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대학교의 학장이 되기에 앞서 신학대학의 학과장으로도 재임했다. 그는 재임기간 동안 학생들로부터 교수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고 그들과 우정을 나누었으며 동료 교수들의 존경 또한 받았다. 그는 학문적인 연구에 전념해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박식한 사람이란 평판을 얻었다.

그의 지적이고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비범한 능력은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f I)에게까지 알려졌다. 그래서 황제는 교황에게 공석으로 있던 리비프 대교구의 교구장 후보로 그를 추천했고, 교황 레오 13세(Leo XIII)는 그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1900년 12월 17일 라틴 전례 리비프 대교구의 대주교로서 40세의 요셉 빌체프스키 몬시뇰을 임명하였다.

그는 대교구장으로서 그에게 주어진 복잡한 사회적 · 경제적 · 인종적 · 종교적 상황에 깊이 참여하며, 놀라운 도덕적 노력과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심을 갖고 하느님과의 지속적인 만남에서 얻은 활기찬 신앙으로 교구민을 돌보았다.

그는 또한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한없는 사랑에서 솟아난 그의 풍요로운 선의와 이해심, 겸손과 경건함, 어려운 일에 기꺼이 투신하는 사목적 열정으로도 잘 알려졌다.

그의 대교구에 대한 사목적 계획은 성교회를 위해 전적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것으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그는 성체성사에 대한 신심을 증진시키고 잦은 영성체의 필요성에 대해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했다.

그의 사목 활동에 있어서 특별한 모습은 대교구의 사제와 신자들에게 사목서한과 강론을 통해 호소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통해 당대의 신앙과 윤리적 문제를 토로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절박한 문제인 사회 계층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는 성체성사와 예수 성심에 대한 헌신을 설명하고, 가정과 학교 안에서 어린이와 젊은이들의 종교적 · 도덕적 성장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거룩한 사제성소를 육성하는데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사제를 신앙을 위한 시초이자 가장 중요한 교사로서, 그리스도의 도구로서, 부자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로서 보았다.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자리를 만드는 사제는 성사의 집전자이고, 그런 이유로 사제는 그리스도의 성체로서 하느님의 백성이 양육될 수 있도록 온 마음을 다해 성체성사를 거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주 사제들에게 성체조배를 권고하고, 사목서한을 통해 사제들에게 사제적 친교에 참여하도록 초대하였다. 지속적인 성체조배와 가난한 가톨릭 교회에 대한 원조회에 대한 참여는 사제들이 스스로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는 또한 어린이들의 교리준비와 미사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했으며, 모든 교리교사들이 어린이와 젊은이들을 성체성사에로 인도하길 소망했다.

그는 많은 성당과 경당, 학교와 주간 보호소를 건축했고, 신자들이 교육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렇듯 그는 물질적 · 영성적으로 대교구에서 행해야 할 주요 사업들을 도와 그의 삶 전체가 기도와 사목과 자선사업으로 충만했다.

또한 교구 내에 현존하는 다양한 종교와 전례와 민족들의 측면을 존중하여 그의 재임기간 중에 종교적 · 민족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일치와 조화와 평화의 옹호자였다. 사회적 문제에 있어서 그는 항상 백성들과 가난한 이들 편에 섰다. 그는 사회생활의 기초는 정의여야 하며 그리스도인의 사랑에 의해 완성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사람들이 증오와 타인에 대한 존중 결핍에 휩싸였을 때 그는 모든 종류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 관심을 두도록 사람들을 격려하였다.

그는 특별히 형제적 사랑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준수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으며, 가정과 젊은이들의 처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 민감하게 대하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기초하여 그 해결방법을 용감하게 제시하였다.

그가 교구장으로 있던 23년 동안 리비프 대교구의 모든 모습들이 변화되었다. 오로지 죽음만이 그의 원대하고 거시적인 사목 활동을 끝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며 평화로이 받아들였고 하느님의 의지에 순명하였다. 그는 참으로 거룩한 생각과 행동으로 일생을 살다가 1923년 3월 20일 그의 교구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보편적인 거룩함을 알고 생활하도록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의 소망대로 참된 사제요 보호자로서 일생을 살았다. 그의 유해는 리비프 대교구에서 가난한 이들의 묘지로 알려진 야누프(Yaniv)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리비프 대교구에 대한 그의 헌신과 노력에 대한 감사의 표현은 그의 시복시성 청원으로 표현되었다. 기적 심사를 통과한 그는 2001년 6월 26일 사목방문을 위해 우크라이나를 찾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리비프 대교구에서 시복되었고, 2005년 10월 23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9. 요한 (수도원장)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209-1289년 파르마

 

 

요한 (수도원장)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수도원장) 자료

작은 형제회의 제7대 총장인 요한 부랄리(Joannes Buralli)는 이탈리아 파르마 출신으로 25세 때에 작은 형제회 회원이 되었다. 그는 즉시 파리(Paris)로 가서 공부를 하고 사제로 서품된 후에는 볼로냐(Bologna), 나폴리(Napoli) 그리고 로마(Roma)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그의 설교는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들곤 하였다. 1247년 그는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강인하고 배짱이 센 사람으로 인내심도 많았기 때문에 수도회 내외의 어려운 문제들을 잘 풀어나갔다.

그는 자주 부엌일하는 수사들을 거들어 준 것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침묵을 사랑하고 화해의 정이 깊어서 쓸데없는 말은 삼갔다. 그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에는 국왕 헨리 3세가 문밖으로 나와 보잘것없는 그를 껴안아 영접했고, 프랑스의 상스(Sens)를 찾았을 때에도 국왕 루이 9세가 그의 기도와 축복을 청할 정도로 공경을 받았다.

또한 그는 교황으로부터 임명 받은 동방 황제의 교황 대사로서 봉사하기도 했다. 1257년에 그는 총장직을 사임하고 성 보나벤투라(Bonaventura, 7월 15일)를 후임자로 뽑았다. 그는 그레치오(Greccio)의 은둔소로 은퇴하여 30여 년 동안 잊혀진 사람으로 살며 수덕생활에 전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0. 요한 (수도승, 순교자)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승,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796년 마르 사바

 

 

요한 (수도승, 순교자)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수도승, 순교자) 자료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성 요한(Joannes)과 성 세르기우스(Sergius) 그리고 20여명의 동료 수도승들이 예루살렘 인근의 마르 사바 대수도원에서 그리스도교를 반대하는 아랍인들의 급습을 받아 순교하였다.

또한 더 많은 수도승들이 부상을 입었고, 몇몇은 습격을 피해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이들 중의 한 명인 스테파누스(Stephanus)는 이 사건의 전말과 순교자들의 영예로운 죽음에 대한 시를 지어 남겼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1. 요한 (신부, 순교자)

 

  • 가톨릭 성인 이름
    Joh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345?-1393년 네포무크

 

 

요한 (신부, 순교자)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네포무케네, 네포무케노, 네포무케누스, 네포묵,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요한 (신부, 순교자) 자료

1340~1350년 사이 체코 서부 보헤미아(Bohemia) 지방의 네포무크에서 태어난 성 요한(Joannes)은 그의 아버지 이름이자 가문 이름인 벨플린(Velflin) 대신에 고향 이름을 따서 자신의 별명을 ‘네포무케누스’(Nepomucenus, 또는 네포무케노, 네포무크)로 짓고, ‘네포무크 출신의 요한’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프라하(Prague)의 카렐 대학교(Univerzita Karlova)에서 공부한 후 교회법을 공부하기 위해 1383년부터 1387년까지 이탈리아의 파도바(Padova) 대학교로 유학한 후 그곳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보헤미아로 돌아온 그는 1393년에 프라하 대교구 얀 젠슈타인(Jan z Jenstejna) 대주교의 총대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자신이 맡은 중책을 성실히 수행하며 설교가와 고해 사제로도 활동했다.

전승에 의하면, 당시 보헤미아를 통치하고 있던 국왕 벤체슬라우스 4세(Wenceslaus IV)는 그리스도교 신자였으나 타락의 길을 걷고 있었고, 성격 또한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성 요한은 왕비의 고해신부로도 활동했는데, 왕비를 의심한 국왕이 왕비의 고백 내용을 털어놓으라고 명령했을 때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성스러운 고해의 비밀을 누설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엄히 금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처럼 명하신 것을 순종치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로 인해 그는 국왕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클라드루비(Kladruby)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의 대수도원장 임명을 둘러싸고 국왕과 프라하 대주교 간의 논쟁에도 휘말리게 되었다. 프라하 대주교와 함께 로마 교황을 지지하던 그는 대수도원장 선거에 참석하러 갔다가 국왕이 보낸 사람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성 요한은 국왕이 자신을 따르는 귀족들을 위해 수도원장을 자신이 원하는 사람으로 임명하려 했을 때 이를 강력히 반대했을 뿐 아니라 성직에 대한 국왕의 개입 자체를 거부하였다.

이미 왕비의 고백 내용을 밝히지 않아 국왕의 미음을 샀던 그는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끝까지 고해성사의 비밀을 누설하기를 거부한 성 요한은 불에 달군 쇠로 옆구리를 지지는 등 참혹한 형벌을 받은 뒤, 두 손을 뒤로 결박하고 몸을 구부려 발을 머리에 잡아맨 상태로 프라하의 카렐 다리(Charles Bridge) 위로 끌려가 산 채로 블타바강(Vltava R., 독일어로는 몰다우강 Moldau R.) 아래로 던져져 순교했다.

1393년 3월 20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뒤에 블타바강 위에 다섯 개의 별과 같은 광채가 떠올랐고, 어부들이 그곳에서 성 요한의 시신을 발견해 성당에 모셨고, 현재 프라하의 성 비투스(Vitus) 대성당에 그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프라하의 대교구장 얀 젠슈타인 대주교는 1393년 4월 23일 로마로 가서 교황 보니파티우스 9세(Bonifatius IX)에게 성 요한 네포무크의 순교 사실을 전하고, 벤체슬라우스 4세 왕을 고발하는 문헌을 제출하였다.

프라하의 대주교는 성 요한이 이미 순교자이자 성인으로서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고 있음도 전했다. 성 요한 네포무크는 1721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3세(Innocentius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729년 3월 19일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 요한은 체코의 수호성인이자 고해성사의 비밀을 끝까지 수호한 순교자로서 ‘고해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또한 다리 위에서 물속에 던져져 순교했다는 이유로 ‘다리의 수호성인’으로도 불린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보통 사제복 위에 중백의를 입고 영대를 걸친 상태로 한 손으로 십자가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고해성사의 비밀을 상징하듯 입을 가리는 모습 등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그가 순교한 후 강 위로 떠 오른 광채를 상징하는 다섯 개의 별을 성인의 후광과 함께 표현하고 있다. 체코를 비롯한 몇몇 나라와 옛 “로마 순교록”은 5월 16일을 그의 축일로 기념하고 있다.

그런데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교회의 전통에 따라 순교한 날인 3월 20일 목록에서 네포무크의 성 요한 사제 순교자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2. 윌리엄

 

  • 가톨릭 성인 이름
    William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042년 페냐코라다

 

 

윌리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굴리엘모, 빌리암, 빌헬름, 윌리암.

 

 

윌리엄 자료

성 윌리엄은 에스파냐 북부 레온(Leon)의 사아군(Sahagun)에 있는 수도원의 수도승이었다. 그는 988년 사라센인들이 수도원을 공격해 올 때 동료들과 함께 그곳을 탈출하여 페냐코라다에 정착하여 은수생활을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성 윌리엄은 마침내 동료들과 함께 산타 마리아 데 로스 발레스(Santa Maria de los Valles) 수도원을 세웠는데, 후에 페냐코라다의 산 귈레르모(San Guillermo) 수도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3. 치릴로

 

  • 가톨릭 성인 이름
    Cyril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치릴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시릴, 시릴로, 시릴루스, 치릴루스, 키릴로, 키릴로스, 키릴루스.

 

 

치릴로 자료

성 바오로(Paulus), 성 키릴루스(Cyrillus, 또는 치릴로), 성 에우게니우스(Eugenius)를 포함해서 7명의 순교자들이 로마인들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시리아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에 대해 알려진 다른 것은 거의 없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4. 쿠트베르토

 

  • 가톨릭 성인 이름
    Cuthbert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수도승

  • 활동 연도와 지역
    +687년 린디스판

 

 

쿠트베르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구트베르토, 구트베르투스, 구트베르트, 커스버트, 쿠트베르투스, 쿠트베르트, 쿳베르토, 쿳베르투스.

 

 

쿠트베르토 자료

어떤 사람들은 성 쿠트베르투스(Cuthbertus, 또는 쿠트베르토)가 아일랜드계라고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스코틀랜드계라고 하지만, 저명한 역사가인 성 베다(Beda, 5월 25일)는 잉글랜드 출신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얼마 동안 목동으로 살았고, 머시아(Mercia) 사람들과 싸웠던 경험도 있다.

성 쿠트베르투스는 영국 스코트랜드의 멜로즈(Melrose) 수도원에서 성 보스웰(Boswell, 7월 7일) 수도원장의 지도로 수도자가 된 후 성 에아타(Eata, 10월 26일)를 수행하여 리펀(Ripon) 수도원으로 갔다.

알크프리드(Alcfrid) 국왕이 리펀 수도원의 책임을 성 발프리두스(Walfridus, 10월 12일)에게 넘겨주자, 그는 다음 해에 멜로즈 수도원으로 돌아와 그곳의 원장이 되었다.

661년에 멜로즈에 흑사병이 발생했을 때 자신도 병에 걸릴 만큼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의 성덕은 너무나 뛰어나서 놀라운 치유 능력을 보였고, 수많은 기적도 일으켰다고 한다. 그는 주로 선교사로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성 콜만누스(Colmannus, 2월 18일)가 로마 전례 거행을 결정한 휘트비(Whitby) 시노드의 결정을 거부하고 린디스판섬 수도자의 대부분을 이끌고 아일랜드로 돌아갔을 때, 성 에아타가 그의 후임 주교로 임명되었고 성 쿠트베르투스는 린디스판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멜로즈에서 린디스판 수도원으로 옮긴 그는 선교 활동을 재개했는데 수많은 군중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이 일은 그가 은수자로 생활할 허가를 받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은수자로서 생활하던 성 쿠트베르투스는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새로 분할된 헥삼(Hexham) 교구의 주교로 선임되었다가 다시 헥삼 교구 대신 인연이 깊은 린디스판의 주교로 착좌하였다.

그는 2년 동안 자기 교구를 지도하다가 최후의 날이 임박한 것을 깨닫고, 성탄절을 지낸 후 판(Farne) 섬에 있는 자신의 은둔소 방으로 돌아가서 지내다가 687년 3월 20일에 선종하였다.

그리고 그날로 그의 유해는 린디스판 섬의 수도원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그러나 875년 바이킹의 침략을 우려해 수도자들이 그의 유해를 워킹턴(Workington), 휘턴(Whithorn), 체스털리스트리트(Chester-le-Street), 리펀 등으로 옮겼고, 최종적으로 더럼(Durham)으로 이장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종종 노섬브리아(Northumbria)의 왕인 성 오스왈두스(Oswaldus,8월 5일)의 머리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는 메이서필드(Maserfield) 전투에서 사망한 왕의 머리를 후에 그가 다시 매장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5. 파라스케베

 

  • 가톨릭 성인 이름
    Parascev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세기경

 

 

파라스케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빠라스께베스, 빠라스케베스, 파라셰베스.

 

 

파라스케베 자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Samaria) 지방을 가로질러 가실 때 시카르(Sychar)라는 고을의 ‘야곱의 우물’에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며 한 여인과 대화를 나누셨는데(요한 4,1-42), 성경에 이름이 나오지는 않지만 성녀 포티나(Photina)가 바로 그 사마리아 여인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물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온 여인은 예수님 말씀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대화를 이어가면서 예수님을 예언자로 알아보았다.

그리고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장소에 관한 대화에 이어서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라고 고백했을 때,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는 말씀을 들었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곧바로 고을로 가서 자신이 만난 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하며 고을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였다.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을 통해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가 갈릴래아로 가셨다.

전승에 따르면, 사마리아 여인인 성녀 포티나는 예수님을 만난 후 그분의 제자가 되었고, 사도들에게 세례를 받은 후 두 아들과 자매들과 함께 카르타고(Carthago)로 가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네로 황제의 박해 때 그곳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성녀 포티나는 그녀의 두 아들과 다섯(또는 세) 자매들과 다른 사마리아 출신 신자들과 함께 카르타고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어 네로 황제 때 순교했다고 한다. 성녀 포티나는 순교하기 전에 네로 황제의 딸 돔니나(Domnina)와 백여 명에 달하는 그녀의 노예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고 한다.

이 사실에 분노한 네로 황제는 성녀 포티나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한 후 마른 우물에 던져 죽였다고 한다. 성녀 포티나는 특히 동방정교회에서 사도에 버금가는 성녀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은 3월 20일 목록에서 사마리아 여인인 성녀 포티나와 그녀의 두 아들인 성 요셉(Josephus)과 성 빅토르(Victor), 사마리아 출신으로 군 장교인 성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 사마리아 출신의 성 아나톨리우스(Anatolius)와 성 포티우스(Photius) 그리고 성녀 포티나의 자매인 성녀 포티데스(Photides) · 성녀 파라스케베스 · 성녀 키리아카(Cyriaca)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모두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성녀 포티나와 동료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의 불확실성으로 같은 날 목록에서 그들에 대한 기록을 삭제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6. 페레그리노

 

  • 가톨릭 성인 이름
    Peregrine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250년경

 

 

페레그리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뻬레그리노, 뻬레그리누스, 페레그리누스, 페레그린.

 

 

페레그리노 자료

에반젤리스트(Evangelist)와 페레그리누스(Peregrinus, 또는 페레그리노)는 이탈리아의 베로나(Verona)에서 학창 시절에 만나 우정을 나눈 이래 무덤에 갈 때까지 함께 생활한 보기 드문 친구이다.

두 사람은 수도원에 들어가 하느님만 섬기기로 결심하고 입회하였는데 그 수도회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 후 그들은 환시를 보게 되었고, 그때 받은 환시에 따라 베로나 교외에 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회의 공동체에 들어갔다.

그들의 행동은 모범적이었다. 원장이 어느 날 당신들은 왜 그토록 자주 문 밖에서 하늘만 응시하고 기도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천주 성자를 팔에 안고 계시는 성모님과 성녀 안나(Anna)를 그곳에서 뵈옵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고, 그분들이 바로 자신들에게 은수생활을 하도록 인도하신 분들이라고 하였다.

그들이 받은 초자연적 은혜는 이 두 친구들에게 원기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항상 겸손한 자로 처신토록 하였으며, 가장 힘든 노동까지 자발적으로 하게 만들었다. 또 그들은 치유의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은둔소를 찾아오는 환자들을 낫게 하여 그곳은 날로 유명해졌다.

에반젤리스트는 천사의 발현을 받고 머지않아 임종하리라는 말씀을 듣고는 무릎을 꿇고 감사드리자 그 천사는 평화로이 물러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페레그리누스도 하느님께 간청하여 친구와 같이 불러 달라고 기도하였는데, 에반젤리스트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너도 곧 나를 따르리라고 말한 뒤에 페레그리누스가 운명하여 같은 무덤에 안장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7. 포티오

 

  • 가톨릭 성인 이름
    Pho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66년

 

 

포티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포시오, 포시우스, 포씨오, 포씨우스, 포티우스.

 

 

포티오 자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Samaria) 지방을 가로질러 가실 때 시카르(Sychar)라는 고을의 ‘야곱의 우물’에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며 한 여인과 대화를 나누셨는데(요한 4,1-42), 성경에 이름이 나오지는 않지만 성녀 포티나(Photina)가 바로 그 사마리아 여인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물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온 여인은 예수님 말씀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대화를 이어가면서 예수님을 예언자로 알아보았다.

그리고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장소에 관한 대화에 이어서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라고 고백했을 때,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는 말씀을 들었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곧바로 고을로 가서 자신이 만난 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하며 고을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였다.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을 통해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가 갈릴래아로 가셨다.

전승에 따르면, 사마리아 여인인 성녀 포티나는 예수님을 만난 후 그분의 제자가 되었고, 사도들에게 세례를 받은 후 두 아들과 자매들과 함께 카르타고(Carthago)로 가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네로 황제의 박해 때 그곳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성녀 포티나는 그녀의 두 아들과 다섯(또는 세) 자매들과 다른 사마리아 출신 신자들과 함께 카르타고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어 네로 황제 때 순교했다고 한다.

성녀 포티나는 순교하기 전에 네로 황제의 딸 돔니나(Domnina)와 백여 명에 달하는 그녀의 노예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고 한다.

이 사실에 분노한 네로 황제는 성녀 포티나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한 후 마른 우물에 던져 죽였다고 한다. 성녀 포티나는 특히 동방정교회에서 사도에 버금가는 성녀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은 3월 20일 목록에서 사마리아 여인인 성녀 포티나와 그녀의 두 아들인 성 요셉(Josephus)과 성 빅토르(Victor), 사마리아 출신으로 군 장교인 성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 사마리아 출신의 성 아나톨리우스(Anatolius)와 성 포티우스(또는 포티오) 그리고 성녀 포티나의 자매인 성녀 포티데스(Photides) · 성녀 파라스케베스(Parasceves) · 성녀 키리아카(Cyriaca)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모두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성녀 포티나와 동료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의 불확실성으로 같은 날 목록에서 그들에 대한 기록을 삭제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8. 헤르베르토

 

  • 가톨릭 성인 이름
    Herbert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사

  • 활동 연도와 지역
    +687년 더웬트호

 

 

헤르베르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허버트, 헤르베르또, 헤르베르뚜스, 헤르베르투스, 헤르베르트.

 

 

헤르베르토 자료

성 헤르베르투스(Herbertus, 또는 헤르베르토)는 성 쿠트베르투스(Cuthbertus, 3월 20일)의 제자 겸 절친한 친구로서 더웬트 호수의 한 섬에서 홀로 지냈다. 그는 매년 린디스판(Lindisfarne) 섬에 있던 그의 스승을 방문하여 자신의 사도적 열정을 새롭게 하였다.

그러던 중 스승이 운명하기 1년 전부터는 아예 스승과 함께 지내며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 두 성인은 기도와 고행으로 깊이 일치하였고, 거의 함께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성 헤르베르투스는 스승에 대한 사랑과 친구의 우정으로 인하여 높은 공경을 받는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9. 히폴리토 갈란티니

 

  • 가톨릭 성인 이름
    Hippolytus Galantini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65-1619년

 

 

히폴리토 갈란티니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히뽈리또, 히뽈리뚜스, 히폴리또, 히폴리뚜스, 히폴리투스.

 

 

히폴리토 갈란티니 자료

히폴리투스 갈란티니(또는 히폴리토)는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의 부유한 비단장수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의 장사를 배워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열두 살 때에 메디치(Medici)의 주교이며 후일 교황 레오 11세(Leo XI)가 된 알렉산데르(Alexander) 대주교의 주목을 받게 되어 사제 수업을 받았으나 중병으로 인하여 그만두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식과 편태 그리고 밤새워 기도하면서 뛰어난 영적 식별력을 얻었고, 돈도 없고 책도 없이 재속회를 세우는데 성공하여 남녀 신자들에게 주요 교리와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가르쳤다.

그의 단체는 1602년에 회칙을 만들고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의 재속회는 ‘그리스도교 교리회’였으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름은 ‘반체토니’이다.

그는 45세 때에 중병을 앓고 운명하였는데, 병중에 그는 천상 나라를 잠시 보았고, 자신의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께 친구하니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 듯하였다고 전해온다. 그는 1825년 교황 레오 12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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