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세례명 루도비카는 루도비까, 루이즈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여자세례명 루도비카 3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루도비카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루도비카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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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도비카 여자세례명 목록
- 루도비카 알베르토니 (1월 31일)
- 루도비카 드 마리약 (3월 15일)
- 루도비카 (7월 24일)
1. 루도비카 알베르토니
- 세례명 축일
1월 31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Louise Albertoni - 신분과 직업
과부, 3회원 - 활동 연도와 지역
1474-1533년
루도비카 알베르토니 세례명과 같은 이름
루도비까, 루이즈, 알베르또니, 알베르또니아, 알베르토니아.
루도비카 알베르토니 이야기
루도비카 알베르토니(Ludovica Albertoni)는 1473년 로마의 저명한 귀족인 스테파노 알베르토니(Stefano Albertoni)와 루크레티아 테발디(Lucretia Tebaldi)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2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도 재혼하면서 고모들 손에서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귀족 집안 딸이었던 그녀는 1494년 같은 귀족이자 부유한 집안 출신인 자코모 델라 체테라(Giacomo della Cetera)와 결혼하여 세 딸을 낳았다. 그녀는 날카롭고 무례한 남편 때문에 힘겨운 결혼생활을 했지만, 신앙 안에서 온유함을 간직하며 남편의 냉랭함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지 않았다.
1506년 오랜 병고 뒤에 남편이 사망한 후 시숙인 도메니코(Domenico)가 정당한 그녀의 상속 권리를 인정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지만, 법원의 결정으로 자신과 세 딸의 상속 권리를 찾았다.
이 무렵 루도비카 알베르토니는 그녀가 살던 트라스테베레(Trastevere)의 성 프란치스코 리파 (San Francesco a Ripa) 성당에서 작은 형제회 제3회에 입회하여 매일매일 기도 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녀는 특별히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묵상을 좋아했고, 기도 외 시간에는 병자를 돌보거나 로마에 있는 일곱 개의 대성당을 찾아 조배하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그녀는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며 스스로는 철저히 가난과 겸손의 덕을 실천하며 살았다. 하느님께서는 그녀에게 가끔 탈혼의 은총을 내려주셨고 공중에 떠 있는 기적도 내려주셨다.
로마에서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로 알려진 루도비카 알베르토니는 1533년 1월 31일 병으로 선종하였다. 그녀의 유해는 그녀가 평소 원하던 대로 성 프란치스코 리파 성당의 성녀 안나 경당에 안치되었다. 선종 후에도 오래도록 대중들의 사랑과 공경을 받았던 루도비카 알베르토니는 1671년 1월 28일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해 시복되었다.
1674년 지안 로렌초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는 루도비카 알베르토니의 유해가 안치된 성당 안에 탈혼에 빠진 그녀의 모습을 표현한 누운 조각상으로 유명한 새 제단을 제작했고, 그녀의 유해는 그곳 경당으로 옮겨져 공경을 받고 있다. 그녀는 루도비카 알베르토니아(Ludovica Albertonia)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루도비카 드 마리약
- 세례명 축일
3월 15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Louise de Marillac - 신분과 직업
과부, 설립자, 수녀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591-1660년
루도비카 드 마리약 세례명과 같은 이름
루도비까, 루이사, 루이즈, 마리악, 마릴락.
루도비카 드 마리약 이야기
성녀 루도비카(Ludovica)는 1591년 8월 프랑스 북부 와즈(Oise) 지방의 뮤(Meux) 인근에서 태어났다. 혼외 관계로 태어난 그녀는 평생 어머니가 누구인지 모른 채 아버지와 함께 루이 드 마리약(Louis de Marillac)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 성장했다.
아버지가 결혼한 후 성녀 루도비카는 도미니코회 수녀인 숙모가 있는 파리 인근 푸아시(Poissy)의 왕립 수녀원으로 보내져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12살 때 아버지가 사망한 후 형편이 어려워져 수녀원 기숙사를 나와 하숙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그녀는 가사 일과 허브로 약을 만드는 비법 등을 배웠고, 귀족의 삶에서 서민의 삶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다.
수녀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파리의 카푸친회 수녀원에 입회를 신청했으나 건강과 여러 이유로 거부되었다. 결국 가족들의 권유로 1613년 22살이 나이로 당시 프랑스 여왕의 비서였던 앙투안 르 그라(Antoine Le Gras) 백작과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다.
프랑스의 왕족과 귀족들 안에서 평온하고 행복한 삶을 살던 그녀의 결혼 생활은 12년밖에 이어지지 않았다. 건강이 안 좋았던 남편이 1625년 사망하고, 내전 등으로 혼란한 시기에 숙부들마저 처형당하거나 옥사하는 일이 생기면서 그녀는 실의에 빠져 심각한 우울증까지 겪게 되었다.
그러나 기도 중에 공동체 안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며 살게 될 것이라는 환시를 보았고, 뜻하지 않게도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1월 24일)에게 영적 지도를 받는 계기가 생기면서 삶의 일대 전환기를 마련하였다.
그녀는 평소 부유한 귀족 부인들과 함께 자선 활동을 하며 잘 알고 지냈던 성 빈첸시오 드 폴(Vincentius de Paul, 9월 27일)을 찾았다. 성 빈첸시오 드 폴은 1925년 선교 사제회를 설립하고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본당 단위의 애덕회를 조직해 활동하고 있었다.
성 빈첸시오 드 폴의 초대로 가난한 이들을 도우며 살게 된 성녀 루도비카 드 마리약은 내적 치유를 경험하고 앞으로의 사도직을 준비할 수 있었다. 성 빈첸시오 드 폴은 성녀 루도비카 드 마리약의 소망을 받아들여 1633년 젊은 처녀들을 모아 ‘애덕의 수녀회’를 설립하고 그녀를 초대 원장으로 임명하였다.
이 수녀회가 오늘날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The Daughters of Charity of St. Vincent de Paul)라고 불리는 수녀회이다. 그때부터 그들의 수도원은 병원이요, 성당은 교구 내의 모든 성당이며, 봉쇄 구역은 길거리가 되었다. 회칙 초안도 그녀가 작성하였다. 그녀의 명석한 두뇌와 관대한 사랑은 이 수녀회의 급속한 성장을 예고하고 있었다.
성 빈첸시오 드 폴 신부가 선종하기 몇 달 전인 1660년 3월 15일, 성녀 루도비카 드 마리약이 파리에서 임종할 때 프랑스 내에는 이미 40개의 수도원이 있었고, 병자와 가난한 이를 돕는 구호소는 수없이 많았다. 그녀는 이런 말을 남겼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봉사하라. …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을 부끄럽게 하지 말 것이다. 그대가 섬기는 이는 곧 그리스도이시니…”
그녀는 1920년 5월 9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4년 3월 11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리고 1960년 교황 요한 23세(Joannes XXIII)에 의해 사회복지사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루도비카
- 세례명 축일
7월 24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Louise - 신분과 직업
과부 - 활동 연도와 지역
1462-1503년 사보이아
루도비카 세례명과 같은 이름
루도비까, 루이즈.
루도비카 이야기
상류사회의 우아한 귀부인이던 루도비카(Ludovica)는 클라라 회원이 될 은혜를 미리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던 것 같다. 그녀는 사보이아 공국의 공작인 복자 아마데우스의 9세(Amadeus IX, 3월 30일)의 딸로 태어났다. 아홉 살 때에 부친을 여의었지만 어머니에 의하여 훌륭히 자랐으니, 특히 뛰어난 영적 지위에 있었다.
18세 때에 그녀는 위고 드 샬롱과 결혼하였는데 남편은 열렬한 그리스도인이었으므로, 그들의 집은 마치 수도원처럼 거룩하였고 부부생활은 사랑으로 가득하였다. 그녀는 최초로 자선함을 설치한 인물로 기록된다. 자선함에 모인 기금으로 그녀는 고아와 과부 특히 나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남편과 사별한 그녀는 이제 완전히 세속과 결별하였다. 그녀는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수도복을 입고 성무일도를 바쳤으며, 밤중에 일어나 새벽기도를 바치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그녀는 오르베(Orbe)의 클라라 수녀회에서 살게 되었다. 비록 귀족 출신이었지만 그녀는 수녀원 내의 부엌일을 비롯하여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 하였다.
이처럼 그녀는 철저히 겸손하고 거룩한 삶을 살다가 1503년 7월 24일 “우리 사부 성 프란치스코여, 하느님의 자비를 빌어주소서” 하며 선종하였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839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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