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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베르토 천주교 남자세례명

피어나네 2023. 4. 2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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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세례명 노르베르토는 노르베르또, 노르베르뚜스, 노르베르투스, 노르베르트, 놀베르토, 놀베르트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남자세례명 노르베르토를 모았어요.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노르베르토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노르베르토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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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베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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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베르토 남자세례명 목록

 

  1. 노르베르토 (6월 6일)

 

노르베르토 천주교 남자세례명

 

 

1. 노르베르토

 

  • 세례명 축일
    6월 6일

  • 호칭 구분
    성인

  • 가톨릭 성인 이름
    Norbert

  • 신분과 직업
    대주교,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080?-1134년 마그데부르크

 

 

노르베르토 세례명과 같은 이름

노르베르또, 노르베르뚜스, 노르베르투스, 노르베르트, 놀베르토, 놀베르트.

 

 

노르베르토 이야기

성 노르베르투스(Norbertus, 또는 노르베르토)는 1080년경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ordrhein-West falen) 지역의 크산텐(Xanten)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크산텐에 있는 성 빅토르(Victor) 수도원에 들어갔고, 커서는 쾰른(Koln)의 대주교와 함께 하인리히 5세 황제의 궁전에 들어와 황제의 하사품을 관리하는 차부제로 지냈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많았던 그는 자신의 지위에 맞지 않는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식에 참석하고자 말을 타고 가다가 벼락을 맞아 땅에 떨어졌다. 얼마 후 의식을 회복한 그는 방탕했던 지난 생활에 대해 깊이 뉘우치며 “주님, 저로 하여금 무엇을 하길 원하십니까?” 하고 그 옛날 사도 성 바오로(Paulus)가 그랬던 것처럼 주님께 여쭈었다. 그러자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라는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소명을 더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 쾰른 근처 지크부르크(Siegburg)의 한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들어가 기도와 단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결국 주님의 뜻을 확신한 그는 쾰른으로 돌아와 사제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1115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후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전에 있던 곳으로 돌아왔으나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아는 이들의 온갖 모욕과 냉대를 참으며 과거의 죄를 보속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소중한 기회로 삼았다.

그 후 그는 주임 사제직을 사임하고 소유물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본격적으로 보속의 길을 떠났다. 그가 프랑스 북부 지역을 다니며 주님의 말씀을 설교한 것이 큰 효과를 내면서 그는 매우 유명한 설교가로 변신하였다. 그리고 포스(Fosses)의 복자 후고(Hugo, 2월 10일)가 그의 동반자가 되면서 그의 능력은 더욱 돋보이게 되었다.

프랑스 북동부 랑(Laon)의 주교는 자신의 교구로 성 노르베르투스를 초대하면서 프레몽트레(Premontre)의 계곡에 있는 성당을 사용하도록 그에게 주었다. 그는 그곳에서 얼마간 기도와 고행을 실천하며 살다가 1120년 1월 25일 13명의 동료와 함께 성 마르티누스(Martinus)의 율수 수도회를 개혁하여 새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새 수도회는 급격히 성장하며 회원 수도 빠르게 불어났는데, 이것이 이른바 백의의 율수 의전 수도회인 ‘프레몽트레회’(Chanoines Reguliers de Premontre)의 시작이었다. 그는 생전에 8개의 대수도원과 2개의 수도원을 세웠고, 1125년에 교황 호노리우스 2세(Honorius II)에게 공식 인가를 받았다. 그 후 테오발드(Theobald) 백작이 입회를 요청하자 그는 입회를 거절하고 세상에서 수도회의 규칙을 따라 살도록 제3회를 조직하였다.

그 뒤에 교회 일로 독일의 슈파이어(Speyer)에 갔다가 황제와 교황 사절의 간청에 굴복하여 독일 중부에 있는 마그데부르크의 대주교가 될 것을 승낙하였다.

그 교구에는 개혁할 일, 정리해야 할 일들이 태산 같았다. 그는 성실한 협력자인 포세스의 복자 후고에게 수도회를 돌보도록 맡기고 마그데부르크로 갔다. 새 임지에 갔을 때 주교관의 문지기는 너무도 남루한 그의 모습을 보고 거지로 착각해 주교관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는 일화도 있다.

새 주교와 그의 개혁 정책에 반감을 갖게 된 이들도 많아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방해하며 심지어 그를 해치려는 시도까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덕행과 온화하고 용맹한 마음으로 그 모든 장애를 극복해나갔다.

1132년 그는 황제 대관식에 참석하고자 로마에 갔다가 중병에 걸려 4개월간 병상에 눕게 되었으나 그 후 교구로 돌아와 2년간 직무를 수행하다가 1134년 6월 6일 선종하여 프레몽트레회의 성모 성당에 안장되었다.

생전에 성 노르베르투스는 프랑스 북부 캉브레(Cambrai)에서 이단과 싸우는 대주교를 돕도록 제자 성 발트만(Waltman, 4월 11일)을 파견해 도와주었고, 사제직과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부정하고 다른 성사들도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탄켈름(Tanchelm)의 이단적 주장을 배격하는데 큰 공로를 세웠다.

그는 선종 후 비교적 늦은 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Gregorius X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유해는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가 성장하면서 마그데부르크가 개신교 지역이 되자 유해 훼손을 방지하기 위한 오랜 노력 끝에 1627년 폴란드 프라하(Prague) 인근 프레몽트레회의 스트라호프(Strahov) 수도원으로 옮겨 모셔 오늘에 이르고 있다.

1672년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는 보편 교회 전례력 안에서 그의 축일을 지내도록 하였다. 보통 출생지와 연결해서 ‘크산텐의 성 노르베르투스’로 불리는 그는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을 타원형으로 둘러싼 열주 위에 세워진 140명의 성인 입상의 주인공 중 한 명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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