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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가리타 여자세례명 18인 목록

피어나네 2023. 5. 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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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세례명 마르가리타는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주교 여자세례명 마르가리타 17분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모았어요. 축일로 구분한 아래 세례명 목록을 클릭하면 해당하는 마르가리타 가톨릭 성인의 스토리로 이동합니다. 본받고 싶은 마르가리타를 찾아 가톨릭 성인의 믿음과 가치를 발견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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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가리타
천주교 여자세례명
18인 목록

 

 

 

 

마르가리타 여자세례명 목록

 

  1. 마르가리타 부르주아 (1월 12일)

  2. 마르가리타 (1월 18일)

  3. 마르가리타 (1월 23일)

  4. 마르가리타 (2월 3일)

  5. 마르가리타 (2월 22일)

  6. 마르가리타 클리테로우 (3월 25일)

  7. 마르가리타 (4월 13일)

  8. 마르가리타 폴 (5월 28일)

  9. 오 마르가리타 (5월 29일)

  10. 마르가리타 (7월 20일)

  11. 마르가리타 (맨발의) (8월 27일)

  12. 마르가리타 워드 (8월 30일)

  13. 마르가리타 (8월 31일)

  14.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10월 16일)

  15. 마르가리타 (11월 6일)

  16. 마르가리타 (11월 16일)

  17. 마르가리타 (11월 23일)

  18. 마르가리타 콜론나 (12월 30일)

 

마르가리타 천주교 여자세례명 17인 목록

 

 

1. 마르가리타 부르주아

 

  • 세례명 축일
    1월 12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Margaret Bourgeoys

  • 신분과 직업
    선교사,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20-1700년

 

 

마르가리타 부르주아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부르져와.

 

 

마르가리타 부르주아 이야기

프랑스 샹파뉴(Champagne)의 트루아(Troyes) 출신인 성녀 마르가리타 부르주아(Margarita Bourgeoys)는 신심 깊은 가정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20세 때에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 카르멜회, 클라라 관상 수도회에 차례로 입회를 청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하였다.

1652년에 그녀는 캐나다의 빌르 마리(Ville-Marie, 현 몬트리올)에 정착 중인 프랑스 총독이 자신의 식민지 내의 학교 선생을 원하자 그에 동의하고 1653년 퀘벡의 몬트리올(Montreal)에 도착하였다. 그 후 4년 동안 '비교회법적인 수련기'를 마친 그녀는 1658년에 개교한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이 학교는 점차 발전을 거듭하였고, 또 그녀는 '마리아회'를 조직하고 적극적으로 활약하였지만 이로쿼이(Iroquois)족 인디언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잠시 귀국하였다.

프랑스에서 자신과 함께 할 젊은 여성들을 모집하여 캐나다로 돌아온 그녀는 가장 버림받고 가난한 지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676년 마침내 퀘벡의 주교로부터 노틀담 수도회의 법적 설립을 승인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사도직 활동이 수월하지만은 않았다. 수녀원에 화재가 발생해 자신의 조카를 포함하여 두 명의 수녀를 잃는 비극이 있었고, 또 담당 주교와의 심각한 견해 차이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노틀담 수도회는 괄목할만한 발전을 거듭하였다.

73세가 된 성녀 마르가리타는 건강과 기력이 점차 쇠하자 수도원 총원장직에서 은퇴하여 여생을 지내다가 1700년 1월 12일에 선종하였다. 그녀는 1950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2년 10월 31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마르가리타

 

  • 세례명 축일
    1월 18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Margaret

  • 신분과 직업
    공주, 수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242-1271년경 헝가리

 

 

마르가리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마르가리타 이야기

성녀 마르가리타(Margarita)는 헝가리의 왕 벨라 4세(Bela IV)와 마리아 라스카리나(Maria Laskarina)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폴란드의 성녀 쿠네군다(Cunegundis, 7월 24일)와 복녀 욜렌타(Jolenta, 6월 11일)의 동생으로 크로아티아 왕국의 스플리트(Split) 인근 클리스(Klis) 요새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는 몽골족의 침략으로 헝가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였다. 그녀의 부모는 만일 몽골족의 침략으로부터 헝가리가 무사히 해방된다면 어린 마르가리타를 하느님께 바치겠다는 약속을 했고, 그 은혜는 실제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벨라 왕은 세 살 난 딸을 베스프렘(Veszprem)에 있는 도미니코회 수도원에 맡겼다.

6년 후 성녀 마르가리타는 그녀의 부모가 오늘날 부다페스트(Budapest) 한가운데를 흐르는 도나우강(Donau R.)의 ‘토끼(Nyulak) 섬’이라 불리는 곳에 세운 동정 마리아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지냈다. 후에 이 섬의 이름은 그녀로 인해 마르가리타 섬(Margaret Island)으로 변경되어 현재까지 그렇게 불리고 있다.

그녀는 그곳에서 자신의 삶 전부를 수도 생활에 봉헌하며 살고자 했다. 성녀 마르가리타는 12살 경 첫서원을 했는데, 그때 정치적인 이유 등을 들어 서원을 반대하는 이들 앞에서 수녀원을 떠나느니 차라리 자신의 코와 입술을 자르라고 항변하며 자발적인 선택임을 이해시켰다.

그리고 정치적인 이유로 아버지가 보헤미아의 왕인 오토카르 2세(Ottokar II)와 결혼시키려 할 때도 완강히 물리치고 수도 생활에 더욱 전념했다. 그리고 18살에 종신서원을 했다.

성녀 마르가리타의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자기 극기는 여러 가지 활동을 통해 드러났다. 그녀는 가끔 온밤을 지새우며 성체 앞에서 기도하였고, 기도의 효력을 확신하며 전능하신 하느님께 간구하였다.

그녀는 이런 말을 하였다.

“갑자기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할 순 없지만, 어떻게든 하느님께 청하면 무엇이든지 다 받을 수 있다.”

사실 그녀의 이 말이 입증된 적이 있는데, 한 번은 두 명의 수녀가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더 있다가 가라고 했지만 즉시 떠나려 하자 그녀의 기도로 갑자기 비가 와서 그곳에 더 머물렀다고 한다.

그녀는 자주 탈혼을 경험했고 기적도 많이 따랐다. 또한 사순시기가 끝날 무렵이 되면 잠을 거의 자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단식으로 인해 측은한 생각마저 들 정도까지 되곤 하였다. “성금요일은 하루 중에서 가장 짧은 날이다”라고 한 그녀의 말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1271년 1월 18일 수도원에서 선종한 성녀 마르가리타는 1789년 교황 비오 6세(Pi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43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교회 미술에서 그녀는 보통 도미니코회 수녀복을 입은 모습으로 흰 백합과 함께 손에 책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마르가리타

 

  • 세례명 축일
    1월 23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Margaret

  • 신분과 직업
    동정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505년 라벤나

 

 

마르가리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마르가리타 이야기

이탈리아의 라벤나 교외 루시(Russi)에서 태어난 마르가리타(Margarita)는 태어난 지 불과 며칠 만에 시력을 잃고 완전한 맹인이 되었지만, 성장한 뒤부터는 혼자서도 성당을 찾아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가 보고자 하면 무엇이든지 볼 수 있다”고들 하였다.

어릴 적부터 이런 시련 외에도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자발적으로 고행을 하고, 자신이 불우한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자선활동을 끊임없이 계속하였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영적 지도를 받으려고 모여들었기 때문에 그녀는 세속에 살면서 수도자의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들을 모아 공동체를 세웠다.

그리고 성 히에로니무스 말루셀리의 도움으로 그녀가 직접 회헌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단체는 영구히 뿌리내리지는 못하였다. 마르가리타의 사후 말루셀리는 그녀의 뜻을 이어받아 '착한 예수의 사제회'로 알려진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그녀는 63세의 일기로 운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마르가리타

 

  • 세례명 축일
    2월 3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Margaret

  • 신분과 직업
    동정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192년 영국

 

 

마르가리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마르가리타 이야기

성녀 마르가리타(Margarita)는 원래 영국인이었다는 말도 있으나 헝가리의 귀족가문 출신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녀는 영국인 출신의 어머니와 함께 예루살렘을 순례한 후에 베들레헴에서 극기와 회개의 생활을 하던 중, 어머니가 운명하자 에스파냐의 몬세라트산(Montserrat)을 순례한 후 프랑스의 푸이 앙 블레(Puy-en-Velay) 교구에서 시토회 수녀원에 들어가 일생을 살았다고 한다.

그녀는 영국 시토회의 영광으로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마르가리타

 

  • 세례명 축일
    2월 22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Margaret

  • 신분과 직업
    통회자, 3회원

  • 활동 연도와 지역
    1247-1297년 코르토나

 

 

마르가리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마르가리타 이야기

성녀 마르가리타(Margarita)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의 라비아노(Laviano)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새어머니 밑에서 갖은 학대를 받으며 진정한 사랑을 느껴보지 못한 채 성장했다. 

외모가 뛰어나게 예뻤을 뿐만 아니라 다소 관능적이었던 그녀는 17살 때 더는 새어머니의 학대를 견디지 못해 집을 뛰쳐나와 몬테풀치아노(Montepulciano) 성(城)의 하녀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향락을 즐기는 성주의 아들과 눈이 맞아 그와 결혼을 약속하고 성밖에 거처를 마련해 살면서 아들까지 낳았다. 

하지만 성주의 아들은 10년 가까이 결혼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그녀 또한 성주의 아들과 정상적인 결혼이 불가함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는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귀족 청년을 유혹한 죄 많은 여자의 대명사처럼 여겨져 갖은 멸시를 당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개 한 마리가 다가와 그녀의 옷을 물고 잡아당겨 숲속의 한 밤나무 밑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무참히 살해된 연인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녀는 이미 부패하기 시작한 연인의 처참한 모습을 보자마자 하느님의 심판을 절실히 깨닫고 몬테풀치아노를 떠나 통회와 보속의 생활을 시작하고자 했다.

성녀 마르가리타는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고행복을 입은 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으나 새어머니에게 이내 쫓겨나고 말았다. 거의 절망 상태에 빠졌을 때, 그녀는 코르토나의 작은 형제회 성당에 들어가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고해성사를 받고 인근에 작은 집 한 칸을 얻어 고행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는 성당 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사람들에게 용서를 청했다. 또한 보다 철저한 통회를 위해 작은 형제회의 재속 3회원이 되고자 했지만, 그녀의 과거 때문에 쉽게 입회 허가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3년의 통회 생활을 거쳐 그녀의 통회가 참되다는 것을 인정받고 1277년 비로소 입회가 허락되어 철저한 보속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열성이 증가할수록 사탄의 유혹과 방해 또한 커졌다. 사탄은 그녀의 통회를 방해하며 지난날의 욕정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기도와 고행이 무가치함을 보여주어 실망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주님은 그녀를 따뜻이 안아 주시어 유혹을 이겨내고 관상의 은혜와 남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은총을 주셨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그녀를 보고 하느님의 권능을 찬미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통회 생활을 시작한 지 23년째 되던 해인 1297년 2월 22일에 50세의 나이로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작은 형제회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로도 불렸다. 그녀의 시신은 후에 그녀에게 봉헌된 코르토나의 성녀 마르가리타 성당에 안장되었는데, 신비하게도 그 유해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의 무덤을 찾는 사람들에게 치유의 기적도 많이 일어났다. 그녀는 1728년 5월 16일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마르가리타 클리테로우

 

  • 세례명 축일
    3월 25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Margaret Clitherow

  • 신분과 직업
    부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56-1586년 영국

 

 

마르가리타 클리테로우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가레트, 마가렛, 마거릿,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클리스로우.

 

 

마르가리타 클리테로우 이야기

성녀 마르가리타 클리테로우(Margarita Clitherow)는 1556년 영국 잉글랜드 요크셔(Yorkshire)의 요크에서 부유한 양초 제조업자인 토마스 미들턴(Thomas Middleton)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14살 때 존경받는 사업가이자 요크의 보안관이었던 아버지가 사망했고, 얼마 후인 1571년 그녀는 정육점을 운영하며 그 도시의 징수관으로 있는 존 클리테로우와 결혼하여 세 명의 자녀를 낳았다. 결혼하고 3년이 지난 1574년 그녀는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존 클리테로우는 영국 국교회 신자였지만 형제 중에 가톨릭 신부가 있었던 까닭에 아내의 결정을 지지하고, 아내가 교회 예배에 불참한 데 따른 벌금을 기꺼이 감당했다. 그러나 그녀는 프로테스탄트 예배에 불참했다는 이유로 2년 동안이나 투옥되었고, 요크 성의 감옥에서 셋째 아들을 낳았다.

석방된 후 그녀는 그전보다 더욱 용감하게 행동했다. 그녀는 어린이들을 위한 가톨릭 학교를 세우고 자기 집이나 혹은 빌린 집의 방을 제공해 박해 중임에도 사제가 미사를 거행할 수 있도록 했다. 그녀의 집은 잉글랜드 내에 숨어있는 가톨릭 사제들의 은밀한 피난처 중 하나였다.

성녀 마르가리타 클리테로우는 1584년부터 거의 1년 반 정도를 연금 상태로 지냈는데, 이는 그녀의 맏아들을 사제로 키우기 위해 프랑스의 두에(Douai)로 보내 교육받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1586년 3월에 다시 체포되었다.

집안에 보관 중이던 전례서와 성작 등 미사 도구가 발각되면서 가톨릭 사제들의 은신처로 사용되었음이 밝혀져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온몸을 눌러 으스러뜨리는 모진 고문을 받고 3월 25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순교하였다.

‘요크의 진주’로 불리는 성녀 마르가리타 클리테로우는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그녀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순교한 날인 3월 25일에 기념하나 영국 가톨릭교회에서는 성녀 안나 린(Anna Line)과 성녀 마르가리타 워드(Margarita Ward)와 함께 8월 30일에 경축한다. 1970년 시성식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함께 기념해 왔었다.

2000년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마르가리타

 

  • 세례명 축일
    4월 13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Margaret

  • 신분과 직업
    동정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287-1320년 치타디카스텔로

 

 

마르가리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마르가리타 이야기

1293년경 치타디카스텔로의 몇몇 부인들이 본당으로 기도하러 갔다가 부모로부터 버려진 6-7세 된 여아를 발견했는데 불행하게도 맹인이었다. 이 맹인 소녀 마르가리타(Margarita)는 이집 저집에서 보호받다가 마침내 어느 수녀원에서 자라게 되었다. 그러나 이 수녀원이 그리 성스럽지 못하여 그녀를 학대하자 어느 부부가 제공한 조그마한 집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13세 때 그녀는 도미니코회의 3회원이 되면서부터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봉헌생활을 시작하였다. 하느님께서는 그녀에게 치유의 은혜를 허락하셨다. 그래서 그녀는 많은 이들의 병을 고쳐주었으며, 부모가 일터로 가고 없는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조그마한 학교를 세우고 그들을 교육했는데, 자신이 맹인임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게 활약하였다. 마르가리타는 33세의 나이로 운명할 때까지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죽은 이후 비범한 인물로서 높은 공경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609년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승인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마르가리타 폴

 

  • 세례명 축일
    5월 28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Margaret Pole

  • 신분과 직업
    과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473-1541년

 

 

마르가리타 폴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마르가리타 폴 이야기

영국 왕 에드워드 5세와 리처드 3세의 조카인 마르가리타 플란타제넷 폴(Margarita Plantagenet Pole)은 헨리 8세에 의해 리처드 폴(Richard Pole) 경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러나 헨리 8세가 즉위했을 때에는 마르가리타는 5명의 자녀를 둔 과부였다. 5명의 자녀를 데리고 사는 그녀는 영국에서 성녀로 불릴 만큼 덕이 출중하여 헨리 8세가 솔즈베리(Salisbury)의 백작으로 그녀를 임명하는 등 많은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나 헨리 8세가 앤 볼린(Ann Boleyn)과 결혼하자 그녀는 왕가와의 모든 인연을 끊어버리고 은둔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와중에 그녀의 넷째 아들인 레지날드 폴(Reginald Pole)이 왕의 수장령에 반대하는 글을 썼다.

이 사건으로 온 집안 식구가 모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녀 역시 헨리 8세를 공격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1541년 5월 28일에 참수형을 받고 장렬하게 순교하였다. 그녀는 1886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오 마르가리타

 

  • 세례명 축일
    5월 29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吳 Margaret

  • 신분과 직업
    부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68년 한국

 

 

오 마르가리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오 마르가리타, 오마르가리타.

 

 

오 마르가리타 이야기

오(吳) 마르가리타(Margarita)의 출생지와 천주교에 입교한 사정은 알려져 있지 않고, 뒷날 박 프란치스코와 혼인하여 충청도 청주에서 살았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다. 그들 부부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안전한 곳을 찾아 아들 사 형제를 데리고 진천 절골로 이주하여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였다.

박해가 더욱 거세어지면서 1868년 9월 5일(음력 7월 19일)에 경기도의 죽산 포졸들이 절골로 들이닥쳤다. 오 마르가리타는 어린 자식을 업고 산에 숨어 있다가 가장 먼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많은 매를 맞았다. 그리고 동정을 살피려고 산에서 내려왔다가 나중에 체포된 남편과 함께 죽산으로 끌려갔다.

오 마르가리타와 박 프란치스코 부부는, 이후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켰다. 그런 다음 죽산에서 함께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8년 9월 28일(음력 8월 13일)이었다.

오 마르가리타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마르가리타

 

  • 세례명 축일
    7월 2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Margaret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4년경 안티오키아

 

 

마르가리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가렛, 마르가리따, 마리나,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마르가리타 이야기

성녀 마르가리타(Margarita)는 중세 유럽 교회에서 큰 공경을 받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지만, 그녀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중세의 대표적 성인전인 “황금 전설”(Golden Legend)에 따르면, 그녀는 안티오키아에서 살던 귀족 출신의 이교도 사제인 아이데시우스(Aedesius)의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유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유모의 영향으로 성녀 마르가리타는 자라면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해 은밀히 신앙생활을 이어갔고, 개인적으로 동정을 서원하며 일생을 하느님께 바칠 결심을 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의심을 사서 추궁을 받자 당당히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했고, 결국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녀는 곧 유모와 함께 집을 나와서 귀족 신분에도 불구하고 양을 치고 살며 오히려 자유롭고 평화로운 신앙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던 중 그 지방에 새로 부임한 지방 장관 올리브리우스(Olybrius)가 우연히 그녀를 보고는 그녀의 뛰어난 용모와 높은 지식에 반해 자기 아내를 버리고 그녀와 결혼하려고 했다. 성녀 마르가리타는 온갖 감언이설로 유혹하는 지방 장관의 요구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단호히 거절했다.

그녀가 그리스도인임을 안 지방 장관은 박해를 빌미로 협박과 회유를 했지만, 그때마다 성녀 마르가리타는 슬기롭게 답변했을 뿐만 아니라 용감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다. 결국 그리스도인이란 죄목으로 투옥된 성녀 마르가리타는 지하 감옥에 갇혀 갖은 고문을 당했다.

전설적 이야기에 따르면, 그 무렵 그녀의 성덕을 증오하던 악마가 거대한 용으로 변신해 그녀를 단숨에 집어삼켰다고 한다. 그런데 성녀 마르가리타가 항상 품에 지니고 있던 커다란 십자가가 용의 목에 걸려 삼키지 못하고 결국은 토해내고 말았다.

그녀는 두려움 없이 십자 성호를 그으며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기도를 바쳤고, 십자가로 용으로 변한 악마를 물리쳤다. 그 후로도 성녀 마르가리타는 많은 고문을 당했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몸에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이겨냈다.

그러면서 그녀의 용감한 신앙을 지켜보던 군중들은 그리스도인이 될 각오를 마음에서부터 다질 수 있었다고 한다. 결국 그녀는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지만, 그녀의 죽음은 그 지방의 수많은 사람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로마 순교록”은 성녀 마르가리타를 안티오키아에서 순교한 동정 순교자로 간략히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진주’라는 뜻을 지닌 성녀 마르가리타는 동방 교회에서 ‘위대한 순교자 성녀 마리나(Marina)’로 불리며 일찍부터 큰 공경을 받아왔다.

서방 교회에서도 그녀는 ‘14명의 구난(救難) 성인’ 중 한 명으로 또한 로마의 성녀 아녜스(Agnes, 1월 21일), 성녀 체칠리아(Caecilia, 11월 22일), 성녀 바르바라(Barbara, 12월 4일),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11월 25일) 등과 함께 대표적인 동정 순교자로서 중세 시대에 큰 공경을 받았다.

성녀 마르가리타는 성녀 잔 다르크(Jeanne d’Arc, 5월 30일)가 들은 신비한 목소리의 주인공 중 한 명이고, 순교의 순간에 아기를 낳는 여인들을 보살펴 주겠다는 약속을 해서 임산부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 성녀 마르가리타는 십자가나 망치를 이용해 용으로 변한 악마를 무찌르거나 용의 목에 사슬을 걸고 붙잡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표현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마르가리타 (맨발의)

 

  • 세례명 축일
    8월 27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Margaret the Barefooted

  • 신분과 직업
    과부

  • 활동 연도와 지역
    +1395년?

 

 

마르가리타 (맨발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마르가리타 (맨발의) 이야기

맨발의 성녀 마르가리타(Margarita the Barefooted)는 안코나(Ancona)의 산 세베리노에서 태어났는데, 집안은 매우 구차하였다. 15세 때에 결혼하였으나 남편은 그녀를 심하게 학대하였다.

그녀는 신발도 없이 돌아다녔기 때문에 주민들은 그녀에게 ‘맨발의 성녀’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과 사별할 때까지 놀라운 인내심으로 이 모든 학대를 이겨냈다.

그녀는 일생 동안 고통 중에 살았으나 기도와 고행을 잊지 않았기에, 그녀가 운명하자 주민들은 그곳의 도미니코 수도원 성당에 안장하고 성녀로 공경하는 것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마르가리타 워드

 

  • 세례명 축일
    8월 30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Margaret Ward

  • 신분과 직업
    부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88년 영국

 

 

마르가리타 워드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가레트, 마가렛, 마거릿,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와드.

 

 

마르가리타 워드 이야기

성녀 마르가리타 워드(Margarita Ward)는 1550년대에 영국 잉글랜드 체셔(Cheshire)의 콩글턴(Congleton)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런던에서 상류사회의 부인으로 살고 있었는데, 브라이드웰(Bridewell) 감옥에 갇힌 리차드 왓슨(Richard Watson) 신부가 심각한 학대를 당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그를 방문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그녀가 처음 방문할 때는 철저한 수색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느슨해지자 감옥 안으로 밧줄을 몰래 들여갔다. 그녀의 도움으로 리차드 왓슨 신부는 탈출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상처를 입고 창문에는 밧줄이 그대로 매달려 있게 되었다.

성녀 마르가리타 워드는 신부의 탈출을 도와주기로 약속한 뱃사공과 만났지만, 그는 그녀와의 약속을 거부했다. 그래서 다른 뱃사공인 복자 요한 로체(Joannes Roche)에게 사정을 털어놓자 그는 기꺼이 그녀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아일랜드 출신의 복자 요한 로체는 배를 제공하고 신부와 옷을 바꿔입었다. 리차드 왓슨 신부는 무사히 탈출에 성공했지만 복자 요한 로체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그리고 리차드 왓슨 신부의 유일한 방문자였던 성녀 마르가리타 워드 역시 체포되었다.

성녀 마르가리타 워드와 복자 요한 로체는 감옥에 갇혀 여러 날 동안 채찍질과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끝까지 사제가 도망간 은신처를 말하지 않았다. 성녀 마르가리타 워드는 재판에서 리차드 왓슨 신부의 탈출을 도와준 것을 인정하고, ‘피투성이 늑대의 손에서 무죄한 양을 구한 것에 대해 기뻐한다’고 말했다.

성녀 마르가리타 워드와 복자 요한 로체는 한 번만이라도 프로테스탄트 예배에 참석하면 용서하고 풀어준다는 요구를 거부하고, 1588년 8월 30일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날 그들 외에도 복자 에드워드 셸리(Edward Shelley), 복자 리카르두스 마틴(Richardus Martin), 복자 리카르두스 리(Richardus Leigh), 복자 리카르두스 로이드(Richardus Lloyd)도 함께 그 자리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녀 마르가리타 워드는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순교일인 8월 30일에 기념하고, 시성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마르가리타

 

  • 세례명 축일
    8월 31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Margaret

  • 신분과 직업
    동정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207-1225년? 루뱅

 

 

마르가리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마르가리타 이야기

마르가리타(Margarita)는 벨기에 중부 루뱅에서 태어났으나 친척인 오베르란 사람의 가정부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사람은 매우 훌륭하고 또 자선사업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그녀 역시 이런 활동에 적극 가담함으로써 ‘자랑스러운 마르가리타’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1225년경 오베르와 그의 아내는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재산을 팔았을 때, 어떤 손님이 왔으므로 마르가리타는 손님을 접대하기 위하여 술을 가지러 간 사이에 그 부부는 살해되고 그녀 역시 납치되었다.

강도들은 이 사건의 증인을 죽이려 하였으나, 한 사람이 자기와 결혼하면 살려준다고 하였지만 그녀는 끝까지 거절하였다. 이에 강도들은 그녀의 혀를 자르고 옆구리를 찔러서 강물에 던져버렸다.

후일 그녀의 유해가 발견되어 루뱅의 성당에 모셔졌는데,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나서 그녀의 높은 덕을 증거하였다. 그녀는 한마디로 지극히 단순하고 무죄한 영혼으로 한생을 살았다고 역사가들은 기록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 세례명 축일
    10월 16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Margaret Mary Alacoque

  • 신분과 직업
    수녀, 환시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647-1690년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메리, 알라콕.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이야기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Margarita Maria Alacoque)는 1647년 6월 22일 프랑스 샤롤레(Charolais) 지방 베로브르(Verosvre)의 로트쿠르(Lauthecourt)에서 클로드 알라코크(Claude Alacoque)와 필리베르트 라멩(Philiberte Lamyn)의 7남매 중 다섯 번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대대로 많은 토지를 소유한 귀족 가문의 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숲에서 기도하고 성체 앞에 머무는 것을 좋아했다. 4살 때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후 그녀와 그녀의 가족은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며 지냈다. 성녀 알라코크는 대모의 집인 코르슈발(Corechval) 성(城)으로 보내져 8살까지 생활하면서 상류 가정의 예의범절과 교양을 배웠다.

그 후 그녀는 클라라회에서 운영하는 샤롤레의 기숙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첫영성체를 한 성녀 알라코크는 클라라회 수녀들의 생활에 감동해 수도 생활을 더 갈망하게 되었다. 하지만 신경계통의 병을 얻어 2년 만에 학교를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5년 정도 병상에 누워 지냈는데, 자신의 병만 낫게 해준다면 일생을 성모 마리아의 딸로 자신을 봉헌하며 살겠다고 간절히 기도했다.

기적적으로 병이 나은 후 그녀는 집안의 재산을 공동소유한 친척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학대를 받았다. 1669년 견진성사를 받은 그녀는 결혼을 거부하고 평소 생각해온 수도 생활을 실천하고자 1671년 6월 20일 파레르모니알(Paray-le-Monial)의 성모 방문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1월 6일 ‘마르가리타 마리아’라는 수도명으로 수도서약을 했다. 그녀는 엄격한 금욕과 기도 생활로 모범적인 수녀였으나 유머 없는 수녀로 통했던 것 같다.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는 1673년부터 1675년 사이에 예수 성심의 환시를 4번이나 경험하였다. 이 환시에서 그리스도는 그녀에게 당신의 성심께 대한 신심을 널리 전하는 도구로 선택되었음을 알렸고, 특별히 첫 번째 금요일에 영성체할 것과 매주 목요일 밤에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고 고통에 동참하는 성시간을 통해 구속사업에 참여하라는 신심을 그녀에게 알려주셨다.

그리고 성체 축일 일주일 후 금요일을 당신의 성심을 공경하는 축일로 정하도록 요구하셨다. 그녀는 자신이 환시 중에 받은 그리스도의 교육을 따르려는 노력 중에 장상으로부터 수많은 퇴짜를 받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고 노력하여 온갖 장애를 극복해 나갔다.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발현 문제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고, 장상뿐만 아니라 동료 수녀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녀는 당시 수녀원의 고해신부였던 파레르모니알의 예수회 원장인 성 클로드 라 콜롱비에르(Claude La Colombiere, 2월 15일) 신부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그는 면담을 통해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의 환시가 올바르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1년 뒤 그는 영국으로 떠나게 되었고, 새로 부임한 원장 수녀는 신중한 자세를 취하기 위해 그녀에게 더욱 엄격하고 냉정하게 대했다.

1684년 원장으로 선출된 멀랭(Marie Christine Melin) 수녀는 덕과 재능이 출중하고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멀랭 수녀는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에 대한 수녀원 내의 반대를 종식하고 그녀를 딸처럼 돌보아 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부원장과 수련장직을 맡김으로써 수녀원 안에서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 예식이 가능하게 되었다.

1686년 초에는 수녀원에서 예수 성심 축일을 거행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고, 2년 후에는 예수 성심께 봉헌된 경당이 수녀원 뜰에 세워졌고, 곧이어 예수 성심 축일을 지내는 관습이 전 세계의 성모 방문 수녀회로 파급되기 시작하였다.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는 1690년 10월 17일 병으로 수녀원에서 선종할 때까지 예수 성심 공경의 신심을 전파하는 사도로서 활동하였다. 그녀는 1864년 9월 18일에 시복되었으며, 1920년 5월 13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와 성 요한 에우데스(Joannes Eudes, 8월 19일) 그리고 그녀의 고해신부였던 성 클로드 라 콜롱비에르는 ‘성심의 성인들’로 불린다.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은 1765년에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해 공식적으로 선포되었는데, 이는 그녀의 선종 75년 만의 일이었다.

1969년 전례 개혁에서는 예수 성심 축일을 대축일로 승격하고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지낸 후 다음 금요일에 지키도록 함으로써 성체의 신비와 예수 성심 사이 불가분의 관계를 더욱 분명히 천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마르가리타

 

  • 세례명 축일
    11월 6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Margaret

  • 신분과 직업
    과부

  • 활동 연도와 지역
    +1521년 로렌

 

 

마르가리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마르가리타 이야기

마르가리타(Margarita)는 25세 때에 알랑송의 공작인 르네와 결혼했으나, 남편은 3명의 자녀를 남기고 4년 후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후 그녀는 모베스 성으로 물러가서 영적인 일과 영지를 돌보면서 고독한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때 그녀는 바울라의 성 프란치스코의 지도를 받으며 철저한 고행과 수덕생활에서 놀라운 성과를 얻었다. 1513년 자녀들에 대한 부양 의무가 끝났을 때, 그녀는 자유롭게 되어서 가난한 이와 병자들을 돌보게 되었다.

그녀는 클라라회 규칙을 따르는 수녀원을 그곳에 세우고 공동체를 이루었는데, 자신은 1519년에 서원하였다. 그녀는 원장직을 끝까지 사양하고 평수녀로서 일생을 마쳤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마르가리타

 

  • 세례명 축일
    11월 16일

  • 호칭 구분
    성녀

  • 가톨릭 성인 이름
    Margaret

  • 신분과 직업
    왕비

  • 활동 연도와 지역
    1046-1093년 스코틀랜드

 

 

마르가리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마르가리타 이야기

성녀 마르가리타(Margarita)는 1046년 헝가리의 레스카(Reska)에서 앵글로 색슨 왕조 최후의 왕인 에드워드 애틀링(Edward Atheling)과 헝가리의 왕비 아가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헝가리의 성왕(聖王) 스테파누스(Stephanus, 8월 16일)의 조카로 어린 시절 대부분을 성 스테파누스 왕의 궁중에서 보냈다. 1066년 부왕이 세상을 떠나자 프랑스 노르망디의 윌리엄(William) 대공이 쳐들어왔고, 헤이스팅스(Hastings) 전투에서 패한 후 그녀의 가족들은 헝가리로 피난을 가려고 했으나 배가 표류하여 스코틀랜드에 도착했다.

이때 스코틀랜드의 왕 말콤 3세(Malcolm III)는 성녀 마르가리타 일행을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그녀의 인품과 선행에 반해 결혼을 청하였다. 이렇게 스코틀랜드의 왕비가 된 성녀 마르가리타는 여섯 명의 왕자와 두 명의 공주를 낳고 직접 훌륭하게 교육하였는데, 스코틀랜드의 성 다윗 1세(David I, 5월 24일)가 바로 그녀의 아들 중 하나이다.

그녀의 성덕은 더욱 널리 알려졌다. 특히 기도와 고행과 단식에서 철저하였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애정은 놀라웠다. 그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 만연하던 성직 남용과 성직매매를 금지하려는 시노드(Synod)를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교회 개혁에도 이바지하였다.

그녀는 또한 남편인 말콤 3세와 함께 스코틀랜드의 예술과 교육의 진흥을 위해 노력했고, 던펌린(Dunfermline)에 성삼위 대수도원을 세우고 이오나(Iona)를 비롯한 여러 곳의 켈트 성당들을 복구하는 일을 후원하였다. 왕비라는 높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성녀 마르가리타는 겸손을 잃지 않았고, 가족에 대한 사랑과 특별히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성녀 마르가리타는 말콤 3세 왕과 장남 에드워드(Edward)가 노섬브리아(Northumbria)와의 안윅 전투(Battle of Alnwick)에서 사망하고 3일 뒤인 1093년 11월 16일 슬픔에 잠겨 에든버러(Edinburgh)에서 선종하였다.

그녀는 1249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Innocentius IV)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 1670-76년 재위)는 오래전부터 스코틀랜드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성녀 마르가리타를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7. 마르가리타

 

  • 세례명 축일
    11월 23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Margaret

  • 신분과 직업
    과부

  • 활동 연도와 지역
    +1464년 사보이아

 

 

마르가리타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마르가리타 이야기

사보이아 공국의 아마데우스(Amadeus) 왕과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마르가리타(Margarita)는 두 자녀를 둔 홀아비인 테오도레(Theodore)란 사람과 결혼하였다.

그녀 자신에게는 자식이 없었지만 남편을 극진히 섬겼을 뿐만 아니라, 제노바(Genova)에 기근과 전염병이 극성을 부릴 때에는 자신을 온전히 잊어가면서 주민들을 간호하여 큰 명성을 얻었다.

그러던 중 1418년에 남편과 사별한 후 그녀는 성 빈첸시오 페레리우스(Vincentius Ferrerius, 4월 5일)의 도움을 받아가며 기도생활에만 몰두하면서 25년을 살았다. 또한 그녀는 주님의 환시를 보는 도중에 질병과 중상 그리고 박해의 세 글자가 적힌 화살 세 개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모두 그녀가 받을 고통을 의미했다고 한다.

결국 이것이 사실로 나타났는데, 그녀는 위선자라는 고발과 동시에 중병에 걸렸으며 또 발도파 이단이라는 누명을 썼다. 그녀는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운명하였다. 그녀는 1669년 교황 클레멘스 9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8. 마르가리타 콜론나

 

  • 세례명 축일
    12월 30일

  • 호칭 구분
    복녀

  • 가톨릭 성인 이름
    Margaret Colonna

  • 신분과 직업
    동정녀

  • 활동 연도와 지역
    +1284년

 

 

마르가리타 콜론나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마르가리타 콜론나 이야기

마르가리타 콜론나(Margarita Colonna)는 1255년경 이탈리아의 로마(Roma)에서 팔레스트리나(Palestrina)의 유명한 귀족 가문인 오도네 콜론나(Oddone Colonna)의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오빠인 조반니(Giovanni)와 자코모(Giacomo)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그리고 성장한 뒤에는 주변의 유력한 집안과 결혼하라는 권유를 물리치고 오직 하느님을 섬기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다.

처음에는 오빠인 조반니의 반대가 있었지만, 당시 작은 형제회 수사로서 나중에 추기경이 된 오빠 자코모의 도움을 받아 실행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로마 동남쪽에 있는 작은 도시이자 고향인 팔레스트리나 근처의 성 베드로 성(城)으로 가서 고독 속에 은거하며 기도와 고행을 실천하고,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데 힘쓰며 살았다.

그녀는 아시시(Assisi)의 클라라회에 입회할 뜻을 가졌지만, 병 때문에 어려워지자 팔레스트리나에 수도원을 세우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상속받은 재산과 추기경이 된 오빠의 도움을 받아 고향에 클라라회의 규칙을 따르는 수녀원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나중에 교황으로부터 설립 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마르가리타 콜론나는 건강이 더 나빠져서 이 수녀원에서 서원조차 발하지 못하였다. 7년 동안 그녀는 온갖 병으로 시달리면서도 용기와 인내심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여러 번 탈혼을 경험하고 옆구리에 그리스도의 성흔(聖痕, stigmata)을 입은 것으로 전해졌으며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란 명성을 얻게 되었다.

1280년 12월 30일에 마르가리타 콜론나가 선종한 후 그녀가 세운 수녀회는 로마의 카피테(Capite)에 있는 산 실베스트로(San Silvestro) 수도원으로 옮겨 설립자의 뜻을 이어 크게 발전하였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847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승인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2월 30일 목록에 그녀를 추가하면서 성녀 클라라의 수도 규칙을 따르고 세상의 부와 쾌락보다 그리스도를 위한 완전한 가난을 실천한 복녀 마르가리타 콜론나를 팔레스트리나 인근에서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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