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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5일 남자세례명 9가지

피어나네 2023. 7. 5.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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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5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김대건 안드레아, 누메리아노, 도미시오, 마리노, 아가토, 아타나시오 (은수자), 아타나시오 (신부), 안토니오 마리아 즈카르야, 테오도토, 총 9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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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5일 여자세례명 모드벤나 (수녀원장), 모드벤나 (동정녀), 세도파, 조아, 치릴라, 트리피나, 필로메나, 총 7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7월 5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9가지

 

 

 

 

7월 5일 남자세례명 목록

 

  1. 김대건 안드레아

  2. 누메리아노

  3. 도미시오

  4. 마리노

  5. 아가토

  6. 아타나시오 (은수자)

  7. 아타나시오 (신부)

  8. 아타나시오 (신부)

  9. 테오도토

 

7월 5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9가지

 

 

1. 김대건 안드레아

 

  • 가톨릭 성인 이름
    金大建 Andrew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821-1846년 한국

 

 

김대건 안드레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김 안드레아, 김안드레아, 안드레아스, 앙드레, 앤드루, 앤드류.

 

 

김대건 안드레아 자료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Andreas)는 1821년 8월 21일 현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의 솔뫼 마을에서 아버지 성 김제준 이냐시오(金濟俊, Ignatius)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Ursula) 사이에서 태어났다.

성 김대건의 아명(兒名)은 재복(再福)이고 보명(譜名)은 지식(芝植)이라고 하는데, 그의 집안은 열심한 교우 집안이었다. 성 김대건의 증조부인 복자 김진후 비오(金震厚, Pius)와 아버지는 순교로써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이다.

신앙 깊은 순교자 집안에서 성장한 성 김대건은 굳센 기질과 열심한 신덕으로 충실히 생활하던 중, 16세 때인 1836년에 나(羅) 베드로(모방 베드로) 신부에 의해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Thomas)와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崔方濟, Franciscus Javier)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이듬해 말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남은 두 신학생만이 훌륭히 학업과 성덕을 닦았으나 나이가 25세에 이르지 못해 사제품 받을 때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 무렵 파리 외방 전교회가 조선 교구를 담당하여 주교와 신부를 조선에 입국시켜 전교하는 중이었으나, 조선이 외국과 수호조약을 맺지 않아 종교자유가 없었기에 프랑스 루이 필립 왕이 파견한 함대의 세실 제독이 그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나섰다.

성 김대건은 세실 제독의 통역관으로 선발되어 조선에 들어갈 메스트르 이(Maistre, 李) 신부와 함께 에리곤호에 올라 1842년 2월 중순 마카오를 출항하였다. 그러나 세실 제독이 갑자기 조선 항해를 중지하게 되어 성 김대건은 혼자 육로로 본국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변문에 이르러 조선 사절단의 일원인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본국 소식을 자세히 듣게 되었는데, 1839년의 기해박해로 성직자를 비롯하여 아버지와 많은 신자가 순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국을 서둘렀다. 성 김대건은 그해 12월 29일 혼자서 의주 변문을 거쳐 입국했으나 하였으나 중도에 신분이 발각될 위험이 생겨 다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성 김대건은 백가점(白家店)과 소팔가자(小八家子)에 머물며 메스트르 신부로부터 신학을 배우고,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고(Ferreol, 高)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다시 입국을 시도하여 페레올 주교와 함께 변문으로 와서 조선교회의 밀사들과 만났다.

그러나 아직 선교사의 입국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성 김대건 부제 혼자만 국경을 넘어 이듬해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1845년 4월 말에 주교와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라파엘호로 명명한 작은 배를 타고 제물포를 떠나 상해로 출항했다.

어렵게 상해에 도착한 성 김대건은 그해 8월 17일 상해 부근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 집전으로 사제품을 받아 조선교회의 첫 사제가 되었다. 이어 8월 24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횡당(橫堂) 신학교 성당에서 성 안(安) 안토니오(다블뤼 안토니오) 신부의 보좌를 받으며 첫 미사를 집전하였다.

1845년 8월 31일 성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성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를 모시고 라파엘호라는 작은 목선을 타고 상해에서 출발했다. 도중에 제주도에 표착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1845년 10월 12일에 강경(江景) 부근 황산포(黃山浦) 나바위에 무사히 상륙하였다.

성 김대건 신부는 서울로 올라와 서울과 그 인근의 교우들을 방문하고 성사를 집전하며 선교 활동에 힘쓰는 한편 만주에서 기다리고 있는 메스트르 신부를 입국시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의주 방면의 경비가 엄해서 페레올 주교는 그에게 바닷길을 알아보라고 지시했고, 성 김대건 신부는 선교사 영입을 위한 안전한 통로를 개척하기 위해 백령도 부근으로 갔다가 순위도(巡威島)에서 1846년 6월 5일 밤 체포되었다.

체포된 성 김대건 신부가 황해 감사 김정집의 심문에서 자신이 조선에서 출생하여 마카오에서 공부했음을 토로하자 황해도 감사는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이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하여 중신 회의를 열고 그를 서울포도청으로 압송하도록 명했다.

일부 대신들은 성 김대건 신부의 박학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에 탄복해 그를 배교시켜 나라의 일꾼으로 쓰고자 했다. 그래서 배교를 강요했으나 성 김대건 신부가 도리어 관리들을 교화시키려고 하자 ‘사학의 괴수’라는 죄목을 붙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결국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인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성 김대건 신부의 나이는 26세였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는 순교 후 한강 변 모래사장에 가매장되었다. 40일 뒤 용감한 신자 이민식 빈첸시오가 순교를 각오하고 몰래 유해를 수습해 자신의 고향인 미리내(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141)에 모셨다. 그 후 1901년 5월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Mutel) 주교의 지시로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성당 제대 밑에 안치되었다가 1951년 그의 두개골을 포함한 유해 대부분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성당으로 옮겨 모셨다.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는 미리내 성지를 비롯해 전국 여러 곳으로 분배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교회 전통에 따르면 순교자들의 축일은 일반적으로 그가 순교한 날로 정한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순교했으나 한국 교회에서는 1984년에 시성된 103위 한국 순교 성인을 전례적으로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기념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9월 16일 목록에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에 대해 기록하면서 9월 20일 전례 안에서 기념한다고 언급하였다. 한편 한국 교회에서는 오래전부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축일을 7월 5일에 별도로 기념해왔다.

7월 5일은 1925년 교황 비오 11세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포함한 한국 순교자 79위를 복자품에 올린 날이다. 한국 교회는 전례력 안에서 그날을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안드레아 김대건 사제 순교자 대축일”로 경축해왔다.

그런데 2018년 전례력부터 동일 성인에 대한 대축일 중복을 피하고자 7월 5일 대축일을 폐지하고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변경하였다. 따라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경우 9월 20일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기념해온 7월 5일에도 그 축일을 기념할 수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누메리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Numer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666년 트리어

 

 

누메리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누머리안, 누메리아누스, 누메리안, 메모리아노, 메모리아누스.

 

 

누메리아노 자료

부유한 원로원 의원의 아들로 태어난 성 누메리아누스(Numerianus, 또는 누메리아노)는 독일의 트리어에서 성 아르눌푸스(Arnulphus, 7월 18일) 지도아래 수도승이 되었다.

후에 그는 뤽세이유(Luxeuil)로 옮겨서 성 발데베르투스(Waldebertus, 5월 2일)의 지도를 받았다. 그의 성덕은 점점 성장했고 마침내 트리어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메모리아누스(Memorian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도미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Domit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62년 프리지아

 

 

도미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도미시우스, 도미씨오, 도미씨우스, 도미티오, 도미티우스.

 

 

도미시오 자료

페르시아(Persia) 또는 프리지아(고대 소아시아 중서부 지역) 출신인 성 도미티우스(또는 도미시오)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의 니시비스(Nisibis)에서 은수자로서 살았다. 그는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에게 대항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마리노

 

  • 가톨릭 성인 이름
    Mar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마리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리누스.

 

 

마리노 자료

성 마리누스(또는 마리노)와 성 테도도투스(Theodotus) 그리고 성녀 세도파(Sedopha)는 흑해 연안의 토미(Tomi)에서 순교하였다. 성녀 세도파는 세돌파(Sedolpha)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아가토

 

  • 가톨릭 성인 이름
    Agatho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06년

 

 

아가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가또.

 

 

아가토 자료

시칠리아(Sicilia) 섬 출신 순교자인 성 아가토와 성녀 트리피나(Triphina)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려진 것이 없다. 게다가 성녀 트리피나의 성별에 대해서도 불확실하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아타나시오 (은수자)

 

  • 가톨릭 성인 이름
    Athanas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은수자,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920-1000/1003년? 아토스산

 

 

아타나시오 (은수자)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따나시오, 아따나시우스, 아타나시우스.

 

 

아타나시오 (은수자) 자료

성 아타나시우스(또는 아타나시오)는 920년 흑해의 남동부 해안 지역에 있는 트라브존(Trabzon)에서 태어나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콘스탄티노플에서 수학하였다. 

세례명은 아브라함이었고, 키미나스(Kiminas) 산에서 니케포루스 2세 황제의 삼촌인 말레이노스(Michael Maleinos) 수도원 원장 문하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한편 니케포루스 2세는 장군 시절에 아브라함을 자신의 영적 지도자로 삼았었다. 그 후 아타나시우스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가 머물던 키미나스 산의 수도원은 소위 라브라(Lavra)로 불리는데, 이 말은 은수자들이 성당을 중심으로 개별적인 삶을 사는 은수자들의 집단을 뜻한다. 그는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자 이를 피하여 은수자로 살기 위해서 그리스의 아토스 산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리스 동남쪽 크레타(Creta) 섬에서 사라센과 전쟁이 벌어지자 니케포루스 장군과 동행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이 일을 성공리에 마친 아타나시우스는 아토스 산으로 다시 돌아가서, 황제가 된 니케포루스 2세의 재정적인 도움으로 936년 아토스 산에 대수도원(Great Lavra)를 세웠다.

그는 체계화된 공동체 삶의 형태로 은둔적인 수도생활을 새롭게 확립하였다. 그러나 느슨한 체제의 수도원들에 거주하던 많은 아토스 산의 수도자들은 이러한 개혁에 반대하였다.

이러한 반대는 969년 황제가 죽은 뒤 더욱 적극적으로 나타났고, 더욱이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하던 새 황제 요한 1세마저도 키프로스(Cyprus)로 떠나버렸다. 공주 생활 수도원이라는 개혁에 반대하는 이들이 콘스탄티노플로 황제를 찾아가 아타나시우스를 고발하자, 황제는 수도자 에우티미우스를 파견하여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아타나시우스의 개혁이 공적으로 인정되어 재정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수도 규칙과 수도 생활 방법 또한 공적으로 인정받았다. 이에 용기를 얻어 아토스 산으로 돌아온 아타나시우스는 자신이 만든 58개 공동체의 원장이 되었다.

수천 명의 수도자들이 오늘날에도 그곳에서 생활하고 기도한다. 물론 지금은 동방 정교회 수도원의 중심으로 로마와의 교류가 없다. 공주 생활 수도원의 창설자인 성 아타나시우스와 그의 다섯 동료 은수자들은 수도원의 건물이 붕괴되면서 사망했다고도 하고 살해당했다고도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아타나시오 (신부)

 

  • 가톨릭 성인 이름
    Athanas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부제,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62년 예루살렘

 

 

아타나시오 (신부)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따나시오, 아따나시우스, 아타나시우스.

 

 

아타나시오 (신부) 자료

성 아타나시우스(또는 아타나시오) 부제는 예루살렘 교구의 가톨릭 주교인 성 유베날리스(Juvenalis)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오른 이단자 테오도시우스(Theodosius)를 공공연히 비난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그는 군인들에 의해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안토니오 마리아 즈카르야

 

  • 가톨릭 성인 이름
    Anthony Mary Zaccaria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설립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502-1539년

 

 

안토니오 마리아 즈카르야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자카리아, 자카리아스, 자카리야, 재커리, 즈가리아, 즈가리야.

 

 

안토니오 마리아 즈카르야 자료

성 안토니우스 마리아 자카리아(Antonius Maria Zacharias, 또는 안토니오 마리아 즈카르야)1502년 말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 크레모나(Cremona)의 귀족 가문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 안토니에타(Antonietta Pescarolli)에게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일찍이 정결을 지키겠다는 서약과 함께 자신에게 남겨진 유산을 포기할 정도로 어려서부터 신앙심이 깊고 청빈을 사랑했다. 1522년 파도바(Padova)의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의사로 활동하던 중 자신의 소명이 영혼의 병자를 치료하는 데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신학을 배운 뒤 1528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1530년 밀라노(Milano) 과스탈라(Guastalla)의 토렐리(Torelli) 백작 부인의 지도 신부가 된 그는 ‘영원한 지혜의 형제회’에 합류하였고, 그곳에서 밀라노 귀족 출신인 페라리(Bartolomeo Ferrari)와 모리쟈(Jacomo Antonio Morigia)를 만나 그들과 함께 성 바오로(Paulus)를 주보성인으로 하는 성직 수도회를 설립했다.

이것이 ‘바르나바회’(Barnabitarum)라고도 불리는 ‘성 바오로 성직 수도회’이다. 이 수도회의 목적은 성직자와 평신도를 쇄신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여자 수도회인 ‘성 바오로의 천사 수녀회’도 설립하였다.

한창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는 1539년 과스탈라에서 병에 걸려 크레모나에 있는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갔다가 그 해 7월 5일 29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1849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1897년 5월 27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안토니우스 마리아 즈카르야 성인은 이탈리아의 아버지요 수호성인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테오도토

 

  • 가톨릭 성인 이름
    Theodot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테오도토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데오도또, 데오도뚜스, 테오도또, 테오도뚜스, 테오도투스.

 

 

테오도토 자료

성 마리누스(Marinus)와 성 테도도투스(또는 테오도토) 그리고 성녀 세도파(Sedopha)는 흑해 연안의 토미(Tomi)에서 순교하였다. 성녀 세도파는 세돌파(Sedolpha)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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