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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8일 남자세례명 16가지

피어나네 2023. 8. 23.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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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8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네메시오, 루필로, 마테르노, 브루노, 스탁테오, 시몬, 아르눌포, 에밀리아노, 에우제니오, 유스티노, 율리아노, 크레센스, 팜보, 프레데리코, 프리미시보, 필라스트리오, 총 16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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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8일 여자세례명 군데니스, 마리나, 심포로사, 에드부르가, 테오도시아, 총 5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7월 18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6가지

 

 

 

 

7월 18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네메시오

  2. 루필로

  3. 마테르노

  4. 브루노

  5. 스탁테오

  6. 시몬

  7. 아르눌포

  8. 에밀리아노

  9. 에우제니오

  10. 유스티노

  11. 율리아노

  12. 크레센스

  13. 팜보

  14. 프레데리코

  15. 프리미시보

  16. 필라스트리오

 

7월 18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6가지

 

 

1. 네메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Nemes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38년경

 

 

네메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네메시우스, 네메씨오, 네메씨우스.

 

 

네메시오 자료

오래된 순교 행전에 따르면, 성녀 심포로사(Symphorosa)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순교한 로마의 호민관 성 게툴리우스(Getulius, 6월 10일)의 아내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당시 로마 근교 티볼리(Tivoli)에서 일곱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황제는 티볼리에 호화스러운 새 궁전을 짓고 그 궁전의 운명이 성녀 심포로사 가족이 바치는 희생 제사에 좌우된다는 신탁을 듣고 깜짝 놀랐다. 황제는 성녀 심포로사 가족을 신전으로 유인하려다 성공하지 못하자 성녀 심포로사를 헤르쿨레스(Hercules) 신전으로 끌고 오라고 명령했다.

성녀 심포로사는 남편과 같이 순교할 결심을 하고 황제의 요구를 용감하게 거절했다. 황제는 그녀에게 갖가지 고문을 자행한 다음 목에 무거운 돌을 매달아 아니에네(Aniene)강에 던져 버렸다. 티볼리 의회 의원이던 그녀의 오빠가 시신을 수습해 도시 외곽에 묻어주었다.

다음날 황제는 신들에게 희생 제사를 바치기 위해 성녀 심포로사의 일곱 아들을 불러들였다. 그들의 이름은 성 크레스켄스(Crescens), 성 율리아누스(Julianus), 성 네메시우스(또는 네메시오), 성 프리미티부스(Primitivus), 성 유스티누스(Justinus), 성 스탁테우스(Stacteus) 그리고 성 에우게니우스(Eugenius)이다. 

일곱 아들 역시 부모처럼 이교 신상에 희생 제사 바치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황제는 그들 모두를 헤르쿨레스 신전 공사를 위해 세워둔 7개의 말뚝에 묶은 뒤 각기 다른 방법으로 고문한 후 처형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시신을 궁전에 있는 깊은 도랑에 던져버렸다. 그 후 1년 반 정도 박해가 잠잠해지자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시신을 로마 인근 티부르티나 가도(Via Tiburtina)로 이장하였다.

옛 순교 행전이 전하는 성녀 심포로사와 일곱 아들의 순교 이야기에 대한 신빙성을 식별하기는 어렵다. 자료에 따라 일곱 아들의 이름이 서로 다르게 전해지기도 한다. 1970년 이후 간행된 “로마 순교록”은 7월 18일 목록에서 성녀 심포로사와 옛 순교 행전에 나오는 일곱 명의 아들 순교자의 이름과 유해 발견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유해는 752년 교황 스테파누스 2세(Stephanus II)에 의해 로마의 어시장(Pescheria)과 가까운 성 안젤로(Angelo) 성당 제단에 안치됐다고 한다. 그리고 17세기에 보시오(Bosio)가 로마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진 티부르티나 가도에서 대성당 유적을 발견했는데, 이 대성당이 성녀 심포로사와 그녀의 일곱 아들의 무덤 위에 건립되었음을 확인했다.

1610년에 발견된 석관에는 “여기에 스테파누스 2세 교황에 의해 이장된 순교자 성녀 심포로사와 그녀의 남편 성 게툴리우스와 그의 아들들의 유해가 있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들은 모두 티볼리 교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성녀 심포로사는 이탈리아어로는 신포로사(Sinforosa)라고 부른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루필로

 

  • 가톨릭 성인 이름
    Rufill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382년 포를림포폴리

 

 

루필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루필루스.

 

 

루필로 자료

성 루필루스(또는 루필로)는 이탈리아 에밀리아(Emilia) 지방 포를림포폴리의 유명한 초대 주교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마테르노

 

  • 가톨릭 성인 이름
    Mater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307년 밀라노

 

 

마테르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마떼르노, 마떼르누스, 마테르누스.

 

 

마테르노 자료

성 마테르누스(또는 마테르노)는 295년에 백성들의 갈채와 찬성에 의해 주교가 되었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동안에 큰 고통을 받았으나 살아남아서 후에 평화로이 선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브루노

 

  • 가톨릭 성인 이름
    Bruno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1049-1123년 세니

 

 

브루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없음.

 

 

브루노 자료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 지방의 귀족 가문 태생으로 솔레로에서 출생한 성 브루노는 볼로냐(Bologna)에서 수학하였고, 로마 회의에서 베렌가리오를 상대로 하여 성체성사에 관한 교회의 교리를 옹호하였다.

그는 1080년에 세니의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또한 뛰어난 성서학자이던 그는 성직매매와 평신도 서임권을 반박하고,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와 더불어 교회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헨리쿠스 4세(Henricus IV) 황제의 추종자인 아이눌프 백작의 적의를 분쇄하였다.

1095년 그는 자신의 주교좌를 사임하고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의 수도자가 되었으나, 세니 교구민들의 반대로 어쩔 수 없이 그의 사임을 철회하였으나 몬테카시노에서 그대로 생활하였다. 1183년에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스탁테오

 

  • 가톨릭 성인 이름
    Stacte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38년경

 

 

스탁테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스탁테우스.

 

 

스탁테오 자료

오래된 순교 행전에 따르면, 성녀 심포로사(Symphorosa)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순교한 로마의 호민관 성 게툴리우스(Getulius, 6월 10일)의 아내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당시 로마 근교 티볼리(Tivoli)에서 일곱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황제는 티볼리에 호화스러운 새 궁전을 짓고 그 궁전의 운명이 성녀 심포로사 가족이 바치는 희생 제사에 좌우된다는 신탁을 듣고 깜짝 놀랐다. 황제는 성녀 심포로사 가족을 신전으로 유인하려다 성공하지 못하자 성녀 심포로사를 헤르쿨레스(Hercules) 신전으로 끌고 오라고 명령했다. 

성녀 심포로사는 남편과 같이 순교할 결심을 하고 황제의 요구를 용감하게 거절했다. 황제는 그녀에게 갖가지 고문을 자행한 다음 목에 무거운 돌을 매달아 아니에네(Aniene)강에 던져 버렸다. 티볼리 의회 의원이던 그녀의 오빠가 시신을 수습해 도시 외곽에 묻어주었다.

다음날 황제는 신들에게 희생 제사를 바치기 위해 성녀 심포로사의 일곱 아들을 불러들였다. 그들의 이름은 성 크레스켄스(Crescens), 성 율리아누스(Julianus), 성 네메시우스(Nemesius), 성 프리미티부스(Primitivus), 성 유스티누스(Justinus), 성 스탁테우스(또는 스탁테오) 그리고 성 에우게니우스(Eugenius)이다. 

일곱 아들 역시 부모처럼 이교 신상에 희생 제사 바치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황제는 그들 모두를 헤르쿨레스 신전 공사를 위해 세워둔 7개의 말뚝에 묶은 뒤 각기 다른 방법으로 고문한 후 처형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시신을 궁전에 있는 깊은 도랑에 던져버렸다. 그 후 1년 반 정도 박해가 잠잠해지자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시신을 로마 인근 티부르티나 가도(Via Tiburtina)로 이장하였다.

옛 순교 행전이 전하는 성녀 심포로사와 일곱 아들의 순교 이야기에 대한 신빙성을 식별하기는 어렵다. 자료에 따라 일곱 아들의 이름이 서로 다르게 전해지기도 한다. 1970년 이후 간행된 “로마 순교록”은 7월 18일 목록에서 성녀 심포로사와 옛 순교 행전에 나오는 일곱 명의 아들 순교자의 이름과 유해 발견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유해는 752년 교황 스테파누스 2세(Stephanus II)에 의해 로마의 어시장(Pescheria)과 가까운 성 안젤로(Angelo) 성당 제단에 안치됐다고 한다. 그리고 17세기에 보시오(Bosio)가 로마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진 티부르티나 가도에서 대성당 유적을 발견했는데, 이 대성당이 성녀 심포로사와 그녀의 일곱 아들의 무덤 위에 건립되었음을 확인했다.

1610년에 발견된 석관에는 “여기에 스테파누스 2세 교황에 의해 이장된 순교자 성녀 심포로사와 그녀의 남편 성 게툴리우스와 그의 아들들의 유해가 있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들은 모두 티볼리 교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성녀 심포로사는 이탈리아어로는 신포로사(Sinforosa)라고 부른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시몬

 

  • 가톨릭 성인 이름
    Simo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설교가

  • 활동 연도와 지역
    1435/1440-1482년 리프니카

 

 

시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사이먼.

 

 

시몬 자료

성 시몬은 1435-1440년 사이에 폴란드 남부의 리프니카 무로바나(Lipnica Murowana)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인 그레고리우스(Gregorius)와 안나(Anna)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치를 반영한 좋은 교육을 어떻게 그에게 해줄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성 시몬을 안전하게 돌보고 적절한 교양을 쌓을 수 있도록 교육했다. 그는 부모의 뜻대로 신앙심 깊고 책임감 있는 본성을 갖고 성장했고, 타고난 성품의 풍요로움은 기도 생활과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대한 사랑으로 기울도록 했다.

그는 1454년 유명한 야기엘론스키(Jagiellonski) 대학교에 다니기 위해 고향에서 멀지 않은 크라쿠프(Krakow)로 갔다. 바로 그 해에 카페스트라노(Capestrano)의 성 요한(Joannes, 10월 23일)이 크라쿠프에 와서 성덕과 열정적인 설교로 시민들을 감동시켰고, 젊은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많은 이들을 작은 형제회의 성소자로 불러들였다. 

1453년 9월 8일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은 3년 전에 시성된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누스(Bernardinus, 5월 20일)의 이름을 따서 크라쿠프에 첫 번째 엄률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수도원에 사는 작은 형제회 수사들을 ‘베르나르디니’(Bernardini)라고 불렀다.

1457년 젊은 청년 시몬은 작은 형제회의 이상에 매혹되어 복음서에서 언급된 가장 값진 진주를 얻기 위해 성공과 부유한 미래의 가능성을 뒤로하고 수도 생활을 선택하였다. 그는 다른 10명의 동료 학생들과 함께 크라쿠프의 스트라돔(Stradom) 구역에 있는 성 베르나르디누스 수도원에 입회를 청했다. 

가르침과 성덕에 있어서 높은 명성을 지닌 바레세(Varese)의 크리스토포루스(Christophorus) 수련장 수사의 현명한 지도하에 성 시몬은 작은 형제회의 겸손하고 가난한 삶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1460년경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작은 형제회 수사신부가 된 성 시몬은 폴란드 남동부 타르누프(Tarnow)의 작은 형제회 수도원에서 첫 번째 사도직을 수행하였다. 그 후 그는 크라쿠프의 스트라돔 구역에서 명백한 말씀으로 설교하고 충만한 열정과 신앙과 지혜를 가지고 끊임없이 자신을 헌신하여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성경에 대한 오랜 연구를 통해 가능했다. 그는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누스와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과 같이 ‘예수 성명’(Holy Name) 신심을 전파하는 데 주력하여 수없이 많은 죄인들의 회개를 이끌었다. 

그는 1463년에 작은 형제회에서는 처음으로 크라쿠프의 바벨(Wawel) 주교좌성당에서 설교할 수 있는 직분을 받았다. 복음을 설교하는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인해 옛 자료들은 그에게 ‘가장 열렬한 설교자’(praedicator ferventissimus)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성 시몬은 자신의 설교에 영감을 주었던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누스를 존경하는 열망으로 몇몇 폴란드 동료들과 함께 1472년 5월 17일 성인의 이름으로 설립된 새 성당에 성인의 유해를 장엄하게 이장하는 행렬에 참가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아퀼라(Aquila)를 방문했다. 

그리고 1478년에 파비아(Pavia)에서 열린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이탈리아를 찾았다. 회의를 마친 다음 그는 로마로 가서 사도들의 무덤을 방문함으로써 자신의 가장 깊은 열망을 만족시켰고, 이어서 예루살렘 성지로 자신의 순례 계획을 연장하였다. 

성 시몬은 만약 하느님께서 기뻐하신다면 영혼 구원을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고 싶다는 열망을 간직한 채 참회의 정신과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진정한 사랑으로 예루살렘 순례에 나섰다. 그는 성지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를 본받고자 했다.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성 시몬의 사랑은 그의 생애 마지막 해에 크라쿠프에 유행성 전염병이 발발했을 때 비범한 방법으로 분명히 드러났다. 크라쿠프는 1482년 7월부터 1483년 1월 6일까지 유행성 전염병의 대재난에 직면했었다. 성 베르나르디누스 수도원의 작은 형제회 수사들은 진정한 위로의 천사로서 병자들을 돌보기 위해 쉼 없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성 시몬은 애덕을 실천하고 봉헌된 삶을 완성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느 곳이든 찾아가서 병자들을 위로하고 성사를 집전하며 죽어가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위로를 전해주었다. 그러다가 그 역시 전염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는 놀라운 인내로써 질병의 고통을 견뎌냈고, 임종이 가까워지자 모든 이들이 자신을 밟고 지나갈 수 있도록 성당 문지방 아래 묻어달라는 소망을 표현하였다. 1482년 7월 18일, 전염병에 감염된 지 6일째 되던 날 그는 죽음의 두려움도 없이 자신의 눈을 십자고상에 고정한 채 하느님께 자신의 영혼을 돌려드렸다.

성 시몬에 대한 공적인 공경은 1685년 2월 24일 교황 복자 인노켄티우스 11세(Innocentius XI)에 의해 승인되었고, 공식적인 시성 절차는 1948년 6월 25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 때 시작되었다.

그의 영웅적인 덕행과 전구를 통해 1943년 크라쿠프에서 일어났던 기적적인 치유가 사실로 드러나자 2005년 12월 19일과 2006년 12월 16일에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는 이를 공식적으로 확인하였다. 그리고 2007년 6월 3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다른 세 명의 복자들과 함께 시성식을 갖고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아르눌포

 

  • 가톨릭 성인 이름
    Arnulf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582-641년 메스

 

 

아르눌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르눌뽀, 아르눌뿌스, 아르눌푸스, 아르눌프.

 

 

아르눌포 자료

귀족 가문 출신인 성 아르눌푸스(Arnulphus, 또는 아르눌포)는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의 국왕 테오도베르토 2세의 왕실 위원이자 용감한 전사이며 덕망 높은 고문관이었다.

그는 귀족 출신인 도다와 결혼하였으나, 도다가 수녀가 되자 그 역시 레랭(Lerins) 수도원으로 은퇴하려고 했으나 610년 메스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국사를 매우 훌륭히 처리한 인물로 추앙받다가 626년경에 주교직을 사임하고 은둔소로 떠나 그곳에서 운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에밀리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Emilia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62년 불가리아

 

 

에밀리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이밀리아노, 아이밀리아누스, 애밀리아노, 애밀리아누스, 에밀리아누스.

 

 

에밀리아노 자료

성 에밀리아누스(Aemilianus, 또는 에밀리아노)는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 때에 불가리아의 실리스트리아(Silistria)에서 순교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에우제니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ugen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38년경

 

 

에우제니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우게니오, 에우게니우스, 에우제니우스, 유진.

 

 

에우제니오 자료

오래된 순교 행전에 따르면, 성녀 심포로사(Symphorosa)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순교한 로마의 호민관 성 게툴리우스(Getulius, 6월 10일)의 아내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당시 로마 근교 티볼리(Tivoli)에서 일곱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황제는 티볼리에 호화스러운 새 궁전을 짓고 그 궁전의 운명이 성녀 심포로사 가족이 바치는 희생 제사에 좌우된다는 신탁을 듣고 깜짝 놀랐다. 황제는 성녀 심포로사 가족을 신전으로 유인하려다 성공하지 못하자 성녀 심포로사를 헤르쿨레스(Hercules) 신전으로 끌고 오라고 명령했다. 

성녀 심포로사는 남편과 같이 순교할 결심을 하고 황제의 요구를 용감하게 거절했다. 황제는 그녀에게 갖가지 고문을 자행한 다음 목에 무거운 돌을 매달아 아니에네(Aniene)강에 던져 버렸다. 티볼리 의회 의원이던 그녀의 오빠가 시신을 수습해 도시 외곽에 묻어주었다.

다음날 황제는 신들에게 희생 제사를 바치기 위해 성녀 심포로사의 일곱 아들을 불러들였다. 그들의 이름은 성 크레스켄스(Crescens), 성 율리아누스(Julianus), 성 네메시우스(Nemesius), 성 프리미티부스(Primitivus), 성 유스티누스(Justinus), 성 스탁테우스(Stacteus) 그리고 성 에우게니우스(Eugenius, 또는 에우제니오)이다. 일곱 아들 역시 부모처럼 이교 신상에 희생 제사 바치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황제는 그들 모두를 헤르쿨레스 신전 공사를 위해 세워둔 7개의 말뚝에 묶은 뒤 각기 다른 방법으로 고문한 후 처형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시신을 궁전에 있는 깊은 도랑에 던져버렸다. 그 후 1년 반 정도 박해가 잠잠해지자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시신을 로마 인근 티부르티나 가도(Via Tiburtina)로 이장하였다.

옛 순교 행전이 전하는 성녀 심포로사와 일곱 아들의 순교 이야기에 대한 신빙성을 식별하기는 어렵다. 자료에 따라 일곱 아들의 이름이 서로 다르게 전해지기도 한다. 1970년 이후 간행된 “로마 순교록”은 7월 18일 목록에서 성녀 심포로사와 옛 순교 행전에 나오는 일곱 명의 아들 순교자의 이름과 유해 발견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유해는 752년 교황 스테파누스 2세(Stephanus II)에 의해 로마의 어시장(Pescheria)과 가까운 성 안젤로(Angelo) 성당 제단에 안치됐다고 한다. 그리고 17세기에 보시오(Bosio)가 로마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진 티부르티나 가도에서 대성당 유적을 발견했는데, 이 대성당이 성녀 심포로사와 그녀의 일곱 아들의 무덤 위에 건립되었음을 확인했다.

1610년에 발견된 석관에는 “여기에 스테파누스 2세 교황에 의해 이장된 순교자 성녀 심포로사와 그녀의 남편 성 게툴리우스와 그의 아들들의 유해가 있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들은 모두 티볼리 교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성녀 심포로사는 이탈리아어로는 신포로사(Sinforosa)라고 부른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유스티노

 

  • 가톨릭 성인 이름
    Justi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38년경

 

 

유스티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유스띠노, 유스띠누스, 유스티누스, 저스틴.

 

 

유스티노 자료

오래된 순교 행전에 따르면, 성녀 심포로사(Symphorosa)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순교한 로마의 호민관 성 게툴리우스(Getulius, 6월 10일)의 아내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당시 로마 근교 티볼리(Tivoli)에서 일곱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황제는 티볼리에 호화스러운 새 궁전을 짓고 그 궁전의 운명이 성녀 심포로사 가족이 바치는 희생 제사에 좌우된다는 신탁을 듣고 깜짝 놀랐다. 황제는 성녀 심포로사 가족을 신전으로 유인하려다 성공하지 못하자 성녀 심포로사를 헤르쿨레스(Hercules) 신전으로 끌고 오라고 명령했다. 

성녀 심포로사는 남편과 같이 순교할 결심을 하고 황제의 요구를 용감하게 거절했다. 황제는 그녀에게 갖가지 고문을 자행한 다음 목에 무거운 돌을 매달아 아니에네(Aniene)강에 던져 버렸다. 티볼리 의회 의원이던 그녀의 오빠가 시신을 수습해 도시 외곽에 묻어주었다.

다음날 황제는 신들에게 희생 제사를 바치기 위해 성녀 심포로사의 일곱 아들을 불러들였다. 그들의 이름은 성 크레스켄스(Crescens), 성 율리아누스(Julianus), 성 네메시우스(Nemesius), 성 프리미티부스(Primitivus), 성 유스티누스(Justinus, 또는 유스티노), 성 스탁테우스(Stacteus) 그리고 성 에우게니우스(Eugenius)이다.

일곱 아들 역시 부모처럼 이교 신상에 희생 제사 바치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황제는 그들 모두를 헤르쿨레스 신전 공사를 위해 세워둔 7개의 말뚝에 묶은 뒤 각기 다른 방법으로 고문한 후 처형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시신을 궁전에 있는 깊은 도랑에 던져버렸다. 그 후 1년 반 정도 박해가 잠잠해지자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시신을 로마 인근 티부르티나 가도(Via Tiburtina)로 이장하였다.

옛 순교 행전이 전하는 성녀 심포로사와 일곱 아들의 순교 이야기에 대한 신빙성을 식별하기는 어렵다. 자료에 따라 일곱 아들의 이름이 서로 다르게 전해지기도 한다.

1970년 이후 간행된 “로마 순교록”은 7월 18일 목록에서 성녀 심포로사와 옛 순교 행전에 나오는 일곱 명의 아들 순교자의 이름과 유해 발견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유해는 752년 교황 스테파누스 2세(Stephanus II)에 의해 로마의 어시장(Pescheria)과 가까운 성 안젤로(Angelo) 성당 제단에 안치됐다고 한다.

그리고 17세기에 보시오(Bosio)가 로마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진 티부르티나 가도에서 대성당 유적을 발견했는데, 이 대성당이 성녀 심포로사와 그녀의 일곱 아들의 무덤 위에 건립되었음을 확인했다.

1610년에 발견된 석관에는 “여기에 스테파누스 2세 교황에 의해 이장된 순교자 성녀 심포로사와 그녀의 남편 성 게툴리우스와 그의 아들들의 유해가 있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들은 모두 티볼리 교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성녀 심포로사는 이탈리아어로는 신포로사(Sinforosa)라고 부른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율리아노

 

  • 가톨릭 성인 이름
    Justi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38년경

 

 

율리아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율리아누스, 줄리안, 줄리언.

 

 

율리아노 자료

오래된 순교 행전에 따르면, 성녀 심포로사(Symphorosa)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순교한 로마의 호민관 성 게툴리우스(Getulius, 6월 10일)의 아내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당시 로마 근교 티볼리(Tivoli)에서 일곱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황제는 티볼리에 호화스러운 새 궁전을 짓고 그 궁전의 운명이 성녀 심포로사 가족이 바치는 희생 제사에 좌우된다는 신탁을 듣고 깜짝 놀랐다. 황제는 성녀 심포로사 가족을 신전으로 유인하려다 성공하지 못하자 성녀 심포로사를 헤르쿨레스(Hercules) 신전으로 끌고 오라고 명령했다.

성녀 심포로사는 남편과 같이 순교할 결심을 하고 황제의 요구를 용감하게 거절했다. 황제는 그녀에게 갖가지 고문을 자행한 다음 목에 무거운 돌을 매달아 아니에네(Aniene)강에 던져 버렸다. 티볼리 의회 의원이던 그녀의 오빠가 시신을 수습해 도시 외곽에 묻어주었다.

다음날 황제는 신들에게 희생 제사를 바치기 위해 성녀 심포로사의 일곱 아들을 불러들였다. 그들의 이름은 성 크레스켄스(Crescens), 성 율리아누스(Julianus, 또는 율리아노), 성 네메시우스(Nemesius), 성 프리미티부스(Primitivus), 성 유스티누스(Justinus), 성 스탁테우스(Stacteus) 그리고 성 에우게니우스(Eugenius)이다. 

일곱 아들 역시 부모처럼 이교 신상에 희생 제사 바치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황제는 그들 모두를 헤르쿨레스 신전 공사를 위해 세워둔 7개의 말뚝에 묶은 뒤 각기 다른 방법으로 고문한 후 처형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시신을 궁전에 있는 깊은 도랑에 던져버렸다. 그 후 1년 반 정도 박해가 잠잠해지자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시신을 로마 인근 티부르티나 가도(Via Tiburtina)로 이장하였다.

옛 순교 행전이 전하는 성녀 심포로사와 일곱 아들의 순교 이야기에 대한 신빙성을 식별하기는 어렵다. 자료에 따라 일곱 아들의 이름이 서로 다르게 전해지기도 한다.

1970년 이후 간행된 “로마 순교록”은 7월 18일 목록에서 성녀 심포로사와 옛 순교 행전에 나오는 일곱 명의 아들 순교자의 이름과 유해 발견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유해는 752년 교황 스테파누스 2세(Stephanus II)에 의해 로마의 어시장(Pescheria)과 가까운 성 안젤로(Angelo) 성당 제단에 안치됐다고 한다.

그리고 17세기에 보시오(Bosio)가 로마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진 티부르티나 가도에서 대성당 유적을 발견했는데, 이 대성당이 성녀 심포로사와 그녀의 일곱 아들의 무덤 위에 건립되었음을 확인했다.

1610년에 발견된 석관에는 “여기에 스테파누스 2세 교황에 의해 이장된 순교자 성녀 심포로사와 그녀의 남편 성 게툴리우스와 그의 아들들의 유해가 있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들은 모두 티볼리 교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성녀 심포로사는 이탈리아어로는 신포로사(Sinforosa)라고 부른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2. 크레센스

 

  • 가톨릭 성인 이름
    Crescen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38년경

 

 

크레센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그레스겐스, 끄레쎈스, 크레셴스, 크레스켄스, 크레쎈스.

 

 

크레센스 자료

오래된 순교 행전에 따르면, 성녀 심포로사(Symphorosa)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순교한 로마의 호민관 성 게툴리우스(Getulius, 6월 10일)의 아내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당시 로마 근교 티볼리(Tivoli)에서 일곱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황제는 티볼리에 호화스러운 새 궁전을 짓고 그 궁전의 운명이 성녀 심포로사 가족이 바치는 희생 제사에 좌우된다는 신탁을 듣고 깜짝 놀랐다. 황제는 성녀 심포로사 가족을 신전으로 유인하려다 성공하지 못하자 성녀 심포로사를 헤르쿨레스(Hercules) 신전으로 끌고 오라고 명령했다. 

성녀 심포로사는 남편과 같이 순교할 결심을 하고 황제의 요구를 용감하게 거절했다. 황제는 그녀에게 갖가지 고문을 자행한 다음 목에 무거운 돌을 매달아 아니에네(Aniene)강에 던져 버렸다. 티볼리 의회 의원이던 그녀의 오빠가 시신을 수습해 도시 외곽에 묻어주었다.

다음날 황제는 신들에게 희생 제사를 바치기 위해 성녀 심포로사의 일곱 아들을 불러들였다. 그들의 이름은 성 크레스켄스, 성 율리아누스(Julianus), 성 네메시우스(Nemesius), 성 프리미티부스(Primitivus), 성 유스티누스(Justinus), 성 스탁테우스(Stacteus) 그리고 성 에우게니우스(Eugenius)이다. 

일곱 아들 역시 부모처럼 이교 신상에 희생 제사 바치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황제는 그들 모두를 헤르쿨레스 신전 공사를 위해 세워둔 7개의 말뚝에 묶은 뒤 각기 다른 방법으로 고문한 후 처형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시신을 궁전에 있는 깊은 도랑에 던져버렸다. 그 후 1년 반 정도 박해가 잠잠해지자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시신을 로마 인근 티부르티나 가도(Via Tiburtina)로 이장하였다.

옛 순교 행전이 전하는 성녀 심포로사와 일곱 아들의 순교 이야기에 대한 신빙성을 식별하기는 어렵다. 자료에 따라 일곱 아들의 이름이 서로 다르게 전해지기도 한다. 1970년 이후 간행된 “로마 순교록”은 7월 18일 목록에서 성녀 심포로사와 옛 순교 행전에 나오는 일곱 명의 아들 순교자의 이름과 유해 발견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유해는 752년 교황 스테파누스 2세(Stephanus II)에 의해 로마의 어시장(Pescheria)과 가까운 성 안젤로(Angelo) 성당 제단에 안치됐다고 한다. 그리고 17세기에 보시오(Bosio)가 로마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진 티부르티나 가도에서 대성당 유적을 발견했는데, 이 대성당이 성녀 심포로사와 그녀의 일곱 아들의 무덤 위에 건립되었음을 확인했다.

1610년에 발견된 석관에는 “여기에 스테파누스 2세 교황에 의해 이장된 순교자 성녀 심포로사와 그녀의 남편 성 게툴리우스와 그의 아들들의 유해가 있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들은 모두 티볼리 교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성녀 심포로사는 이탈리아어로는 신포로사(Sinforosa)라고 부른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3. 팜보

 

  • 가톨릭 성인 이름
    Pambo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390년경 니트리아

 

 

팜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빰보.

 

 

팜보 자료

성 안토니우스(Antonius)의 제자이던 성 팜보는 이집트에 세운 니트리아 사막 수도원들의 설립자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엄격성과 고행 그리고 지혜에서 뛰어났다. 그는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성 루피누스(Rufinus) 그리고 성녀 멜라니아(Melania the Elder)와의 교분이 두터웠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4. 프레데리코

 

  • 가톨릭 성인 이름
    Frederick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838년 위트레흐트

 

 

프레데리코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프레데리꼬, 프레데리꾸스, 프레데리쿠스, 프레드릭, 프리데릭.

 

 

프레데리코 자료

네덜란드 북부 프리슬란트(Friesland)의 국왕 라드본(Radbon)의 손자로 태어난 성 프레데리쿠스(Fredericus, 또는 프레데리코)는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서 사제가 된 후부터 즉시 그의 성덕과 학덕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위트레흐트 지방의 사목을 담당하다가 825년경에 주교로 승품되었다. 그는 질서정연하고 정의롭게 교구를 다스렸고, 교구 북부 이교도들의 지방으로 선교사들을 파견하였다.

그는 왕비 유디스(Judith)의 문란한 생활을 탓한 사건으로 그녀의 미움을 받아 상당 기간 동안 고생하였다. 그러다가 결국은 플랑드르(Flandre)의 마스트리흐트(Maastricht)에서 어느 자객의 칼을 맞고 운명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5. 프리미시보

 

  • 가톨릭 성인 이름
    Primitiv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38년경

 

 

프리미시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프리미띠보, 프리미띠부스, 프리미시부스, 프리미씨보, 프리미씨부스, 프리미티보, 프리미티부스.

 

 

프리미시보 자료

오래된 순교 행전에 따르면, 성녀 심포로사(Symphorosa)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순교한 로마의 호민관 성 게툴리우스(Getulius, 6월 10일)의 아내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당시 로마 근교 티볼리(Tivoli)에서 일곱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황제는 티볼리에 호화스러운 새 궁전을 짓고 그 궁전의 운명이 성녀 심포로사 가족이 바치는 희생 제사에 좌우된다는 신탁을 듣고 깜짝 놀랐다. 황제는 성녀 심포로사 가족을 신전으로 유인하려다 성공하지 못하자 성녀 심포로사를 헤르쿨레스(Hercules) 신전으로 끌고 오라고 명령했다. 

성녀 심포로사는 남편과 같이 순교할 결심을 하고 황제의 요구를 용감하게 거절했다. 황제는 그녀에게 갖가지 고문을 자행한 다음 목에 무거운 돌을 매달아 아니에네(Aniene)강에 던져 버렸다. 티볼리 의회 의원이던 그녀의 오빠가 시신을 수습해 도시 외곽에 묻어주었다.

다음날 황제는 신들에게 희생 제사를 바치기 위해 성녀 심포로사의 일곱 아들을 불러들였다. 그들의 이름은 성 크레스켄스(Crescens), 성 율리아누스(Julianus), 성 네메시우스(Nemesius), 성 프리미티부스(또는 프리미시보), 성 유스티누스(Justinus), 성 스탁테우스(Stacteus) 그리고 성 에우게니우스(Eugenius)이다.

일곱 아들 역시 부모처럼 이교 신상에 희생 제사 바치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황제는 그들 모두를 헤르쿨레스 신전 공사를 위해 세워둔 7개의 말뚝에 묶은 뒤 각기 다른 방법으로 고문한 후 처형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시신을 궁전에 있는 깊은 도랑에 던져버렸다. 그 후 1년 반 정도 박해가 잠잠해지자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시신을 로마 인근 티부르티나 가도(Via Tiburtina)로 이장하였다.

옛 순교 행전이 전하는 성녀 심포로사와 일곱 아들의 순교 이야기에 대한 신빙성을 식별하기는 어렵다. 자료에 따라 일곱 아들의 이름이 서로 다르게 전해지기도 한다. 1970년 이후 간행된 “로마 순교록”은 7월 18일 목록에서 성녀 심포로사와 옛 순교 행전에 나오는 일곱 명의 아들 순교자의 이름과 유해 발견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유해는 752년 교황 스테파누스 2세(Stephanus II)에 의해 로마의 어시장(Pescheria)과 가까운 성 안젤로(Angelo) 성당 제단에 안치됐다고 한다. 그리고 17세기에 보시오(Bosio)가 로마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진 티부르티나 가도에서 대성당 유적을 발견했는데, 이 대성당이 성녀 심포로사와 그녀의 일곱 아들의 무덤 위에 건립되었음을 확인했다.

1610년에 발견된 석관에는 “여기에 스테파누스 2세 교황에 의해 이장된 순교자 성녀 심포로사와 그녀의 남편 성 게툴리우스와 그의 아들들의 유해가 있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들은 모두 티볼리 교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성녀 심포로사는 이탈리아어로는 신포로사(Sinforosa)라고 부른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6. 필라스트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Philast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87년 브레시아

 

 

필라스트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필라스뜨리오, 필라스뜨리우스, 필라스테르, 필라스트리우스.

 

 

필라스트리오 자료

에스파냐 태생의 성 필라스트리우스(또는 필라스트리오)는 흔히 성조 아브라함과 비교된다. 왜냐하면 불신자와 이단자 특히 아리우스(Arius) 이단을 반대하기 위하여 수많은 지방을 여행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신앙과 정열은 진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한 사도 바오로(Paulus)와도 비교가 된다. 특히 그는 이탈리아 밀라노(Milano)에서 아리우스파(Arianism)의 거두중의 한 사람인 옥센티우스와 싸웠다.

후일 이탈리아 브레시아의 주교로 축성된 그는 외유내강하기로 유명하였으나 이단에 대해서는 항상 강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이단을 퇴치하고 신자들에게 주는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이단 목록”(Catalogue of Heresies)을 최초로 만들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와 함께 밀라노에서 그를 만났는데, 그를 존경하여 마지않았음을 실토하였다고 한다. 그는 필라스테르(Filaster)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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