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8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나자리오, 베드로 포베다 카스트로베르데, 보트비드, 빅토르 1세, 삼손, 아카치오, 안토니오 델라 치에사, 에우스타시오, 인노첸시오 1세, 첼소, 페레그리노, 총 11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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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7월 28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11가지
7월 28일 남자세례명 목록
1. 나자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Naza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68년경
나자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나자리우스.
나자리오 자료
성 나자리우스(또는 나자리오)는 로마 시민으로 아버지 아프리카누스(Africanus)는 유대인 또는 이교도이고, 어머니는 로마의 성녀 페르페투아(Perpetua, 8월 4일)이다.
사도 베드로(Petrus)에 의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는 사도 성 베드로나 성 바오로(Paulus)의 제자에게 교육을 받고, 후에 성 베드로를 계승해 제2대 교황이 된 성 리누스(Linus, 9월 23일)에게 세례를 받았다.
다른 사람을 구원하려는 열망으로 불타던 성 나자리우스는 자기 고향인 로마를 떠나 여러 도시를 다니며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사도들의 제자가 되었다.
밀라노(Milano)에 갔을 때는 감옥에 갇혀 있던 성 게르바시우스(Gervatius)와 성 프로타시우스(Protasius, 이상 6월 19일) 형제를 만나 큰 감동을 받았다. 심한 매를 맞고 추방당한 성 나자리우스는 갈리아 지방으로 갔고, 그곳에서 한 이교도 어머니로부터 자기 아들을 가르치고 세례 줄 것을 부탁받아 9살밖에 되지 않은 성 켈수스(Celsus)를 맡게 되었다.
성 나자리우스는 성 켈수스를 데리고 선교여행을 다니며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했다. 제노바(Genova)를 거쳐 트리어(Trier)에 갔을 때, 그들의 설교로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그래서 그들은 감옥에 갇혔고, 아직 어린 성 켈수스는 신앙을 포기시키려고 한 이교도 여인에게 맡겨졌다.
하지만 배교하기를 거부한 성 켈수스는 다시 성 나자리우스에게 돌아왔다. 전승에 따르면 그들은 트리어에서 네로 황제에 의해 익사형을 선고받고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선원들이 그들을 배 밖으로 던지자 갑자기 폭풍이 불어와 공포심을 느낀 선원들이 다시 그들을 끌어올렸다.
그들은 트리어를 떠나 제노바를 거쳐 다시 밀라노로 돌아와 선교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우상에게 희생제사 바치기를 거부하고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이 두 순교자는 네로 황제 이후 첫 순교자들로 꼽힌다. 그들의 유해는 밀라노 근교에 각각 매장되었는데, 395년경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12월 7일) 주교가 찾아내어 잘 모셨다.
성 나자리우스의 무덤에서는 순교 당시 흘리던 것과 똑같은 성인의 피가 붉고 신선하게 묻어날 때가 있었다고 한다. 성 암브로시우스는 이 성인들의 유해를 자신이 건립한 사도들의 성당에 안장했고, 거기서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전해져 온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베드로 포베다 카스트로베르데
- 가톨릭 성인 이름
Peter Poveda Castroverd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설립자, 신부 - 활동 연도와 지역
1874-1936년
베드로 포베다 카스트로베르데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까스뜨로베르데, 베드루스, 뽀베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 포베다 카스트로베르데 자료
성 베드로 포베다 카스트로베르데(Petrus Poveda Castroverde)는 1874년 12월 3일 에스파냐 남부 리나레스(Linares)의 독실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사제직에 대한 성소를 느낀 그는 1889년 하엔(Jaen)에 있는 교구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학비를 감당하지 못해 장학금을 제공하기로 약속한 그라나다(Granada) 주(洲)의 과딕스 교구 신학교로 소속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1897년 4월 17일에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후 성 베드로 포베다 신부는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다른 여러 방면에서 교구의 직무를 맡아 봉사하였다. 그는 1900년 세비야(Sevilla)에서 신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과딕스 외곽 언덕에 있는 대피소에서 살던 일명 ‘동굴 거주자’들 속에서 사도직을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를 건립하고 어른들을 위한 연수회를 열어 전문적인 훈련과 예비신자 과정을 제공하였다. 하지만 그는 오해를 받아 이 특별한 사도직에서 떠나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북부 에스파냐의 산간벽지에 있는 코바동가(Covadonga)로 향했고, 그곳에서 1906년 아스투리아스(Asturias)에 있는 코바동가 대성당의 참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코바동가에서 그는 더 많은 시간을 기도에 쏟아 부었고, 에스파냐의 교육 문제에 대해 특별히 심사숙고했다.
그는 주님께서 그 시대의 교회와 사회에 새로운 길을 열도록 자신을 초대하셨다고 이해했다. 그는 전문적으로 교사들을 양성하는 일에 대한 논문과 소책자를 출판하기 시작했고,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현존과 활동의 필요성을 느끼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도 접촉했다.
신앙과 과학의 대립은 그 시대의 문화 안에서 더욱더 분명해졌고, 이는 공교육 제도 안에서 탈(脫)그리스도화를 야기했다. 성 베드로 포베다 신부는 과딕스에서의 사목적 체험과 코바동가에서의 몇 년에 걸친 반성과 기도 후에 공교육 제도 하에 근무하는 교사들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양성해야 할 필요성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굳건한 신앙과 전문적인 자격 둘 모두 복음의 메시지를 살아있게 하는데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했다.
1911년 그는 학생들을 위한 거주시설인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아카데미를 개설했는데, 이는 교사들을 영성적 · 사목적으로 양성하기 위해 헌신하는 테레지안 연합회(Teresian Association)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에 그는 교구 사제들의 사도직 연합회와 함께 새로운 교수법 센터를 시작하였다.
그 후 그의 작업은 신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던 하엔으로 이어져 ‘창조적 교리교수법 센터’(Los Operarios Catechetical Center)의 영성 지도자와 사범대학의 교수로 활동했다. 1914년 그는 마드리드(Madrid)에서 기숙사 시설을 갖춘 에스파냐 최초의 여자 대학교를 개교하였다.
그 동안에 테레지안 연합회는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해 다양한 집단과 지역으로 전파되었고, 그를 통해 하엔에서 교회와 시민사회의 인정을 이끌어냈다.
성 베드로 포베다는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평신도들을 위해 그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복음화의 새로운 길로써 테레지안 연합회를 제시했고, 자신의 체험에 근거해서 그들이 복음의 증거자가 되도록 양성해갔다.
“굳건히 믿는 것과 침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처럼 그는 모든 이들이 신앙을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투신하기를 원했고, 스스로도 그러한 소망을 실현하며 살았다. 1921년 그는 마드리드로 이동해 왕실 담당사제로 임명되었다.
다음해에 그는 문맹 퇴치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테레지안 연합회를 위해 많은 시간을 헌신해 1924년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다. 그는 비록 직접 지도하지는 않았지만 설립자로서 테레지안 연합회가 후에 칠레와 이탈리아로 전파되었을 때 테레지안 연합회의 사명을 더욱 공고히 하고 촉진하기 위해 힘썼다.
1936년 발발한 에스파냐의 내전으로 인해 종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고, 마드리드에 있던 성 베드로 포베다 신부 역시 순교의 위험에 놓였을 때 그는 기꺼이 순교할 것을 다짐했다. 1936년 7월 28일 새벽, 박해자들이 그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물었을 때 그는 당당히 대답했다.
“나는 그리스도의 사제이다.”
그는 결국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자로서 총에 맞아 순교하였다. 그는 1993년 10월 10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3년 5월 4일 에스파냐 마드리드의 콜론(Colon) 광장에서 100만여 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다른 네 명의 복자들과 함께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식을 갖고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보트비드
- 가톨릭 성인 이름
Botvid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120년경 스웨덴
보트비드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보트비트.
보트비드 자료
스웨덴 사람인 성 보트비드는 원래 외교인이었으나 영국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였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온갖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는 특히 핀란드 노예 한 사람을 해방시켜 개종시킨 뒤, 그로 하여금 자신의 고향으로 가서 먼저 복음을 전하도록 하였다.
그 후 그는 다른 동료와 함께 발틱해를 가로질러 핀란드로 갔다. 그들은 밤을 이용하여 상륙하였으나 오히려 성 보트비드가 석방시켜준 그 노예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순교자 성 보트비드는 봇쉬르카(Botkyrka)에 안장되었고 스웨덴의 사도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빅토르 1세
- 가톨릭 성인 이름
Victor I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교황,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98/199년
빅토르 1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빅또르, 빅또리오, 빅또리우스, 빅똘, 빅토리오, 빅토리우스, 빅톨.
빅토르 1세 자료
최초의 라틴계 교황이자 아프리카 출신인 성 빅토르는 189년경에 교황 성 엘레우테리우스(Eleutherius, 5월 26일)를 계승하여 로마 성 베드로좌에 올랐다.
재임기간 동안 그는 부활 대축일 날짜를 둘러싼 논쟁에서 소아시아의 주교들에게 로마의 관습을 따르도록 명령하여 로마 주교의 우위권을 정착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이단인 그리스도 양자설을 유포한 콘스탄티노플의 가죽 판매상 테오도투스(Theodotus)를 파문함으로써 정통교리를 끝까지 옹호하였다. 그는 빅토리우스(Victorius, 또는 빅토리오)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삼손
- 가톨릭 성인 이름
Samson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수도원장,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485-565년 돌
삼손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샘슨.
삼손 자료
성 삼손은 495년경 영국 웨일스(Wales) 남부의 글러모건(Glamorgan)에서 태어났다. 전승에 따르면 그의 부모는 오랫동안 아이를 기다렸고,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약속한 대로 어린 나이에 그를 란트위트 메이저(Llantwit Major)라는 작은 해안 마을에 성 일투드(Illtud, 11월 6일)가 설립한 수도원에 맡겨 양육하였다.
성 일투드의 제자로 교육을 받고 사제품을 받은 성 삼손은 웨일스 지방 펨브룩셔(Pembrokeshire) 연안의 칼디(Caldey) 섬으로 가서 한동안 은수자로 생활했다.
그곳에서 그를 지도했던 원장이 우물에 빠져 사망한 후 그가 원장직을 승계하였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수도원을 둘러본 후 원장직을 사임했으나 다시 란다프(Llandaff) 성 두브리키우스(Dubricius, 11월 14일)에 의해 주교로 축성되었다.
이때부터 성 삼손은 잉글랜드(England) 남서부 콘월(Cornwall) 지방에 복음을 전하는 순회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사우스힐(South Hill)과 골란트(Golant) 등에 여러 교회와 수도원을 세웠고, 잉글랜드 서남쪽 끝인 실리 제도(Scilly Isles)도 방문하였다.
성 삼손의 선교활동은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Bretagne) 지방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돌(오늘날의 Dol-de-Bretagne)에 수도원을 세웠고, 노르망디(Normandie) 지방 펜탈(Pental, 오늘날의 Saint-Samson-de-la-Roque)에도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557년 제3차 파리(Paris) 교회 회의에 참석했고, 565년경 선종한 후 돌의 수도원에 묻혔다.
그는 프랑스에서 브르타뉴(Bretagne)의 7명의 설립자 성인 중 한 명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7월 28일 목록에서 성 일투드에게 배운 성 삼손이 브르타뉴 지방 돌에서 수도원장이자 주교로서 복음과 수도원 규율을 전파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아카치오
- 가톨릭 성인 이름
Acac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10년 밀레투스
아카치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아까끼오, 아까끼우스, 아카치우스, 아카키오, 아카키우스, 아카티오, 아카티우스.
아카치오 자료
성 아카키우스(또는 아카치오)는 리키니우스 황제 때에 소아시아 서안의 이오니아에 위치한 그리스의 고대도시인 밀레투스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아카티우스(Acatius)로도 불린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안토니오 델라 치에사
- 가톨릭 성인 이름
Anthony della Chiesa - 호칭 구분
복자 - 신분과 직업
설교가 - 활동 연도와 지역
1395-1459년
안토니오 델라 치에사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안토니오 델라 치에사 자료
이탈리아 로디(Lodi)의 치에사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안토니우스 델라 치에사(Antonius della Chiesa, 또는 안토니오)는 부모의 강력한 반대 때문에 수도성소를 꽃피우지 못하다가, 22세 때에야 베르첼리(Vercelli)의 설교자회 회원이 되었다.
그는 뛰어난 설교가이자 영신 지도자였으며 프란치스코 회원인 성 베르나르디누스(Bernardinus)를 수행하여 선교한 경험도 있었다. 그가 코모 수도원에 있을 때에는 그 도시 주민들의 생활 개선을 주도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무슨 직무이든 즐겁고도 기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1440년부터 1449년까지 교회는 대립교황인 사보이아(Savoia)의 아마데우스(Amadeus) 때문에 큰 고통을 당했는데, 이때 그는 아마데우스의 온갖 제안을 뿌리치고 합법적인 교황께 충성을 호소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성 안토니우스는 기적의 은혜와 식별의 은혜를 받았으며,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등 영적인 지혜가 뛰어났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에우스타시오
- 가톨릭 성인 이름
Eustath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연대미상 갈라티아
에우스타시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에우스따시오, 에우스따시우스, 에우스따시우스, 에우스따씨오, 에우스타시우스, 에우스타티오, 에우스타티우스, 유스터스.
에우스타시오 자료
갈라티아(고대 소아시아의 중앙 내륙 고지대)의 순교자 성 에우스타티우스(또는 에우스타시오)는 고문을 당한 뒤 강에 던져졌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9. 인노첸시오 1세
- 가톨릭 성인 이름
Innocent I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교황,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417년
인노첸시오 1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인노첸시우스, 인노켄티오, 인노켄티우스.
인노첸시오 1세 자료
이탈리아 알바노(Albano) 태생인 성 인노켄티우스(Innocentius, 또는 인노첸시오)는 401년 12월 21일에 교황 성 아나스타시우스 1세(Anastasius I, 12월 19일)를 계승하여 교황에 등극하였다.
재임 기간 동안 그는 교황의 수위권을 강조하고, 북아프리카의 도나투스주의와 하느님의 은총을 가볍게 다룬 펠라기우스주의 이단을 단죄하였다.
그는 유명한 경구인 "로마 로쿠타, 카우사 피니타 에스트"(Roma loquta, Causa Finita est, 로마가 말하면 일은 끝난다)란 말로 유명하다.
그는 사제 독신제를 강력히 촉구하였고,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annes Chrisostomus, 9월 13일)의 부당한 면직에 대해 투쟁하였다. 그는 417년 3월 12일 선종하여 성 아나스타시우스 1세 교황이 묻힌 포르투엔시스(Portuensis) 가도에 있는 폰티아누스 카타콤바에 안장되었다.
성 인노켄티우스 1세 교황은 신자들의 기부금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주교좌성당인 성 비탈리 성당을 건축하였다. 로마 순교록은 그의 축일을 7월 28일로 기록하고 있으나, 선종일인 3월 12일을 축일로 기념하기도 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0. 첼소
- 가톨릭 성인 이름
Cels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소년,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68년경
첼소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첼수스, 켈소, 켈수스.
첼소 자료
성 나자리우스(Nazarius)는 로마 시민으로 아버지 아프리카누스(Africanus)는 유대인 또는 이교도이고, 어머니는 로마의 성녀 페르페투아(Perpetua, 8월 4일)이다.
사도 베드로(Petrus)에 의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는 사도 성 베드로나 성 바오로(Paulus)의 제자에게 교육을 받고, 후에 성 베드로를 계승해 제2대 교황이 된 성 리누스(Linus, 9월 23일)에게 세례를 받았다.
다른 사람을 구원하려는 열망으로 불타던 성 나자리우스는 자기 고향인 로마를 떠나 여러 도시를 다니며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사도들의 제자가 되었다.
밀라노(Milano)에 갔을 때는 감옥에 갇혀 있던 성 게르바시우스(Gervatius)와 성 프로타시우스(Protasius, 이상 6월 19일) 형제를 만나 큰 감동을 받았다. 심한 매를 맞고 추방당한 성 나자리우스는 갈리아 지방으로 갔고, 그곳에서 한 이교도 어머니로부터 자기 아들을 가르치고 세례 줄 것을 부탁받아 9살밖에 되지 않은 성 켈수스(또는 첼소)를 맡게 되었다.
성 나자리우스는 성 켈수스를 데리고 선교여행을 다니며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했다. 제노바(Genova)를 거쳐 트리어(Trier)에 갔을 때, 그들의 설교로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그래서 그들은 감옥에 갇혔고, 아직 어린 성 켈수스는 신앙을 포기시키려고 한 이교도 여인에게 맡겨졌다.
하지만 배교하기를 거부한 성 켈수스는 다시 성 나자리우스에게 돌아왔다. 전승에 따르면 그들은 트리어에서 네로 황제에 의해 익사형을 선고받고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선원들이 그들을 배 밖으로 던지자 갑자기 폭풍이 불어와 공포심을 느낀 선원들이 다시 그들을 끌어올렸다. 그들은 트리어를 떠나 제노바를 거쳐 다시 밀라노로 돌아와 선교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우상에게 희생제사 바치기를 거부하고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이 두 순교자는 네로 황제 이후 첫 순교자들로 꼽힌다. 그들의 유해는 밀라노 근교에 각각 매장되었는데, 395년경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12월 7일) 주교가 찾아내어 잘 모셨다.
성 나자리우스의 무덤에서는 순교 당시 흘리던 것과 똑같은 성인의 피가 붉고 신선하게 묻어날 때가 있었다고 한다. 성 암브로시우스는 이 성인들의 유해를 자신이 건립한 사도들의 성당에 안장했고, 거기서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전해져 온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11. 페레그리노
- 가톨릭 성인 이름
Peregrin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세기 리옹
페레그리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뻬레그리노, 뻬레그리누스, 페레그리누스, 페레그린.
페레그리노 자료
성 페레그리누스(Peregrinus, 또는 페레그리노)는 프랑스 리옹의 주교 성 이레네우스(Irenaeus, 6월 28일)의 시대에 리옹 교구의 사제로 나온다. 그는 세베루스 황제의 박해 동안 손(Saone) 강의 한 섬에서 은수자로서 지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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