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9일에 해당하는 여자세례명 마리아 데 라 카베사, 불필다, 세라피나 스포르차, 총 3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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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9월 9일
천주교 여자세례명
3가지
9월 9일 여자세례명 목록
1. 마리아 데 라 카베사
- 가톨릭 성인 이름
Mary de la Cabeza - 호칭 구분
복녀 - 신분과 직업
과부, 은수자 - 활동 연도와 지역
+12세기
마리아 데 라 카베사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또리비아, 메리, 미르얌, 미리암, 토리비아.
마리아 데 라 카베사 자료
마리아 토리비아(Maria Toribia)의 탄생 연도나 장소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1세기 말쯤 에스파냐 과달라하라(Guadalajara) 지방의 우세다(Uceda, 마드리드에서 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지역)의 카라퀴즈(Caraquiz)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나중에 그녀는 마드리드(Madrid)의 토렐라구나(Torrelaguna)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농부인 성 이시도루스(Isidorus, 5월 15일)와 결혼하여 아들을 하나 낳았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지만 검소하게 살면서 어려운 이웃을 돕는데 힘썼다.
전설적 이야기에 따르면, 어느 날 그녀의 외아들이 깊은 우물에 빠졌는데 부모는 기도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때 기적적으로 우물의 물이 솟아올라 아이를 무사히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들 부부는 금욕적인 삶을 살기도 하고 서로 다른 공간에서 살았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 마리아 토리비아는 남편인 성 이시도루스가 종종 배고픈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오는 것을 알기에, 벽난로 위에 늘 스튜 냄비를 올려놓았다. 어느 날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을 데려와 이제 음식이 더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의 말을 듣고 냄비를 확인해보니 모두가 먹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스튜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마리아 토리비아는 1130년경 남편 성 이시도루스가 선종한 뒤에도 오랫동안 부지런하게 일하며 검소한 은수자로 살다가 토렐라구나 인근에서 선종하였다. 그녀의 유해는 16세기 말에 발견되어 그곳의 수녀원에 모셔졌다가 최종적으로 1769년에 남편인 성 이시도루스와 함께 마드리드에 있는 산 이시드로(San Isidro) 대학 성당 제단에 모셔졌다.
그녀는 1697년 8월 11일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XII)의 교서를 통해 복자품에 올랐다. 그녀는 보통 마리아 데 라 카베사(Maria de la Cabeza)라는 이름으로 공경을 받는데, 이는 가뭄이 들었을 때 그녀의 두개골 유해를 담은 성해함을 들고 행렬하자 비가 왔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카베사’는 에스파냐말로 ‘머리 · 두개골’이라는 뜻이다.
그녀의 축일은 남편과 함께 5월 15일에 기념하기도 하고, 단독으로는 9월 9일에 지낸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9일 목록에 복녀 마리아 데 라 카베사를 추가하며 농부 성 이시도루스의 아내로서 겸손하고 근면한 은수 생활을 했다고 기록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불필다
- 가톨릭 성인 이름
Wulfhilda - 호칭 구분
성녀 - 신분과 직업
수녀원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000년경 바킹
불필다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울필다.
불필다 자료
성녀 불필다는 영국 윌튼(Wilton)의 대수도원에서 자랐다. 수련자 때 성 에드가(Edgar) 왕은 그녀와 결혼하고자 했으나 성녀에게는 되돌릴 수 없는 성소가 있었다.
그녀의 고모인 웨어웰(Wherwell)의 웬플레다(Wenfleda) 대수도원장은 어린 성녀를 자신의 수도원으로 초대하여 후계자로 삼고자 한다고 하였으나 그 의도는 윌튼 수도원으로부터 그녀를 데려오기 위한 계략이었다.
성녀 불필다가 웨어웰에 도착하자 왕이 기다리고 있었고, 고모인 수도원장은 왕이 성녀를 유혹하도록 묵인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녀 불필다는 수도원 안의 감시자들과 수도원 밖의 경비병들을 피해 배수구로 도망쳤다.
왕은 윌튼까지 쫓아가서 수도원에서 그녀를 붙잡았으나, 그녀는 다시금 왕의 품에서 빠져나와 제대와 성해 사이의 성역으로 도망쳤다. 그러자 에드가 왕은 자신의 의지를 꺾고 대신 사촌동생인 성녀 빌프리다(Wilfrida)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성녀 불필다는 도싯셔(Dorsetshire)에 호턴(Horton) 수도원을 세우고 그 수도원의 초대 수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후에 성녀는 성 에드가 왕이 재건한 웨식스(Wessex) 마을의 예닐곱 성당이 딸린 바킹 수도원의 대수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성녀는 여러 기적을 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 에드가 왕이 죽자 그의 미망인 여왕인 엘프리다(Elfrida)는 성녀 불필다의 수도원 수녀 몇 명과 공모하여 성녀를 바킹에서 내쫒았다. 그래서 성녀 불필다는 에텔레드(Ethelred) 왕이 그녀를 다시 초청하기 전까지 20년 동안 호턴 수도원에서 생활하였다.
성녀 불필다는 생애의 마지막 7년간 호턴과 바킹 수도원의 원장으로 봉직하였다. 성녀에 대한 신심행위는 항상 그 지역 전체의 축제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세라피나 스포르차
- 가톨릭 성인 이름
Seraphina Sforza - 호칭 구분
복녀 - 신분과 직업
과부 - 활동 연도와 지역
1432-1478년
세라피나 스포르차 여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쎄라피나.
세라피나 스포르차 자료
이탈리아 우르비노(Urbino)에서 몬테펠트로(Montefeltro)의 백작 딸로 태어나 수에바(Sueva)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세라피나 스포르차는 어릴 때에 부모를 여의었다. 그래서 그녀는 삼촌인 콜론나(Colonna) 왕자 집에서 자랐고, 16세 때에는 페자로(Pesaro)의 알렉산데르 스포르차 경과 결혼하였다. 이 사람은 두 자녀를 둔 홀아비였으나 그녀와 행복한 생활을 하였다.
한 번은 그녀가 친정에서 머무는 동안에 남편이 파치피카란 여인과 지냈다. 세라피나 스포르차는 남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강구하였으나 수포로 끝나자 결국 포기하고 오로지 기도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결국 그녀의 남편은 아내를 집에서 내쫒았다. 그래서 그녀는 클라라회에 들어가서 세라피나라는 수도명을 받고 엄격한 회개생활을 시작하였고, 그녀의 덕은 날로 높아만 갔다. 그러던 중에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수녀가 되었을 때의 나이는 25세였고, 20년 동안 회개생활을 하였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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