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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30일 남자세례명 8가지

pieonane 2023. 10. 1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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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30일에 해당하는 남자세례명 그레고리오, 레오파르도, 빅토르, 안토니노, 예로니모, 우르소, 프란치스코 보르자, 호노리오, 총 8분 목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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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30일 여자세례명 소피아, 총 1분 목록은 여기에 있어요.

 

 

 

 

세례명 어떤 이름이 좋을까?

9월 30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8가지

 

 

 

 

9월 30일 남자세례명 목록

 

  1. 그레고리오

  2. 레오파르도

  3. 빅토르

  4. 안토니노

  5. 예로니모

  6. 우르소

  7. 프란치스코 보르자

  8. 호노리오

 

9월 30일 천주교 남자세례명 8가지

 

 

1. 그레고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Gregory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증거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40-326년 아르메니아

 

 

그레고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그레고리오 자료

계몽주의자로 불리는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아르메니아의 코스로프 1세(Khosrov I)를 제거했던 아나크(Anak)의 아들이라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그는 부친과 함께 카이사레아(Caesarea)로 피신하여 살았는데, 그는 여기서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코스로프의 아들 티리다테스(Tiridates)가 즉위하면서 개종하고, 그리스도교가 아르메니아의 국교임을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아쉬티샷(Ashtishat)의 주교로 축성되면서부터 아르메니아 교회를 제도화시켰고, 이방인 성직자를 양성하여 복음화에 전력을 경주하였다. 그는 아르메니아의 사도요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2. 레오파르도

 

  • 가톨릭 성인 이름
    Leopard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62년

 

 

레오파르도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레오빠르도, 레오빠르두스, 레오파르두스.

 

 

레오파르도 자료

성 레오파르두스(또는 레오파르도)는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의 노예이거나 부하였다. 그는 로마(Roma)에서 순교한 것으로 여겨진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3. 빅토르

 

  • 가톨릭 성인 이름
    Victor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86년경 졸로투른

 

 

빅토르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빅또르, 빅똘, 빅톨.

 

 

빅토르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9월 30일 목록에서 성 빅토르와 성 우르수스(Ursus)가 아가우눔의 성 마우리티우스(Mauritius, 9월 22일)가 이끄는 테반 군단(Theban Legion)의 군인으로서 로마의 신들에게 희생제물 바치기를 거부하고 오늘날 스위스의 졸로투른에서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의 빛이 그들 위에 비추고 처형자들이 땅바닥에 쓰러지면서 구원을 미리 맛보았다. 그들은 불 속에 던져져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고, 결국 참수형을 받고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고 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같은 날 목록에서 성 우르수스와 성 빅토르가 테반 군단에 속한 순교자로서 오늘날 스위스의 졸로투른에서 공경을 받는다고 간단히 기록하였다.

졸로투른의 성 빅토르와 크산텐(Xanten)의 성 빅토르(10월 10일)는 아가우눔(Agaunum, 오늘날 스위스의 생 모리스 Saint-Maurice 또는 장크트 모리츠 Sankt Moritz)의 순교자 성 빅토르(9월 22일)와 동일 인물로 조금씩 다른 전승의 결과로 보기도 한다. 성 우르수스와 성 빅토르는 졸로투른 주교좌성당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4. 안토니노

 

  • 가톨릭 성인 이름
    Antonin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세기 피아첸차

 

 

안토니노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안또니노, 안또니누스, 안토니누스.

 

 

안토니노 자료

테반 군단의 군인이었는데 성 안토니누스(또는 안토니노)는 이탈리아 피아첸차 근교에서 신앙 때문에 사형을 당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그의 피는 오랜 동안 살아 있는 그대로였고, 샘솟는 듯한 것이 마치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의 경우와 같았다고 전한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5. 예로니모

 

  • 가톨릭 성인 이름
    Jerome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교회학자, 성서학자

  • 활동 연도와 지역
    345?-420년

 

 

예로니모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예로니무스, 제로니모, 제롬, 지롤라모, 히에로니모, 히에로니무스.

 

 

예로니모 자료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또는 예로니모)는 345년경 달마티아(Dalmatia)와 판노니아(Pannonia), 곧 오늘날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경계에 있는 스트리돈(Stridon,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두 나라 국경 지대의 어느 곳이거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보산스코 그라호보 Bosansko Grahovo 근처)의 부유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12살 무렵부터 이탈리아의 로마(Roma)에서 당시 저명한 문법학자인 아엘리우스 도나투스(Aelius Donatus)의 문하생으로 수사학과 고전 라틴 문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지식은 물론 고대 학자들에 대한 뛰어난 지식과 연구 업적으로 명성을 날리다가 당시 관습대로 358년에서 364년 사이 어느 날 성인이 되어 세례를 받았는데, 로마의 주교인 교황 리베리우스(Liberius)가 세례를 준 듯하다.

로마에서 공부를 마친 그는 로마 제국 안에서 다양한 경력을 쌓기 위해 갈리아 지방을 따라 오늘날 독일의 트리어(Trier)에 도착해 정부 관리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앞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 주교가 유배를 와서 전파한 동방 수도 생활을 접하고 크게 감동해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할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는 370년경 이탈리아 북부 아드리아해의 항구 도시인 아퀼레이아(aquileia)로 돌아와 발레리아누스 주교의 지도하에 같은 뜻을 지닌 몇몇 친구들과 함께 “복된 이들의 단체(성가대)”(Chorus beatorum)라는 곳에서 복음적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374년경에 그는 더욱 철저한 수덕 생활을 실천하고자 안티오키아(Antiochia)로 갔고, 여행으로 인한 열병에 시달리다가 375년 사순 시기에 꾼 꿈속에서 재판관이신 주님을 뵙고 삶의 결정적 전환점, 곧 회심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병에서 회복된 후에 그는 칼키스(Chalcis) 사막으로 들어가 375년부터 2~3년간 은수 생활을 하며 성경 언어 연구 매진하였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먼저 그리스어를 익히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어느 랍비로부터 히브리어를 새로 배웠으며, 사막의 은수자인 테베(Thebae, 나일강 중류에 있는 고대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수도로 오늘날의 룩소르 Luxor)의 “성 바오로(Paulus) 전기”를 썼다.

사막에서의 은수 생활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느님과의 만남과 친교를 위해 노력하던 그는 은수자들 사이에 아리우스(Arius) 이단 문제로 대립하는 일이 생겨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379년 봄에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그는 그 도시의 주교인 바울리누스(Paulinus)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그 뒤에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그곳의 총대주교인 나지안주스(Nazianzu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월 2일)의 강의를 듣고 오리게네스(Origenes)의 성경 주석 방법에 매료되었다.

그러면서 니사(Nyssa)의 성 그레고리우스(3월 9일) 주교와도 교류하였다. 이때 그는 오리게네스(Origenes)의 “강론집”과 에우세비우스(Eusebius)의 “연대기” 등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382년에 로마로 돌아온 성 히에로니무스는 교황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 12월 11일)의 비서로 임명되어 교황을 보좌하는 임무를 맡았다. 교황은 그에게 신구약 성경 모두를 라틴어로 새로 번역하는 대업을 맡겼다.

서방 교회에 이미 여러 개의 라틴어 성경 번역본이 있었지만, 교황은 성 히에로니무스에게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라틴어 성경본을 다시 만들도록 위촉한 것이었다.

그 당시 그는 헬비디우스(Helvidius)의 이론을 반박하는 “헬비디우스 논박, 복되신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에 대하여”(383년)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는 헬비디우스가 마리아는 예수 외에도 여러 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성 히에로니무스는 성경 번역 작업을 수행하면서도 영적인 수련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로마의 아벤티노(Aventino)에서 성녀 마르첼라(Marcella, 1월 31일)와 성녀 바울라(Paula, 1월 26일) 등이 주축이 되어 복음적 삶을 따르기 위해 모인 상류층의 미망인들에게 성경 읽기와 성경 공부에 전념하는 다락방 모임을 만들고, 수도 생활의 이상에 대한 열정을 고취하였다. 그는 성경 주석가이자 교사이자 영적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그런데 그의 든든한 후원자이던 성 다마수스 1세 교황이 선종하자 그의 재능을 시기한 일부 사람들이 성 히에로니무스가 여자들의 집을 들락거린다며 의심하고 비난하였고, 그로 인해 그는 로마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안티오키아로 갔고, 얼마 뒤 영성 생활과 성경 공부를 계속하고자 했던 성녀 바울라와 그녀의 둘째 딸인 성녀 에우스토키움(Eustochium, 9월 28일) 그리고 로마에서 온 몇몇 동료들과 함께 이집트로 가서 사막의 은수자들을 만났다.

그곳에서 그는 위대한 신학자인 맹인 디디무스(Didymus)도 만났다. 그 후 팔레스티나로 간 성 히에로니무스는 386년 여름부터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에 정착하여 본격적인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귀족 출신의 미망인인 성녀 바울라도 성녀 에우스토키움과 함께 베들레헴에 정착해 자신의 재산으로 성 히에로니무스가 세 개의 남자 수도원과 한 개의 여자 수도원을 세우는 데 경제적으로 뒷받침했다. 그리고 성녀 바울라는 여자 수도원의 원장을, 성 히에로니무스는 남자 수도원의 원장을 맡았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도 짓고, 수도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워 직접 강의를 담당했다.

그 뒤로 성 히에로니무스는 선종하는 순간까지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34년 이상 성경 번역 활동에 몰두하며 당시 몇몇 이단적 가르침을 반박하는 글도 발표하였다.

예를 들어 요비아누스(Jovianus)의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 부인과 사제의 독신 및 성인들의 유해 공경 반대에 대해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며 반박하였다. 그러나 성 히에로니무스의 가장 큰 논쟁은 자신의 옛 친구이자 오리게네스의 지지자이며 성경 번역에도 공로가 있는 아퀼레이아의 루피누스(Rufinus)와의 사건이었다.

본래 오리게네스 신학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성 히에로니무스는 살라미스(Salamis)의 성 에피파니우스(Epiphanius, 5월 12일) 주교와 예루살렘의 요한(Joannes) 주교 사이에 벌어진 오리게네스 신학 논쟁에 휘말렸다.

이때 성 에피파니우스를 지지함으로써 요한을 지지했던 루피누스와 등지고 말았다. 그러면서 오리게네스주의 반대편에 서게 되었다. 또한 394년부터 히포(Hippo)의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8월 28일)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us) 이단을 몰아내는 데도 힘을 보탰다.

성 히에로니무스의 가장 큰 업적은 교황 성 다마수스 1세의 명은 받은 때부터 405년 완역할 때까지 계속된 성경의 라틴어 번역이었다.

382년부터 신약성경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직접 번역하고, 구약성경의 경우에는 히브리어 원문에서 라틴어로 직접 번역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칠십인역”(Septuaginta)을 배척하는 유대인 랍비들과 토론을 벌이면서 새로이 번역했다.

405년까지 계속된 이 엄청난 작업으로 번역된 라틴어 성경에 ‘불가타’(Vulgata, ‘대중적’이라는 뜻)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성 히에로니무스 당시가 아니라 13세기경의 일이었다. 그 이유는 성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 번역 성경이 원문에 매우 충실하고 정확한 번역일 뿐 아니라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라틴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는 16세기에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ient, 1545~1563년)에서 이 번역본을 교회의 공식적인 라틴어 성경으로 인정하는 칙령을 반포하였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이사야서 주해” 서문에서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과 같다.”라고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불가타 성경을 통해서 중세 유럽인들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성찰하는 법을 배웠고, 그럼으로써 그리스도를 더 잘 알게 되었다 할 수 있다.

성경 번역 작업을 마무리하고 406년부터 임종할 때까지 그는 수많은 성경 주석서를 남겼고, 자신의 번역 사업에 대한 귀중한 자료들도 남겼다.

415년에 펠라기우스주의자를 반대하는 글을 썼다가 이듬해인 416년 펠라기우스주의를 신봉하는 폭도들이 베들레헴 수도원으로 쳐들어와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고 성 히에로니무스와 수도자들을 해치려고 했었다.

성녀 바울라가 선종한 이후 수녀원을 이끌던 성녀 에우스토키움도 폭도들의 약탈 사건 이후 힘든 시간을 보내다 419년경 베들레헴에서 눈을 감았고, 420년 9월 30일에 성 히에로니무스도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선종하여 주님 탄생 성당에 묻혔다.

그는 라틴 교부들 가운데 가장 박학한 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고, 동시대 사람 중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는 서방(라틴)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명으로, 신학교의 수호성인 또는 수덕 생활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보통 서재에 있는 학자나 사막의 은수자(참회자)로 많이 그려진다. 또한 라틴 교회의 4대 교부들과 함께 등장하거나 성경 번역가로서 번역 작업 중인 모습이나 성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복장에 있어서는 참회자의 모습뿐 아니라 추기경 복장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교회법적으로 추기경 서임을 받은 적은 없지만 중세 후기부터 존경의 표시로 추기경 복장을 한 모습을 많이 표현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6. 우르소

 

  • 가톨릭 성인 이름
    Urs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군인, 순교자

  • 활동 연도와 지역
    +286년경 졸로투른

 

 

우르소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우르수스.

 

 

우르소 자료

옛 “로마 순교록”은 9월 30일 목록에서 성 빅토르(Victor)와 성 우르수스(또는 우르소)가 아가우눔의 성 마우리티우스(Mauritius, 9월 22일)가 이끄는 테반 군단(Theban Legion)의 군인으로서 로마의 신들에게 희생제물 바치기를 거부하고 오늘날 스위스의 졸로투른에서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의 빛이 그들 위에 비추고 처형자들이 땅바닥에 쓰러지면서 구원을 미리 맛보았다. 그들은 불 속에 던져져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고, 결국 참수형을 받고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고 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같은 날 목록에서 성 우르수스와 성 빅토르가 테반 군단에 속한 순교자로서 오늘날 스위스의 졸로투른에서 공경을 받는다고 간단히 기록하였다.

졸로투른의 성 빅토르와 크산텐(Xanten)의 성 빅토르(10월 10일)는 아가우눔(Agaunum, 오늘날 스위스의 생 모리스 Saint-Maurice 또는 장크트 모리츠 Sankt Moritz)의 순교자 성 빅토르(9월 22일)와 동일 인물로 조금씩 다른 전승의 결과로 보기도 한다. 성 우르수스와 성 빅토르는 졸로투른 주교좌성당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7. 프란치스코 보르자

 

  • 가톨릭 성인 이름
    Francis Borgia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신부, 총장

  • 활동 연도와 지역
    1510-1572년

 

 

프란치스코 보르자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방지거, 보르지아,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프란치스코 보르자 자료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Franciscus Borgia, 또는 프란체스코 보르자)는 간디아(Gandia)의 세 번째 공작인 후안 보르자(Juan Borgia)와 아라곤(Aragun)의 알론소(Alonso)의 딸인 후아나(Juana)의 14명의 자녀 중 맏이로 에스파냐의 발렌시아(Valencia) 근교 간디아에서 태어났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VI)를 증조부로, 가톨릭 왕으로 불리며 에스파냐 왕국 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Ferdinand II)를 외증조부로 둔 그는 어려서부터 신심 깊은 아이로 성장하며 장차 수도승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명문 귀족인 보르자 가문의 장남이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왕궁에 들어가 귀족교육을 받았다.

1528년에 그는 에스파냐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로스 5세(Carlos V)의 궁중 자문위원이 되었다. 황제와 황후의 총애를 받은 그는 1529년 9월 황후 이사벨라의 제1 시녀이자 포르투갈의 귀족 출신인 레오노르 데 카스트로(Leonor de Castro)와 결혼해서 8명의 자녀를 두었다.

1539년 5월 황후 이사벨라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그는 삶의 큰 변화와 함께 회심을 체험하게 되었다. 왕의 명령으로 장례식이 거행되는 그라나다(Granada)까지 황후의 시신을 운송하고, 매장 직전 황후의 썩어가는 시신을 보며 세상이 주는 화려함보다는 하느님을 위해 살고 싶은 열망을 품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카탈로니아(Catalonia) 지방 총독을 지내고, 1543년 부친이 사망하면서 제4대 간디아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공작으로 재임하면서 그는 예수회의 초창기 회원들을 알게 되어 그들과 영적 교류를 나눌 기회를 얻었다.

1546년 그의 아내가 8명의 자녀를 남기고 사망했을 때, 그는 세상의 모든 영예를 버리고 수도 생활을 추구하려는 강한 열망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장남에게 작위를 물려주고, 자녀들을 위한 충분한 준비를 마련해준 후 예수회에 입회했다.

예수회원으로서 수련과 신학 공부를 시작한 그는 1551년 5월 23일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후 잠시 본당 사목을 경험한 그는 1554년 로욜라(Loyola)의 성 이냐시오(Ignatius, 7월 31일)에 의해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두 관구를 감독하는 총장대리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는 많은 수도원을 건립하고 대학을 설립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1565년에는 예수회의 제3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7년 동안 총장직에 재임하는 동안 그는 예수회를 가톨릭 개혁 운동의 기수로 만들었다. 그는 해외 선교사업에 예수회의 참여를 독려하고, 그레고리안 대학교 설립의 책임자 중 한 사람이 됨은 물론 폴란드 관구 설정, 프랑스의 대학 설립, 아메리카 선교 개시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1567년 그는 예수회의 회칙을 개정했고, 1571년에는 교황 비오 5세(Pius V)의 명으로 보넬리(Bonelli) 추기경과 함께 투르크 군과 싸우고 있는 군인들을 격려하기 위해 유럽의 주요 도시를 여행했다. 이 여행으로 건강을 해친 그는 로마로 되돌아와서 1572년 9월 30일 폐렴으로 선종해 하느님 품에 안겼다.

예수회를 그토록 왕성하고 생기 있는 수도회로 만든 이유로 그는 흔히 예수회 제2의 설립자로 불린다. 그는 1624년 마드리드(Madrid)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670년(또는 1671년)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시신은 마드리드에 있는 예수회 성당에 안치되었는데, 1931년 에스파냐 내란 도중 성당과 함께 소실되었다. 그의 축일은 1688년 보편 전례력에 들어가면서 선종일과 가까우면서 다른 축일과 겹치지 않도록 10월 10일로 정해졌다. 그러나 1969년 전례 개혁 이후부터는 선종한 날인 9월 30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9월 30일 목록에서 그를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8. 호노리오

 

  • 가톨릭 성인 이름
    Honorius

  • 호칭 구분
    성인

  • 신분과 직업
    주교

  • 활동 연도와 지역
    +653년 캔터베리

 

 

호노리오 남자 세례명과 같은 이름

호노리우스.

 

 

호노리오 자료

이탈리아 로마(Roma) 태생인 성 호노리우스(또는 호노리오)는 베네딕토회의 수도자가 된 후, 캔터베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5월 27일) 주교의 요청에 응답한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의 명을 받고 영국 잉글랜드(England) 선교 길에 올랐다.

그는 627년에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된 후 약 4반세기 동안 교구를 지혜롭게 다스렸다. 그러나 개인적인 신상이나 성품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는 던위치(Dunwich)의 성 펠릭스(Felix, 3월 8일)를 이스트앵글리아(East Anglia)로 파견하여 선교하도록 명하였고, 또 644년에는 처음으로 영국인을 주교로 승품시켰는데, 이 주교는 후에 캔터베리의 첫 영국인 대주교가 된 로체스터(Rochester)의 성 이타마르(Ithamar, 6월 10일)이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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